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묵의 행성 밖에서 C. S. 루이스의 우주 3부작 1
클라이브 스테이플즈 루이스 지음, 공경희 옮김 / 홍성사 / 200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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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루이스가 좋은 소설가는 아니다.  

 

  이 소설은 평소 생각이 맞다는 걸 확인시켜 준다.  

 

  그는 메시지를 잘 던지는데 소설적 허구를 동반하면 밀도가 확 떨어진다.  

 

  그도 이를 알았는지 모르겠다.  

 

  톨킨은 반대다.  

 

  그는 메시지에 무감하다.  

 

  하여 그의 소설이 좋은 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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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 구보씨의 일일 - 박태원 단편선 문학과지성사 한국문학전집 15
박태원 지음, 천정환 책임 편집 / 문학과지성사 / 200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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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1934) 은 별 다른 일을 말하지 않는다. 평평범범한 하루일 뿐이다. 구보(仇甫)는 오늘도 오정이 다 되어서야 집을 나선다. 광교를 지나 종로의 화신백화점을 들린다. 전차를 타고 대학병원, 동대문, 경성 운동장을 지나 훈련원, 약초정을 거쳐 본전통으로 들어와 조선은행에 이른다. 그 곳에서 다시 걸어 낙랑 다방, 남대문 역, 다시 낙랑 다방, 제비 다방, 대창옥, 또다시 낙랑 다방을 거쳐 낙원정에 이르고 새벽 두 시에 이르러서야 집으로 향한다.

  결국 의식의 흐름류의 모더니즘 소설이 근대에 있어 끊임없이 창작되고 소리소문없이 많은 이들로부터 사랑을 받는 것은 우리가 지내는 일상이 구보의 하루처럼 너무도 쓸쓸하며 싱겁기 때문일 것이다.

  다음은 의식의 흐름이 가장 잘 드러나는 장면이다.


어서 옵쇼. 설렁탕 두 그릇만 주우. 구보가 노트를 내어놓고, 자기의 실례에 가까운

심방(尋訪)에 대한 변해(辨解)를 하였을 때, 여자는, 순간에, 얼굴이 붉어졌었다. 모르

는 남자에게 정중한 인사를 받은 까닭만이 아닐 게다. 어제 어디 갔었니? 요시야 노

부코. 구보는 문득 그런 것들을 생각해 내고, 여자 모르게 빙그레 웃었다. 맞은편에

앉아, 벗은 숟가락 든 손을 멈추고, 빠안히 구보를 바라보았다. 여름 저

녁에 먹은 한 그릇의 설렁탕은 그렇게도 더웠다.


  벗과 함께 설렁탕 가게에 들어선 구보는 어느새 상념에 젖는다. 도쿄유학 시절 마음에 두었던 여자와의 일화를 생각한다. 대뜸 요시야 노부코(吉屋信子)라는 이름도 떠올린다. 그러다 다시 설렁탕을 입에 넣는다. 요시야 노부코는 바로 앞 장인 ‘여자를’에서 한 차례 등장하는데 아쿠타가와 류노스케와 함께 언급되는 걸 보고 작가이려니 했다. 그런데 언급하는 이 부분에서 다시 등장하는 걸 보고 궁금증이 생겨 일본문학사를 뒤져보았다. 그녀는 20세기 초반에 활동한 소설가이다. 보통 신여성을 소재로 한 작품들을 써냈고, 일본에서는 여성문학 연구에서 꽤 다뤄진다고 한다. 요시야 노부코가 도쿄의 여자와 외양이 혹은 성격이 닮아서였는지 모르겠다. 독자인 우리는 여기에 대해 알 방도가 전혀 없다. 이처럼 의식의 흐름은 독자의 이해와 공감보다는 소설 속 인물들의 자유로운 연상이 더 중요시된다.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에서 나는 한국적 현실을 발견한다. 의식의 흐름이란 이름 자체도 그렇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자본주의가 전면적으로 이루어진 공간에서 이루어진 서구의 문학 조류이다. "구보는 그저 <율리시즈>를 논하고 있는 벗을 깨닫고, 불쑥, 그야 제임스 조이스의 새로운 시험에는 경의를 표하여야 마땅할 게지. 그러나, 그것이 새롭다는, 오직 그 점만 가지고 과중 평가를 할 까닭이야 없지." 구보는 조이스의 문학적 실험에 대해 제 나름의 비판을 편다. 

   <율리시즈(Ulysses)>의 블룸은 광고외판원이다. 이런 말을 들은 적이 있다. 19세기의 맑스가 만일 20세기에 태어났다면 <자본론(Das Kapital)>이 아닌 <광고론>을 썼을 것이라고. 반면 우리의 구보는 룸펜일 뿐이다. 구보가 근대에 대해 나름의 반성적 성찰을 할 수 있는 것은 아일랜드와 우리의 차이, 광고외판원과 룸펜의 차이 때문일 것이다. 조이스의 <젊은 예술가의 초상(A Portrait of the Artist as a Young Man)>은 스티븐 디덜러스라는 문학청년을 그린다. 이 때문인지 이 소설에는 내가 생각하기에 근대에 대한 반성적 성찰이 곧잘 눈에 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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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마 민음사 오늘의 작가 총서 7
윤흥길 지음 / 민음사 / 200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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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설이 외할머니의 불길한 꿈 얘기로 시작된다는 것은 특기할 만하다. 이것은 결말의 구렁이 사건과도 맞물리며 소설의 분위기를 형성한다. 분위기만이 아니다. 문제되는 사건의 해결도 상징적 차원에서 이루어진다. 이것은 다음에서 서술할 화자 문제와 맞물려 작품 전체의 문제의식을 살필 수 있는 꽤 중요한 실마리가 된다.

  소설은 회상의 차원에서 진행된다. “무엇 때문에 내가 망설이고 있었는지 알 수 없다. 받아서 좋을 것인가, 아니면 절대로 받아서는 안 될 것인가를 결정짓지 못해서였을까. 혹은 그런 도덕적인 문제가 아니라 단순히 그 나이의 시골애답게 모르는 사람에 대한 낯가림 때문에 그랬을까.” 화자는 분명 소년이나 이 소년을 바라보는 한 시선이 있다. 바로 어른이 된 소년이다. 소년은 당시의 사건을 즉물적으로 관찰하고 이해하나, 어른인 화자는 차분히 사건들을 정리한다. 독자는 이 두 시선 속에서 여러 사건을 대하게 된다.

  문제는 어른이 된 화자이다. 그가 소설 내내 사건들에 별다른 판단을 내리지 않는 건 그가 소년 시절의 즉물적이며 감각적인 상징의 세계를 옹호한다는 말일 것이다. 성장한 지금에 와서도 6.25에 대한 그의 생각은 그 때 당시와 별로 달라진 것이 없다. 무서웠으며, 알 수 없었다. 그가 여적지 판단을 내리지 못하는 것은 여전히 두렵기 때문이다. 화자 자신이 비켜 설 공간이란 없다.

  6.25란 전쟁이자 아이들 말로 하면 편가르기일텐데 소설의 화자는 그 어느 편도 먹지 않고 있다. 이것이 독자로 하여금 신뢰감을 갖게 한다. 그러나 화해로 가는 과정에서 보이는 환상성 혹은 상징성은 독자의 신뢰를 저버리게 할 수도 있다. 이것은 그만큼 역사적 사건이 무섭다는 말이기도 할 것일테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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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문의 벽 이청준 문학전집 중단편소설 7
이청준 지음 / 열림원 / 199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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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가는 왜 소설가를 소재로 삼았을까? 소설가는 언어를 다룬다. 그런데 이 언어란 다름 아닌 현실의 핍진한 반영이다. 작가의 관심은 현실을 향해 있다. 언어를 거쳐 에둘러 갈 뿐이다. 하이데거의 말을 빌리자면 언어란 ‘존재의 집’(하이데거)이다.

   데리다를 읽던 때가 있다. 그는 <성서>의 <요한복음> 1장 1절을 재미나게 풀어내고 있었다. “태초에 '말씀'이 계셨다. 그 '말씀'은 하나님과 함께 계셨다. 그 '말씀'은 하나님이셨다.”(표준 새번역) 이는 로고스 중심주의며, 문자언어에 대한 음성언어 중심주의라는 것이다. 자세한 것은 모르겠으나 그가 해체하고자 하는 것은 음성언어의 위계성 혹은 폭력성이 아닐까 한다. ‘글을 잘 읽어야 한다!’란 얘기보다는 ‘말을 잘 들어야 한다!’는 이야기가 많다는 것은 데리다의 견해에 대한 주요한 증거가 아닐까?

  나(화자)의 말이다. “소설이 꾸며낸 이야기일는지는 모르지만 소설가에겐 그것이 그의 현실의 전부이니까요.” 작가의 관심은 늘 현실을 향할 수밖에 없다. 관심의 폭이 넓을 수도 있으며 좁을 수도 있다. 이 사이에 가로놓이는 것은 문제의식, 혹은 기호이리라. 이는 모든 작가의 운명이다.

  소설의 구도를 몇 가지로 나누어 생각해 보고자 한다. 우선 박준을 중심으로 한 언어를 다루는 이들의 세계이다. 작가는 현실에서 진실을 찾는다.(작가-진실-현실) 그러나 작품은 허구이기에 이 세계는 가짜이다. 다음으로 생존의 세계에 사는 생활인이다. 이들은 정치적 혹은 사회적 현실 속에서 진실을 찾는다.(개인-진실-현실) 여기는 실재하는 세계이다.

  이제 문제가 발생한다. 작가와 개인이 찾는 진실을 평가하는 이가 있다. 바로 소설 속에 등장하는 신문관이다. G의 말이다. “이 자(신문관)의 정체는 도대체 무엇인가. 나의 결백은 결국 이 자에 의해 증명되게 되어 있는데, 작자의 마음에 들 수 있는 이야기란 도대체 어떤 것이어야 하는가.” G는 진실의 영역을 찾지만, 신문관은 이 영역이 오직 자신에 의해서만 성립되어야 한다 생각한다. 그리고 그는 자신이 강요하는 진실에 바탕해 형벌을 선고한다. “당신(G)은 이미 그 형벌을 선고받고 있는걸요. 당신의 진술 속에서 당신은 자신의 범죄만큼한 형벌을 선고받고 그리고 그 형벌은 이미 집행이 되고 있단 말입니다.” 신문관은 G에게 궤변을 늘어놓더니 이 같이 말하는 것이다. 신문관이 생각하는 진실을 우리의 지난 날을 되돌아 볼 때 이념이라 이름 짓는 것도 괜찮을 듯 싶다. 이념의 시대란 거짓 언어가 횡행한 시대였으며, 폭력에 언어가 무릎 꿇은 시대였기 때문이다.

  박준은 광인인 것이 편하다 말한다. 왜인가? 정상으로 산다는 것은 거짓이 진실임을 묵인하고 산다는 말에 다름 아니기 때문이다. 그는 차라리 미침이 진실을 진실로 알 수 있는 유일한 시간임을 깨달았던 것이다. 박준의 말이다. “작가란 괴로운 일이지만 그 정체가 보이지 않는 전짓불의 공포를 견디면서도 끝끝내 자기의 진술을 계속해 나갈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는 운명을 짊어진 사람들이라고 했다.” 이것은 비단 작가만의 운명만은 아닐 것이다. 나는 이를 괴롭게 확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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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인 것이 부끄럽다
정연주 지음 / 비봉출판사 / 200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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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겨레21>에 실린 정연주 인터뷰를 보고 꺼내든 책이다.  

 

  리영희 선생의 상찬이 아니더라도 이 사람은 우리 시대의 보기 드문 언론인이다.  

 

  재판은 진행중이지만 이미 역사는 정연주의 손을 들어줬다는 생각이 든다.  

 

  한 가지 바람이라면 그가 다시 사회를 향해 쓴소리를 뱉는 것이다.  

 

  그 소리가 몹시 듣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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