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물의 본성에 관하여 대우고전총서 29
루크레티우스 지음, 강대진 옮김 / 아카넷 / 201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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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랑에는 만족이 있을 수 없다

 

하지만 사랑을 피하는 사람에게 베누스의 결실이 결핍되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그는 피해 없는 즐거움을 누린다.

왜냐하면 확실히 여기서 나오는 쾌락은 사랑으로 비참해진 이들에게보다는

건전한 사람들에게 더 순수하기 때문이다. 사랑에 빠진 사람들의 열정은

소유의 바로 그 순간에도 불확실한 방향으로 출렁이고,

확신하지 못하니 말이다, 무엇을 먼저 눈과 손으로 즐길지에 대하여.

그들은 자신들이 추구했던 바를 졸라 누르고, 그 육체에 고통을

가하며, 자주 이로 입술을 깨물고

입끼리 부딪게 한다. 이는 쾌감이 순수하지 않아서고,

무엇이든 그 대상 자체를 다치게 하도록 부추기는

자극이 숨어있어서다. 거기서 저 광기의 싹이 돋아난다.

하지만 베누스는 사랑 가운데서 이 고통을 가볍게 부수고,

달래주는 쾌락을 섞어 그 입을 재갈 물린다.

왜냐하면 거기에 희망이 있기 때문이다, 열정을 발생시킨

같은 몸 안에서 불길이 다시 꺼질 수도 있으리라는 희망이.

하지만 자연이 모든 게 반대로 되도록 맞서 싸운다.

그리고 이것이, 우리가 그걸 더 많이 가질수록

가슴이 더욱더 무서운 욕망으로 불타게 되는 유일한 대상이다.

왜냐하면, 먹을 것, 마실 것은 지체들 내부에서 흡수되고,

이것들은 정해진 부위에 자리 잡을 수 있어서,

물과 빵에 대한 이 욕구는 쉽사리 채워지기 때문이다.

반면에 사람의 얼굴과 아름다운 색으로부터는

아무것도 즐기도록 육체 안으로 주어지지 않는다, 섬세한

영상 외에는. 비참한 희망은 자주 그것을 바람에게서 취한다.

마치 목마른 사람이 꿈속에서 물 마시길 꾀하나, 그의 사지에서

열기를 꺼줄 수 있는 물은 주어지지 않고,

그는 음료의 영상을 좇으며 헛되이 애쓰고

타는 불길 가운데서 마시면서도 목마른 것처럼,

꼭 그렇게 베누스는 사랑 속에서 영상으로써 사랑에 빠진 자들을 희롱하고,

그들은 눈앞에 보면서도 자신들의 몸을 만족시키지 못하고,

손으로써 부드러운 사지에서 무엇 하나 벗겨내지

못한다, 확신 없이 온몸을 방황하면서.

마침내 사지로써 결합하여 청춘의 꽃을

즐기게 되고, 이제 육체가 즐거움을 예고하며,

여성의 밭에 베누스가 씨를 뿌릴 바로 그 순간에

그들은 탐욕스레 육체를 부딪고, 입의 타액을

서로 섞으며, 이로써 입을 누르고 숨을 헐떡인다,

헛되이. 왜냐하면 이들은 거기서 아무것도 벗겨낼 수 없으며,

몸 전체에서 아무것도 몸속으로 뚫고 들어가거나 떠나갈 수 없기 때문이다.

때때로 그들이 이것을 이루고자 원하는 듯, 또는 그러려 애쓰는 돗 보이기에 하는 말이다.

그 정도까지 그들은 열망으로써 베누스의 연합 속에 엉겨붙는다,

사지가 쾌감의 힘에 풀려 늘어진 동안에도.

 

결국 모여 있던 욕구가 힘줄에서 무너지게 되면,

잠깐 동안 열정의 광란에 작은 휴식이 생겨난다.

그런 후에 같은 광기가 되돌아오고, 저 광포함이 다시 찾아온다,

자신들이 스스로 닿기를 갈망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고 싶어 하는데,

그리고 자신들의 이 병을 이길 방도를 발견하지 못하고 있는데.

그 정도까지 불확실한 채로 그들은 보이지 않는 상처에 스러져 간다.

(336∼338쪽)

 

 - 루크레티우스, 『사물의 본성에 관하여』, 제4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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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 사랑의 열정에 대한 비판(1058∼1287행)

 

이것이 우리의 베누스다. 그리고 여기서 아모르라는 이름이,

여기서 처음 베누스의 저 달콤함이 방울져

가슴속으로 듣고, 또 냉기 어린 근심이 뒤따른다.

왜냐하면 그대가 사랑하는 대상이 떠나있다 해도, 저 이의 영상이

곁에 머물고, 달콤한 이름이 귓전에 멤돌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영상들을 피하는 것이 마땅하도다, 또 사랑을 키우는 것들을

겁주어 그대로부터 쫓아내고 다른 데로 마음을 돌리며,

모아진 액체를 아무 몸에나 쏘아 보내고

가두지 않는 것이, 그리고 일단 한 사람에 대한 사랑으로 돌아섰다면,

근심과 특정의 괴로움을 자신을 위해 보존하는 것이.

왜냐하면 속 상처가 활성을 얻고, 자양분을 받아 깊어지며,

날이 갈수록 그 광기가 확장되고, 그 처참함이 심해지기 때문이다,

만약에 그대가 새로운 타격으로 첫 상처를 흩어버리지 않는다면,

그리고 사전에 사람 사이를 떠도는 베누스로써 새로운 그것을 치료하지 않는다면,

혹은 정신의 운동을 다른 것으로 돌릴 수 없다면.

(335쪽)

 

 - 루크레티우스, 『사물의 본성에 관하여』, 제4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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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랑의 물리적 근원

 

우리가 앞에 말한 것, 그 씨앗은 우리 속에서

들끓는다, 성년의 나이가 처음 사지를 굳혔을 때.

저마다 다른 것이 다른 것을 격동시키고 들쑤시기 때문이다.

사람의 힘만이 사람으로부터 나와 사람의 씨앗을 자극하는 것이다.

그것은 자신의 자리들로부터 내보내지자마자,

사지와 지체들을 통해 온몸으로부터 떠나서,

힘줄의 정해진 자리로 모여서 곧장

몸의 생식하는 부분 자체를 자극한다.

그 장소는 씨앗으로 인해 흥분되어 부풀고, 맹렬한 욕망이

지향하는 곳을 향해 그것을 쏘아 보낼 욕구가 생긴다.

[이것은 수많은 씨앗으로 부푼 장소를 자극하여 들쑤신다.]

그리고 그것은 저 육체를 좇는다, 그 때문에 정신이 사랑으로 상처입은 그 육체를.

왜냐하면 일반적으로 모든 사람이 부상을 입은 쪽으로 쓰러지며, 피도

우리가 타격을 당한 바로 그 방향으로 뿜어나가고,

접근전이라면 붉은 핏줄기는 적을 맞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마찬가지로 베누스의 무기에 타격을 받은 사람은,

소년이 여성적인 몸매로 그를 맞혔든,

여인이 온몸으로 사랑을 던졌든,

타격이 비롯된 곳, 거기로 향하고 결합을 행하고자

육체로부터 육체로 액체를 이끌어 쏘아 보내고자 한다.

왜냐하면 말없는 욕망이 쾌락을 예고하기 때문이다.

(333∼334쪽)

 

 - 루크레티우스, 『사물의 본성에 관하여』, 제4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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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소 생활과 꿈의 관계

 

거의 모든 사람이 열심히 거기 묶여서 집착하는 것,

또는 이전에 우리가 오래 시간을 썼던 그런 일,

그리고 마찬가지로 마음을 더 많이 쏟아부었던 일들,

우리는 일반적으로 잠잘 때 이것들을 만나는 듯하다.

변호사는 변론을 행하고 법을 비교하며,

장군은 싸우고 전투에 맞서나가고,

뱃사람은 바람과 밀고 당기는 전쟁을 치르고,

우리 또한 이 일을 행하여 항상 사물들의 본성을

탐구하며, 발견된 것을 조국의 언어로써 밝히는 듯 말이다.

이와 같이 다른 탐구, 다른 분야 기술들도 일반적으로, 잠잘 때

사람들의 정신을 헛것으로 붙드는 듯 보인다.

그리고 어떤 사람이든 연속해서 여러 날 동안 놀이에

끊이지 않는 관심을 쏟았다면,

그 사람이 감각으로는 그것을 보기를 벌써 그쳤다 해도,

그의 정신 속에 통로들이 열린 채로 남아있어서

거기로 사물들의 같은 영상들이 들어올 수 있는 걸 우리는 자주 본다.

그래서 여러 날 동안 저 같은 것들이 눈앞에

어른거린다. 심지어 깨어있을 때조차, 뛰어오르는 이들을,

부드러운 사지를 움직이는 이들을 보는 듯 생각되며,

키타라의 맑은 노래를, 이야기하는 현(絃)들을

귀로 듣고, 같은 모임을 보며,

무대의 여러 장식들은 동시에 빛나는 것같이 보인다.

열정과 즐거움은 그만큼이나 중요하다,

그리고 어떤 일에 몰두해 버릇했는지도,

사람뿐 아니라 모든 동물들에게 있어서도 그렇다.

진정으로 그대는 보리라, 강한 말들이 사지를 눕혀 쉴 때,

자면서도 땀을 흘리고, 계속 헐떡이며

마치 승리의 종려나무 가지를 두고 온 힘을 다하듯,

혹은 마치 출발대가 열리자 <뛰쳐나가기를 원하듯> 하는 것을.

또 사냥꾼들의 개들 역시 자주 안온한 휴식 중에도

갑작스레 다리를 휘젓고, 돌연 짖는 소리를

발하며, 되풀이되풀이 코로 공기를 킁킁댄다,

마치 들짐승들의 자취를 발견해 따라붙듯이.

그리고 자주, 깨어나 사슴들의 헛된 영상을

쫓는다, 마치 도주에 진력하는 그들을 포착하는 듯,

착각을 떨치고 제 정신으로 돌아올 때까지.

반면, 집안에서 길들여진 강아지들의 재롱스런 자손들은

몸을 흔들며 바닥으로부터 벌떡 일어난다.

[그러면서도 갑작스레 다리들을 휘젓고, 돌연 짖는 소리를

발하며, 되풀이되풀이 코로 공기를 킁킁댄다,

마치 들짐승들의 자취를 발견해 따라붙듯이.

그리고 자주, 깨어나 헛된 것들을 쫓는다.]

마치 모르는 형태와 얼굴을 보았을 때같이.

그리고 씨앗들 각각이 더 거칠면, 그 거친 만큼

자는 동안에도 그것이 더 크게 요동치는 것은 당연하다.

한편 다양한 새들은 도주하며 밤 시간에

갑작스레 깃을 쳐 신들의 숲을 소란케 한다,

부드러운 잠 속에서 매들이 싸움을, 전투를

일으키며 날아 뒤쫓는 것으로 보이게 되면.

나아가, 큰 움직임으로써 큰 것들을 내놓는 인간들의 정신은,

자주 자면서 똑같은 것을 이루고 행한다.

그들은 왕들을 쳐부순다, 잡힌다, 전투에 뛰어든다,

고함을 지른다, 마치 도살되는 듯, 고통에 신음을 발하며,

마치 표범의, 혹은 사나운 사자의 이빨에

물어뜯기듯, 큰 비명으로 모든 곳을 채운다.

많은 이들이 자는 동안 큰 주제들에 대해 담론하며,

또 아주 자주 자신의 범죄 행위에 대한 증인이 되었다.

많은 이가 죽음을 만난다. 많은 이가, 마치 높은 산으로부터

땅으로 온몸으로 곤두박질치는 사람이 그러하듯

겁에 질리고, 마치 이성을 앗긴 듯 잠으로부터

자신으로 거의 돌아오지 못한다, 육체의 혼란에 뒤흔들려서.

마찬가지로 목마른 이는 강이나 쾌적한 샘 가까이

앉아서, 거의 강물을 몽땅 목구멍으로 집어삼킨다.

순진한 이들은 자주 잠에 묶인 채, 자신들이

호수나 얕은 단지 가까이서 옷을 쳐들었다고 믿으면,

몸 전체로부터 걸러진 액체를 쏟아낸다,

화려하게 빛나는 바뷜로니아 산 침구가 젖어드는데.

그리고 청춘기의 물길에 처음으로 씨앗들이 흘러드는

이들에게, 성숙한 날 자체가 지체들에 그 씨앗들을 생기게 하면,

영상들이 바깥 각각의 몸으로부터 닥쳐온다,

빛나는 용모와 아름다운 색을 전해 알리며.

그리고 이것은 수많은 씨앗으로 부푼 장소를 자극하여 들쑤신다,

자주 마치 모든 것이 뒤집어진 듯 거대한 흐름의

물결을 쏟아붓고 옷을 더럽히도록.

(329∼333쪽)

 

 - 루크레티우스, 『사물의 본성에 관하여』, 제4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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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질과 기억 대우고전총서 17
앙리 베르그손 지음, 박종원 옮김 / 아카넷 / 200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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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밑줄긋기)
 

어떤 기적에 의해서가 아니라면 달리 소통할 수 없는, 두 상이한 세계

 

그러나 만일 실재에 대한 이 최초의 세분이 직접적 직관에 답하기보다는 오히려 삶의 근본적인 필요에 응답하는 것이라면, 어떻게 이 분할을 더 멀리 밀고 감으로써 사물들에 더욱 근접한 인식을 얻을 수 있을 것인가? 그렇게 하는 것은 생명적 운동(욕구의 충족을 의미-역자)을 연장하는 것이고 진정한 인식에 등을 돌리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물체를 그것과 동일한 본성의 부분들로 해체시키는 이 조야한 작용은 우리를 막다른 골목으로 이끈다. 즉 우리는 왜 이 분할이 멈출 것인지도, 어떻게 이 분할이 무한히 계속될 것인지도 생각할 수 없다고 곧 느끼게 된다. 이 분할 작용은 실로 유용한 행동의 일상적인 형식을 순수 인식의 영역으로 부당하게 이전한 것을 나타낸다. 따라서 물질의 단순한 속성들은 입자들이 어떤 것이든 간에 결코 입자들에 의해 설명할 수는 없을 것이다. 기껏해야 사람들은 물체가 행하는 다른 모든 것들에 대한 작용과 반작용을 물체 자체와 마찬가지로 인위적인 미립자들에까지 추척할 것이다. 화학의 목표가 바로 그러하다. 화학은 물질보다는 물체를 연구한다. 따라서 사람들은 화학이 물질의 일반적 속성을 지니는 원자에서 멈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물리학자의 시선 아래서 원자의 물질성은 점점 더 해체된다. 예를 들어 우리는 원자를 액체나 기체보다는 고체로서 표상할 어떤 이유도 없으며, 원자들의 상호작용을 아주 다른 방식이 아니라 바로 충돌에 의해 표상할 어떤 이유도 없다. 왜 우리는 충돌을 생각하는가? 왜냐하면 고체들은 우리가 가장 명백하게 힘을 행사하는 물체들이어서 외부 세계와 우리의 관계에서 우리에게 가장 많은 관심을 야기하는 것들이기 때문이다. 또한 접촉은 우리 신체가 다른 물체들에 작용하는 데 있어서 우리가 마음대로 다룰 수 있는 것으로 보이는 유일한 수단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주 단순한 실험들만 참조해도 어떤 실제적 접촉도 없이 서로 밀어내는 두 물체들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다른 한편 고체성은 절대적으로 뚜렷한 물질의 상태가 아니다. 따라서 고체성과 충돌은 그것들의 외관상의 명백성을 실천적 삶의 습관들과 필요성으로부터 빌려 온 것이다. 이런 종류의 이미지들은 사물들의 근거에 관해 어떤 빛도 던져주지 않는다.

 

게다가 과학이 모든 반론들 위에 놓는 진리가 있다면, 그것은 물질의 모든 부분들이 상호작용한다는 것이다. 물체를 구성한다고 가정된 분자들은 인력과 반발력을 행사한다. 중력의 영향은 행성 사이의 공간을 통해 펼쳐진다. 따라서 원자들 사이에는 무언가가 존재한다. 사람들은 그것이 더 이상 물질에 속하는 것이 아니라 힘에 속한다고 말할 것이다. 사람들은 원자들 사이에 평행하게 이어져 있는 선들을 상상하고 그것들이 점점 더 얇아져서 보이지 않으며 심지어 비물질적인 것이라고 믿게 될 때까지 그것들을 상상할 것이다. 그러나 이 조야한 이미지가 무엇에 소용될 수 있겠는가? 삶을 보존하기 위해 우리는 아마도 일상적 경험에서는 불활성적인inertes 사물들과 그것들이 공간 속에서 행하는 작용들을 구분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사물을 접촉할 수 있을 정확한 지점에 그것의 자리를 고정하는 것이 우리에게 유용하기 때문에, 사물의 촉지할 수 있는palpable 윤곽은 우리에게 그것의 실제적 한계가 된다. 그 때 우리는 사물의 작용에서 그것으로부터 분리되고, 그것과 다른 <내가 알지 못하는 어떤 것>을 본다. 그러나 물질의 이론은 바로 우리의 욕구에 전적으로 상대적인 이 일상적인 이미지들 아래서 실재를 재발견하려 하기 때문에, 그것이 우선적으로 벗어나야 하는 것은 이 이미지들이다. 그리고 실제로 우리는 힘과 물질이 물리학자가 그 효과들을 깊이 탐구함에 따라 서로 접근하고 다시 결합하는 것을 본다. 우리는 힘이 물질화되고, 원자가 관념화되며, 이 두 항들이 하나의 공통적 경계로 수렴하고, 이렇게 해서 우주가 자신의 연속성을 회복하는 것을 본다. [그래도] 사람들은 여전히 원자에 대해서 말할 것이고, 심지어 원자는 그것을 고립시킨 우리 정신에 대해 그 개체성을 보존할 것이다. 그러나 원자의 고체성과 관성은 운동들이나 역선(力線)들로 용해될 것이며, 그것들의 상호 연대성이 우주적 연속성을 회복할 것이다. 물질의 구성 안으로 가장 깊게 파고 들어간 19세기의 두 물리학자인 톰슨과 패러데이도, 비록 아주 다른 관점의 입장이라 하더라도, 바로 이 결론에 필연적으로 도달했음에 틀림없다. 패러데이에게 원자는 하나의 <힘들의 중심>이다. 이 말이 의미한 것은 원자들의 개별성이란 공간을 통해 방사되는 무한한 역선들이 교차하는 수학적인 점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각 원자는, 그의 표현을 빌리면, <중력이 전개되는 공간 전체>를 점유하며, <모든 원자들은 상호침투한다>. 톰슨은 전적으로 다른 종류의 관념들에 위치하여 완벽하고 연속적이며 동질적이고 압축불가능한 어떤 유체를 가정하고 그것이 공간을 채우고 있을지 모른다고 한다. 우리가 원자라고 부르는 것은 이 연속성 속에서 소용돌이운동을 하면서 자신의 속성들을 자신의 형태와 존재에 빚지고, 따라서 자신의 개체성을 자신의 운동에 빚지고 있는 불변적인 형태의 고리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양쪽 가설에서 우리는 물질의 궁극적 요소들에 접근함에 따라 우리 지각이 표면에 세워 놓은 불연속성이 사라지는 것을 본다. 심리학적 분석은 우리에게 이미 이 불연속성이 우리의 욕구에 관련되어 있다는 것을 드러내 주었다. 모든 자연 철학이 마침내 불연속성이 물질의 일반적인 속성들과 양립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사실인즉, 소용돌이와 역선들은 물리학자의 정신 속에서는 계산을 도식화할 목적으로 마련된 편리한 형태들에 불과하다. 그러나 철학은 왜 이 상징들이 다른 상징들보다 더욱 편리하고, 더 멀리 나아갈 것을 허용하는지를 물어야만 한다. 이 상징들에 상응하는 개념들이 실재의 표상을 찾게 해 주는 적어도 하나의 방향을 우리에게 지시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이 상징들 위에서 작업하면서 경험과 다시 결합할 수 있을까? 그런데 이 상징들이 지시하는 방향은 의심스럽지 않다. 그것들은 구체척 연장을 가로질러 가면서 우리에게 긴장tension 또는 에너지의 변양, 교란perturbations, 변화를 보여준다. 무엇보다도 그런 사실들에 의해서 이 상징들은 우리가 처음 운동에 관해 제공했던 순수하게 심리적인 분석과 다시 결합하는 경향이 있다. 심리학적 분석은 우리에게 운동을 대상들의 관계 위에 우연처럼 덧붙여지는 단순한 변화로서가 아니라 진정한 실재성으로, 말하자면 독립적인 실재성으로 제시하였다. 따라서 과학도 의식도 결코 다음의 명제에 혐오감을 가지지 않을 것이다.

 

지속과 긴장

 

Ⅳ. 실재적 운동은 한 사물의 이동이라기보다는 한 상태의 이동이다.

 

이 네 가지 명제들을 공식화하면서 우리는 사실 단지 사람들이 서로 대립시킨 두 항들, 즉 성질이나 감각 그리고 운동 사이의 간격을 점진적으로 다시 좁혔을 뿐이다. 처음에 그 거리는 뛰어넘을 수 없는 것처럼 보인다. 성질ㅇ느 서로간에 이질적이고, 운동은 동질적이다. 본질상 불가분적인 감각은 측정을 벗어난다. 언제나 가분적인 운동은 방향과 속도의 계산가능한 차이에 의해 구분된다. 사람들은 성질을 감각의 형태로 의식 속에 놓기를 좋아한다. 반면에 운동은 공간 속에서 우리와 독립적으로 실행된다. 이 운동은 자신들로 구성되며 운동만을 야기할 것이다. 그러나 운동을 접촉할 수 없는 우리의 의식은 어떤 신비로운 과정에 의해서 그것들을 감각으로 번역할 것이고, 그 다음에 이 감각은 공간 속에 투사되어 자신들이 번역하는 운동을 아무도 모르는 방법으로 뒤엎으러 올 것이다. 거기서부터 어떤 기적에 의해서가 아니라면 달리 소통할 수 없는, 두 상이한 세계가 비롯되는데, 그것들은 한편으로는 공간 속의 운동의 세계이고, 다른 편으로는 감각을 갖는 의식이다. 그리고 확실히 우리 자신이 이전에 제시한 바 있듯이 한편으로는 질과 다른 편으로는 순수 양 사이에서 차이는 환원할 수 없는 것으로 남아 있다. 그러나 문제는 바로 실재적 운동들이 자신들 사이에서 단지 양의 차이만을 나타내는지, 아니면 내적으로 진동하는 그리고 자신의 고유한 존재르르 헤아릴 수 없는 무수한 순간들로 분절하는, 질 자체가 아닌지를 아는 일이다.(332∼339쪽)

 

 - 앙리 베르그송, 『물질과 기억』, <제4장 이미지들의 한정과 고정에 관하여>

 

 

 

 

우주적인 변화를 응축하고 있는 것

 

일 초의 공간 속에서 적색 빛ㅡ가장 긴 파장을 가지며 따라서 파동vibration의 빈도가 가장 적은 빛ㅡ은 400조(兆)의 잇따르는 파동들을 완성한다. 이 수에 대한 관념을 형성하고자 하는가? 우리 의식이 그것을 세기 위해서는 또는 적어도 그것들의 순차성succession을 명시적으로 기록하기 위해서는 그 파동들을 서로간에 충분히 벌려 놓아야 할 것이가. 그리고 사람들은 이 잇따름이 며칠, 몇 달 또는 몇 년을 점유하는지를 탐구할 것이다. 그런데 엑스너Exner에 따르면, 우리가 의식하는 텅 빈 시간의 가장 짧은 간격은 천분의 이(2/1,000) 초와 동등하다고 한다. 게다가 우리가 그렇게 짧은 여러 간격들을 연이어 지각할 수 있을지도 의심스럽다. 그러나 우리가 무한히 그렇게 할 수 있다고 인정해 보자. 한마디로 아주 순간적인 400조의 파동들의 행렬을 목격하는 어떤 의식을 상상해 보자. 이 파동들은 단지 그것들을 구별하기 위해 필요한 2/1,000초에 의해서만 서로 분리된다. 단순 계산으로도 이 작용이 완성되기 위해서는 2만 5000년이 필요한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처럼 일초 동안 우리에게 체험된 이 적색 빛의 감각이 우리 지속 속에서 가능한 가장 경제적인 시간으로 펼쳐진다 하더라도, 그 자체로 우리 역사의 250세기 이상을 점유할 현상들의 잇따름에 상응한다. 그것이 생각할 수 있는 일인가? 여기서 우리의 고유한 지속과 시간 일반을 구별해야만 한다. 우리 의식이 지각하는 지속, 우리의 지속 속에 주어진 한 간격은 제한된 수의 의식적 현상들만을 포함할 수 있다. 이 [지속의] 내용이 증가한다고 생각할 수 있을까? 그리고 우리가 무한히 가분적인 시간에 대해서 말할 때, 우리가 생각하는 것이 바로 이 지속인가?

 

…… 따라서 우리가 우리 주변에 간간이 던지는 시선은 단지 무수한 반복들과 내적인 진화들의 결과들만을 포착하는 것이다. 이러한 사실 자체에 의해 이 결과들은 불연속적이 되고, 우리는 그것들의 연속성을 우리가 공간 속의 <대상들>에 부여하는 상대적 운동들에 의해서 회복한다. 변화는 도처에 있다. 그러나 그것은 심층적으로 존재한다. 우리는 변화를 여기저기 위치시키지만 그것은 표면일 뿐이다. 그리고 우리는 이렇게 해서 그것들의 질에 관해서는 안정적이고, 그것들의 위치에 관해서는 움직이는 물체들을 구성한다. 그러나 우리가 보기에, 단순한 장소의 변화는 자신 안에 우주적인 변화를 응축하고 있는 것이다.(343∼349쪽)

 

 - 앙리 베르그송, 『물질과 기억』, <제4장 이미지들의 한정과 고정에 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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