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극적 공상은 심하게 탈선한 것에 이르기까지 그 나름대로 합리적이고, 그 광기와 같은 것에도 조리가 있다. 꿈을 꾸는 듯하지만 곧 사회 전체에 승인이 되고 이해가 되는 환각을 불러일으킨다. 이런 희극적 공상이 인간의 상상작용에 관해서, 특히 사회적·집단적·민중적인 상상의 작용에 관해서 어찌 우리에게 가르치는 바가 없겠는가? 실제의 삶에서 나온 예술과 닮은 그것이 어찌 예술과 삶에 대해서 우리에게 호소하는 바가 없겠는가?
- 앙리 베르그송, 『웃음』
* * *
고대 그리스 사람들에겐 해마다 열리는 축제가 국가적인 중대사였다. 그래서 그들은 전쟁이 벌어지는 긴박한 상황에 내몰릴지라도 축제를 생략하는 일은 상상할 수 없었던 듯하다. 축제가 열릴 때마다 빠지지 않는 행사가 있었으니 그건 바로 '연극 공연'이었다. 저 유명한 3대 비극작가의 '고대 그리스 비극'은 물론이고 '온갖 풍자와 저질스런 농담들이 가득찬 희극'도 바로 그때문에 쓰여지고 만들어진 것이었다. '그때 그 시절'을 자세히 알지 못하는 우리로서는 이를 두고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상반된 생각을 동시에 떠올릴 수도 있으리라.
어떻게 전쟁을 치르면서도 그들은 한가로이 축제를 열고 또 연극 공연까지 즐길 수 있었을까.
그래도 그들은 참으로 '삶'을 제대로 즐길 줄 아는 멋진 사람들이었구나.
그런데 그 까마득한 옛날에 공연된 작품들을 2,500번의 여름이 지난 뒤에야 겨우 '우리말로 번역된 글로서만' 접하는 게 고작인 우리로서는 궁금한 게 한두 가지가 아니다. 그 당시에도 물론 스타 작가들이 있었다는 건 능히 알겠는데 그와 더불어 '스타 배우'들도 당연히(?) 있었는지, 작품 제작에 많은 비용이 들었다고 하는데 무대장치와 합창단의 노래 실력은 과연 얼마나 훌륭했는지, 그 때 공연된 작품들 가운데 수많은 명대사들이 여러 문학 작품에 무척이나 자주 인용된 사실은 알겠는데, 과연 요즘과 달리 TV도 없고 라디오도 없고 인터넷도 없었던 그 당시에, 축제때 딱 한 번 공연된 드라마를 두고 사람들이 실생활에서 대화를 나눌 때 얼마나 자주 이야깃거리로 삼았는지 등등.
그런데 나로서는 그런 표면적인 문제들보다 훨씬 더 궁금한 게 있었으니 그건 바로 비극과 희극의 근본적인 차이점이 과연 어디에서 연유하는 것일까 하는 점이었다. 도대체 왜 고대 그리스 비극들은 우리들에게 그토록 익숙하고도 잘 알려진 데 비해 희극은 턱없이 낯설게만 느껴지는 것일까. 희극은 비극에 비해 도대체 얼마만큼이나 생소한가. 고대 그리스 희극을 읽는 내내 나는 이런 점들이 자꾸만 내 마음속을 맴도는 바람에 그걸 스스로 해명하지 않고 어물쩍 넘어가기가 그리 쉽지는 않으리란 걸 어렴풋하게나마 느꼈다.
아무리 고대 사람들이라고 해도 늘상 가슴이 찢어지고 눈물이 앞을 가리는 '엄청난 비극'에만 유난히 더 관심과 애정을 쏟고 즐겼을 리는 만무했을 테고, 그들도 때로는 희극 공연을 통해 눈물이 쏙 빠지도록 실컷 웃어도 보고 싶었을 것이다. 더군다나 희극을 보면서 '몹시도 미운 털이 박힌 놈들'을 실컷 골려주고 혼내주는 모습을 무대 위에서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그칠 줄 모르는 전쟁으로 피폐해진 마음을 달래기에는 더할 나위없이 좋았을 텐데 그들은 도대체 왜 '비극'에만 유난히 더 골몰하고 그 작품들을 칭송하기 바쁜 반면, 희극은 늘 꾸어다 놓은 보릿자루마냥 언제나 한켠으로 제쳐둔 느낌이 드는 것일까. 희극 작품들은 왜 비극 작품들에 비해 늘상 가벼워 보이고 심지어 초라하게까지 느껴지는 것일까.
그런 '의문들'에 대한 답을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까를 고민하고 있을 때, 그리고 고대 그리스 희극 작품들을 '낄낄거리거나 키득거리지도 못한 채' 심지어 낑낑거리며 읽고 있을 때 문득 머릿속을 스치는 책이 있었으니 그건 바로 '웃음'이라는 희한한 주제를 '드물지만 제대로' 고찰한 앙리 베르그송의 『웃음』이라는 책이었다.
그런데 그 프랑스 철학자가 쓴 『웃음』이라는 책이야말로 '웃음'을 머금으며 읽을 수 있는 책과는 너무나 거리가 먼 기묘한 책이었다. 정말 웃기는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웃음'을 지상과제로 삼는 '고대 희극 작품'을 읽으면서 도대체 '웃음'이 제때 터져나오지 못해 줄곧 끙끙거리며 그걸 읽었던 마당에, 그 '웃음'의 정체가 궁금해서 다시금 일부러 찾아 읽은 『웃음』이라는 책은 한술 더 떠서 '웃음'을 싹 가시게 만드는 책이라니... 이거야말로 갈수록 첩첩산중이고 오리무중이 달리 없었다.
그런데 베르그송이 쓴 그 묘하고도 미로 속을 헤매는 듯한 책을 읽어나갈수록 내가 가졌던 의문들이 하나둘씩 어둠속에서 슬며시 정체를 드러내듯이 마구 술술 풀려나오는 모습들을 확인하게 되면서 나는 비로소 무릎을 칠 듯한 묘한 기쁨을 느꼈고, 고대 그리스 희극 작품들을 읽으면서 제때 제대로 웃지 못해 속상해 하고 답답해 했던 그 정체 모를 감정들을 한층 더 분명하게 이해할 수 있었다. 그리고 바로 그 때문에 비로소 입가에 슬며시 '웃음'을 떠올릴 수 있었다. 참 일이 묘하게 풀렸던 셈이다.(어떤 책이든 그 책을 읽는 사람이 어떤 절박한 필요를 느끼는 '바로 그때'와 제대로 마주치게 되면 그 책을 읽는 재미가 확실히 몇 배로 더 증폭되는 듯하다.)
내 이야기가 어쩔 수 없이 파고 내려갈 수밖에 없었던 곁뿌리까지 너무 멀리 뻗어나간 듯하다. 다시 이야기를 본래 줄기로 끌고 오자. 고대 그리스 비극은 대체로 익숙한 데 비해 고대 그리스 희극은 그토록 낯선 이유가 도대체 어디에서 연유하는지를 찾아 나섰던 바로 그 '줄기' 말이다. 그 이유를 찾고 나면 비극은 오랫동안 깊은 각인을 남기고 희극은 자주 생겨났다가 금세 사라지고 마는 물거품과 닮았다는 사실이 고대는 물론 현재까지도 여전히 유효하다는 사실까지도 자연스레 해명될지 모른다.
고대 그리스 희극은 비극보다 우리에게 훨씬 낯설고 공감하기가 쉽지 않은데, 그 주된 이유 가운데 하나는 아마도 두 예술 장르가 지닌 본질적인 차이에서 기인하는 것임에 틀림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비극은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했듯이 '우리들 이상의 선인이거나 우리들 이상의 악인'을 모방의 대상으로 삼는 데 비해, 희극은 '보통 이하의 악인'을 모방의 대상으로 삼으니까 말이다. 쉽게 말하면 비극은 무엇보다도 우선 '매우 특별한 주인공들'을 대상으로 삼는다는 것이 희극과는 결정적으로 다르다. 그러니 비극이 어찌 '특별'하지 않을 것인가. 그래서 (베르그송도 특별히 강조했듯이) 비극작품과 희극작품은 '제목'부터가 확연하게 다른 것이다.『오이디푸스왕』,『안티고네』, 『결박된 프로메테우스』 등과 『구름』,『새』,『개구리』,『심술쟁이』,『삭발당한 여인』등등을 어찌 한 저울의 양쪽 접시에 동시에 올려 놓고 그 무게를 서로 비교해 볼 생각을 품을 수 있겠는가 말이다.
두 예술 장르 사이에 놓인 이런 중대한 차이를 명쾌하게 밝혀놓은 최초의 책이 바로 아리스토텔레스의『시학』이므로 이 대목에서 고대 그리스 철학자의 그 유명한 통찰을 인용하지 않을 도리가 없다.
모방의 대상
모방자는 행동하는 인간을 모방하는데 행동하는 인간은 필연적으로 선인이거나 악인이다. 인간의 성격이 거의 언제나 이 두 범주에 속하는 것은 모든 인간이 덕과 부덕에 의하여 그 성격이 구별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모방의 대상이 되는 행동하는 인간은 필연적으로 우리들 이상의 선인이거나, 또는 우리들 이하의 악인이거나, 또는 우리와 동등한 인간이다. (31∼32쪽)
희극은 앞서 말한 바와 같이 보통 이하의 악인의 모방이다. 이때 보통 이하의 악인이라 함은 모든 종류의 악과 관련해서 그런 것이 아니라 어떤 특정한 종류, 즉 우스꽝스런 것과 관련해서 그런 것인데 우스꽝스런 것은 추악의 일종이다. 우스꽝스런 것은 남에게 고통이나 해를 끼치지 않는 일종의 실수 또는 기형이다. 비근한 예를 들면 우스꽝스런 가면은 추악하고 비뚤어졌지만 고통을 주지는 않는다.(45쪽)
- 아리스토텔레스, 『시학』중에서
여기에 더해 '비극'은 또한 '희극'이 결코 넘보기 어려운 '멋진 선물'을 관객들이나 독자들에게 제공해준다. 이 또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에 최초로 담겼는데, 우리는 여기서 고대 그리스어로 쓰여진 그 고귀한 책을 직접 우리말로 옮긴 천병희 선생님의 '친절한 해설'을 통해 좀 더 쉽게 그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비극의 목적
아리스토텔레스는 비극의 목적은 특정한 쾌감을 산출하는 데 있다고 말하고 있다. 사실 그 이전에는 이러한 사실이 뚜렷하게 지적된 적이 없었다. 이런 의미에서 그는 문학에 심미적 가치를 부여한 최초의 문예 비평가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 그런데 비극이 제공하는 특정한 쾌감은 우리의 감정을 좋은 의미에서 구제해주는 선한 활동에 수반되는 쾌감이다. 왜냐하면 그렇지 않았더라면 우리의 감정은 위험하게 폭발할 수도 있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가 비극에서 얻는 쾌감은 위험 부담을 남에게 전가하고 얻는 경험의 쾌감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일상생활에서는 우리 자신이나 이웃에 불행과 고통을 주지 않고는 배출될 수 없는 격렬한 감정의 스릴을 비극이라는 안전판 위에서는 마음껏 즐길 수 있는 것이다. (14∼15쪽)
- 아리스토텔레스, 『시학』, <옮긴이 해설> 중에서
사정이 이렇다 보니 '희극'은 '비극'에 비해 자꾸만 여러모로 '스펙'이 딸리는 느낌을 지우기 어렵다. 더구나 희극은 본질적으로 '웃음'을 만들어내기 위한 작업인데, 그것은 아리스토텔레스도 지적했듯이 본질적으로 '저속함'이나 '풍자'와 '조롱'을 동반하가 쉽다. 그러니 예로부터 '고상함'을 중시하고 추구했던 많은 '점잖은 사람들'로부터 얼마쯤 외면을 받았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도 쉽게 떠올릴 수 있다.(물론 예외가 없는 건 아니다. 희극의 범주를 문학 일반으로까지 좀 더 확장시킨다면 말이다. 당장 소설『돈키호테』만 떠올려 봐도 충분하다. 수많은 문학가들이 격찬하고 베르그송도 당연히 거기에 적극 동조했듯이, 세르반테스가 지어낸 그 소설은 '웃음'을 이끌어내기 위해 끌어들이기 쉬운 온갖 '독소적인 요소들'을 거의 다 배제했음에도 불구하고 독자들로 하여금 끊임없이 '유쾌한 웃음'을 불러 내기 때문이다. 또한 단지 '웃음'만 끊임없이 불러내는 것이 아니라 최종적으로는 그 숱한 웃음 뒤에 남겨진 '이루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격한 감동'까지 숨겨놓았다는 점에서 『돈키호테』는 특별히 경이로운 작품이기도 하다. 그 거대한 감동을 좀 더 거창하게 표현하는 것이 허락된다면, 나는 돈키호테의 모험과 착각 속에서 '인류의 거대한 진화의 발걸음'을 엿보는 느낌이 든다고까지 말하고 싶다.)
어쨌든 파고들수록 '희극'이 비극에 비해 숙명적으로 떠안을 수밖에 없는 여러 불리한(?) 점들에 대해서도 빈틈없는 철학자인 아리스토텔레스가 어물쩍 넘어갔을 리는 만무하다. 내가 궁금해 했던 점들 가운데 하나인 '왜 희극은 비극보다 훨씬 더 푸대접을 받는 느낌이 드는가'에 대한 해명 또한 바로 여기서 손쉽게 발견되는 듯하다.
고상한 시인들과 저속한 시인들
시는 시인의 개성에 따라 두 가지 종류로 구분되었다. 고상한 시인들은 고상한 행동과 고상한 인물들의 행동을 모방한 반면 저속한 시인들은 비열한 자들의 행동을 모방했는데, 전자가 찬가(讚歌, hymnos)와 찬사(讚詞, enkomion)를 쓴 것처럼 후자는 처음에는 풍자시를 썼다. (38쪽)
- 아리스토텔레스, 『시학』중에서
익살꾼, 저속한 사람
우스갯소리를 하는 데 있어서 지나친 사람들은 '(저급) 익살꾼', '저속한 사람'으로 보인다. 그들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웃기려고만 하며, 고상한 것을 이야기하거나 조롱거리가 되고 있는 사람에게 고통을 주지 않는 것보다는 폭소를 만들어 내는 것에 더 마음을 쓴다. 반면에 자기 자신에 대해 어떤 우스운 이야기도 하지 않을 뿐 아니라 우스운 이야기를 하는 사람에 대해서도 못마땅해 하는 사람은 '촌스러운 사람', '경직된 사람'으로 보인다. 반면 적절하게 농담을 풀 수 있는 사람은 방향을 빨리 바꾸는 사람(eutropos)처럼(회전이 빠른 사람처럼) '재치 있는 사람(eutrapelos)'이라고 불린다. 이런 종류의 농담들은 품성상태의 움직임(kinēsis)으로 보여, 마치 신체가 신체의 움직임에 의해 판단되듯, 그렇게 품성상태 또한 이러한 움직임으로부터 판단되는 것이다.
그런데 웃을 만한 일은 도처에 있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마땅한 것 이상으로 놀이나 조롱하는 일을 즐기기에, 사람들은 저속한 익살꾼마저 즐거운 사람이라고 생각해서 '재치 있는 사람'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하지만 이 양자는 엄연히 다르며, 그것도 적지 않게 다르다는 것은 지금까지 논의해 온 바를 보면 분명하다.
- 『니코마코스 윤리학』 제4권, <제8장 재치> 중에서
고대 그리스 희극이 그에 비교되는 비극 작품들보다 우리에게 훨씬 더 낯설면서도 왠지 모를 가벼운 느낌으로 다가온다는 점들에 대해서는 대략 이 정도의 탐구만으로도 충분할 듯싶다. 물론 다른 뛰어난 책들에서 더 훌륭한 설명들을 찾아낼 수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그렇게까지 일을 크게 벌리는 건 내가 의도하는 바도 아니고 내 능력에서도 너무나 멀리 벗어나는 일이니 나로서는 상관할 일이 전혀 아니다.
그런데 고대 그리스 희극들이 일반적인 예상보다 훨씬 재미가 없는가 하면 꼭 그렇게만 볼 일도 아닌 듯하다. 물론 그 작품들이 당대 사람들에게는 '두말할 필요도 없이' '엄청난 재미'를 주는 작품들이었음에 틀림없을지라도 '기나긴 시대'를 건너뛴 탓에 어느새 우리에게는 저절로 낯설게 변하고 말았으며, 그래서 당연히 '우리가 느끼지도 못하고 깨닫지도 못하는 웃음'이 거기에 너무 많이 숨어있다는 사실을 늘 잊지 않는다는 전제가 있다면 말이다. 입장을 조금만 바꿔놓고 생각해 봐도 그점은 명백하다. 오늘날 우리들의 웃음보를 아주 손쉽게 터트리는 온갖 '웃기는 개그들' 가운데 과연 얼마쯤이 몇 백년 후에 태어날 우리의 후세들까지도 '제때 제대로' 속시원히 웃길 수 있을까.
희극적 효과는 한 언어에서 다른 언어로 번역할 수 없는 것
희극적 효과는 한 언어에서 다른 언어로 번역할 수 없는 것으로, 한 사회의 습속이나 관념과 연관되어 있음이 몇 번이고 강조되지 않았는가. 그러나 이 이중의 사실이 얼마나 중요한지 몰랐기 때문에 지금까지 사람들은 익살 속에서 정신이 흥겨워하는 단순한 호기심과, 다른 인간 활동과는 무관한 유별나고 고립된 현상만을 보아왔다. 그래서 '관념들 속에서 인정된 하나의 추상적 관계', 즉 '지적 대조'라든가 '감각적 부조리' 등으로 희극적인 것의 정의를 내리는 것이다. 이러한 정의는 비록 실제 희극적인 것의 온갖 형태에 들어맞는다고 해도, 왜 그것이 우리를 웃게 하는지를 조금도 설명해 주지 못한다.
- 앙리 베르그송, 『웃음』 중에서
이렇듯 온갖 난관들이 잔뜩 버티고 있는 고대 그리스 희극 작품들을 우리가 애써 읽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 작품들을 찾아 읽으면 우리가 너무나 오랫동안 잊고 지내왔던 '잃어버린 웃음'을 되찾을 가능성이라도 있다는 말인가. 꼭 그렇지만은 않더라도 고대의 희극 속에서 발견하는 소득이 결코 사소할 수는 없다. 나와 같은 평범한 독자가 '고대 그리스 희극 작품'을 읽는 독해 능력이 너무 뒤떨어진다고 하더라도 그걸 나무랄 사람은 없으리라는 확신을 가지고 내가 얻은 수확을 몇 가지만 얘기하자면 이렇다.
우선, 무엇보다도 고대인들의 생활상을 생생하게 느낄 수 있다는 점이 좋았다. 희극 작품이 아니었다면 결코 쉽게 발견하기 어려운 '고대인들의 민낯'을 비로소 아주 가까이에서 생생하게 들여다보는 느낌이 든다고나 할까. 희극 속에서는 고대 그리스 비극 작품이나 역사책 혹은 철학책에서는 좀처럼 발견하기 힘든 '평범한 일상'이 고스란히 드러나 있다. 그들 역시 '똥이나 오줌 등 배설물'을 입에 올리며 낄낄대고, 그들 역시 '남녀간의 교접을 둘러싼 온갖 음담패설'을 주고 받으며 즐거워했던 것이다.
스티븐 핑커는 『마음은 어떻게 움직이는가』라는 책에서 '인간의 성(性) 문제'에 대해 매우 흥미로운 '진화심리학적 통찰'을 보여준 적이 있었는데, 그 가운데 특히 인상적인 대목 하나가 지금 문득 떠오른다. 이 짧은 문장만으로도 '성(性)을 둘러싼 웃음'이 얼마나 다채롭게 각색될 수 있을지를 능히 짐작케 한다.
체스터필드 경은 성에 대해 "즐거움은 일시적이고, 자세는 우스꽝스럽고, 비용은 지독하다."고 말했다.
내가 발견한 두 번째 소득이라면 고대인들 역시 스티븐 핑커가 말했던 이른바 '위엄의 격하'를 통해 유난히 즐거워했다는 점이다. 아리스토파네스의 대표작이라 부를 만한『구름』은 심지어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철학자로 칭송받는 인물인 소크라테스를 주인공으로 내세운다. 연극이 공연될 당시만 해도 '멀쩡히 살아있는 소크라테스'는 희극 속에서 '말장난으로 남에게 진 빚 떼어먹는 언술을 가르치는 사이비 선생' 정도로 격하된다. 그렇게 훌륭한 인물을 그토록 실랄하게 풍자하고 조소하고 깎아내릴 수도 있다는 사실 자체가 믿기지 않을 정도이다. 그는 또한 당대 최고의 권력자였던 '크레온'을 틈날 때마다 여러 작품 속에 등장시켜 끊임없이 비난하고 비웃을 뿐만 아니라 당대 최고의 비극 시인 가운데 한 사람이었던 에우리피데스까지도『개구리』라는 작품 속에 등장시켜 그가 지닌 '위엄'을 깎아내리며 즐거워한다. 이런 점들을 두루 살펴 보자면 고대 그리스 사람들이야말로 예술 창작에 있어서나 실생활에 있어서나 '예속'을 몹시도 싫어했던 기질 답게 아무런 거리낌도 없이 '표현의 자유'를 만끽했던 듯하다.
위엄의 격하
위엄의 격하는 또한 성적이고 외설적인 유머의 보편적인 매력을 뒷받침하는 기초다. 전 세계 대부분의 위트는 알공킨 원탁모임보다는《애니멀 하우스》에 더 가깝다. 샤농은 야노마뫼족의 가계조사를 시작할 때, 저명한 사람들의 이름을 언급하지 않는 그들의 터부 때문에 어려움을 겪었다. 샤농은 피조사자들에게 저명한 개인의 이름과 그 친척들의 이름을 귀에다 속삭이라고 요청했고, 그 때문에 어색한 과정을 몇 번씩 반복한 후에야 이름을 정확히 들을 수 있었다. 이름이 거론된 사람이 샤농을 노려보고 구경꾼들이 킥킥대고 웃으면 샤농은 안심하고 그의 진짜 이름을 기록했다. 몇 달에 걸쳐 정성스럽게 가계를 정리한 후 이웃 부락을 방문하던 중에 샤농은 자랑삼아 그곳 추장 부인의 이름을 불쑥 꺼냈다.
순간 싸늘한 침묵이 흘렀고 잠시 후 온 마을이 걷잡을 수 없는 웃음, 목메임, 헐떡거림, 아우성에 빠졌다. 사람들 앞에서 나는 비사시테리의 추장이 "털 많은 성기'와 결혼했다고 생각한 사람이 되어 버렸다. 그뿐 아니라 나는 추장을 '기다란 음경'으로, 그의 형제를 '독수리 똥'으로, 그의 한 아들을 '병신 같은 놈'으로, 그의 딸을 '방귀 냄새'로 부르고 있었다. 다섯 달 동안 심혈을 기울여 가계조사를 한 결과가 터무니없는 헛소리에 불과했다는 사실을 깨닫자 관자놀이에 피가 솟구쳤다.
- 스티븐 핑커, 『마음은 어떻게 움직이는가』중에서
내 몸에 밴 고약한 습성이 좀처럼 떠날 줄 모른다. 그래서 내가 쓰는 글이 자꾸만 엉뚱한 데로 달아나려고 헐떡거리고 있다. 정말 이쯤에서 마무리짓자. 비록 할 말은 많이 남았지만 말이다. 그래도 마지막으로 덧붙일 게 하나 있다면 그건 바로 여태껏 '고대 그리스 희극'을 구경도 못해 본 독자가 제법 있으리라는 주제넘은 확신을 품으며 그들을 위해 '고대 희극' 한 대목을 소개하는 일이다. 내가 여기에 끌어오고 싶은 작품은 『뤼시스트라테』이다. 먼저 천병희 선생님의 친절한 작품 소개부터 들어 보자.
기원전 411년 아테나이인들 사이에서는 심각한 위기감이 감돌았으니, 시칠리아 원정 함대는 기원전 413년 괴멸하고, 아테나이 제국에 종속되어 있던 동맹국들은 반기를 들기 시작했으며, 스파르테는 페르시아와 유리한 동맹을 맺었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아테나이인들은 나라가 당장 붕괴할 위험에 빠진 것은 아니라 해도, 큰 위험을 감수하지 않고 타협을 통하여 평화조약을 맺고 싶어 했는데, 이 희극은 아테나이인들의 이같은 염원을 반영한 것이다. ······
남자들이 전쟁을 종식시킬 가망이 없어 보이자, 뤼시스트라테는 여자들이 사태를 장악하고 평화조약을 체결하도록 강요해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러기 위해서는 첫째, 남편들에게 교접을 거부하는 성(性)파업을 하고, 둘째, 아크로폴리스를 점령하여 그곳의 파르테논 신전에 적립해둔 전쟁 기금을 쓸 수 없게 함으로써 남자들이 전쟁을 수행할 수 없게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전쟁이 너무나 지겨워 여자들이 '섹스 파업'을 일으킨다는 내용을 담은 이 유명한 희극은 오늘날 '전쟁에 신물이 난' 여자들이 진짜로 '섹스 파업 시위'를 벌이는 바람에 2,500년 만에 다시금 주목을 받은 '놀라운 경력'을 자랑한다. 오랜 세월이 지나도 진짜로 일어날 법한 일을 희극으로 꾸며낼 수 있는 작가의 상상력은 얼마나 대단한가. 어쨌든 '섹스 파업'이라는 몹시도 흥미로운 사태를 둘러싸고 벌어지는 일들이 '공연윤리심의'조차 거치지 않은 듯 '수위높은 적나라한 대사'를 통해 그 당시 국가적 종교행사때 대중들에게 공연되었다는 사실이 흥미롭고 놀랍기만 하다.
이 작품의 도입부에 등장하는 '섹스 파업 제안 설명'은 대략 이렇게 진행된다.
뤼시스트라테 여인들이여, 평화롭게 살도록 남편들을 강요할 요량이라면
우리는 앞으로 삼가야 해요.
칼로니케 뭐를요? 말해봐요.
뤼시스트라테 그렇게 하겠어요?
칼로니케 그렇게 할게요. 우리가 죽는 한이 있더라도 말예요.
뤼시스트레테 앞으로 우리는 남근을 삼가야 해요.
(여자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하면서 몇 명은 떠나려고 돌아선다.)
왜들 돌아서는 거죠? 어디로 가려는 거죠?
왜들 입술을 깨물고 머리를 흔드는 거죠?
왜들 안색이 변하며, 왜들 눈물을 흘리세요?
하겠어요, 못하겠어요? 왜들 망설이죠?
칼로니케 난 못해요. 전쟁이야 계속되든 말든.
뮈르리네 제우스에 맹세코, 나도 못해요. 전쟁이야 계속되든 말든.
뤼시스트라테 이 넙치야, 그따위 말을 하다니! 방금 자신의 몸을
두 쪽으로 자르겠다고 하더니.
칼로니케 다른 것이라면 뭐든 그대가 원하는 대로 하겠어요.
불속에라도 뛰어들겠어요. 남근을 삼가느니 그편이 낫겠어요.
세상에 그만한 것은 없으니까요, 뤼시스트라테.
뤼시스트라테 (다른 여자 쪽으로 돌아서며)
그대는 어때요?
다른 여자 나도 불속에 뛰어들래요.
- 아리스토파네스, 『뤼시스트라테』120∼137행
처음에는 이렇듯 영 마음이 내키지 않았던 여인들도 결국 '전쟁 대신 평화'를 얻기 위해 하는 수 없이 '대(大)를 위해 소(小)'를 희생하기로 맹세한다. 그 장면 또한 여간 웃기는 게 아니다. 선창자의 말을 앵무새처럼 반복하는 모습은 마치 운동 경기에 참여하는 지역 대표들의 '선수 선서'를 연상시키는 듯해서 더욱 재미있다.
뤼시스트라테 자, 람피토, 그리고 모두들 술잔을 잡아요. 그리고 누구
한 명이 여러분을 위해 내가 하는 말을 따라 하세요.
그러면 여러분은 그걸 맹세하고 확인하세요.
(엄숙하게) '애인이든 남편이든 남자는 어느 누구도···.'
칼로니케 애인이든 남편이든 남자는 어느 누구도···.'
뤼시스트라테 '꼿꼿이 세우고 내게 접근하지 못하게 하겠습니다.' 따라 해요!
칼로니케 '꼿꼿이 세우고 내게 접근하지 못하게 하겠습니다.'
맙소사! 난 무릎이 꺾일 것만 같아요, 뤼시스트라테!
뤼시스트레테 '집에서 나는 숫처녀처럼 지내겠습니다.'
칼로니케 '집에서 나는 숫처녀처럼 지내겠습니다.'
뤼시스트라테 '사프란색 가운을 입고 화장을 한 채.'
칼로니케 '사프란색 가운을 입고 화장을 한 채.'
뤼시스트라테 '남편이 나를 몹시 열망하도록 하겠습니다.'
칼로니케 '남편이 나를 몹시 열망하도록 하겠습니다.'
뤼시스트라테 '나는 결코 자진하여 내 남편의 요구에 응하지 않겠습니다.'
칼로니케 '나는 결코 자진하여 내 남편의 요구에 응하지 않겠습니다.'
뤼시스트레테 '내가 싫다는데도 그이가 완력으로 강요한다면···.'
칼로니케 '내가 싫다는데도 그이가 완력으로 강요한다면···.'
뤼시스트라테 '나는 재미없게 해주고 요분질도 하지 않겠습니다.'
칼로니케 '나는 재미없게 해주고 요분질도 하지 않겠습니다.'
뤼시스트라테 '나는 천장을 향하여 다리도 들지 않겠습니다.'
칼로니케 '나는 천장을 향하여 다리도 들지 않겠습니다.'
뤼시스트라테 '나는 치즈 강판에 새겨진 암사자처럼 엉덩이를 들고 웅크리지도 않겠습니다.'
칼로니케 '나는 치즈 강판에 새겨진 암사자처럼 엉덩이를 들고 웅크리지도 않겠습니다.'
- 아리스토파네스, 『뤼시스트라테』209∼232행
앞에서도 이미 언급했듯이 아리스토파네스는 넓은 의미의 '정치'에 너무 깊이 개입하는 바람에 당대의 권력자들 뿐만 아니라 소크라테스와 에우리피데스 같은 위대한 인물들까지도 무차별로 희극의 주인공으로 끌어들여 인신공격을 일삼았다. 게다가 노골적인 성행위와 배설물을 너무 자주 언급하는 바람에 그는 세상을 떠나기도 전에 메난드로스로 대표되는 '앗티케 신희극'인 '풍속 희극'에 주도권을 내주고 밀려 난다. 그렇지만 그의 위상은 그런 정도의 흠결과 한 때의 인기 상실로는 결코 깎아내리기 힘들 만큼 '희극'에서 차지하는 위상이 드높기만 하다.
그러나 일단 그의 생기발랄하고 재기 넘치는 작품을 읽어보면 아리스토파네스가 세계 문학사상 가장 위대한 희극작가라는 데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그래서 랑프리에르(John Lemprière)는 『고전 사전』(Classical Dictionary)에서 '아리스토파네스는 세계 문학사상 가장 위대한 희극작가이다. 그에 비하면 몰리에르(Molière)는 무뎌(dull) 보이고, 셰익스피어는 어릿광대 티가 난다(clownish)"고 말하는 것이다.
- 아리스토파네스, 『아리스토파네스 희극전집 1』, '옮긴이 서문' 중에서
오래 전부터 넘보던 '고대 그리스 희극'을 최근에 어렵사리 읽긴 했지만 그래도 보람이 적지는 않았다. 특히 웃기는 작품들을 읽으면서도 '수많은 주석'을 살피느라 몹시 바쁘고, 기껏 주석까지 꼼꼼히 찾아 읽어도 '웃음이 제때 잘 터져 나오지 않는 아쉬움' 또한 달랠 길이 없었는데 이런 고충 때문에 이번에 베르그송의 『웃음』을 찾아 읽게 된 건 여간 보람 있는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고대 그리스 희극에 대해서는 대략 이쯤에서 마무리하자. 이 글을 쓰자니 문득 어제 TV를 통해 잠깐 봤던 <웃찾사> 프로그램의 인기 코너인「서울의 달」이 생각난다. 촌사람이 서울에 올라와 살기도 참 고달프지만, 21세기에 사는 우리가 2,500년 전에 쓰여진 고대의 희극 작품을 읽는 일도 결코 쉽지는 않다 싶다. 그래도 이런 작품들을 통해 '옛 사람들의 해학'을 아주 바싹 다가가 살펴보는 일은 여간 흥미롭지 않다. 인간의 '희로애락'이 시대와 장소를 달리한다고 그리 크게 바뀌는 것은 아니니까 말이다. '경상북도 무성리에서 올라온 내 일년 밑에 후배'의 말로 마무리하자.
'사람 사는 거 다 똑같은 거 아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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