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오싱젠의 <영산>이 그렇듯이 이 작품도 원시성으로의 회귀를 바라고 있다.
무익한 것은 아니나 복고는 사람들을 순응적이게 만든다.
성찰을 위해 가끔씩 뒤를 돌아보는 것은 좋지만 항상은 아니다.
때마침 김규항의 <예수전>을 함께 읽어 이해에 도움이 되었다.
두 사람 다 예수를 정치적으로 읽는다.
이런 시각이 민중신학과 해방신학 이후에는 거의 없는 듯 한데 예수의 새로운 모습을 발견케 한다.
문제는 예수의 정치적 폭발력 이후다.
그것이 기독교의 밑절미인데 두 사람의 부족함은 여기서 찾을 수 있다.
시심(詩心)이 메마른 시대다.
사르트르가 시를 언어에 대한 숭배라 격하시켰지만 메마른 이 시대엔 한 구절의 시가 필요하다.
시의 모닥불이 피어나야 한다.
곁불이라도 온기를 바라는 사람들을 위해서다.
"연극(문학)은 그 자체보다도 동시대 사람들의 생활과 함께 살아 존재하는 '글쓰기'의 존엄함"이다.
황석영의 리얼리즘은 바로 치열함인 것 같다.
그것은 사람들과 부대끼는 중에 만들어지는 것이다.
목적이 올바르다면 방황은 필요하다.
마치 골드문트(헤르만 헤세의 <나르치스와 골드문트>)가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
법운이 확연히 깨달았던 건 바로 인애(人愛)다.
깨달은 순간 하나의 방황은 끝나고 새 방황이 시작된다.
그게 인생이라 작가는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