전출처 : 갈대 > 이윤기의 <장미의 이름> 번역에 대한 소회
기획특집 - 한국의 번역문학
나는 다시 태어나도……
이 윤 기
"다시 태어나도 이 길을 가겠다."
사람들은 깊이 생각해보지도 않고 흔히들 잘 이런다. 그 길에 대한 정보를 가장 많이 가지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 길이야말로 가장 잘 알고 있는 길, 잘 알고 있어서 수나롭게 갈 수 있을 것으로 보이는 길이기 때문일 것이다. 사람들에게는 자기가 가진 정보를 '선(善)'으로 규정하는 버릇이 있는 것 같다. 가진 정보를 선으로 규정해야 그 정보의 소유 주체 역시 '선'에 가까워질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사람들이 "다시 태어나도 이 길을 가겠다"라고 하는 것은 다른 길은 잘 모르기 때문, 혹은 자기가 알고 있는 것 너머의 세상은 '선'으로 용인하고 싶지 않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많은 아내들이 "그거야 댁의 사정이지", 하고 반응할지도 모르는데도 불구하고 많은 남편들은 "나는 다시 태어나도 당신만을 사랑하리라"를 노래한다. 누가 나에게, 다시 태어나도 번역가의 길을 가겠느냐고 묻는다면, 나는 이렇게 대답하겠다.
"좀 생각해 봅시다."
나는 틀림없이『장미의 이름』과『푸코의 진자』를 번역하던 1984년의 기나긴 여름과 1990년의 기나긴 겨울을, 다시는 떠올리고 싶지 않은 그 여름과 겨울을 자동적으로 떠올릴 것이다. 나는 이 두 책을 번역한 뒤 많은 독자들로부터 "잘 읽었다"는 격려를 받았다. 이 두 책 덕분에 나는 꽤 유식해지기도 했다. 하지만 그 갑절의 격려와 교양을 보증한다고 해도 두 책과 비슷한 책과의 악연을 되풀이하게 될 것 같지 않다. 그렇다면 사람들은, 별로 보람을 느끼지 못하는 모양인데, 무엇 때문에 그렇게 악전고투했느냐고 물을 것이다. 나 자신과의 약속 때문이었다. 나는 순전히, 움베르토 에코를 뚫어내고야 말겠다는 나 자신과의 약속 때문에 두 책과 싸웠다. 악몽은 그 뒤로도 오래 계속된다. 아직 끝나지 않았다.
『장미의 이름』과 『푸코의 진자』 악몽은 1992년까지 계속되었다. 1992년 나는 미국 미시간 주립대학교의 객원교수 아파트에 살고 있었다. 객원교수 아파트는, 세계 107개국에서 온 학자들이 살고 있는 인종 전시장, 혹은 학자 전시장 같은 곳이었다. 나는 꽤 많은 학자들을 찾아다녔다. 움베르토 에코의 음흉한 계략이 백일하에 드러나기 시작했다. 나는 미국에서 이 두 책을 처음부터 다시 번역했다. 작은 보람이 없지는 않았다.
1995년 6월 2일, 나는 『푸코의 진자』를 다시 번역한 원고를 들고(정확하게 말하면, 개역판 원고가 든 컴퓨터는 가방에 넣고, 만일의 경우에 대비해서 그 원고를 복사한 플로피 디스켓은 주머니에 넣고) 미국에서 서울로 돌아오다가 재미있는 일을 겪었다.
목에 군번 줄이 감겨 있어서 주한 미군임에 분명해 보이는, 20대 초반의 한 청년이 내 옆자리에서 공교롭게도, 부피가 베개만한 영어판 페이퍼백 『푸코의 진자』를 읽고 있었다. 나는 기회를 보아 그에게, 책이 재미 있느냐고 물어보았다. 청년은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었다. 왜 그러냐니까, 도대체 무슨 소리를 하고 있는지 모르겠다고 했다. 나는 어떤 대목이 그러냐고 물었다. 그랬더니 대뜸 책을 펼쳐 보이면서, 제 1장의 히브리어 해제를 비롯, 번역도 안된 채 생짜로 실려 있는 라틴어, 스페인어, 포르투갈어, 이탈리아어, 프랑스어, 독일어 문장을 일일이 손가락질해 보이면서 해제가 본문과 어떤 관련이 있는지 모르겠고, 외국어가 섞여 들어 문맥의 의미 놓치기가 다반사라는 것이다. 나는 우쭐해지지 않을 수가 없어서 그에게, 일일이 그 해제의 의미와 본문과의 관련성을 설명해 주고, 본문에 나오는 외국어 문장도, 그가 도움을 청할 때마다 영어로 번역해 주었다. 교환교수 아파트에서 갈고 닦은, 눈물 겨운 실력이었다. 청년이 별 희한한 인간을 다 본다는 눈을 하고, 도대체 뭐하는 사람이냐고 물었다. 하기야 두 책에 대해 집중적으로 연구한 세월 없이 그렇게 좔좔 풀어낼 수 있었다면 그것 참 대단한 실력이었겠다. 나는 실토했다. 사실은, 『푸코의 진자』 한국어판 역자인데, 난들 잘 처음부터 알았겠느냐, 지난 반년 동안 유태인, 포르투갈인, 스페인인, 이탈리아인, 독일인, 프랑스인을 찾아다니면서 졸라서 배운 덕분에 그 의미를 알게 되었다…… 『푸코의 진자』 때문에 지난 반 년간 죽다가 살았다는 나의 고백을 듣고서야 청년은 속으로, 그러면 그렇지, 하는 눈치를 보였다. 미국인 문학도 하나 기죽이는 정도의 소득…… 조금 슬펐다.
1984년에 『장미의 이름』을 번역했다. 하지만 출판하겠다는 회사가 없어서 원고가 2년을 겉돌았다. '열린책들'이 출간했는데 반응이 너무 좋아서 오금이 저렸다. 실수했으면 어쩌나 싶었다. 그래서, 1992년 미국에서 원고를 다시 손보았다. 미국과 일본에서 나온 『장미의 이름』 관련 서적을 구입, 약 5백개에 이르는 각주도 달아, 같은 해 개역판을 내었다. 오금 저린 구석이 없지 않았지만, 잡초 없는 뜰이 어디 있으랴, 하면서 스스로 위로하면서 8년을 보냈다.
2000년 3월, 무려 60쪽에 달하는 원고 봉투를 받았다. 철학을 전공한 강유원 박사의, '『장미의 이름』읽기'라는 제목이 달린 원고였다. 박사는 철학개론 시간에 학생들에게 『장미의 이름』을 바르게 읽어 주면서 이 소설이 지니고 있는 철학적 의미를 가르쳤던 모양인데, 바로 그 때의 메모를 내게 보내준 것이다. 매우 부끄러웠다. 메모는 무려 3백여 군데의 부적절한 번역, 빠져 있는 부분 및 삭제해야 할 부분을 지적해주고 있었다. 강 박사의 지적은 정확하고도 친절했다. 나는 철학 전공자가 아니어서 작가 에코의 해박한 중세학(中世學) 및 철학을 다 이해할 수 없었다. 어렴풋이 이해했다고 하더라도 에코가 옮겨주는 무수한 개념을 철학사에서 찾아내는 일이 나에게는 불가능에 가까웠다. 그래서 독자의 이해를 돕기 위해 원서에 없는 말을 덧붙인 일도 없지 않다. 그 해 6월 말부터 7월 초까지 강박사의 지적을 검토하고, 3백가지 지적 중 2백60군데를 바르게 손을 보았다. 그리고는 강박사에게 전화를 걸어, 부끄러웠다고 고백하고, 그의 지적을 새 책에 반영해도 좋다는 양해를 얻었다. 끝났다고? 나는 끝나지 않았다고 믿는다. "다시 태어나도 이 길을 가겠다"는 말, 나는 함부로 못하겠다. 하지만 이 일을 어쩔고. 산고가 다 잊혀졌는지 슬슬 또 임신이 하고 싶어진다.
* 이윤기 : 소설가, 번역가. 1947년생. 소설 『나비넥타이』『두물머리』, 역서 『장미의 이름』『푸코의 진자』『양들의 침묵』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