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은 대담무쌍한 모험이 아니면 아무것도 아니다.
- 헬렌 켈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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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시절에 내가 읽은 별로 많지도 않은 아동용 책들 가운데 하나가 『톰 소여의 모험』이었다. 그 소설의 내용을 이제 와서 과연 얼마쯤이나 기억하고 있을까? 아마도 그 책을 자주 읽고 들려줄 수 있는 어느 '독서지도교사'가 내게 '그 책을 얼마나 제대로 읽었는지에 대해' 시험을 치르게 한다면, 나는 틀림없이 '거의 모든 문제'에 대해 낯설어 하며 매번 통밥을 굴리기 바쁠 것이다.('통밥'을 굴리는 얘기가 이 소설에 엄청 많이 나온다. '우리말 번역' 또한 '통밥' 그대로여서 나도 이참에 써봤다.) 그 모험소설의 내용을 새까맣게 잊은지도 너무나 오래 지났기에 그건 어쩌면 지극히 당연한 일인지도 모르겠다. 어린 시절에 장발장을 읽지 않은 애들이 얼마나 될까. 그러나 어른이 다 된 후에 어느 누가 불쑥『레미제라블』을 바탕으로 시험을 한번 보자고 한다면, 대략 난감해 하지 않을 사람이 몇이나 될까. 아주 특별한 기억력이 아니라면 어릴 때 읽었던 아동용 고전 명작을 읽고 그 내용을 어른이 되어서도 줄줄 기억해 낼 수 있는 사람은 별로 많지 않을 것이다.
내가 겨우 열 살이나 혹은 열세 살 무렵에 읽었을 법한 『톰소여의 모험』은 읽을 당시로만 따지면 어쨌든 무쟈게 재미있었다. 아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그 소설 속의 주인공들이 곧 독자였던 당시의 나와 거의 똑같은 나이였으니까 말이다. 아무런 생각이 없던 시절이 좋은 건 '어른들이나 걱정할 고민들'은 하나도 머릿속에 담아 둘 필요가 없다는 데 있다. 어린애들은 무엇보다 '먹고 살 걱정'을 하지 않는다. '장래'도 별로 걱정하지 않는다. 어느 철학자의 말대로 '어린 시절엔 세상이 온통 무지개처럼 아름답게 보일 뿐'이기 때문이다. 무턱대고 저지른 온갖 저지레 때문에 나중에서야 어른들로부터 크게 혼날 걱정만 빼고는, 늘상 '뭐 재미난 일이 없을까'를 궁리하기 바쁜 게 바로 어린 시절의 특징이리라.
까마득한 옛날인 70년대 초에『톰 소여의 모험』을 읽고 절로 빠져든 '감정이입'을 이제 와서 다시 느끼기는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다. 그 소설을 읽은 지 벌써 40년 이상이나 흐른 내게 '동심' 같은 게 과연 얼마나 남아있을까. 그나마 내게 한 가지 운이 좋았던 사실 하나는, 어릴 적에는『톰 소여의 모험』까지만 읽고 『허클베리 핀의 모험』은 전혀 읽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 묘한 우연 덕분에 어느날 문득 오십줄에 접어든 초로의 내가 다시금 그 말썽꾸러기 소년들인 허클베리 핀과 톰 소여를 다시 만나게 되었으니 말이다.
『허클베리 핀의 모험』을 집어들기 전부터 미리 걱정을 전혀 안 했던 건 아니었다. 50대의 나이에 10대 초반의 어린 소년이 '나'로 등장하는 소설을 과연 무슨 재미로 끝까지 다 읽어낼 수 있을까 싶었던 것이다. 그래도 이 소설은 숱한 사람들로부터 엄청난 평가를 받고 있으니 그런 걱정일랑 따로 할 필요가 별로 없겠지 싶긴 했다. 괜히 엄청난 평가를 받는 고전들을 나는 여태껏 한 번도 만나본 적이 없었으니까 하는 말이다. 결론부터 말하면 과연 명불허전이었다!
아무튼 이 고전에 대해 걸출한 작가들이 내놓은 놀라운 평가부터 좀 들어 보고 나서 이 소설을 얘기하는 게 순서이지 싶다. 우선 헤밍웨이가 남긴 말부터 들어보자.
현대의 미국 문학은 모두 마크 트웨인의 『허클베리 핀의 모험』이라는 한 권의 책으로부터 비롯되었다. 모든 미국 작품이 그로부터 비롯되었다. 그 이전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그 이후에도 그만큼 훌륭한 것은 없었다.
- 어니스트 헤밍웨이
헤밍웨이가 남겼던 이 말은 흔히 도스토옙스키가 고골의 가장 유명한 단편소설에 대하여 남겼던 평인 "우리는 모두 고골의 '외투'에서 나왔다"는 말과 비교되곤 한다. 고골이 자신의 천재성을 발휘하여 자신이 활약하기 이전의 러시아 문학의 공허한 형식주의와 경직성을 완전히 파괴했던 활약상이 마치 마크 트웨인이 미국 문학에서 했던 역할과 적잖이 닮았기 때문이다.
미국이 싫어서 영국으로 건너갔던 T.S.엘리엇조차도 마크 트웨인을 격찬했다. 그는 모든 면에서 '하버드 맨'으로 합당했지만, '훨씬 오랜 역사와 더 위대한 문학 유산을 가진 나라, 종교와 영혼의 문제에 높은 가치를 부여하고 아이러니의 깊은 의미를 아는 땅인 프랑스와 영국'에 매력을 느껴 결국 구대륙으로 건너가 살았다. 그의 평을 들어보자.
트웨인은, 최소한 『허클베리 핀의 모험』에서만큼은, 본인이야말로 그 어떤 문학에서도 흔치 않은, 작가 자신뿐만 아니라 다른 작가들에게도 타당한, 새로운 글쓰기 방식을 발견한 작가들 중 하나임을 밝히고 있다. 이런 면에서 나는 그를 심지어 드라이든과 스위프트와 나란히 놓고자, 즉 자신의 언어를 최신의 것으로 만든, 그런 와중에 ‘자기 부족의 방언을 정화한’ 그런 희귀한 작가 가운데 하나로 놓고자 한다.
- T.S.엘리엇
엘리엇이 마크 트웨인의 소설을 특별히 좋아한 건 그가 세인트루이스에서 태어났기 때문이다. 세인트루이스는 미시시피강과 미주리강이 만나는 지역에 위치한 미주리주 최대의 도시이고, 『허클베리 핀의 모험』에도 뉴올리언스와 함께 자주 언급되는 도시이다. 특히 마크 트웨인은 미시시피강 유역 사람들만의 토속적인 사투리를 아주 맛깔나게 살린 것으로 유명한데, 엘리엇이 자신의 어린 시절을 숱하게 되살려 줄 그런 표현들에 특별히 매료되었음은 의심할 여지가 별로 없다. 조정래의『태백산맥』을 읽은 많은 독자들이 벌교 사람들의 사투리에 매료되고, 이문열의『영웅시대』를 읽은 독자들이 그 작품 속에서 자주 맞닥뜨리는 작가의 고향 사투리에 몹시 놀라며 반기듯이 말이다.
어쨌든 두 사람의 걸출한 작가로부터 이런 정도로 높은 평가를 받는 소설이 그저 단순히 '어린이 모험 소설'에 그칠 수는 없다. 작가 자신이 태어나고 자란 '미시시피 강'을 배경으로, 열세 살짜리 허클베리 핀이 도망친 노예 짐과 함께 '뗏목 여행'을 펼치는 온갖 흥미진진한 모험 이야기가 어떻게 그토록 뛰어난 작품성과 문학성을 얻게 된 것일까.
이 소설의 매력은 한마디로 표현하기 어렵다. 내가 이 소설에서 느낀 가장 큰 매력은 무엇보다도 '문명'이 배제된'원시 자연 상태가 고스란히 살아 숨쉬는 펄떡이는 19세기의 낭만적인 미국'을 아주 잘 그려냈다는 점이다. 미국만큼 '새로움과 동경으로 가득찬 나라'도 드물다. 콜롬버스가 '신대륙'을 발견한 이후, 구대륙에 살던 온갖 지방의 사람들이 새로운 삶을 찾아 대서양을 건너 '새로운 삶'을 시작한 곳이 바로 미국땅이었다. 보스톤이나 뉴욕이나 시카고가 아닌, 까마득한 옛날 인디언들이 살던 미시시피강 유역에 사는 미국인들의 삶은 오늘날과는 판이하게 달랐다. 그래서 이 소설 속엔 '서두르는 법'이 온통 배제되어 있다. 문명화되기 이전 시대의 느릿느릿한 삶의 흐름들이 마치 미시시피강이 흐르는 유속만큼 완만하기 그지 없다. 그래서 폴리 이모가 샐리 이모한테 '톰 소여'의 소식을 편지로 전하더라도, 미처 그 편지가 닿기 전에 허클베리 핀이 '톰 소여'인 양 먼저 나타나는 상황이 얼마든지 가능한 것이다. 희대의 사기꾼인 '왕과 공작'이 우연히 어느 마을로 찾아가 막대한 상속 재산을 남기고 죽은 피터 영감의 형님 노릇을 한참 동안이나 대신할 수 있었던 것도 마찬가지다.
두 번째 매력이라면 역시 '모험 소설'로서의 매력이다. '어린 시절' 만큼 사람들이 쉽게 공유하기 쉬운 '시절'도 없다. 어느 하나 '불변적이고 고정적'이기 보다는 늘 '가변적이고 유동적'인 상태에 가깝고, 거의 모든 가능성에 항상 열려 있고, 그래서 '하루하루가 모험 그 자체의 연속'에 가까운 시절이 바로 어린 시절의 가장 큰 특징이다. 작가는 허클베리 핀의 '뗏목 여행'을 통해서 끊임없이 변화무쌍하게 전개되는 '모험들'을 독자들 앞에 가득 펼쳐 놓는다. 이 신명나는 모험에 공감하지 못할 독자들은 거의 없을 것이다. 애들이나 어른이나를 가릴 것 없이 말이다.
밀란 쿤데라는 젊은 시절의 '무한한 변주 가능성'을『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에서 음악에 빗대어 아주 멋지게 표현한 적이 있었다. "젊은 시절 삶의 악보는 첫 소절에 불과해서 사람들은 그것을 함께 작곡하고 모티프를 교환할 수도 있지만 보다 원숙한 나이에 만난 사람들의 악보는 어느 정도 완성되어서 하나하나의 단어나 물건은 각자의 악보에서 다른 어떤 것을 의미하기 마련이다"라고 말이다. 주인공 헉 핀과 짐 뿐만 아니라 이 소설에 등장하는 많은 인물들이 끊임없이 '새로운 변화'를 찾아 도전하고 '안주'하는 걸 한사코 거부한다. 우리의 영원한 고향과도 같은 '어린 시절'의 모험 충동을 자극하기에 조금도 모자람이 없다. 도망치던 흑인 노예 짐이 우연히 샐리 이모네 농장의 오두막에 갇혀 쇠사슬에 묶여 있는 동안, 사실은 그가 '자유의 몸'이 된 상태였음을 알고 나서도, 굳이 죄수를 좀 더 그럴듯하게 탈출시키기 위해 헉 핀과 톰 소여가 꾸미는 '길이 남을 대탈주극'은 이 소설의 본질을 극명하게 보여준다.
허클베리 핀과 흑인노예 짐이 '뗏목'에 의지해서 벌이는 모험은 한편으로는 '어른용 모험 소설'인『돈키호테』를 몹시나 닮았다. 돈키호테가 산초 판사와 함께 늙은 로시난테에 의지한 채 온갖 흥미진진한 모험을 벌이는 그 이야기와의 가장 뚜렷한 차이점을 굳이 꼽자면 아마도『허클베리 핀의 모험』에서는 '사랑 이야기'가 거의 없다는 점 정도일 것이다. 두 소설은 모두 작가 특유의 유머와 해학이 주체하기 어려울 만큼 넘친다. 또한 두 소설 모두 작품 속 주인공들이 겪는 모험 속에 삽입된 '주인공을 달리 하는 또다른 이야기들'이 너무나 그럴 듯하고 훌륭한 점도 몹시 닮았다.
이 소설이 풍기는 또하나의 묘한 매력은 호메로스의 서사시『오뒷세이아』를 닮았다는 점이다. 주인공 오뒷세우스의 '눈물겨운 귀향'을 다룬 서사시는 어쩌면 '모험 이야기'의 원조격 작품이니 당연히 그럴 수밖에 없다. 두 작품의 차이점 또한 『돈키호테』와 비슷하다. 오뒷세우스가 전쟁터를 떠나 고향 이타케 섬으로 되돌아오기까지 겪는 온갖 모험과 고초 가운데 등장하는 여인네만 해도 그 수가 얼마였던가. 세이렌의 유혹 정도는 축에 끼지도 못한다. 칼륍소와는 아예 살림을 차렸었고, 마녀 키르케와도 부부처럼 지냈고, 나우시카아 공주에게도 새장가를 들 뻔 하는 등 숱한 여인과 사랑과 이별을 겪었다. 전쟁터로 떠난 남편을 기다리는 페넬로페 역시 시아버지의 수의를 짜는 동안 숱한 남정네들로부터 유혹을 받았다. 남녀 간의 사랑 이야기를 빼면『오뒷세이아』는 금세 시들해지고 재미가 없어진다. 그런데 『허클베리 핀의 모험』에선 사랑 이야기가 아주 짧다. 어느 마을 대령의 딸이 '비밀 쪽지' 하나를 받고 적대적인 가문의 총각과 함께 느닷없이 줄행랑을 쳤다는 얘기를 빼면 다른 사랑 이야기는 거의 찾아볼 수 없을 정도다. 그만큼 담백하다고나 할까.『평생독서계획』에서 클리프턴 페디먼은 이런 말을 남겼다. "페리클레스 시대의 고대 그리스 지식인들은 호메로스를 읽으면서 그리스의 서사시를 느꼈는데, 그와 똑같이 미국인은 『허클베리 핀의 모험』에서 미국의 『오뒷세이아』를 읽는다."고 말이다. '신화'는 사라져도 어쨌든 '서사시'는 계속 태어나는가 보다.
이 모험 소설엔 '사랑 이야기'가 빠지는 대신에 그보다 훨씬 단단한 감정인 '우정'이 담겨 있다. 바로 주인공 허클베리 핀과 도망친 노예 짐 사이에 싹튼 백인과 흑인 사이의 '우정'이다. 두 사람이 처음부터 뗏목 여행에 자연스럽게 의기투합했던 건 아니었다. 허클베리 핀은 술주정뱅이 아버지로부터 도망쳐 나왔고, 같은 마을에 살았던 이웃집 노예였던 짐은 '남부지방으로 팔려가야 하는 신세'를 벗어나고자 '자유'를 찾아 무작정 도망쳐 나왔는데 그 두 사람이 우연히 미시시피강 한가운데 있던 잭슨섬에서 만났을 뿐이었다. 헉 핀으로서는 '도망친 노예'와 어쩔 수 없이 한 배를 탄 셈이었는데, 당시에 도망친 흑인 노예는 누구든지 '신고'하는 게 의무처럼 여겨지던 때여서 소년조차도 '마음 속의 도덕적 갈등'을 심하게 겪는다. 그런데 짐과 함께 며칠을 살다 보니 그도 백인인 자신과 똑같은 인간임을 발견하고 차마 양심상 신고할 수 없게 된다. 도리어 그를 도망칠 수 있도록 도와주기로 결심하면서, 그게 죄가 된다면 '지옥에라도 가고야 말겠다'고 다짐한다. 이 대목이야말로 이 소설의 시대적 배경을 극명하게 압축해서 드러내 주는 부분이다.
당시의 잘못된 법률과 사회 관습이 얼마나 한심스러운 수준이었던가는 다른 많은 이야기에서도 여지없이 드러난다. 적대적인 가문과의 대결에서는 10대 초반의 어린아이들까지 서로 총을 들고 서슴없이 총격을 가한다. 살인과 폭력과 미신과 탐욕 등이 백주대낮에 버젓이 횡행한다. '흑인 노예제도'를 둘러싼 뿌리깊은 인종간 갈등은 미국 사회의 야만성과 불합리성을 대표하는 문제이다. 작가는 이 골치아픈 문제를 '문명화'와 '교양'을 거부하는 순수한 마음을 지닌 헉 핀의 '마음 속 갈등'을 통해 아주 자연스럽게 해결해 나간다. 그렇다고 해서 작가로부터 노예 제도와 인종 갈등에 대한 근원적인 해결책이 명쾌하게 제시되는 것도 아니다. '노예제도'를 다루는 작가의 입장은『허클베리 핀의 모험』과 더불어 19세기 미국 문학을 대표하는 작품 『월든』을 쓴 헨리 데이빗 소로우와 비교될 만하다. 왜냐하면 소로우는 미국의 노예제도에 대해 격렬하게 반대했고, 자신이 직접 나서서 도망친 흑인 노예의 도주를 도와주기도 했기 때문이다. 몇 년 전에 영화로까지 소개된 작품인『노예 12년』을 떠올려 보면 '그 당시의 흑인 노예 상황'이 얼마나 심각하고도 절박한 문제였던가를 누구라도 금세 느낄 수 있다.
이 소설이 쓰여진 시기도 벌써 100년이 훌쩍 넘었고 소설의 배경은 지금으로부터 150년 이상이나 더 거슬러 올라간다. 더구나 무대의 공간 배경 또한 드넓은 미시시피 강과 뗏목과 증기선과 강변 마을과 농장 등이 전부여서 우리에겐 많이 낯설다. 셀 수도 없이 많은 '우리들'도 한결같이 어린 시절을 틀림없이 보냈지만 미시시피강만큼 드넓은 강을 끼고 자라진 않았음에 틀림없다. 더구나 언어와 종교와 관습과 문화조차 우리와는 전혀 다른 '산업화 이전 시대의 미국땅'에서 펼쳐지는 물내음 물씬 풍기는 '뗏목 여행' 이야기가 우리에게 친숙할 리는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린 어쨌든 이 소설을 읽는 동안 끊임없이 우리들의 어린 시절로 되돌아갈 수밖에 없다. 그만큼 작가의 이야기 솜씨가 탁월하기 때문이다. 또한 이 소설의 배경이 낯설다는 이유 때문에 우리의 '모험 본능'이 방해를 받는 일도 거의 없다. 허클베리 핀과 짐의 뗏목 여행에 대해 독자들이 느끼는 순수한 동경이야말로 우리가 늘 잊고 있었던 '미래의 무한한 가능성'에 대해 무작정 겁도 없이 뛰어들었던 '이런 시절의 모험 본능'으로 되돌아가고픈 '우리들의 원초적 귀소 본능'에 대한 자극에 다름아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