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중해의 영감 한길 헤르메스 7
장 그르니에 지음, 함유선 옮김 / 한길사 / 200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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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장 그르니에의 이름을 들었던 게 언제던가? 실존주의 철학에 기웃거릴 때인 것 같다. 사르트르의 <구토>를 읽어가며 로캉탱에 공감하기도 하고, 까뮈의 <시지프의 신화>가 우리들의 삶이라 고개를 끄덕이기도 했다. 당시 "실존이 본질을 앞선다"라는 아포리즘만큼 내 마음을 두드린 말은 없었다. 까뮈를 통해 장 그르니에를 알게 됐다. 까뮈의 스승이라니? 서둘러 그의 책들을 읽어갔다. 
  
  "마침내 나는 생각한다. 익명의 인간이 될 것이다. 그리하여 나의 일, 나의 직업, 나의 가족, 심지어 나 자신에 대해서조차 아무도 나에게 말을 걸지 않을 것이다. 나는 나를 곧 잊을 수 있을 것이며, 나를 잘 알아볼 수 없을 것이다. 더 이상 맡아야 할 역할도 없고, 더 이상 일부러 꾸며서 해야 할 어떤 태도도 이제는 없다.(<지중해의 영감> 35, 6면)" 
  
  여행을 하는 이유는 무얼까? 장 그르니에는 '익명의 인간'이 되고 싶어서라 이야기한다. 나의 얼굴, 나이, 직업을 모르는 공간에 서고 싶어서다. 융은 사회적 자아를 '페르소나'라 했던가? 그래, 우리는 모두 가면을 쓰고 산다. 가면을 쓰고 이런 저런 역할 놀이를 한다. 여행이란 그 가면을 벗을 수 있는 유일한 시간이다. 

  <모래의 여자>라는 소설이 있다. 일본 작가 아베 코보(安部公房)의 장편이다. 내용은 이렇다. 평범한 셀러리 맨인 한 남자가 어느 날 실종된다. 그는 일상에서 피하기 위해 모래 땅으로 곤충 채집을 나선 것이다. 그 곳에서 기이한 일을 하는 여자를 만난다. 여자는 모래 구덩이 속에 있는 집에서 흘러내리는 모래에 집이 파묻혀 버리지 않도록 쉬지 않고 삽질을 한다. 어이 없어 하는 남자에게 여자는 모래로 인해 한 집이 붕괴되면 사구에 자리 잡은 마을 전체가 붕괴되기 때문에 작업을 멈출 수 없다고 이야기한다. 남자는 이런 일이야 훈련만 받으면 원숭이도 할 수 있는 일이지 않냐고 하며 모래 구덩이에서 탈출을 시도한다. 탈출에 성공하지만 이내 마을 사람들에 의해 모래 구덩이로 돌려 보내진다. 
  
  남자의 비아냥처럼 우리는 일상 속에서 원숭이가 하는 일을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무료한 일상을 벗어나고자 한 남자였지만 그를 맞은 건 역시 반복되는 삽질 뿐이었다. 이 작품은 그야말로 그로테스크하다. 그럼 도대체 우리는 어디에서 가면을 벗을 수 있단 말인가? 
  
  장 그르니에는 여행을 하며 그 무거운 가면을 벗어 던지고 있다. 그의 글은 내밀한 고백으로 가득 차 있다. 가면을 벗지 않으면 토해낼 수 없는 고백들이다. 
  
  <모래의 여자>에서 탈출에 실패한 남자를 여자는 위로한다. 그런데 돌연 작가의 목소리가 들린다. "서로 상처를 핥아주는 것도 좋겠지. 그러나 영원히 낫지 않을 상처를 영원히 핥고만 있는다면, 끝내는 혓바닥이 마모되어 버리지 않을까?" 작가는 비관한다. 그러나 닳아 없어져 버릴 일상 속의 혀이지만 나만을 위한 것이 아니기에 그 충분한 가치가 있다는 생각이 든다. 물론 이것 역시 너무나 어려운 일이지만. 

           Jean Grenier(1898-19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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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하트마 간디 - Gandhi
요게시 차다 지음, 정영목 옮김 / 한길사 / 200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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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마하트마 간디>는 정말 많은 것을 고민케 하는 책이다. 아니 간디 자체가 그런 것 같다. “나는 인도에서가 아니라면 이 세상의 삶에서 구원을 얻을 수 없다. 구원을 원하는 사람은 누구나 인도의 성스러운 땅으로 가야 한다. 다른 모두가 마찬가지이지만 나에게는 인도 땅이 ‘고통받는 자들의 피난처’이다.”(357쪽) 
      

  우리는 누구나 이상(理想)을 꿈꾸고 산다. 하지만 그 이상을 꿈꾸고만 살기에는 우리의 하루하루는 너무나 ‘현실적’이다. 간디의 위의 말에서 난 이상과 현실의 절묘한 조화를 본다. 신앙을 갖고, 또 나름의 꿈을 갖게 되면서 현실은 자꾸만 소홀히 하는 버릇이 생겼다. 머나먼 미래에 대한 설레임은 있지만, 하루 하루에 대한 긴장감은 지니질 못했었다. 많은 이들이 간디는 종교적이고 감상적이라 말하지만 내가 읽었던 간디는 진정한 ‘리얼리스트’이다. 구원은 저 머나먼 곳에 있지 않다. 바로 지금, 이 곳에 있다. 

  이 책을 읽어가며 기독교에 대해 많이 생각해보았다. 351-2쪽을 걸쳐 드러나는 당대 기독교인들의 모습은 많은 실망을 갖게 한다. 백인들만 들어갈 수 있는 설교단에 간디의 입장이 허용되지 않자 친구인 찰리 앤드루스는 이렇게 이야기한다. “그리스도가 그 교회에 가셨다면 그 분 역시 아시아인이라는 이유로 쫓겨났을 것이다.” 
   
  이 상황과 비슷한 장면을 소설 속에서 본 적이 있다. 도스토예프스키의 <까라마조프씨네 형제들>에는 <대심문관 이야기>라는 조시마 장로가 들려주는 유명한 구절이 있다. 
   
  중세에 그리스도가 세상에 재림한다. 그는 수도원을 찾는다. 그리고 대심문관을 만난다. 심문관은 그의 앞에 있는 분이 그리스도인 것을 눈치 챈다. 하지만 그는 그리스도를 쫓아버린다. 왜일까? 그리스도의 재림을 가장 반겨야할 그가 납득이 되질 않는 행동을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내가 이해하는 바로는 대심문관 그는 현재 너무 행복하다. 권력으로나, 부(富)로나 어느 것도 부족한 것이 없다. 따라서 그에겐 그리스도의 재림이 전혀 반갑지가 않다. 현재가 행복할 뿐이다. 간디가 살던 시절의 기독교인들도 자신의 존재 이유의 본질을 망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많은 이들로부터 비판을 받았던 것이다. 

  앞서도 말했지만, 현실과 이상은 어느 것에도 소홀함을 둘 수 없이 소중한 것들이다. 하지만 어느 하나에 기울어 버릴 때 그 자신의 존재 이유를 망각하게 된다. 대심문관이 애처로이 느껴지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영국의 철학자 버트런드 러셀은 이렇게 말한다. “나를 지탱하는 세 가지 열정은 사랑의 갈구, 진리 추구, 인간의 고통에 대한 연민이다.” 마하트마 간디는 누구보다 많은 열정을 쏟아 붇고 살았던 사람이다. 폭력과 불의가 난무한 이 시대에 그가 더욱 읽히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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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쟈의 인문학 서재 - 곁다리 인문학자 로쟈의 저공비행
이현우 지음 / 산책자 / 200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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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로쟈를 김현에 비견하는 게 상술이 묻어나는 말이지만 문학판에서 그만한 역할을 해준다면야 반가운 일이다.  

 

  블로거들 사이에서야 이미 김현 이상이겠지만.  

 

  글 속에 숨어있는 슬픔들을 모두 알지는 못 하겠으나 김현의 원죄의식과 비슷하다는 생각을 한다.  

 

  내겐 반가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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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란 무엇인가 - 책 만드는 사람의 거의 모든 것에 대하여
김학원 지음 / 휴머니스트 / 200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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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아주 가끔 출판계의 현실이 보도되는 걸 본다.  
 

  등록된 출판사 가운데 노조가 결성된 곳은 2곳 뿐이라고 한다.  

 

  이 책의 저자가 CEO로 있는 곳도 물론 노조는 없다.  

 

  열악함 속에서 분투하는 출판인들에게 응원을 보낸다.  

 

  열악한 현실은 누구보다 그 자신이 해결해야 할 일임을 감히 충고도 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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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뇌의 원근법 - 서경식의 서양근대미술 기행
서경식 지음, 박소현 옮김 / 돌베개 / 200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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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경식은 우리의 피륙장이다.  
 

  그가 두 형의 고난을 가죽 삼아 여태 작업해왔다면 이 책에서 다루는 짐승의 가죽은 인간 그 자체이다.  

 

  그는 가죽으로 남은 짐승의 피흘림을 잊지 않는다.  

 

  그리고 피흘림을 가죽에 남긴 예술가를 기억한다.  

 

  또한 가죽의 피흘림을 애써 잊으려 노력하며 온갖 찬란한 색을 덧칠하는 피륙장은 진짜 피륙장이 아니라 말한다.   

 

  우리의 몫도 그 가죽에 이름을 남김임을 그는 우리에게 조용히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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