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10월, 가을산행에서 만난 풍경
2013년 10월, 가을 산행에서 만난 풍경

 

청춘이 정열을 추구하는 것은 용서하고, 노년이 쾌락을 찾는 일은 금지하는 것은 잘못이다. 나는 젊었을 때는 불타는 정열을 조심성으로 은폐했다. 이제 늙어서는 음산한 심정을 방종으로 풀어 준다. 그 때문에 플라톤의 법칙은 편력을 더 유익하고 교양적인 것으로 만들기 위해서, 40이나 50세 전에 돌아다니는 것을 금지한다. 나는 바로 이 규칙의 제2항으로 60세가 넘어서는 편력을 금지하는 데 기꺼이 동의할 것이다.

"그런데 이런 나이에 길을 떠나다가는 그 먼 길에서 다시 돌아오지 못할 것 아니오?" 무슨 상관이 있나? 나는 여행에서 돌아오거나 여행을 완수하려고 떠나려는 것이 아니다. 나는 단지 움직이는 것이 기분 좋은 동안은 움직여 보려고 하는 것이다. 바람을 쏘이기 위해서 나는 바람을 쐰다. 이득이나 토끼를 보고 달려가는 자는 달려가는 것이 아니다.

- 몽테뉴, 《몽테뉴 수상록》 중에서

 

 * * *

 

가을은 정말 좋은 계절이다. 예전엔 가을이 오는 게 참 싫었다. 나는 여름이 단연 제일 좋았다. 원래부터 더위도 별로 타지 않는다. 여름은 낮이 길어서 좋고, 시원한 강물과 바닷물에 온 몸을 풍덩 내던질 수 있어서 좋고, 싱그러운 신록과 쏟아지는 비와 한여름의 뭉게구름과 저녁놀이 특히 아름다워서 좋다. 매미소리, 풀벌레소리, 싱그러운 풀내음도 다 좋다. 가을은 곧 그런 여름이 끝장난 뒤에 찾아오기 마련이어서 싫었다. 한때는 가을이 너무나도 싫을 때도 있었다. 낙엽이 수북히 깔리고 눈 앞에서 잎이 뚝뚝 떨어지는 날에는 견디기 어려울 정도로 외로움을 느낄 때도 많았다. 가을에 듣는 음악들은 가슴을 후벼 파는 듯이 아플 때도 많았다. 얼마나 많은 슬픈 노래들이 가을을 뒤흔드는지는 하루 종일 라디오를 켜 놓으면 금세 느낄 수 있다. 어떨 땐 그런 아릿한 아픔조차도 그립고 땡길 때조차 있지만 그건 정말 잠시나마 그럴 뿐이다. 가을은 어쨌든 내겐 오랫동안 '슬픈 계절'이었다.

 

차츰 나이가 들면서 가을이 조금씩 편해지기 시작했다. 가을이 예전보다 훨씬 더 밝아지고 풍요로워진 이유 가운데 하나는 분명 '가을 여행' 덕분이라 믿는다. 가을엔 편지도 써야 하고, 책도 읽어야 하고, 야유회도 가야 하고, 체육대회나 동창회에도 가봐야 한다. 참 할 일이 너무 많은 때가 가을이다. 그 중에서도 가장 빼놓기 어려운 건 아무래도 가을 산행이다. 단풍이 곱게 물들 무렵 파란 쪽빛 하늘을 올려다 보면서 바스락거리는 낙엽을 밟으며 산길을 오르는 기쁨은 무어라 형언하기 힘든 매력이 있다. 또 한 해가 이렇게 저무는 구나 싶은 얄팍한 생각도 떨치기 어렵지만 그래도 용케 복잡한 도심과 일상에서 벗어나 자연을 벗삼을 시간을 올해도 또다시 찾았구나 싶은 안도감부터 불쑥 찾아든다. 옛사람들에 비하면 우리는 얼마나 자연과 멀리 벗어나 복잡하고 찌들고 고달픈 삶을 스스로 자초하고 사는 셈인가 싶은 생각이 그제서야 문득 드는 것이다. 올핸 울릉도로 떠나볼 계획이었는데 기어코 하루 전날에 '높은 파고 때문에 운행 취소'라는 문자를 받고야 말았다. 그래도 가을 산행을 포기할 순 없었다.

 

그래서 서둘러 달려간 곳이 삼척 앞바다였고, 검봉산 자연휴양림에 빈 방이 있었고, 검봉산(686m)에 올랐고, 이튿날은 통고산 자연휴양림에 남아 있는 빈 방을 예약했고, 울진 망양 앞바다와 불영사 등지를 오랜만에 다시 둘러보게 되었다. 끼니마다 풍성한 먹거리를 찾아 헤매는 재미도 쏠쏠하고 좋았다. 어느새 가을이 많이 깊었다.

 

 

 - 새벽부터 서두른 덕분에 중간에 고속도로 휴게소에서 아침을 먹고도 점심때가 덜 되어 삼척 앞바다에 도착했다

(Shooting Date/Time 2015-10-25 오전 10:48:17)

 

 

 - (일행 중에 어느 누가) 10년쯤 전에 무지 맛있게 먹었다는 '물회집'을 간신히 찾아냈다.

    어제 오늘은 파도가 높아 '해삼물회'는 먹을 수 없단다.

 

 

 

 - 그냥 '물회'도 참 맛있었다. 오전 11시 남짓인데도 외진 곳에 자리잡은 식당엔 손님이 제법 많았다.

(Shooting Date/Time 2015-10-25 오전 11:05:44)

 

 

 - 물회에 밥을 꾹꾹 말아 소주까지 곁들인 점심을 먹은 뒤에 막걸리 두 병을 챙겨서 검봉산 산행에 나섰다.

 

 

 

 - 단풍이 듬성 듬성 보여서 아쉬웠지만 나름대로 운치있는 산이다.

 

 

 

 - 능선에 올라서니 파란 하늘과 바다가 맞닿았다. 날씨 참 좋다.

 

 

 - 오른편에 보이는 능선 끝이 정상인가 보다.

 

 

 - 왕복 4시간 코스여서 부담이 없다. 산 속엔 우리 일행 뿐이다.

    고사목이 서로 외로웠는지 짝지어 서 있다. 물론 살아서도 오랜 시간을 햇살과 바람과 눈비와 함께 했겠지 싶다.

 

 

 - 인간들이 억지로 심어놓은 억새가 아니라 자연스레 자라난 억새라 더욱 반갑다.

 

 

 - 사방을 둘러봐도 아득한 능선들밖에 보이지 않는 이곳에서 하늘거리는 억새는 몹시도 평화로워 보인다.

 

 

 - 가을은 이렇게 시나브로 깊어만 가고 있다.

 

 

 - 이 고사목은 죽은지 얼마나 됐을까, 앞으로 또 얼마나 오래 여기서 버티고 서 있을까. 아직은 몹시 늠름하다.

 

 

 - 고사목이 한두 그루가 아니다. 억새는 아주 전망좋은 곳에 자리잡고 있었다.

 

 

 - 산행으로 땀을 빼고 나서 찾은 곳은 가까운 '임원항' 회센터. 멍게가 정말 싱싱하다.

 

 

 - '문어'를 꼭 먹어야겠다는 소수의견이 있어 결국 이 녀석도 상에 올랐다. 많이 잡히지 않아 조금 비싼 편이었다.

 

 

 - 4.5kg에 달하는 큼지막한 자연산 광어까지 두 접시를 곁들이니 상이 몹시도 푸짐하다. 6인분에 총 22만원.

 

 

 - '검봉산 자연휴양림' 숙소는 시설이 참 좋았다. 널찍한 공간(방 1, 거실 1, 다락방 1)에 방값은 7만원 남짓.

 

 

 - 이튿날 아침 관동팔경의 하나인 '망양정'으로 가는 길에 울진 시내에서 신호를 기다리고 있다.

    평일 오전이라 한산하기만 하다.

(Shooting Date/Time 2015-10-26 오후 12:14:59)

 

 

 - 송강 정철의 '관동별곡'에 등장하는 바로 그 '망양정'이다. 정자에서 바라다보는 풍광이 몹시 아름답다.

 

 

 - 십 년 전쯤에 이곳에 첨 왔을 땐 '망양정' 주변이 온통 흙으로 된 마당이었었다.

   주위가 대나무숲으로 둘러싸여 있어서 고즈녁한 느낌이 좋았는데, 최근에 개발하고 난 뒤 조금 휑한 느낌도 든다.

 

 

 - 망양 앞바다. 백사장이 길어 여름엔 이곳 해수욕장에도 제법 많은 인파들이 몰리지만 지금은 인적이 드물다.

 

 

 - 파도를 보니 '울릉도행 카페리호'가 왜 운항을 취소했는지 알 만했다.

 

 

 - 바닷가에서 해물칼국수, 해물파전, 동동주로 든든하게 배를 채운 뒤에 '불영사'를 찾아 나섰다.

 

 

 - 불영계곡이 몹시 깊어서 그런지 '불영사 가는 길'에 마주친 단풍잎들도 희미하게 스며든 볕에 옅게 물든 듯하다.

 

 

 - 고즈녁하기만 한 산사에 스님 한 분이 채전을 돌보는 손길이 분주하다.

 

 

 - 비구니 사찰이어서 그런지 절이 참 아늑하고 소담스런 느낌이다.

 

 

 - 처마끝에 주렁주렁 달린 곶감이 늦은 오후의 가을햇살에도 눈부시게 빛난다.

 

 

 - 여느 사찰의 대웅전보다는 한결 아담하고 토대가 그다지 높지 않아 친근하게 느껴진다.

 

 

 - 산사를 찾는 사람들이 그리 많지 않아 그저 고요하기만 하다.

 

 

 - 저 멀리 꼬맹이 두 녀석이 개구진 걸음으로 사찰을 둘러본다.

 

 

 - 채전 옆에 딸린 고구마밭에선 수녀님 일행이 캐고 남은 고구마 이삭을 줍는 듯하다.

 

 

 - 아직은 따스하기만 한 이곳에도 금세 눈이 수북히 쌓이는 한겨울이 찾아오겠지 싶다.

 

 

 - 오늘 오후 일정은 '불영사 오가는 일'이 전부다.

 

 

 - 여기 쭈욱 머물면서 곶감도 좀 빼먹고 장독대에서 잘 익은 고추장과 된장을 곁들인 절밥도 얻어먹고 싶지만...

 

 

 - 날이 저물수록 인적이 점점 자취를 감춘다.

(Shooting Date/Time 2015-10-26 오후 4:26:03)

 

 

 - 불영사에서 나오는 길에 살펴 보니 우뚝 솟은 바위산 꼭대기에도 소나무들이 꿋꿋하게 자라나고 있다.

 

 

 - 불영계곡 꼭대기쯤에 자리잡은 '통고산 자연휴양림'. 단풍도 그득하고 숙박비도 저렴하다.

 

 

 - 오늘밤은 여기서~

 

 

 - 밤부터 내린 비 때문에 '영주 부석사 관람'은 취소하고 곧바로 '풍기 온천'으로 직행하기로 했다.

    불영계곡을 넘으니 산자락에 걸친 비구름이 단풍과 어울려 환상적인 풍경을 자아낸다.

(Shooting Date/Time 2015-10-27 오전 11:01:04)

 

 

 - 깊은 산자락에 위치한 간이역 '분천역'.

    한동안 언론에 너무 노출되어서 그런지 '무척이나 낭만적인' 풍경은 아니다 싶은 생각이 든다.

 

 

 - 온천욕으로 땀을 한껏 뺀 뒤에 찾은 곳은 '소백산 한우 맛'이 일품인 '영주축협 한우 프라자'

 

 

 - 고기를 굽기도 전에 '카스처럼'을 만들고 있는 일행들.

 

 

 - 숯불에 구워먹는 한우는 역시 생갈비살이 최고~

 

 

 - 두어 번 와 봤지만 그때마다 '기대한 그대로'였고 올해도 마찬가지였다.

 

 

글쎄, 좀 보라

글쎄, 좀 보라. 자기 머릿속에 처넣은 사상 때문에 맛있는 식사도 돌아다 볼 생각을 않으며, 이런 먹는 일 때문에 시간을 낭비해서야 되느냐고 불평하는 자의 잡념과 허상을 마음놓고 그대에게 말하도록 해 보라. 그대는 식탁의 모든 반찬들 중에 그의 영혼이 말하는 그 훌륭한 이야기보다 더 멋쩍은 것이 없다는 걸 알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의 사상과 의향은 그대의 스튜 요리만한 가치도 없음을 알게 될 것이다. 그것이 아르키메데스의 황홀경이라고 한들 무슨 소용이 있을 것인가?

 - 몽테뉴,『몽테뉴 수상록』 中에서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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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ualia 2015-11-02 23: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야아~! 정말 굉장히 좋으네요.
oren 님 덕분에 가을 느낌 만끽하네요.
사진 속 풍경들이 너무 아름답습니다.
그 가운데 “꼬맹이 두 녀석이 개구진 걸음으로 사찰을 둘러보는” 사진하고요,
“고구마밭에서 수녀님 일행이 캐고 남은 고구마 이삭을 줍는” 사진이
정말 맘에 드네요.
oren 님 심성이랄까 철학이랄까
이런 게 드러난 것 같기도 하고요~ ㅋ
앞으로도 멋진 사진 더 많이 부탁드려요.
정말 혼자 보기 아까워요.

oren 2015-11-03 16:20   좋아요 0 | URL
qualia 님 반갑습니다.
제 사진들 덕분에 가을 느낌을 만끽하셨다니 저도 사진을 올린 보람을 느낍니다. ㅎㅎ

불영사는 1994년에 제 아내랑 함께 가 본 뒤로 무려 21년 만에 다시 가 봤답니다. 그땐 아내랑 손을 맞잡고 징검다리를 밟으며 개울을 건넜던 기억이 나는데, 이번에 가 보니 엄청나게 큰 다리가 놓여 있더라구요. 어느새 강산이 두 번 바뀔 정도의 세월이 흘렀더군요.(2003년엔 초등학교 다니던 두 아이들을 데리고 불영계곡으로 여름 휴가를 갔었는데, 그 때 생각도 많이 나더군요.)

불영사에서 마주친 인상들 가운데 오래도록 남는 게 있다면 아마도 곶감, 꼬맹이 두 녀석, 채소밭과 여스님과 수녀, 노랗게 물든 은행나무 정도가 아닐까 싶네요. 변변찮은 사진을 좋게 봐주시고 긴 댓글까지 남겨주셔서 감사드려요. 어느덧 이번 가을이 그리 길게 남진 않았지만 남은 가을 만끽하시길 바랄께요~

yamoo 2015-11-03 22: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환상적인 사진들 정말 잘 봤습니다!
저는 겨울을 좋아해서 가을무렵 쯤 되면 괜히 기분이 좋아집니다. 그러다가 봄이 되면 무력해지곤 하지요.ㅎ
여름은 여름 나름의 매력이 있으니까요..

오랜님 덕에 여행 잘한 느낌입니다~^^
좋은 사진 감사히 잘봤습니다!

oren 2015-11-04 00:19   좋아요 0 | URL
오호... yamoo 님은 겨울을 좋아하시는군요. 정말 낭만적인걸요..
겨울에 무척이나 따뜻해 보이는 긴 코트와 목도리와 모자와 구두까지 멋지게 차려 입고, 하늘엔 눈발이 가득 휘날리고 거리엔 나뭇잎이 뒹구는 그런 거리를 저만치 앞서 가는 yamoo 님의 뒤를 살금살금 뒤따라 밟아보고 싶은 생각이 불현듯 드는군요. 그러고 보니 이제 겨울도 그리 멀지 않았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