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묵함

말함의 다른 본질적 가능성의 하나인 침묵함도 동일한 실존론적 기초를 가지고 있다. 서로 함께 말하는 가운데 침묵하고 있는 사람이 말을 끝없이 하는 사람보다 더 본래적으로 "이해하게끔 할" 수 있다. 다시 말해서 이해를 형성할 수 있다. 어떤 것에 대하여 말을 많이 한다고 해서 이해가 증진된다는 보장은 조금도 없다. 오히려 그 반대로, 장황하게 말함은 이해된 것을 은폐하고 거짓 명료성 속으로, 다시 말해서 진부함의 몰이해로 이끈다. 그렇지만 침묵함이 벙어리로 있음은 아니다. 벙어리는 오히려 거꾸로 "말하려는" 경향을 가지고 있다. 벙어리는 그가 침묵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하지도 않았을 뿐만 아니라, 그에게는 애당초 그런 것을 증명할 가능성조차 없다. 그리고 천성적으로 말수가 적은 사람도, 벙어리와 마찬가지로, 그가 침묵하고 있고 침묵할 수 있음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 아니다. 아무 말도 하지 않는 사람은 주어진 [결정적] 순간에 침묵할 줄도 모른다. 오직 진정한 말함에서만 본래적으로 침묵함도 가능한 것이다. 현존재는 침묵할 수 있기 위해서 무엇인가 말할 것이 있어야 한다. 다시 말해서 자기 자신에 대하여 풍부하게 열어밝힐 처지에 있어야 한다. 그때에 과묵함[침묵하고 있음]은 [자기 자신을] 드러내고 "잡담"을 눌러버린다. 침묵하고 있음은 말함의 양태로서 현존재의 이해가능성을 근원적으로 분류파악하여, 이 이해가능성에서부터 진정한 들을 수 있음과 투명한 서로 함께 있음이 생기게 한다.


애매함

누구나 다 무슨 일을 당면하고 있고 무엇이 일어나고 있는지를 알고 이야기할 뿐만 아니라, 또한 누구나 다 이제 일어나야 할 일이 무엇이고, 아직 당면하고 있지는 않지만, "본래" 했어야만 했던 것은 무엇인지에 대해서 말할 줄을 이미 알고 있다. 누구나 다 처음부터 이미, 다른 사람이 무엇을 예감하고 느끼는지를 예감하고 감지하고 있었다. 이렇게 흔적을 따라다니는 것, 그것도 풍문에 따라서 그렇게 하는 것은 - 진짜로 사실의 "흔적을" 찾은 사람은 거기에 대하여 이야기하지 않는 법이다 - 애매함이 현존재의 가능성을 제공해주는 가장 위험한 방식인데, 그렇게 해서 애매함은 이미 현존재의 가능성을 무력화시켜버리기 때문이다. ······

공공적인 해석되어 있음의 애매함은 앞질러 얘기하는 것과 호기심으로 예감하는 것을 본래적인 사건인 것처럼 내놓고 실행과 행위는 추후의 일이며 하찮은 것으로 낙인찍어버린다. 그러기에 '그들' 속에 머물러 있는 현존재의 이해는 자신의 기획투사에서 끊임없이 진정한 존재가능성을 잘못 보고 있다. 현존재는 언제나 애매하게 "거기에" 존재한다. 다시 말해서 서로 함께 있음의 공공의 열어밝혀져 있음 안에, 가장 요란한 잡담과 가장 솜씨 좋은 호기심이 "사업"을 관장하고 있는 곳에, 일상적으로는 모든 것이 일어나고 있지만 근본적으로는 아무 것도 일어나고 있지 않은 곳인 거기에 존재한다.

이러한 애매함이 호기심에게는 언제나 그것이 찾는 것을 건네주고, 잡담에게는 마치 그 속에서 모든 것이 결정되는 듯한 가상을 마련해준다.

이러한 세계-내-존재의 열어밝혀져 있음의 존재양식이 서로 함께 있음 그 자체도 철저히 지배한다. 타인은 우선 사람들이 그에 관해서 들은 것, 사람들이 그에 대해서 말하고 알고 있는 그것을 근거로 "거기에" 존재한다. 잡담은 우선 근원적인 서로 함께 있음 사이로 끼어든다. 누구나 먼저 우선 타인의 눈치를 살펴서, 그가 어떻게 행동하는지, 그것에 대하여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를 본다. '그들' 속에 서로 함께 있음은 절대로 폐쇄되어 무관심하게 옆에 나란히 있는 것이 아니고, 긴장 속에 애매하게 서로를 살피며, 몰래 서로 엿들으며 있는 것이다. 서로를 위한다는 가면 아래 서로를 적대하는 연출을 진행하고 있다.

이때 주목해야 할 것은 애매함이 위장과 왜곡을 명시적으로 의도한 데에서 비로소 생기는 것이 절대로 아니라는 것, 개별 현존재가 애매함을 비로소 야기시켜놓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애매함은 이미 하나의 세계 안에 내던져져 있는 서로 함께 있음인 그런 서로 함께 있음 속에 들어 있다. 그런데 이 애매함이 공공적으로는 은폐되어 있으며, 사람들
은 이러한 해석이 '그들[자신들]'의 해석되어 있음의 존재양식에 해당된다는 사실에 대해서 언제나 저항할 것이다. 이러한 현상의 설명을 '그들'의 동의를 얻어서 확증하려고 한다면, 그것은 [대단한] 오해일 것이다.


 

* * *


8월이 어느덧 다 지나간다. 이메일함에 잔뜩 쌓이는 '쓸데없는' 편지들을 지우는 것도 일과 중의 하나가 된지 이미 오래다. 수북히 쌓인 이메일함을 열어볼 때마다 그래도 '혹시나' 놓쳐서는 안 될 이메일은 없는지 살펴보지만 늘 버려야 할 쓰레기들이 대부분이다. 그나마 8월의 끄트머리에 받은 편지 한 통은 열어 읽어본 보람이 없지 않다. 가만 살펴보니 올해의 시간도 이미 후다닥 꽁무니를 내빼기 시작한 모양이다. 고작 해가 짧은 몇 개월을 남겨둔 지금, 시나브로 성큼성큼 다가오는 '청명한 가을'이 새삼 궁금하다.


8월 Han's Letter - 침묵도 커뮤니케이션이다

내 직업은 대부분 말로 이루어진다. 강의하고, 자문하고, 코칭하고, 인터뷰하는 게 일이다. 모두 말이 매개체다. 말 하지 않고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 물론, 글 쓸 때는 떠들지 않는다. 그런 연유로 내가 말이 많을 걸로 오해한다. 무척 사교적인 사람으로 착각한다. 기회만 되면 얘기를 늘어놓을 것으로 생각한다. 그렇지 않다. 직업이 그렇기 때문에 그 외의 시간은 조용히 지내려 애를 쓴다. 의도적으로 혼자만의 시간을 확보하고 그 시간을 즐긴다. 떠드는 시간만큼 혼자만의 시간을 가지려고 애를 쓴다. 어떨 때는 밥도 혼자 먹고 영화도 혼자 보고 산책도 혼자 한다. 어떤 사람은 어떻게 밥을 혼자 먹느냐고 의아해한다. 자신은 혼자 밥 먹는 게 싫어 아예 굶는다는 사람도 있다.

혼자 밥 먹지 말라는 책까지 나왔다. 그럴 수 있다. 근데 그런 사람들은 혼자 밥 먹는 즐거움을 모르는 사람들이다. 같이 밥 먹는 즐거움도 있지만 혼자 밥 먹는 즐거움도 있다. 혼자 밥을 먹으면 세상이 편하다. 남 눈치 볼 것도 없고, 억지로 말 할 필요도 없다. 그냥 밥 먹는 일에만 집중하면 된다. 내 마음대로 신문을 봐도 누가 뭐라 하지 않는다. 혼자 있으면 나 자신과 마주하게 된다. 영혼이 맑아지고 내 삶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새로운 시상도 떠오르고 반성도 하게 된다. 말을 잘 하기 위해서는 그 만큼 말하지 않는 혼자만의 시간이 필요하다.

얼마 전 국가적으로 정전훈련을 실시했다. 정전을 가상한 훈련이다. 그걸 보면서 정전훈련 대신 침묵 훈련을 해보면 어떨까 하는 상상을 혼자 했다. 간단하다. 시간을 정해 그 시간 동안 모든 사람들이 입을 다무는거다. 절대 얘기하면 안 된다. 개인 뿐 아니라 모든 관공서와 회사에서도 일체 얘기를 하면 안 된다. 회의도 안 되고, 연설도 안 된다. 이유 불문하고 모두 입을 다물어야 한다. 전화도 안 된다. 모든 라디오와 텔레비전 방송도 중지한다. SNS도 하지 않는다. 어떤 말도 하지 말아야 한다. 과연 어떤 일이 벌어질까? 이를 몇 분 하는 게 아니라 중동사람들의 라마단 기간 금식처럼 일주일쯤 한다면 어떨까? 상상할 수 없는 혼란이 올 것이다. 불편할 것이다. 하지만 세상이 정말 고요하고 평화로울 것이다.

“우리 회사는 너무 말이 많아요.”란 말을 가끔 듣는다. 쓸데없는 말 때문에 힘들다는 얘기다. 우리 사회가 바로 그렇다. 말이 많다. 많아도 너~무 많다. 따지고 비방하고 험담하는 말, 쓸데없는 말, 시기하고 질투하는 말, 거짓말 등등. 아무 도움이 안 되는 말이다. 들을 필요도 알 필요도 없는 말이다. 그렇게 많이 떠드는 것이 무슨 효용이 있을까? 모든 것이 그러하듯 너무 넘치면 문제가 된다. 특히, 말은 그렇다. 빛이 있어야 그림자가 있고 슬픔이 있어야 기쁨이 있듯이 침묵이 있어야 말이 귀하고 아름답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종종 침묵해야 한다. 침묵할 수 있어야 한다. 하고 싶은 말이 있어도 참을 수 있어야 한다. 침묵도 커뮤니케이션의 한 방법이다. 어떨 때는 백 마디 말보다 침묵이 낫다. 강의를 할 때도 그렇다. 강의를 할 때 나는 침묵으로 시작한다. 앞에 서서 그냥 있는다. 가만히 청중을 바라본다. 조금 지나면 시끄럽던 강의장이 조용해진다. 청중이 나를 보기 시작한다. 그때 입을 열면 된다. 효과적으로 강의를 시작할 수 있다.

중국 명나라 문인 진계유가 쓴 “뒤에야” 란 시를 보면 침묵의 중요성을 알 수 있다. “고요히 앉아본 뒤에야 평상시 마음이 경박했음을 알았네. 침묵을 지킨 뒤에야 지난날 언어가 소란스러웠음을 알았네. 일을 돌아본 뒤에야 시간을 무의미하게 보냈음을 알았네. 문을 닫아건 뒤에야 앞서의 사귐이 지나쳤음을 알았네. 욕심을 줄인 뒤에야 이전의 잘못이 많았음을 알았네. 마음을 쏟은 뒤에야 평소에 마음 씀씀이 각박했음을 알았네.” 여러분들은 어떤가? 말이 많은가, 아니면 말이 없는 편인가? 가끔 침묵의 시간을 갖는가? 아니면 침묵의 시간을 못 견뎌하는가? 혹시 등산 중에도, 사우나 할 때도 라디오 소리라도 들어야 마음의 평화를 느끼는가?

번잡한 사람을 좋아하지 않는다. 계속해서 뭔가를 떠들고 주장하는 사람도 가까이 하지 않는다. 혼자 있는 시간을 못 견뎌하는 사람은 높이 평가하지 않는다. 다 정신없는 사람들이다. 그런 사람의 말과 행동은 믿을 게 못 된다. 말은 침묵에서 나와야 한다. 침묵을 배경으로 하지 않는 말은 소음이다. 인간은 침묵을 통해 성장한다. 침묵 속에서 깊이 생각할 수 있고 내 존재를 자각한다. 이때 비로소 자기언어를 갖고 자기 말에 책임을 느낀다. 처칠은 시간만 나면 방음장치가 된 자기 방에 홀로 있기를 좋아했다. 드골도 집무실에 들어가면 전화기가 울리지 못하도록 했다. 수도자들은 주기적으로 아무 말도 하지 않는 피정의 시간을 갖는다. 입을 다물어야 귀가 열린다. 침묵을 거쳐야 생각을 정리할 수 있다. 그래야 제대로 된 말을 할 수 있다. 침묵도 커뮤니케이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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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클 2013-08-30 22: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진계유의 시, 참 좋네요. 전문인지 모르겠지만...
맨 위의 '침묵함'에 음영표시한 글귀도 좋구요. 살 책이 한 권 더 늘었네요. ^^

oren 2013-08-31 00:05   좋아요 0 | URL
'한 오백 년' 전쯤 살았던 인물인 진계유(1558 ~ 1639)의 연후(然後)라는 시인데 인용한 게 전문이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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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계유는 장쑤성[江蘇省] 화팅[華亭] 출생이다. 어려서부터 글재주가 뛰어났는데, 커서 동기창(董其昌)과 함께 명성을 떨쳐 《금병매》를 지은 왕세정(王世貞)으로부터 존경을 받았다. 그러나 29세 때 유자(儒者)의 의관을 태워 버리고 관도(官途)의 뜻을 포기한 뒤, 쿤산[崑山] 남쪽에서 은거하였다. 동림서원(東林書院)의 고헌성(顧憲成)으로부터 초청을 받았으나 응하지 않고, 82세로 생애를 마칠 때까지 풍류와 자유로운 문필생활로 일생을 보냈다. 그의 박식을 드러낸 저서에 《보안당비급(寶顔堂秘笈)》 《미공전집(眉公全集)》이 있다.

페크pek0501 2013-09-01 12: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입을 다물어야 귀가 열린다. 침묵을 거쳐야 생각을 정리할 수 있다. 그래야 제대로 된 말을 할 수 있다. 침묵도 커뮤니케이션이다." - 그런 것 같아요.
좋은 글이 많군요. 님 덕분에 공부합니다.

oren 2013-09-03 17:18   좋아요 0 | URL
저도 '8월의 편지' 받아보고 나서 '좀 더 침묵해야 겠구나' 싶은 생각을 가졌답니다.
좋은 글이라 생각되어 다른 책에서 읽은 구절까지 굳이 덧보태게 되네요. ㅎㅎ

yamoo 2013-09-02 12: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항상 오렌님께서 올려주시는 인용글은 정말 좋습니다. 야클님께서 보신 글과 페크님께서 보신글에 저두 당연히 눈이 같네요~ 하이데거의 글을 보니 피카르트의 침묵에 대해서...에서의 내용과 어찌 그리도 흡사한지 놀라네요. 인용해주신 부분 정말 감사합니다!

oren 2013-09-03 17:24   좋아요 0 | URL
막스 피카르트의 『침묵의 세계』라는 책 소개글을 보니 하이데거의 책 내용과 너무나 흡사한 데가 많네요.
언제 기회가 되면 저도 한번 피카르트의 책을 읽어보고 싶네요. yamoo님의 댓글 덕분에 새로운 책과 저자를 알게 되어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