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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문의 벽 ㅣ 이청준 문학전집 중단편소설 7
이청준 지음 / 열림원 / 1998년 4월
평점 :
절판
작가는 왜 소설가를 소재로 삼았을까? 소설가는 언어를 다룬다. 그런데 이 언어란 다름 아닌 현실의 핍진한 반영이다. 작가의 관심은 현실을 향해 있다. 언어를 거쳐 에둘러 갈 뿐이다. 하이데거의 말을 빌리자면 언어란 ‘존재의 집’(하이데거)이다.
데리다를 읽던 때가 있다. 그는 <성서>의 <요한복음> 1장 1절을 재미나게 풀어내고 있었다. “태초에 '말씀'이 계셨다. 그 '말씀'은 하나님과 함께 계셨다. 그 '말씀'은 하나님이셨다.”(표준 새번역) 이는 로고스 중심주의며, 문자언어에 대한 음성언어 중심주의라는 것이다. 자세한 것은 모르겠으나 그가 해체하고자 하는 것은 음성언어의 위계성 혹은 폭력성이 아닐까 한다. ‘글을 잘 읽어야 한다!’란 얘기보다는 ‘말을 잘 들어야 한다!’는 이야기가 많다는 것은 데리다의 견해에 대한 주요한 증거가 아닐까?
나(화자)의 말이다. “소설이 꾸며낸 이야기일는지는 모르지만 소설가에겐 그것이 그의 현실의 전부이니까요.” 작가의 관심은 늘 현실을 향할 수밖에 없다. 관심의 폭이 넓을 수도 있으며 좁을 수도 있다. 이 사이에 가로놓이는 것은 문제의식, 혹은 기호이리라. 이는 모든 작가의 운명이다.
소설의 구도를 몇 가지로 나누어 생각해 보고자 한다. 우선 박준을 중심으로 한 언어를 다루는 이들의 세계이다. 작가는 현실에서 진실을 찾는다.(작가-진실-현실) 그러나 작품은 허구이기에 이 세계는 가짜이다. 다음으로 생존의 세계에 사는 생활인이다. 이들은 정치적 혹은 사회적 현실 속에서 진실을 찾는다.(개인-진실-현실) 여기는 실재하는 세계이다.
이제 문제가 발생한다. 작가와 개인이 찾는 진실을 평가하는 이가 있다. 바로 소설 속에 등장하는 신문관이다. G의 말이다. “이 자(신문관)의 정체는 도대체 무엇인가. 나의 결백은 결국 이 자에 의해 증명되게 되어 있는데, 작자의 마음에 들 수 있는 이야기란 도대체 어떤 것이어야 하는가.” G는 진실의 영역을 찾지만, 신문관은 이 영역이 오직 자신에 의해서만 성립되어야 한다 생각한다. 그리고 그는 자신이 강요하는 진실에 바탕해 형벌을 선고한다. “당신(G)은 이미 그 형벌을 선고받고 있는걸요. 당신의 진술 속에서 당신은 자신의 범죄만큼한 형벌을 선고받고 그리고 그 형벌은 이미 집행이 되고 있단 말입니다.” 신문관은 G에게 궤변을 늘어놓더니 이 같이 말하는 것이다. 신문관이 생각하는 진실을 우리의 지난 날을 되돌아 볼 때 이념이라 이름 짓는 것도 괜찮을 듯 싶다. 이념의 시대란 거짓 언어가 횡행한 시대였으며, 폭력에 언어가 무릎 꿇은 시대였기 때문이다.
박준은 광인인 것이 편하다 말한다. 왜인가? 정상으로 산다는 것은 거짓이 진실임을 묵인하고 산다는 말에 다름 아니기 때문이다. 그는 차라리 미침이 진실을 진실로 알 수 있는 유일한 시간임을 깨달았던 것이다. 박준의 말이다. “작가란 괴로운 일이지만 그 정체가 보이지 않는 전짓불의 공포를 견디면서도 끝끝내 자기의 진술을 계속해 나갈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는 운명을 짊어진 사람들이라고 했다.” 이것은 비단 작가만의 운명만은 아닐 것이다. 나는 이를 괴롭게 확인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