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가 구보씨의 일일 - 박태원 단편선 문학과지성사 한국문학전집 15
박태원 지음, 천정환 책임 편집 / 문학과지성사 / 200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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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1934) 은 별 다른 일을 말하지 않는다. 평평범범한 하루일 뿐이다. 구보(仇甫)는 오늘도 오정이 다 되어서야 집을 나선다. 광교를 지나 종로의 화신백화점을 들린다. 전차를 타고 대학병원, 동대문, 경성 운동장을 지나 훈련원, 약초정을 거쳐 본전통으로 들어와 조선은행에 이른다. 그 곳에서 다시 걸어 낙랑 다방, 남대문 역, 다시 낙랑 다방, 제비 다방, 대창옥, 또다시 낙랑 다방을 거쳐 낙원정에 이르고 새벽 두 시에 이르러서야 집으로 향한다.

  결국 의식의 흐름류의 모더니즘 소설이 근대에 있어 끊임없이 창작되고 소리소문없이 많은 이들로부터 사랑을 받는 것은 우리가 지내는 일상이 구보의 하루처럼 너무도 쓸쓸하며 싱겁기 때문일 것이다.

  다음은 의식의 흐름이 가장 잘 드러나는 장면이다.


어서 옵쇼. 설렁탕 두 그릇만 주우. 구보가 노트를 내어놓고, 자기의 실례에 가까운

심방(尋訪)에 대한 변해(辨解)를 하였을 때, 여자는, 순간에, 얼굴이 붉어졌었다. 모르

는 남자에게 정중한 인사를 받은 까닭만이 아닐 게다. 어제 어디 갔었니? 요시야 노

부코. 구보는 문득 그런 것들을 생각해 내고, 여자 모르게 빙그레 웃었다. 맞은편에

앉아, 벗은 숟가락 든 손을 멈추고, 빠안히 구보를 바라보았다. 여름 저

녁에 먹은 한 그릇의 설렁탕은 그렇게도 더웠다.


  벗과 함께 설렁탕 가게에 들어선 구보는 어느새 상념에 젖는다. 도쿄유학 시절 마음에 두었던 여자와의 일화를 생각한다. 대뜸 요시야 노부코(吉屋信子)라는 이름도 떠올린다. 그러다 다시 설렁탕을 입에 넣는다. 요시야 노부코는 바로 앞 장인 ‘여자를’에서 한 차례 등장하는데 아쿠타가와 류노스케와 함께 언급되는 걸 보고 작가이려니 했다. 그런데 언급하는 이 부분에서 다시 등장하는 걸 보고 궁금증이 생겨 일본문학사를 뒤져보았다. 그녀는 20세기 초반에 활동한 소설가이다. 보통 신여성을 소재로 한 작품들을 써냈고, 일본에서는 여성문학 연구에서 꽤 다뤄진다고 한다. 요시야 노부코가 도쿄의 여자와 외양이 혹은 성격이 닮아서였는지 모르겠다. 독자인 우리는 여기에 대해 알 방도가 전혀 없다. 이처럼 의식의 흐름은 독자의 이해와 공감보다는 소설 속 인물들의 자유로운 연상이 더 중요시된다.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에서 나는 한국적 현실을 발견한다. 의식의 흐름이란 이름 자체도 그렇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자본주의가 전면적으로 이루어진 공간에서 이루어진 서구의 문학 조류이다. "구보는 그저 <율리시즈>를 논하고 있는 벗을 깨닫고, 불쑥, 그야 제임스 조이스의 새로운 시험에는 경의를 표하여야 마땅할 게지. 그러나, 그것이 새롭다는, 오직 그 점만 가지고 과중 평가를 할 까닭이야 없지." 구보는 조이스의 문학적 실험에 대해 제 나름의 비판을 편다. 

   <율리시즈(Ulysses)>의 블룸은 광고외판원이다. 이런 말을 들은 적이 있다. 19세기의 맑스가 만일 20세기에 태어났다면 <자본론(Das Kapital)>이 아닌 <광고론>을 썼을 것이라고. 반면 우리의 구보는 룸펜일 뿐이다. 구보가 근대에 대해 나름의 반성적 성찰을 할 수 있는 것은 아일랜드와 우리의 차이, 광고외판원과 룸펜의 차이 때문일 것이다. 조이스의 <젊은 예술가의 초상(A Portrait of the Artist as a Young Man)>은 스티븐 디덜러스라는 문학청년을 그린다. 이 때문인지 이 소설에는 내가 생각하기에 근대에 대한 반성적 성찰이 곧잘 눈에 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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