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하트마 간디 - Gandhi
요게시 차다 지음, 정영목 옮김 / 한길사 / 2001년 12월
평점 :
절판


  <마하트마 간디>는 정말 많은 것을 고민케 하는 책이다. 아니 간디 자체가 그런 것 같다. “나는 인도에서가 아니라면 이 세상의 삶에서 구원을 얻을 수 없다. 구원을 원하는 사람은 누구나 인도의 성스러운 땅으로 가야 한다. 다른 모두가 마찬가지이지만 나에게는 인도 땅이 ‘고통받는 자들의 피난처’이다.”(357쪽) 
      

  우리는 누구나 이상(理想)을 꿈꾸고 산다. 하지만 그 이상을 꿈꾸고만 살기에는 우리의 하루하루는 너무나 ‘현실적’이다. 간디의 위의 말에서 난 이상과 현실의 절묘한 조화를 본다. 신앙을 갖고, 또 나름의 꿈을 갖게 되면서 현실은 자꾸만 소홀히 하는 버릇이 생겼다. 머나먼 미래에 대한 설레임은 있지만, 하루 하루에 대한 긴장감은 지니질 못했었다. 많은 이들이 간디는 종교적이고 감상적이라 말하지만 내가 읽었던 간디는 진정한 ‘리얼리스트’이다. 구원은 저 머나먼 곳에 있지 않다. 바로 지금, 이 곳에 있다. 

  이 책을 읽어가며 기독교에 대해 많이 생각해보았다. 351-2쪽을 걸쳐 드러나는 당대 기독교인들의 모습은 많은 실망을 갖게 한다. 백인들만 들어갈 수 있는 설교단에 간디의 입장이 허용되지 않자 친구인 찰리 앤드루스는 이렇게 이야기한다. “그리스도가 그 교회에 가셨다면 그 분 역시 아시아인이라는 이유로 쫓겨났을 것이다.” 
   
  이 상황과 비슷한 장면을 소설 속에서 본 적이 있다. 도스토예프스키의 <까라마조프씨네 형제들>에는 <대심문관 이야기>라는 조시마 장로가 들려주는 유명한 구절이 있다. 
   
  중세에 그리스도가 세상에 재림한다. 그는 수도원을 찾는다. 그리고 대심문관을 만난다. 심문관은 그의 앞에 있는 분이 그리스도인 것을 눈치 챈다. 하지만 그는 그리스도를 쫓아버린다. 왜일까? 그리스도의 재림을 가장 반겨야할 그가 납득이 되질 않는 행동을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내가 이해하는 바로는 대심문관 그는 현재 너무 행복하다. 권력으로나, 부(富)로나 어느 것도 부족한 것이 없다. 따라서 그에겐 그리스도의 재림이 전혀 반갑지가 않다. 현재가 행복할 뿐이다. 간디가 살던 시절의 기독교인들도 자신의 존재 이유의 본질을 망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많은 이들로부터 비판을 받았던 것이다. 

  앞서도 말했지만, 현실과 이상은 어느 것에도 소홀함을 둘 수 없이 소중한 것들이다. 하지만 어느 하나에 기울어 버릴 때 그 자신의 존재 이유를 망각하게 된다. 대심문관이 애처로이 느껴지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영국의 철학자 버트런드 러셀은 이렇게 말한다. “나를 지탱하는 세 가지 열정은 사랑의 갈구, 진리 추구, 인간의 고통에 대한 연민이다.” 마하트마 간디는 누구보다 많은 열정을 쏟아 붇고 살았던 사람이다. 폭력과 불의가 난무한 이 시대에 그가 더욱 읽히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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