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통 같은 독서

 

헤럴드 블룸의 『교양인의 책 읽기How To Read and Why』는 책의 제목이 번역 과정에서 엉뚱하게 바뀐게 몹시 아쉽다. 이 책을 볼 때마다 그냥 원제 그대로 번역했더라면 훨씬 더 낫지 않았을까 싶은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블룸의 '책 읽기에 대한 강의'는 내 판단으로는 수준이 꽤나 높다. 문학 전공자들에게 권장할 만한 책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어쨌든 나는 그 책을 먼저 읽고 나서 '셰익스피어'도 읽고, '윌리엄 포크너'도 읽었는데, 이렇게 거꾸로(?) 책을 읽는 재미도 쏠쏠하다. 헤럴드 블룸의 책을 먼저 읽으면 마치 '작품 감상'에 앞서서 미리 예습을 하는 기분이 들어서 좋고, 작품을 읽고 나서 다시 헤럴드 블룸의 책을 펼치면 '복습'하는 기분마저 든다. 윌리엄 포크너의 소설 『내가 죽어 누워 있을 때』도 그런 느낌이 들었다. 헤럴드 블룸의 책으로 '예습'을 하고 그 작품을 읽으니 훨씬 더 쉽고 재미있었고, 포크너의 책을 읽고 나서 다시 헤럴드 블룸의 책을 펼쳐 보니 '복습'하듯 명쾌하게 작품을 정리할 수 있었다.

 

그런데 윌리엄 포크너의 『내가 죽어 누워 있을 때』에 대한 '헤럴드 블룸의 해설'은 나에게 '케케묵은 숙제' 하나를 새롭게 꺼내 놓도록 요구했다. 이제부터 그 얘기를 해 볼까 싶다.

 

우선, 윌리엄 포크너의 걸작 『내가 죽어 누워 있을 때』에 대한 '헤럴드 블룸의 해설' 도입부를 잠깐 살펴 보고 넘어 가자. 이 소설은 무엇보다도 '화자'가 계속 바뀐다는 점에서 형식부터 아주 독특하다. 소설의 등장인물이 바뀔 때마다 바로 그 사람이 '화자'가 되는 구조다.

 

20세기 미국 소설 중에서 가장 멋진 시작은 윌리엄 포크너가 쓴 『내가 죽어 누워 있을 때』가 아닌가 싶다. 59개의 내적 독백으로 이루어진 이 작품에서 53개는 번드렌 가家 사람들의 독백이다. 번드렌 가는 가난하지만 자부심이 강한 백인 가족이다.

 

이들은 홍수와 불의 위험을 무릅쓰고 어머니의 관을 미시시피 주 제퍼슨에 있는 묘지로 옮기는 중이다. 할아버지 곁에 묻히기를 바라는 어머니 애디의 뜻을 위해서다.

 

도입부를 포함한 전체 중 19개 부분은 달 번드렌이 말하고 있는데, 그는 몽상가로 나중에는 광증의 경계를 넘어선다. 달은 사이가 좋지 않은 형 주얼과 함께 어머니가 죽어가는 집을 향해 달려간다.(305쪽)

 

 - 헤럴드 블룸, 『교양인의 책 읽기』

 

 

헤럴드 블룸의 해설 대로, 이 소설은 번드렌 가의 둘째 아들인 달이 이끌고 가는데, 소설의 막바지에 가면 마침내 달이 '사고'를 친다. 형이 손수 짠 관에 죽은 어머니를 안치한 채 마차에 싣고 시골길을 열흘 가까이 이동하는 동안에 관에서 악취가 나기 시작하자 '아버지와 5남매로 구성된 장례 일행'은 어딜 가나 문전박대를 당한다.  어느 날 밤, 냄새 때문에 어머니의 관은 숙소에서 멀리 떨어진 헛간으로 옮겨지는데, 한밤중에 헛간에서 불길이 치솟는다. 몹시 예민한 성격을 지닌 달이 '시신 운구 여행'을 견디다 못해 광인(狂人)처럼 느닷없이 헛간에 불을 지른 것이다. 누이동생 듀이 델의 '고자질'로 '방화범'으로 지목된 달은 경찰에 붙잡혔고, 이제 기차에 실려 '감옥'으로 호송되는 중이다.
 

그들은 자리 두 개를 합쳐 달을 앉혔다. 창문 옆에 앉아서 달은 실컷 웃었다. 한 사람은 그의 옆 자리에 앉고, 또 한 사람은 그 앞에 앉아 거꾸로 가고 있었다. 미시시피의 돈은 각각 앞면과 뒷면이 붙어 근친상간을 하고. 그 돈으로 그들은 기차를 타고 있다. 5센트짜리 동전은 한 면에 여자가 있고 다른 면엔 물소가 새겨져 있다. 얼굴만 두 개고 뒤통수가 없다. 왜 그런지 모르겠다. 달은 전쟁 중 프랑스에서 얻은 쌍망원경 하나를 가지고 있었다. 그 안에는 여자와 돼지가 새겨져 있었는데, 얼굴은 없고 모두 뒤통수만 있었다. 그게 뭔지 나는 알고 있다. "달, 그래서 웃고 있는 건가?"

 

"맞아 맞아 맞아 맞아 ……."

 

 - 윌리엄 포크너, 『내가 죽어 누워 있을 때』


이 대목에 대한 헤럴드 블룸의 해설이 없었다면 우리들의 '작품 이해'는 상당한 한계를 지닐 수밖에 없다. 그의 해설이 그만큼 '놀라운 깊이'를 지녔기 때문이다.

 

분열된 달은 자기 자신과 대화를 주고받는다. 그래도 그는 여전히 '보는 자'다. 즉 "근친상간인 주(州)의 화폐"다. 이 구절은 이아고의 이성애異性愛에 대한 라블레의 익살로 보인다. 두 개의 등을 가진 한 마리의 야수라는 생각은 '주의 화폐'를 근친상간으로 보는 점에서 셰익스피어의 『잣대엔 잣대로』와 비슷하다.(312쪽)

 

 - 헤럴드 블룸, 『교양인의 책 읽기』

 

 

'미시시피의 돈'에서 윌리엄 포크너는 셰익스피어의 작품 『오셀로』에 나오는 '이아고의 말'과 '근친상간'을 동시에 떠올린다. 헤럴드 블룸은 바로 그 점을 지적한 것이다. 나는 블룸의 해설에 등장하는 '두 개의 등을 가진 야수'라는 표현을 제임스 조이스의 『율리시스』에서 맨처음으로 만났었다. 조이스 역시 그 표현을 셰익스피어의 작품 『오셀로』에서 빌려온 것임은 더 말할 필요가 없다. 제임스 조이스가 세익스피어의 그 표현에 얼마나 깊은 인상을 받았는지는 작품 속에서 '거듭 반복되는 인용'만 봐도 충분히 미뤄 짐작할 수 있다.

 

어쨌든 나는 이번 기회에 '두 개의 등을 가진 야수' 이야기를 꺼낼 기회를 꽉 붙잡게 되었다. 여기서부터는 잠시 무대를 '미시시피 강'에서부터 아일랜드의 '더블린'으로 옮길 필요가 있다. 여기까지 나를 따라온 독자들이라면 이제부터 인용하는『율리시스』의 소설 내용까지 굳이 자세히 이해할 필요는 없다는 사실쯤은 충분히 눈치채고 있으리라. 우리는 그저『율리시스』의 주석에 딸린 내용을 살펴보는 것만으로도 숨이 약간 벅차다.

 

ㅡ 내 생각으로는 내가 여태껏 내 일생에서 들은 가장 연마된 문장들 가운데 하나가 부쉬의 입술에서 떨어졌지. 그것은 저 형제 살해사건. 덧문즈의 암살 사건이었어. 부쉬가 그를 변호했지.

 

그리하여 나의 귓구멍에 부어 넣었노라.157)

 

 

그런데 어떻게 그가 그걸 알아냈던가? 그는 잠 도중에 죽었지. 아니면 다른 이야기, 두개의 등을 가진 야수(野獸)?158)

 

ㅡ 그게 무엇이었는데? 교수가 물었다. (114∼115쪽)

 

주석

 

157) 유령이 햄릿 왕자에게 자신이 클로디어스에 의해 암살당한 방법을 알리는 구절(『햄릿』1막 5장 59∼63)

 

158) 그런데 어떻게 …… 죽었는데 ㅡ 유령은, 죽은 다음에 자신을 죽인 방법이 폭로되어지지 않는 한 그 방법을 알 수 없다는 것. 다른 얘기는 …… 야수를 ㅡ 유령은 왕자에게, 클로디어스는 '간통의 야수'라 말하고 왕비는 '미덕을 가장한 자'라 말함.(『햄릿』1막 5장 42∼46). 이는 스티븐에게, 숙부와 어머니는 부왕의 죽음 전에 간통을 범함으로써 이아고의 말대로 '두 개의 등을 가진 야수'(『오셀로』1막 1장 117∼118)라는 사실을 암시해 줌. 그러나 이 두 가지 사실을 죽은 부왕이 어떻게 알 수 있었느냐가 문제로 남음.

 

 - 제임스 조이스, 『율리시스』, <제7장 신문사(아이올러스)> 중에서

 

 * * *

 

모두들 듣는다. 그리고 그들의 귀의 현관에 나는 부어 넣는다.

 

ㅡ 영혼이 이전에 이미 치명적인 상처를 받았소. 독(毒)이 잠자는 귀의 현관에 부어졌던 거요. 그러나 그들의 창조주가 다가올 생(生)의 저 지식을 그들의 영혼에 부여하지 않는 한 잠 속에 죽음을 당한 자들은 자신들의 소멸의 방식을 알 수 없는 거요.286) 독살과 그것을 재촉했던 두 개의 등을 가진 야수(野獸)를 햄릿 왕의 유령은 그가 자신의 창조주에 의해 지식을 부여받지 않는 한 알 수 없었을 거요.287)  바로 그것이 언어(그의 말라빠진 보기 흉한 영어)가 항상 다른 데로 이탈하고, 후퇴하는 이유지요. 강탈자며 강탈당하는 자로서, 그가 의지(意志)하려 했거나 의지하려하지 않았던 것이, 루크리스의 푸른 정맥으로 둘러싸인 상아(象牙) 같은 유방.289)에서부터 다섯 끗 점 사마귀 있는, 이모겐의 벌거벗은, 젖가슴에까지 자신과 동행하지요. (이하 생략)

 (161∼162쪽)

 

주석

 

286) 『맥베스』, 1막 7장 72행

287) 성교(性交)를 암시함(『오셀로』, 1막 1장 118행)

289) 셰익스피어 작 『루크리스의 강간』, 4행∼7행

 

 - 제임스 조이스, 『율리시스』, <제9장 국립도서관(스킬라와 카립디스)> 중에서


 * * *

 

 

스티븐

 

(성냥을 눈 가까이 가져간다) 살쾡이 눈이야. 안경을 사야겠어. 어제 그걸 깼지. 16년 전에. 거리(距離). 눈은 모든 걸 평평하게 보지. (그는 성냥을 멀리 끌고 간다. 불이 꺼진다.) 두뇌는 생각하도다. 가까이: 멀리. 가시적인 것의 불가피한 양상. (그는 신비스럽게 상을 찌푸린다) 흠. 스핑크스다. 한밤중에 두 개의 등을 지닌 짐승이군.482)  시집을 가다니.(456쪽)

 

주석

 

482) 『오셀로』, 1막 1장 117∼118행에서 이아고가 한 말 "저는 말입죠. 따님과 무어놈이 지금 잔등이 둘 달린 짐승을 연출하고 있는 ……" 밤의 여인 조지너 존슨은 스티븐에게 불성실함으로써 두 개의 등을 가진 야수를 연출하는 셈임. 또한 『햄릿』에서도 부왕 햄릿이 죽기 전에 클로디어스가 왕비와 간음을 행함으로써 '두 개의 등을 가진 야수'가 됨.

 

 - 제임스 조이스, 『율리시스』, <제15장 밤의 거리(키르케)> 중에서


 

제임스 조이스는『율리시스』에서 『오셀로』를 (내가 세어 본 바로는) '아홉 번' 인용했는데, 그 가운데 무려 '세 번'이 이아고가 말한 '두 개의 등을 가진 야수' 때문이었다. 그런데 정작 우리나라에서 읽는『오셀로』에서는 '두 개의 등을 가진 야수'를 좀처럼 만날 수 없다. 심지어 (물론 내가 아는 좁은 범위 내에서만 말하는 거지만) '그와 비슷한 번역' 조차 구경하기 힘든 실정이다. 이렇듯 '원래의 문장이 지닌 강렬한 이미지'를 다 내다버리고 밋밋하기 짝이 없는 문장으로 번역함으로써 독자들은 '셰익스피어 언어의 놀라운 힘'을 결국 놓치고 마는 게 아닐까.

 

내가 윌리엄 포크너의 소설에 나오는 한 대목을 두고 이토록 자세하면서도 복잡하게 인용문들을 잔뜩 늘어놓으면서 이야기하는 것도 다 이아고가 말한 그 유명한 대사 때문이다. 제임스 조이스와 윌리엄 포크너와 헤럴드 블룸이 모두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주목했던 셰익스피어의 그 놀라운 표현을 왜 우리들은 여태 모를 수밖에 없었던가. 그건 바로 '번역' 때문이었다! 이 문제야말로 내가 '두 개의 등이 달린 야수'를 만난 이후 오랫동안 품어 왔던 '진짜로 하고 싶었던 이야기'였다. 우연히 집어든 윌리엄 포크너의 작품이 마침내 그 실마리를 풀어보도록 내게 요청해 온 셈이었다.(헤럴드 블룸이 슬쩍 언급한 『잣대엔 잣대로』에 대해서는 과감하게 생략했다. 이쯤으로도 충분하지 않을까 싶어서다. 일물일가의 법칙도 있잖은가. 잣대엔 잣대로.)

 

마지막으로 덧붙일 건 내가 읽은『오셀로』에 나오는 이아고의 밋밋하기 짝이 없는 대사다.

 

    브라반티오

입버릇 더러운 넌 누구냐?

 

         이아고

어르신, 전 당신 딸과 무어인이 지금 배를 맞추고 있다는 말씀을 드리려고 온 사람입니다.

 

    브라반티오

네놈은 악당이다!

 

         이아고

당신은 의원입죠!

 

- 최종철 번역, 『오셀로』, <1막 1장>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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꼬마요정 2017-07-04 15:20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귓구멍에 부어 넣는다면 바로 햄릿이 떠오르는데, 두 개의 등을 가진 야수는 처음 봅니다. 오셀로를 제대로 안 읽었나.. 했더니 오렌님께서 우리나라에서는 좀처럼 볼 수 없다 해주시니 책을 뒤지지는 않겠지만 아쉽습니다. 멋진 표현인데..

oren 2017-07-04 15:39   좋아요 1 | URL
예전에 읽은 어떤 책에서 본 ‘번역 후기‘도 생각납니다. 대학에 다닐 때 영문학 수업 시간엔 세익스피어의 비극『오셀로』4막 1장에 나오는 대사 ˝Alas, poor caitiff!(이 한심한 화상아!)˝의 뜻을 잘 몰랐는데, 나중에서야 그 말의 깊은 뜻을 알게 되었다고요. 그런데 제가 찾아본 그 어떤『오셀로』에서도 ‘이 한심한 화상아!‘라는 번역은 찾질 못하겠더군요.

겨울호랑이 2017-07-04 16:0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문학의 표현은 역사를 가지고 있군요. 작품 자체의 의미도 표현도 중요하지만, 다른 작품과의 연계성까지 고려해야 온전한 작품 감상이 이 된다는 것을 oren님 덕분에 깨닫게 됩니다.^^:

oren 2017-07-04 16:57   좋아요 1 | URL
제 생각으로는, ‘텍스트 간의 관련성(intertextuality)‘을 극대화한 작품이 아마도 제임스 조이스의 『율리시스』가 아닐까 싶어요. 작가가 일부러 숱한 ‘미로‘와 ‘건너 뛰기 어려운 협곡‘들도 만들어 놓은 듯하고요. 그 때문에 엄청난 숫자의 사람들이 그 작품을 ‘해석‘하느라 기를 쓰고 달려들고 있기도 하고요. 천병희 선생님이 번역한 책들도 ‘주석‘이 많기로 유명한데, 작품을 쓴 옛날 사람들이 미리 ‘텍스트 간의 관련성‘을 두루 염두에 두고 썼기 때문이라고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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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르길리우스 시의 묘미를 느끼려면 호메로스의 시를 알아야 하듯, 오비디우스의 『변신이야기』도 그의 선배 시인들의 시를 알고 있으면 그 깊은 맛을 구석구석 느낄 수 있다. 오비디우스의 『변신이야기』를 비롯한 그리스 라틴문학의 읽는 재미를 극대화하려면 텍스트 간의 관련성(intertextuality)을 파악할 것을 권한다. 앞서 말했듯이 네스토르는 젊은 나이에 칼뤼돈의 멧돼지 사냥에 참가하지만 멧돼지가 덤벼들자 당장 이를 피해 마치 장대높이뛰기 하듯 창자루를 짚고 나무 위로 도망치는데(8권 260∼546행 참조), 이 장면은 그가 『일리아스 』에서 그리스 장수들의 회의석상에서 기회 있을 때마다 자기는 젊었을 때 아무리 강한 적 앞에서도 물러서지 않았다며 다른 장수들을 나무라는 장면들을 알고 있어야만 더 재미있게 읽히는 것이다.

- 오비디우스, 『원전으로 읽는 변신 이야기』, <옮긴이 해제>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