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찰스 다윈도 진화론을 강자의 논리로 둔갑시킨 ‘다윈주의’의 피해자였다. 다윈은 ‘종의 기원’이 나오자 친구에게 보낸 편지에서 “내가 힘이 곧 정의임을 증명했고, 따라서 나폴레옹도 옳고 사기꾼 상인들 모두가 옳을 수 있다는 것을 보였다고 얘기하더군”이라며 당혹스러워했다. 그는 인간이 동물적 속성을 이어받아 진화한 결과이며, 진화 과정에는 경쟁(이기주의)과 협력(이타주의)이 공존한다고 적시했다. ‘적자생존’을 경쟁 승리자의 윤리적 근거로 왜곡한 ‘사회적 진화론’은 다윈과 무관한 다윈주의인 셈이다.

애덤 스미스도 광대무변한 사상의 폭만큼이나 오독(誤讀)되기 쉬운 사상가다. 그는 ‘국부론’에서 이기심이 경제행위의 동기며, 그것이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 공공복지에 기여하게 된다고 설파했다. 이것이 자유주의자들이 금과옥조로 떠받드는 스미스의 반쪽이다. 스미스는 국부론보다 17년 앞서 쓴 ‘도덕감정론’에서 “이기적 경제인의 행동은 근면·신중·절약·조심하는 것”이라며 이기심이 탐욕으로 치닫지 않게 할 브레이크로 공감(empathy) 즉, 이타심을 강조했다. 경제행위는 이기심과 이타심의 두 날개를 지녔다는 것이다.

영국이 20파운드 새 지폐에 애덤 스미스의 초상을 실었다. ‘고전경제학의 아버지’가 이제야 파운드화에서 대접받은 것은 그가 잉글랜드와 견원지간이었던 스코틀랜드 출신이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흥미로운 것은 돈에 실린 스미스의 초상이 정면이 아니라 옆모습이라는 점이다. 혹여 경제적 불평등을 보다 못한 스미스가 도안자의 꿈에 나타나 “제발 한 쪽(이기심)만 보고 나를 교조화하지 마시게, 그간 오독했다면 다른 쪽도 봐주시게”라고 한 것은 아닐까. 스미스는 공감을 역지사지(易地思之)라 했다.
(2007. 3.14 경향신문 칼럼 중에서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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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사람의 유사한 관능을 판단할 때의 척도
24

한 사람의 각종 감각기관의 기능, 즉 관능(官能:faculty)은 그가 다른 사람의 유사한 관능을 판단할 때의 척도가 된다. 나는 나의 시각으로써 당신의 시각을 판단하고, 나의 청각으로써 당신의 청각을 판단하며, 나의 이성으로써 당신의 이성을 판단하고, 나의 분개로써 당신의 분개를 판단하며, 나의 애정으로써 당신의 애정을 판단한다. 그것들을 판단할 이외의 다른 어떤 방법도 나에게는 없으며, 또 가질 수도 없다.





경이와 경악, 감탄과 갈채
26


그러나 우리 동료의 감정이 우리 자신의 감정과 일치할 뿐만 아니라 우리 자신의 감정을 지도하고 지시할 때에는, 그리고 감정을 형성하는 과정에서 우리의 동료는 우리가 모르고 지나쳤던 많은 것들에도 주의를 기울였으며 그리고 서로 다른 정황에 근거하여 서로 다른 대상들에 대해서도 자신의 감정을 조정했을 때에는, 우리는 그의 감정을 시인할 뿐만 아니라 그의 감정이 특이하고 예상치 못했을 정도로 예리하고 종합적인 데 경이(驚異)와 경악(驚愕)을 느끼게 된다. 이런 경우 그는 고도의 감탄과 갈채를 받을 자격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경이와 경악에 의해 강화된 시인(是認)은 감탄(感歎)이라고 부르는 것이 합당한 감정을 구성하는데, 갈채(喝采)는 이것의 자연스러운 표현이다.


나를 화나게 만드는 분개를 조금도 함께 나누어 가지지 않는다면 29

사고(思考)나 추측(推測)의 문제에 관한 판단이나 취향의 문제에 관한 감정에서 당신과 내가 완전히 상반된다고 하더라도 나는 그것을 쉽게 무시할 수 있다. 그리고 비록 내가 어느 정도 불만이 있더라도, 나는 여전히 당신과의 대화에서, 심지어는 나와 당신의 견해가 상반되는 바로 그 주제에 관한 당신과의 대화에서도, 어떤 즐거움을 발견할 수 있다. 그러나 당신이 내가 당한 재난에 대하여 어떠한 동류의식도 가지지 않거나 또는 나를 괴롭히고 있는 슬픔을 조금도 함께 나누어 가지지 않는다면, 또는 당신이 내가 당한 침해에 대해 전혀 의분을 느끼지 않는다면, 나를 화나게 만드는 분개를 조금도 함께 나누어 가지지 않는다면, 우리는 이것들을 주제로 더 이상 대화를 계속할 수 없다. 우리는 피차 서로를 용납할 수 없게 된다. 나는 더 이상 당신의 친구가 될 수 없고, 당신 역시 더 이상 나의 친구가 될 수 없다. 당신읜 나의 분노와 격정에 당황하게 될 것이고, 나는 당신의 얼음처럼 차가운 무감각과 감정의 결핍에 분노하게 될 것이다.


인간의 천성을 완미(完美)하게 만드는 길 36-37

이처럼 다른 사람에 대해서는 많이 느끼고 자기 자신에 대해서는 적게 느끼는 것, 다시 말해서 자기 자신을 위하는 사심은 억제하고 남을 위하는 자애심(慈愛心)은 방임하는 것이 곧 인간의 천성을 완미(完美)하게 만드는 길이다. 그리고 이렇게 할 때 비로소 감정(sentiments)과 격정(passions)의 조화를 이루어냄으로써 인류의 모든 행위를 고상하고 적절하게 할 수 있는 것이다. 우리 자신을 사랑하는 것처럼 우리의 이웃을 사랑하라는 것이 기독교의 위대한 율법인 것처럼, 다만 우리 이웃을 사랑하는 것처럼, 또는 같은 뜻이지만, 우리 이웃이 우리를 사랑할 수 있는 것처럼 우리 자신을 사랑하라는 것은 자연계의 위대한 계율이다.


미덕이란 탁월함이며, 상스럽거나 평범한 것을 훨씬 뛰어넘는 비상하게 위대한 어떤 것 37

보통 수준의 지력(知力)에서는 어떤 재능도 있을 수 없듯이, 보통 수준의 도덕에서는 어떤 미덕도 있을 수 없다. 미덕이란 탁월함이며, 상스럽거나 평범한 것을 훨씬 뛰어넘는 비상하게 위대하고 아름다운 어떤 것이다. 상냥하고 친근함의 미덕은 정교하고 기대밖의 섬세함과 따뜻함으로 사람을 놀라게 할 정도의 감수성으로 이루어진다. 경외심을 불러일으키는 미덕은 인간의 본성에서 가장 제어하기 어려운 격정에 대해서까지 사람을 놀라게 할 정도의 자기제어 능력으로 이루어진다.


특수한 혐오감의 진정한 원인 45

우리가 다른 사람들에게서 그들의 육체적 욕망이 강렬하게 표현되는 것을 볼 때 속으로 느끼게 되는 특수한 혐오감의 진정한 원인은 우리가 그것을 공감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 욕망을 느꼈던 사람에게도 그 욕망이 채워지자마자 그것을 불러일으켰던 대상은 더 이상 유쾌한 것이 될 수 없고, 심지어 그 대상을 보는 것만으로도 흔히 불쾌해질 수 있다. 그는 그 대상에서 방금 전까지만 해도 자기 정신까지 흘렸던 매력을 이모저모 찾아보지만, 헛일이다. 그리하여 그는 이제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방금 전의 자기 자신의 격정에 대해서도 거의 공감할 수 없게 된다. 식사를 마치고 나면 우리는 식기(食器)를 치우라고 명한다. 그리고 우리는 전에는 가장 강렬하고 격정적이었던 욕망의 대상들을, 만약 이들이 다른 게 아니라 바로 육체에서 기원하는 격정의 대상들이라면, 이와 똑같은 태도로 취급할 것이다.


되풀이되는 엄중한 도발의 결과 때문이라는 것 65∼66

우리가 어떻게 행동할 때 비로소 분개심을 표출하는 우리의 행위가 방관자에게 완전히 유쾌하게 느껴지고 그리고 방관자로 하여금 우리의 분개에 완전히 동감하게 할 수 있을 것인가?

무엇보다도 먼저 우리의 분개를 격발시킨 원인이, 만약 우리가 그것에 대해 어느 정도라도 분개하지 않는다면 우리 자신이 비열한 인간으로 되어버리고 그리고 두고두고 모욕을 받게 될 그런 것이어야 한다. 사소한 침해에 대해서는 무시해 버리는 편이 오히려 낫다. 사소한 시빗거리가 있을 때마다 흥분하는 심술궂고 남의 말꼬리 잡고 시비하기 좋아하는 성격만큼 비열한 것도 없다. 우리가 분개하는 이유는, 우리 스스로 불쾌한 격정으로 화가 나서가 아니라, 분개하는 것이 적절하고 또한 사람들이 우리에게 분개하기를 기대하고 또 요구하고 있다는 자각 때문이어야 한다.

인류가 느낄 수 있는 격정들 중에서 이 분개의 격정만큼 우리로 하여금 그것의 정당성에 대하여 재삼 의문을 가져보게 하고, 우리가 그것을 표출하기 전에 조심스럽게 우리의 본래의 적정성 감각에 비추어 보게 하고, 또한 냉정하고 공정한 방관자가 우리가 표출하는 분개를 보고 어떤 감정을 가지게 될 것인지 진지하게 생각해 보도록 하는 것도 없을 것이다. 관대함이나 우리 자신의 사회적 지위와 존엄을 유지하고자 하는 관심만이 사람들을 불쾌하게 하는 이 격정의 표현들을 고상한 것이 될 수 있게 해주는 유일한 동기이다. 이 동기가 우리의 전체 품격과 태도를 특징짓는 것이 되어야만 한다. 우리의 태도는 반드시 소박·소탈하고, 감추는 것이 없고, 솔직해야만 한다. 과단성이 있되 독단적이 아니어야 하고, 고결하되 오만(傲慢)하지 않아야 하며, 무례하고 상스럽지 않을 뿐만 아니라 우리에게 상해를 가한 자에 대해서조차 너그럽고 솔직하면서도 모든 적절한 배려를 다해 주는 그런 것이어야 한다. 간단히 말해서, 분노의 격정 때문에 인간의 선한 본성이 훼손되지 않았음을, 그리고 만약 우리가 어쩔 수 없이 복수를 하게 된다면 그것은 마지못해서, 필요에 의해서, 그리고 되풀이되는 엄중한 도발의 결과 때문이라는 것이 우리가 그것을 표현하려고 일부러 노력하지 않고서도 우리의 전체 행동에서 저절로 드러나야 한다.

분노가 이런 방식으로 억제되고 진정된다면 그것은 심지어 관대하고 고상하기까지 한 것으로 인정받을 수도 있을 것이다.


경쟁심의 기원 91∼92

이 세상 사람들이 온갖 고생을 다하면서 야단법석을 떠는 것은 무엇을 위해서인가? 탐욕과 야심, 부와 권력 및 최고를 추구하는 목적은 무엇인가?  ······

인류 사회의 각계각층의 사람들 모두에게서 나타나는 경쟁심은 어디에서 생기는 것인가? 그리고 소위 자신의 지위의 개선이라고 하는 인생의 거대한 목적을 추구하는 것은 어떤 이익이 있어서인가? 남들로부터 관찰되고 주의와 주목을 받는다는 것, 그리고 그들로부터 동감과 호의와 시인(是認)을 받는다는 것이 바로 그것으로부터 얻을 수 있는 이익이다. 우리의 관심을 끄는 것은 안락이나 즐거움이 아니라 허영이다. 그러나 허영이란 항상 자신이 주위로부터 주목을 받고 시인의 대상이 되고 있다는 신념에 기초한다.
부유한 사람이 그의 부유함을 자랑하는 것은 그 부유함이 자연히 세간의 이목을 끈다는 것, 그리고 부유함이 그에게 제공한 모든 유쾌한 감정에 인간들이 쉽게 공감하기 마련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이러한 생각을 하면 그는 가슴이 벅차오르고 자랑스러움을 느낀다. 그리고 그는 부유함이 가져다주는 다른 어떤 이익보다도 바로 그 이유 때문에 부자가 되기를 원하는 것이다.


지위를 얻는 과정에 사용된 수단의 비열함에 의해서 더렵혀지는 것 116

야심에 찬 사람이 진실로 추구하는 것은 안락이나 즐거움이 아니라, 비록 매우 잘못 이해되고 있지만, 항상 이런 저런 종류의 영예인 것이다. 그러나 그가 얻은 높은 지위와 영예는, 자신의 눈으로 보건 타인의 눈으로 보건 간에, 그가 그 지위를 얻는 과정에 사용된 수단의 비열함에 의해서 더렵혀지는 것으로 보인다. 마음대로 지출하는 낭비에 의해서, 타락한 인간들의 파멸적 성격이 통상 그렇듯이 각종 방탕한 쾌락에의 극도의 몰입에 의해서, 그리고 바쁜 공적 업무에 의해서, 또는 보다 자랑스럽고 보다 소란스러운 전쟁에 의해서, 그는 자신의 기억과 타인들이 기억으로부터 자신이 과거에 행하였던 추행(醜行)들의 기억을 지워 버리려고 노력할 것이다. 그러나 그 기억들은 끝까지 그를 쫓아다닌다. 그는 건망증과 망각이라는 어둡고 우울한 힘에 호소해 보지만 실패한다. 그는 스스로 행하였던 것을 기억하고 있으며, 그의 기억은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로 그가 행했던 바를 기억하고 있으리라는 사실을 그에게 일깨워 준다.


수치심과 양심의 가책이란 보복의 화염 116

가장 그럴 듯한 상류사회의 모든 화려한 허식 속에서도, 돈에 매수된 고위 인사들과 저명한 학자들의 비열한 아첨 속에서도, 일반 민중들의 어리석지만 천진난만한 환호 속에서도, 그리고 모든 정복과 전쟁에서의 승리로 교만해진 가운데서도, 내심에서 은밀하게 솟아나는 수치심과 양심의 가책이란 보복의 화염은 그를 휩싸서 놓아주지 않는다. 그리고 영예가 사방팔방으로 그를 둘러싸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때에도 그 자신은 자신의 상상 속에서 어둡고 추악한 불명예가 그를 바짝 뒤쫓고 있으며 언제라도 그를 덮치려고 하는 것처럼 느낀다.


분개(憤慨)의 감정 149

분개(憤慨)는 방어를 위해서, 그리고 오직 방어만을 위해서, 천성이 우리에게 부여해준 감정인 것으로 보인다. 그것은 정의를 지키는 보호장치이자 죄없는 사람을 지키는 안전장치이다. 그것은 우리로 하여금 우리에게 가해지려는 해악을 물리치고 이미 가해진 것에 대해서는 보복을 하도록 촉구한다. 그리하여 가해자로 하여금 자신의 부정한 행위를 반성하도록 하고, 나아가 다른 사람들로 하여금 같은 처벌을 받을까봐 두려움을 갖도록 함으로써 유사한 죄를 범하지 못하도록 한다.


다른 사람의 행복을 해치는 행위 156

다른 사람이 우리에게 가한 해악에 대한 우리의 정당한 분노 이외에는, 우리가 우리의 이웃을 해칠 수 잇는 정당한 동기가 있을 수 없고, 만인의 공감을 받으면서 우리가 남에게 해악을 끼칠 수 있도록 하는 유인(誘因)이란 있을 수 없다. 우리 자신의 행복에 방해된다는 이유만으로 다른 사람의 행복을 해치는 행위나, 어떤 것이 우리에게 마찬가지로 유용하거나 또는 그 이상으로 유용하다는 이유만으로 다른 사람들에게 실제로 유용한 것을 빼앗는 행위나, 또는 이와 마찬가지 방식으로 타인을 희생시켜 가면서 다른 사람의 행복보다 자신의 행복을 중시하는 천성적인 선호(選好)에 몰두하는 행위는 공정한 방관자로서는 결코 공감할 수 없는 것이다.


공정한 경쟁을 위반하는 것 158

부와 영예와 높은 지위를 향한 경주에서 사람들은 다른 경쟁자들을 이기기 위해 자신의 온힘을 다하여 달리고, 자신의 정신적, 육체적 노력을 다 기울일 것이다. 그러나 만약 그가 자기 경쟁자들 중 어느 누구를 밀어제치거나 넘어뜨린다면, 방관자들의 관용은 거기서 완전히 끝난다. 그것은 공정한 경쟁을 위반하는 것으로, 방관자들은 그것을 용납할 수 없다. 방관자들에게는 그의 방해를 받은 사람도 모든 면에서 그와 마찬가지로 중요하다. 즉, 방관자들은 이 방해자가 자신을 남보다 훨씬 중요하게 생각하는 자애(自愛)에 공감하지 않으며, 그가 다른 사람을 해치게 된 동기에 공감할 수 없다. 따라서 그들은 피해자가 느끼는 자연스러운 분개의 감정에 기꺼이 동감하고, 가해자는 그들의 증오와 분개의 대상이 된다.


불의의 만연 163, 167

사회는 항상 서로에게 상처를 주고 침해를 입히려고 하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존립할 수 없다. 서로에 대한 가해 행위가 시작되는 순간, 서로에 대한 분개와 증오가 나타나는 순간, 사회의 모든 유대관계는 산산 조각나고, 그 사회의 모든 구성원들은 그들 간의 불화 감정이 야기한 폭력과 대립에 의해, 사방으로 흩어지고 국외로 달아나게 된다.

만약 강도와 살인자들 사이에서도 어떤 사회가 존재하려면, 주지하는 바와 같이, 적어도 그들 간에 서로 강탈하거나 살해하는 것을 자제해야만 한다. 따라서 자혜(慈惠)는 사회를 유지하는 데 있어서 정의(正義: justice)보다 덜 중요하다. 비록 최선의 상태는 아닐지라도, 사회는 자혜 없이도 존속할 수 있다. 그러나 불의의 만연은 사회를 철저히 파괴시켜 버린다.
······
불의는 필연적으로 사회를 파괴한다. 따라서 불의가 나타날 때마다 인간은 놀라고, 그대로 놓아두면 그에게 소중한 모든 것을 급속하게 파괴시켜 버릴 불의한 사건의 진행을, 중지시키려 달려든다. 만약 그가 온당하고 공정한 방법으로 그것을 중지시킬 수 없다면, 그는 힘과 폭력에 의지해서라도 그것을 타도해야 한다. 여하튼 그는 불의가 지속되는 것을 중지시켜야 한다. 따라서 인간은 종종 정의의 법을 위반한 사람들에 대해서는 심지어 극형에 처해 가면서까지 정의의 법을 시행하는 것을 시인(是認)한다고 한다. 공공의 평화를 방해하는 자는 이렇게 해서 세상에서 제거되고, 다른 사람들은 그의 죽음을 보고 겁이 나서 감히 그의 행위를 모방하지 못하게 된다.


분개의 감정이 달성하고자 하는 주요 목적 181∼182

분개의 감정이 달성하고자 하는 주요 목적은 우리의 적으로 하여금 고통을 느끼게 하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로 하여금 자신이 자신의 과거의 행동 때문에 고통을 받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도록 하고, 또한 그로 하여금 과거의 행동을 후회하도록 만들고, 그로 하여금 그가 해악을 가한 그 사람이 그와 같은 식으로 대접을 받아서는 안 되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깨닫도록 만드는 데 있다. 우리를 해치거나 모욕을 준 사람에 대하여 우리로 하여금 분개하게 만드는 것은 그가 우리를 무시하는 태도, 우리보다 자기기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불합리한 태도, 그리고 다른 사람들은 언제라도 그의 편의에 따라 또는 기분에 따라 희생되어도 좋다고 생각하는 그의 터무니없는 자애(自愛: self-love) 등이다. 그의 행동에 나타난 두드러진 도덕적 부적정성, 그의 행동에 담겨 있는 큰 오만과 불의는 종종 우리에게 우리가 당한 해악 그 자체보다도 더욱 큰 충격을 주고, 우리를 격분하게 만든다. 다른 사람들이 응당 받아야 할 몫에 대한 보다 올바른 감각을 그에게 심어주는 것, 그가 우리에게 지고 있는 빚이나 그가 우리에게 행한 잘못을 그가 깨닫도록 해 주는 것 등이 우리가 보복하려는 주요 목적이다. 만약 이 목적이 달성되지 못한다면 보복은 항상 불완전하다.


조심성 없는 행동 197

우리는, 한 사람의 조심성 없는 행동에 의해 다른 사람이 고통을 당해서는 안 되며, 비난받을 만한 부주의로 인해 발생한 손해는 부주의한 행위를 한 사람에 의해 배상되어야 한다는 것보다 더 공정한 것은 있을 수 없다고 생각한다.


미덕과 악덕, 행복과 불행
214-215

친근감을 주고 찬사를 받을 만한 것, 즉 사랑을 받을 만하고 보답을 받을 만한 것은 미덕의 큰 특징이다. 또 가증스럽고 처벌을 받을 만한 것은 악덕의 큰 특징이다. 그러나 이 모든 특징들은 다른 사람들의 감정과 직접적인 관련이 있다.  미덕은, 그 행위자 자신의 사랑이나 감사의 대상이 되기 때문이 아니라, 그것이 다른 사람들의 사랑이나 감사의 마음을 불러일으키기 때문에 친근감을 주고 찬사를 받는 것이다. 자신은 이처럼 사람들을 유쾌하게 하는 관심의 대상이 되고 있다는 인식은 그것에 자연적으로 수반되는 내심의 평온과 자기만족의 원천이 되는데, 이는 마치 자신은 이와 반대의 상황에 놓여 있을지도 모른다는 의심이 악덕으로 인한 고통의 원천이 되는 것과 같다. 사랑을 받고 있고 또 우리는 사랑을 받을 만하다는 것을 알고 있다는 것은 얼마나 큰 행복인가? 미움을 받고 있고 또 우리는 미움을 받아 마땅하다는 것을 알고 있다는 것은 얼마나 큰 불행인가?


근거 없는 칭찬에 기뻐하는 것 219

근거 없는 칭찬에 기뻐하는 것은 결코 있지도 않았던 모험담을 이야기하면서 동료들의 존경을 받으려고 하는 우매한 거짓말쟁이, 자기에게는 그럴 자격조차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으면서도 높은 신분인 체하고 기품 있는 체하는 난봉꾼(coxcomb)들이다. 이와 같은 사람들은 틀림없이 자신들은 갈채를 받고 있다는 공상에서 기뻐한다. 그러나 그들의 허영은 어떤 이성적인 사람이 어떻게 속아 넘어갈지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로 허황된 환상으로부터 발생한다. 그들은 자신들이 속였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의 입장에 자신을 놓고 자기 자신에 대하여 가장 큰 감탄을 한다. 그들은 자신들이 동료들에게 실제로 어떻게 보이고 있을 것인가 하는 관점에서가 아니라, 자신의 동료들이 자신들을 본다고 그들이 믿고 있는 그러한 관점에서 자신들을 보는 것이다.

그들은 피상적인 나약함과 우매함 때문에 자신의 눈을 내부로 돌리지도 못하고, 또한 만약 진실이 알려진다면 자신들이 모든 사람들에게 얼마나 경멸스런 인간으로 보일 것인지 그들의 양심이 말해 줄 그런 경멸스런 관점에서 그들 자신을 바라보지도 못한다.



시인을 받을 가치가 있는 존재가 되는 것
222

인간들 중에서 가장 약하고 가장 천박한 자들만이 자신들이 전혀 칭찬받을 만한 일을 하지 않았음을 알고 있으면서도 칭찬에 의해 크게 기뻐할 수 있다. 약한 사람은 때때로 그러한 칭찬을 기뻐할지도 모르지만, 지혜로운 사람은 모든 경우에 그것을 거부한다. 지혜로운 사람은 그가 칭찬받을 만한 일을 하지 않았으나 칭찬을 받는 경우 그러한 칭찬으로부터 전혀 기쁨을 느끼지 못하지만, 그러나 그가 칭찬받을 만한 일을 자신이 행했을 때에는, 비록 그것에 대하여 결코 칭찬이 부여되지 않을 것임을 스스로 잘 알고 있을지라도, 그는 흔히 최고의 기쁨을 느낀다, 시인을 받을 만하지 못한 경우 인류의 시인을 얻는 것은 그에게 결코 중요한 목적이 될 수 없다. 정말로 시인을 받을 만한 경우 사람들의 시인을 얻는 것은 때로는 그에게 그리 중요하지 않은 하나의 목적이 될 수는 있다. 그러나 시인을 받을 가치가 있는 존재가 되는 것은 언제나 최고로 중요한 목적임에 틀림없다.


칭찬과 비난 238

칭찬과 비난은 우리의 성격이나 행동에 대한 다른 사람들의 감정이 실제로 어떠한 것인지를 나타내고, 칭찬받을 만하다거나 비난받을 만하다거나 하는 것은 우리의 성격과 행동에 대한 다른 사람들의 자연스런 감정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나타낸다. 칭찬을 받고 싶어 하는 것은 우리 형제들의 호의적인 감정을 얻고자 갈망하는 감정이다. 칭찬받을 만한 사람이 되고 싶어하는 것은 자신이 그러한 감정의 정당한 대상이 되고자 하는 갈망이다. 이 점에서 두 가지 원리는 서로 비슷하고 피차 동류(同類)이다. 피차 동류라는 것과 서로 비슷하다는 것 사이의 관계는 실제로 비난받는 것에 대한 두려움과 비난받을 만하게 되는 것에 대한 두려움 사이에서도 성립한다.



양심, 가슴 속의 동거인(同居人), 내부 인간, 우리 행위의 재판관 및 조정자(調整者)
253

그것은 이성(理性), 천성(天性), 양심, 가슴 속의 동거인(同居人), 내부 인간, 우리 행위의 재판관 및 조정자(調整者)이다. 우리가 다른 사람들의 행복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일을 하려고 할 때마다 우리 내심의 가장 몰염치한 격정을 향하여 깜짝 놀랄 정도의 큰 목소리로 다음과 같이 소리치는 것은 바로 이 사람이다. 즉, 우리는 대중 속의 한 사람에 불과하고, 어떠한 점에 있어서도 그 속의 다른 어떠한 사람보다 나을 것이 없으며, 우리가 그처럼 수치(羞恥)를 모르고 맹목적으로 우리 자신을 다른 사람들보다 우선시킨다면 우리는 다른 사람들의 분개와 혐오와 저주의 정당한 대상이 될 것이라고, 우리가 우리 자신들에 관련된 모든 것이 실제로는 사소한 것이라는 사실을 배우는 것은 오직 이 중립적 방관자로부터이고, 이 중립적 방관자의 눈에 의해서만 자애(自愛)가 빠지기 쉬운 잘못된 생각을 바로잡을 수 있다. 관용의 적정성과 부정(不正)의 추악성, 우리 자신의 큰 이익보다 다른 사람들의 더 큰 이익을 위하여 우리 자신의 그것을 양보하는 것의 적정성과, 우리 자신의 최대의 이익을 얻기 위하여 다른 사람의 가장 사소한 이익까지 침해하는 행위의 추악성을 우리에게 보여 주는 것은 바로 이 공평무사한 중립적 방관자이다.

많은 경우 우리로 하여금
그러한 신성한 미덕을 행하도록 촉구하는 것은 우리의 이웃에 대한 사랑도 아니고 인류에 대한 사랑도 아니다. 그러한 경우에 통상 생기는 것은 보다 강한 사랑, 보다 강력한 애정, 즉 명예스럽고 고귀한 것에 대한 사랑, 우리 자신의 성격의 숭고함, 존엄성, 탁월성에 대한 사랑인 것이다.


인간생활의 불행과 혼란의 최대 원천 275-276

인간생활의 불행과 혼란의 최대 원천은 하나의 영속적 상황과 다른 영속적 상황과의 차이를 과대평가하는 것으로부터 생기는 것으로 보인다. 탐욕(貪慾: avarice)은 가난과 부유함 사이의 차이를 과대평가하고, 야심(野心: ambition)은 개인적 지위와 공적 지위의 차이를 과대평가하고, 허영(虛榮: vain-glory)은 무명(無名)의 상태와 유명(有名)한 상태의 차이를 과대평가한다. 이러한 종류의 사치스런 격정의 영향하에 있는 사람은 그 자신이 처해 있는 실제 환경에서 불행하고 고통스러울 뿐만 아니라, 흔히 그가 어리석게도 감탄하는 처지에 도달하기 위해서 사회적 안정을 교란시키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인생에 대해) 조금만 살펴보아도, 인간생활의 일상적인 모든 상황에서 교양 있는 사람은 마찬가지로 평온하고, 마찬가지로 기뻐하고, 마찬가지로 만족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물론 그러한 통상의 여러 가지 상황들 중에서 어떤 상황은 다른 상황보다 더욱 바람직한 것임에 틀림없지만, 그러나 그것들 중 어떤 것도 신중(愼重: prudence) 또는 정의 (正義: justice)의 법칙들을 위반해 가면서까지 격정적인 열의를 가지고 추구할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은 아니며, 또는 후에 가서 자신의 어리석은 행동을 회상할 때 느끼게 될 수치심과, 자신의 부정한 행위에 대한 두려움에서 오는 회한(悔恨)으로 마음의 장래의 평정까지 파괴해 가면서까지 추구할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은 아니다.

신중(愼重)이 자신의 처지를 바꾸려는 시도를 지도(指導)하지 않고, 정의가 자신의 처지를 바꾸려는 시도를 허용하지 않는데도 그것을 바꾸려고 시도하는 사람은, 모든 위험한 게임들 가운데서 가장 불평등한 게임을 하는 것이고, 아무것도 아닌 것에 모든 것을 거는 사람으로서, 그가 장차 얻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에피루스(Epirus) 국왕의 총애하는 신하가 국왕에게 말한 것은 인생의 일상의 모든 경우에 있어서 모든 사람들에게 그대로 적용될 수 있을 것이다. 국왕은 그 신하에게 자신이 예정하고 있는 모든 정복 계획들을 차례대로 설명해 주었는데 그 최후의 정복계획에 이르렀을 때 그 신하가 말했다. "그런 다음에 폐하께서는 무엇을 하실 작정이십니까?" 그러자 국왕이 대답했다. "그런 다음 나는 나의 친구들과 더불어 즐겁게 지낼 거야. 술을 마시면서 친구들과 사귀도록 노력할 거야 ······ ." 그 신하가 다시 물었다. "그러면 무엇이 폐하께서 지금 그렇게 하시는 것을 방해하고 있습니까?"



탐욕의 대상과 야심의 대상
324

탐욕의 대상과 야심의 대상은 단지 그 대상이 위대한 것인지 아닌지에 있어 차이가 날 뿐이다. 구두쇠는 반 푼의 동전을 획득하기 위해 큰 야심을 가진 사람이 한 왕국을 정복하려고 할 때만큼이나 맹렬하다.



사람들의 성격 351

사람들의 성격도, 기예(技藝)의 창작물이나 정부기구와 마찬가지로, 개인과 사회의 행복을 촉진하는 데 적합할 수도 있고 방해하는 데 적합할 수도 있다. 신중, 공정(公正), 적극적, 과단(果斷), 진지한 성격은 그 사람 자신과 그와 관련이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번영과 만족을 약속한다. 반대로 경솔, 오만, 나태, 유약(柔弱), 방탕한 성격은 그 개인에게는 파멸을, 그와 관계를 맺고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는 재난(災難)을 예고한다. 첫 번째의 심리상태는 적어도 가장 유쾌한 목적을 촉진하기 위해 발명되었던 가장 완전한 기계가 가질 수 있는 모든 미(美)를 가지고 있다. 두 번째의 심리상태는 가장 어색하고 졸렬한 발명품이 갖고 있는 모든 결함들을 다 가지고 있다.


견인불발(堅忍不拔) 356

우리가 장래의 더 큰 쾌락을 획득하기 위해 눈앞의 쾌락을 포기할 때, 우리가 요원한 장래의 대상에 대하여 현재 우리 눈앞에서 우리의 감관(感官)에 직접 작용하고 있는 대상에 대한 것과 똑같이 흥미를 가지고 행동할 때에는, 우리의 감정과 방관자의 감정이 정확히 서로 일치하므로, 방관자는 우리의 행위를 시인하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방관자는 경험에 의하여 이러한 자기통제를 할 수 있는 사람이 거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으므로, 우리의 행위를 상당한 정도의 경이(驚異)와 찬탄으로 지켜보게 된다. 장기간 꾸준히 근검절약하고, 부지런히 노력하고, 한 가지 일에 전심전력을 다하는 사람을, 비록 그의 목적이 단지 재부(財富)의 획득을 위한 것이라 하더라도, 모든 사람들이 자연히 높은 존경의 마음을 가지고 대하게 되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이러한 식으로 행동하고, 요원한 장래의 일이지만 큰 이익을 획득하기 위해서 현재의 모든 즐거움을 포기할 뿐 아니라 심신(心身)의 최대의 노고를 참아내는 사람의 견인불발(堅忍不拔)은 필연적으로 우리의 시인을 얻게 된다. 그의 행위를 규제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는 자기 이익과 행복에 관한 그의 관점은 우리가 그의 행위를 보고 자연스럽게 형성하는 관념과 정확히 일치한다. 그의 감정들과 우리의 감정들 사이에는 가장 완전한 일치가 존재하며, 동시에 인간 본성의 공통된 약점에 관한우리의 경험으로 볼 때, 이러한 일치는 우리가 합리적으로 기대할 수 없는 일치이다.

따라서 우리는 그의 행위를 시인할 뿐만 아니라 어느 정도는 감탄해 마지않으며, 그의 행위는 상당한 정도의 칭찬과 갈채를 받을 만하다고 생각한다. 이와 같이 시인(是認) 및 존경할 만한 가치가 있다는 의식만이 우리로 하여금 그 행위자의 그러한 행위 경향을 지지할 수 있게 하는 것이다.


우정이라는 신성하고 존경할 만한 이름 427

젊은이들의 성급하고 맹목적이며 어리석은 친교(親交)는 통상 상격상의 사소한 유사성에 근거하고 있고, 품행과는 전혀 관계없이 서로 같은 학습, 같은 오락, 같은 취미, 또는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지 않는 특이한 원리나 관점에 대한 같은 의견에 근거하고 있다. 변덕이 죽 끓듯이 반복되는 이러한 친교들이 지속되는 동안에는 비록 그것들이 아무리 좋은 것처럼 보인다 하더라도, 그것들은 결코 우정(友情: friendship)이라는 신성하고 존경할 만한 이름으로 불릴 가치가 없다.



황금률 428

배은망덕(背恩忘德)한 비루한 행위에 대한 다른 사람들의 보편적인 분개는 심지어 때로는 시혜자(施惠者)의 공로에 관한 보편적인 감각을 증대시키기까지 한다. 은혜를 베푼 사람은 자신이 베푼 은혜의 결실을 전부 다 잃어버리는 일은 결코 없다. 만약 그가 자신이 마땅히 받아야 할 그 사람에게서 그 결실을 거두지 못한다면, 그는 틀림없이 다른 사람들로부터 그 열 배의 보상을 받게 될 것이다. 자혜(慈惠)는 자혜를 낳는다. 그리고 만약 우리의 형제들로부터 사랑을 받는 것이 우리가 추구하는 최대 목적이라면, 그것을 획득할 가장 확실한 방법은 우리가 그들을 진정으로 사랑한다는 것을 우리 자신의 행동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플라톤의 신성한 잠언 442

인도주의나 인자(仁慈)한 마음에서 우러나온 공익정신을 가진 사람은 이미 확립된 권력이나 특권을, 심지어 그것이 개인들의 특권이라 하더라도, 존중할 것이고, 만약 그 특권이 국가를 구성하는 주요 계층이나 사회단체의 것일 때에는 더욱 존중할 것이다. 그 중의 일부 특권들이 어느 정도 남용되고 있다고 생각되더라도, 만약 그가 그러한 특권들을 거대한 폭력의 행사 없이는 없앨 수 없을 때에는, 그는 자기 스스로 절제하는 것으로 만족할 것이다. 이성(理性)과 설득(設得)을 통해서는 사람들에게 뿌리박힌 편견을 없앨 수 없을 때에도, 그는 그들을 무력으로 굴복시키려 하지 않고, 플라톤의 신성한 잠언(箴言)이라고 키케로(Cicero)가 정확하게 부른 것, 즉 자기 부모에 대해 폭력을 사용해서는 안 되는 것처럼 자기 조국에 대해서도 폭력을 사용해서는 결코 안된다는 말을, 경건하게 준수할 것이다. 그는 공적인 일들을 가능한 한 국민들 속에 이미 단단히 뿌리내려져 있는 습관(習慣)과 편견에 적응시키려 할 것이고, 또 국민들이 복종하기 싫어하는 규제가 없음으로 인해서 발생할 수 있는 불편들을 최대한 제거하려고 노력할 것이다. 그는 옳은 것을 건립할 수 없을 때에는 틀린 것을 개선하는 것을 무가치한 일이라고 무시하지 않고, 솔론(Solon)이 그랬듯이, 최선의 법률체계를 세울 수 없을 때에는 국민이 참을 수 있는 한도 내에서 최선의 것을 세우려고 노력할 것이다.



군주들이 가장 위험한 인물 444

정치가의 관점을 지도하는 데에는 자신들이 제안하는 정책과 법률의 완전성에 대한 일종의 보편적이고 심지어 체계적이기까지 한 관념이 분명히 필요할 것이다. 그러나 일체의 반대를 무릅쓰고 그러한 관념이 요구하는 모든 것을 수립하려고 강하게 주장하는 것은, 그것도 즉각 수립하고자 하는 것은, 흔히 최고도의 오만임에 틀림없다. 그것은 옳고 그름을 판단함에 있어 자신의 판단을 최고의 표준으로 내세우는 것이다. 그것은 자기 자신이 전국에서 유일하게 총명하고 고상한 사람이며, 따라서 동포들이 자기에게 맞추어야지 자기가 동포들에게 맞출 수는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바로 이러한 이유에서 모든 정치 이론가들 중에서 군주(君主)들이 가장 위험한 인물들이다. 그들은 이러한 오만에 매우 익숙해져 있다. 그들은 자신의 판단이 무한히 우월하다는 것에 대하여 전혀 의심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개혁적인 황제나 국왕들이 자신들의 통치하에 있는 국가의 체제에 대해 생각할 때, 그들은 자신들의 의지를 실행하는 데 반대되는 장애물들만큼 잘못된 것은 없다고 생각한다. 그들은 플라톤의 신성한 잠언을 경멸하면서, 국가가 자신들을 위해서 만들어진 것이지 자신들이 국가를 위해서 존재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총명한 사람이라면 449

최대의 국가적 재난(災難)을 당해서도 개인적 재난을 당했을 때와 마찬가지로 총명한 사람은 다음과 같이 생각해야 한다. 즉, 자기 자신과 친구들 및 동포들은 우주에서 생환(生還)의 희망이 보이지 않는 가장 절망적인 진지로 진군하라는 명령을 받았으며, 그리고 만약 전 우주의 행복을 위해서 필요한 것이 아니라면 자신들에게 그러한 명령이 내려지지는 않았을 것이며, 자신들의 임무는 이러한 지시를 체념하고 감수할 뿐 아니라 가볍고 기쁜 마음으로 이를 포용하도록 노력해야 한다고 생각해야 한다. 총명한 사람이라면 훌륭한 병사가 언제나 할 각오와 준비가 되어 있는 그러한 일들을 할 수 있어야 한다.



인간에게 배당되어 있는 일 450

그러나 우주(宇宙)라는 이 거대한 체계를 관리하고 모든 이성적이고 지각 있는 생물들의 보편적 행복을 돌보는 것은 신의 일이지 인간의 일이 아니다. 인간에게 배당되어 있는 일은 훨씬 하찮은 부문이지만, 그의 미약한 능력이나 편협한 이해력에 견주어 보면, 이러한 배당은 매우 적합한 것이다. 즉, 자기 자신의 행복, 자기 가족과 자기 친구와 자기 나라의 행복을 돌보는 것이 그것이다. 그가 더욱 숭고한 것을 사색하는 데 빠져 있다고 해서 그것이 결코 사소한 부문의 일을 무시해도 된다는 핑계는 될 수 없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에 대하여 아비디우스 카시우스(Avidius Cassius)가 했다고 전해지는 아마도 부당한 질책에, 즉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철학적 명상에 깊이 빠져 우주의 번영을 사색하면서도 로마제국의 번영은 무시했다고 하는 그러한 질책에, 자신을 노출시켜서는 안 된다. 명상적인 철학자의 가장 숭고한 사색도 가장 하찮은 현행 의무(義務)를 소홀히 하는 것을 보상할 수는 없다.



우리 자신의 존엄과 지위를 지킬 필요가 있다.
463

질투(嫉妬)란, 다른 사람들이 자신보다 우월한 것을, 그들이 정말로 그처럼 우월할 자격이 있는 경우에도, 그들의 우월함에 대하여 악의적으로 혐오감을 가지고 바라보는 격정이다. 그러나 중대한 문제에서, 어떤 우월함을 누릴 자격이 전혀 없는 사람이 자신을 능가(凌駕)하거나 자기보다 앞서 가도록 순순히 용인하는 사람은, 비열한 소인으로 비난받아 마땅하다. 이러한 나약함은 통상 태만에 기원(起源)하고, 때로는 선량한 성품에, 싸우기 싫어하고 소란 떨고 사정하기 싫어하는 성품에 기원하며, 그리고 때로는 잘못된 판단으로 인한 일종의 아량(雅量)에 기원하기도 하는데, 이런 아량은, 그 당시에 무시하는 이익들을 언제나 계속 무시할 수 있으며, 따라서 쉽게 포기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러한 나약함에는 통상 많은 후회와 회한이 뒤따른다. 그리고 처음에 보여주었던 어느 정도의 아량은 흔히 끝에 가서는 극도로 악의적인 투기(妬忌)로 변하게 되고, 그리고 자신이 아량을 베풀어 주었던 자의 우월함에 대한 증오로 변하게 된다. 일단 그의 아량 덕에 우월한 지위를 누리게 된 사람은, 그의 아량에 의해 양보를 받아냈던 바로 그 환경에 의해, 정말로 그 우월한 지위를 누릴 자격을 갖추게 되기도 한다.

이 세상에서 편안하게 살아가기 위해서는 어떤 경우에 있어서도 우리의 생명과 재산을 지킬 필요가 있는 것처럼 우리 자신의 존엄(尊嚴)과 지위(地位)를 지킬 필요가 있다.


진정으로 총명한 사람 480

진정으로 자신에게 속한 공적(功積)이 아닌 것을 자신에게 속한 것으로 생각하지 않고, 또 다른 사람들이 그것을 자신에게 속한 것으로 생각해 주기를 바라지도 않는 사람은 창피를 당할까봐 두려워하지도 않고, 자신의 실체가 발각(發覺)될까봐 두려워하지도 않고, 다만 자기 자신의 성품의 진실성과 견고성(堅固性)에 대하여 만족하고 느긋해할 뿐이다. 그를 칭찬하는 사람들은 그렇게 많지도 않고, 그렇게 요란하게 갈채를 보내는 것도 아니지만, 그를 가장 가까이에서 보고 그를 가장 잘 아는 총명한 사람은 그에게 최고의 찬사를 보낸다.

진정으로 총명한 사람에게는 총명한 한 사람의 사려 깊고 신중한 시인(是認)이 수천 명의 무지한 열광자들의 요란한 갈채보다 더욱 충심(衷心)으로부터 우러나오는 만족감을 준다. 파르메니데스가 아테네의 군중집회에서 한 편의 철학논문을 읽을 때, 플라톤을 제외한 모든 사람들이 그에게서 떠나가는 것을 보면서도 그는 그것을 계속 읽어 내려갔다. 그러면서 말하기를, 플라톤 혼자만 들어줘도 자기는 충분히 만족한다고 했다.


스스로를 과대평가하는 사람 481

그러나 스스로를 과대평가하는 사람의 경우에는 사정이 다르다. 그를 가장 가까이에서 보는 매우 총명한 사람들은 그에 대해서 가장 적게 감탄한다. 그가 성공에 도취되어 있을 때 총명한 사람들의 그에 대한 냉정하고 공정한 평가는 그의 자기 자신에 대한 터무니없는 과대평가에 비해 너무나 낮기 때문에, 그는 그들의 냉정하고 공정한 평가를 단지 악의(惡意)와 질투심에서 나온 것으로 생각한다. 그리하여 그는 자신의 가장 좋은 친구들을 의심하고, 그들과 교류하는 것에 불쾌감을 느끼기 시작한다. 그는 그들이 자기 앞에 나타나지 못하도록 내쫓고, 또는 흔히 자신에게 은혜를 베풀어준 그들에게 보은(報恩)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잔인(殘忍)하고 불의(不義)하게도 은혜를 원수로 갚기도 한다. 오히려 그는 아첨꾼과 배신자들을 신뢰하게 되는데, 이들은 그의 허영(虛榮)과 허세(虛勢)를 숭배하는 척 가장한다. 그리하여 처음에는 어떤 면에서는 결함이 있을지라도 전체적으로 보면 친근감도 있고 존경할 만하기도 하던 사람이 마지막에 가서는 경멸스럽고 혐오스러운 인물로 변해 버린다.


 우리는 그것을 오만 혹은 허영이라 부른다 483

인류의 보통 수준보다 위대하고 탁월한 재능을 지닌 이러한 걸출한 인물들이 스스로 자신들의 훌륭한 성품을 과대평가하는 것에 대해 우리는 철저히 공감(共感)할 뿐 아니라 동감(同感)하기도 한다. 우리는 그들을 용감하고, 관대하며, 고상한 사람들이라고 부르곤 한다. 이러한 말들 속에는 상당한 정도의 칭찬과 찬사의 뜻이 들어있다.

그러나 우리는 그리 두드러지게 뛰어난 면을 발견할 수 없는 사람들의 자신에 대한 과대평가에는 공감할 수 없다. 우리는 그들의 과도한 자아평가(自我評價)에 혐오감과 반감을 느끼게 된다. 그것을 양해하거나 참아준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우리는 그것을 오만(傲慢) 혹은 허영(虛榮)이라 부른다. 이 두 가지 단어 중에서, 후자는 언제나, 전자는 대부분, 그 속에 어느 정도의 비난의 뜻이 들어 있다.


오만(傲慢)한 사람 483

오만(傲慢)한 사람은 표리부동(表裏不同)하지 않고, 마음속 깊숙이 자신이 다른 사람보다 우월하다는 것을 확신하고 있는 사람이다. 그러나 그러한 확신이 어디에 근거하고 있는지를 알아맞히기는 흔히 어려울 수도 있다. 그는 당신이, 그가 당신의 입장에 있을 때 자기 자신을 바라볼 그런 눈으로, 자기를 보아주기를 바란다. 그가 당신에게 요구하는 것은, 다른 게 아니라, 그가 생각하는 공정(公正)함이다. 만일 그가 자기 자신을 존경하는 것만큼 당신이 자기를 존경해 주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면, 그는 모욕(侮辱)을 당한 것 이상으로, 마치 그가 정말로 어떤 침해를 당한 것처럼 화를 내고 분개한다. 그러나 그런 때조차도 그는 자신이 당신에게 그런 요구를 하는 이유를 설명하려고 하지 않는다. 그는 당신에게 존경을 간청하려고 하지 않으며, 그런 행동을 경멸하는 척하기까지 한다. 그리고 그는, 자기 자신의 우월함을 당신으로 하여금 느끼도록 하기보다는 당신 자신의 비천함을 스스로 느끼도록 함으로써, 자기 스스로 상정(想定)한 지위를 유지하려고 노력한다. 그는 마치 자기 자신에 대한 당신의 존경심을 자극하기보다는 오히려 당신 자신에 대해 당신이 굴욕감을 느끼도록 자극하기를 더욱 바라는 것처럼 보인다.


허영심이 많은 사람 484

그러나 허영심이 많은 사람은 표리부동(表裏不同)하여, 자기 마음속 깊숙한 곳에서는 자신의 우월성에 대해 확신을 하지 못하면서도, 자신에게 그런 우월성이 있다고 당신이 인정해 주기를 바란다. 그는 당신이, 그가 당신의 입장에 있고, 그가 알고 있는 모든 것을 당신이 알고 있을 때, 그가 자기 자신을 바라볼 때의 그런 색채보다 더욱 찬란한 색채로 자기를 보아 주기를 바란다. 그러므로 만약 당신이 그것과는 다른 색채로 그를 보거나 또는 그가 지닌 본래의 색채로 그를 보아주게 되면, 그는 모욕을 당한 것 이상으로 침해를 받았다고 생각한다.

그 자신은 당신이 인정해 주기를 바라는 그러한 성품을 가지고 있다는 근거를 제시하기 위해서, 모든 기회를 이용하여 가장 거짓되고 가장 불필요한 수법들까지 동원하여, 때로는 그가 전혀 가지고 있지 않은 것이나 또는 심지어 그가 가지고 있다고 말하기에는 너무나도 조금밖에 가지고 있지 않은 것들까지 거짓으로 자랑함으로써, 자신에게 어느 정도 있는 양호한 성품과 재능들을 자랑한다. 그는 당신의 존경을 경멸하기는커녕 당신의 존경을 얻으려고 전전긍긍한다. 그는 당신의 자아평가를 폄하(貶下)하여 상처를 주기는커녕 도리어 그것을 기꺼이 존중해 주면서, 그 대신에 당신도 자신의 그것을 존중해 주기를 바란다. 그는 아첨을 받기 위해 아첨을 한다. 그는, 공손하고 정중하게 행동함으로써, 그리고 때로는 당신에게 실제로 중요한 도움을 줌으로써(비록 흔히 그것을 쓸데없이 자랑하고 다니기는 하지만) 당신의 환심을 사려고 연구하거나 당신을 매수해서 당신이 자신에 대해 좋게 생각하도록 하려고 노력한다.



한낱 2펜스짜리 내기에 불과 534

스토아학파에 따르면, 인간의 삶은 이에 수반될 수 있는 많은 유익한 것들에도 불구하고 한낱 2펜스짜리 내기에 불과한 것이며, 따라서 어떤 심각한 관심을 기울일 가치가 전혀 없는 소소한 문제이다. 따라서 우리의 유일한 관심은 내기에 걸린 판돈의 액수가 아니라 게임의 적절한 방법이어야 한다. 만약 우리가 우리의 행복을 내기에 걸린 판돈을 따는 데 둔다면, 결국 우리는 그것을 우리의 능력과 우리의 통제를 벗어나는 원인(原因)에 맡기는 것과 다름이 없게 된다. 따라서 필연적으로 우리는 우리 스스로를 영원한 두려움과 불안, 그리고 빈번한 비통과 수치스러운 실망에 맡기는 셈이 된다.

그러나 만약 우리가 우리의 행복을 훌륭하게, 공평하게, 그리고 영리하고 능숙하게 게임을 치르는 데 둔다면, 간단히 말해서 우리의 행위의 적정성에 둔다면, 우리는 그것을 적절한 규율(規律), 교육, 그리고 주의력에 의해 우리의 능력과 통제 범위 내에 두는 것이 된다. 우리의 행복은 완전히 안전하고, 운(運)과는 무관하게 된다. 우리의 행위의 결과가 우리의 능력의 범위 밖에 있는 것이라면 그것은 또한 우리의 관심 밖에 있는 것이 되고, 따라서 우리는 그 결과에 대해 어떤 두려움이나 걱정을 할 필요도 없고, 또한 어떤 비통한 실망이나 심각한 절망으로 괴로워할 필요도 없다.



자애심 : 결코 미덕이 될 수 없는 천성
580

자기 자신에 대한 사랑, 즉 자애심(自愛心: self-love)은 어떤 정도로도, 어떤 방면에 있어서도 결코 미덕이 될 수 없는 천성이다. 그것이 공동의 이익(利益)을 방해할 때에는, 그것은 언제나 악덕(惡德)이 된다. 그것이 각 개인으로 하여금 오직 자기 자신의 행복만을 돌보도록 할 때에는, 그것은 단지 무죄(無罪)일 따름이며, 따라서 그것은 칭찬받을 가치도 없지만, 그렇다고 어떤 비난을 받아서도 안 된다. 자애적(慈愛的)인 행동들에는, 비록 그것이 다소 강한 자리(自利: self-interrst)의 동기에서 나온 것이라 하더라도, 이런 이유에서 더 많은 미덕(美德)이 있다, 그들은 자애적(慈愛的)인 천성의 힘과 활력을 나타낸다.


배반(背叛)과 기만(欺瞞) 641

배반(背叛)과 기만(欺瞞)은 극히 위험하고 극히 두려운 악덕이다. 그리고 동시에 매우 용이하게, 그리고 많은 경우 매우 안전하게 빠져들게 되는 악덕이기 때문에, 우리는 다른 어떤 악덕들보다 이것에 대해 더 많은 경계심을 갖는다. 그래서 우리의 상상력은 모든 사정과 모든 경우에 있어서 이들에 대하여 치욕의 관념을 부여하는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이들은 여성에게 있어서의 정절(貞節)의 상실과 유사하다. 정절은, 마찬가지 이유로, 우리가 그것을 보호하기 위해서 극도로 조심하는 미덕이다. 그리고 우리의 감정은 양쪽 모두에 관해서 똑같이 민감하다. 정절의 파기는 회복할 수 없는 불명예를 준다. 어떤 상황이나 어떤 유혹도 변명거리가 되지 못한다. 어떠한 슬픔이나 또는 어떠한 후회도 그것을 속죄하지 못한다. 이러한 점에서 우리는 너무나 민감하기 때문에, 심지어 강간(强姦)당한 것까지도 수치스럽게 여기며, 마음속으로 스스로 무고(無辜)함을 믿는다고 해서 그것이 우리의 상상 속에서 더럽혀진 육체를 씻어 주지는 못한다.


맹세의 위반, 신의의 파기
641

맹세(faith)의 위반에 대해서도 사정은 마찬가지이다. 만약 그 맹세가 엄숙하게 선서된 후에 이루어진 것이라면, 비록 그것이 가장 무가치한 인간에 대하여 이루어진 것일지라도 그렇다. 신의(信義: fidelty)는 너무나도 필요한 미덕이기 때문에, 심지어 우리는 일반적으로 다른 어떤 것도 빚진 일이 없는 사람이나, 우리가 합법적으로 죽여버릴 수 있는 그런 사람에 대해서조차 신의는 지켜야 하는 것으로 이해하고 있을 정도이다. 신의를 파기한 사람이, 자신이 약속을 했던 이유는 자신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서였다고 주장하거나, 그 약속을 지키는 것과 다른 어떤 존경할 만한 의무의 이행이 양립할 수 없기 때문에 그것을 파기했다고 주장해 보았자 소용이 없다. 이러한 사정들은 그 불명예를 경감시켜 주기는 하겠지만 그것을 완전히 씻어 주지는 못한다. 그는 어느 정도의 수치심과 불가분하게 연결되어 있다고 사람들이 상상하는 어떤 떳떳치 못한 행동을 저지른 것으로 보인다. 그는 스스로 엄숙하게 지키겠다고 공언(公言)했던 약속을 어겼다, 그리고 그의 성격은, 비록 회복할 수 없을 정도의 오점을 갖게 된 것은 아니라 하더라도, 최소한 조롱거리가 되는데, 그것을 완전히 지워버리기는 매우 어렵다.


우리의 모든 본능적인 욕망들 중에서 가장 강한 것들 중의 하나
648

신뢰를 받고 싶은 욕망, 다른 사람들을 설득하고 싶은 욕망, 다른 사람들을 지도하고 지휘하고 싶은 욕망은 우리의 모든 본능적인 욕망들 중에서 가장 강한 것들 중의 하나인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욕망들은 아마도 본능(本能)으로서, 이 본능 위에 언어(言語)의 관능(官能), 즉 인성 특유의 관능이 세워져 있는 것이다. 다른 어떤 동물도 이런 종류의 관능을 가지고 있지 않다. 우리는 다른 어떤 동물들에게서도 자기 동류(同類)들의 판단과 행위를 지도·지휘하고 싶어 하는 어떤 욕망도 발견할 수 없다. 위대한 야심, 남들보다 우월하고자 하는 욕망, 남들을 지도·지휘하고자 하는 욕망은 전적으로 인류 특유(特有)의 것으로 보이며, 동시에 언어는 야심을 위한, 남들보다 우월하기 위한, 남들의 판단과 행위를 지도·지휘하기 위한 위대한 도구이다.


대화와 교제의 큰 즐거움 651

대화와 교제의 큰 즐거움은 감정과 의견이 어느 정도 일치하고 속마음들이 어느 정도 조화를 이루는 데서 생겨나는데, 그것은 수많은 악기(樂器)들처럼 서로 조화를 이루고 또한 서로 박자가 맞아야 한다. 그러나 이러한 유쾌한 조화는 감정과 의견의 자유로운 교류(交流)가 없으면 이루어질 수 없다. 이러한 이유로 우리 모두는 서로 어떻게 느끼는지 알고자 하고, 서로의 가슴속 깊이 들어가서 그 진실한 감정과 정서를 보고자 하는 것이다. 우리로 하여금 이 천연의 격정에 탐닉하게 하는 사람, 자신의 가슴 속으로 우리를 초대해 주는 사람, 말하자면 자신의 가슴의 문을 활짝 열어 주는 사람은 다른 무엇보다도 사람들을 더 즐겁게 해주는 일종의 후한 대접을 베풀어주는 것으로 보인다. 양호한 기질(氣質)을 가진 사람은, 만약 그가 자신이 느끼는 진실한 감정을, 그리고 그가 그것을 느끼기 때문에, 말로 표현할 용기가 있다면, 그는 언제나 사람들을 유쾌하게 할 수밖에 없다.


아담 스미스의 경우 662

아담 스미스는 일반적으로 『국부론(國富論: The Wealth of Nations)』의 저자로서 근대경제학의 창시자로서만 알려져 있으나, 실은 그는 결코 인간사회의 경제활동의 측면에만 관심을 가지고 있었던 협의(狹意)의 경제학자는 아니었다. 오히려 근대 시민사회 형성기에 있어서 인간과 사회의 기본문제에 대한 총체적 인식에 노력하였던 사회철학자(社會哲學者)였다. 그는 과학 방법론, 수사학(修辭學), 신학, 문학, 윤리학, 법학, 역사 이론, 국가론, 정치경제학 등 광범위한 분야에서 하나의 거대한 학제적(學際的) 체계를 수립하려고 노력하였던 철학자였다. 당시는 학문이 아직 각각의 독립분야로 완전히 분화되기 이전이었기 때문에, 대부분의 근대 사상가들의 경우 학제적 경향이 뚜렷하게 나타나지만, 아담 스미스의 경우처럼 거대한 학제적 체계수립에 어느 정도 성공한 예는 거의 찾아보기 힘들다 하겠다.


도덕감정의 기초는 동감의 능력 672

아담 스미스는 도덕감정의 기초 내지 내용은 인애가 아니라, 모든 인간이 그가 속한 계층이나 계급에 관계없이 가지고 있는 동감(sympathy)의 능력이라고 주장한다. 그는 그의 『도덕감정론』의 서두에서, <아무리 인간이 이기적이라 할지라도, 타인의 행·불행에 관심을 가지게 하는 요인·원리가 인간의 본성 속에 명백히 내재하여 있다. ······ 타인의 슬픔을 보고 슬픔을 함께 느끼는 감정의 존재는 증명을 요하지 않는 하나의 명백한 사실이고, 그 사람이 얼마나 선하냐 유덕하냐에 따라 좌우되지 않는 본원적 감정의 하나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여기서 동감(同感)이란 자기를 타인의 입장과 동일한 입장에 놓고, 타인이 느끼는 것과 동일한 것을 느낄 수 있는 능력, 환언하면 상상에서의 역지사지(易地思之: imaginery change of situation) 능력을 전제한다.


상호동감의 즐거움
673

상호동감(相互同感)의 즐거움(pleasure of mutual sympathy)은 인생의 가장 큰 즐거움의 하나이다. 아담 스미스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우리의 가슴 속에 있는 감정과 동일한 이웃의 동감(fellow-feeling)을 느끼는 것보다 더 큰 즐거움은 없고, 그 반대로 이웃의 동감의 부재(不在)를 느끼는 것보다 더 충격적인 것은 없다.>


보통 사람들이 정의를 판단하는 근거는 효용이 아니라 동감 681

아담 스미스는 결코 일상의 부정의에 대한 처벌을 시인하는 근거가 정의의 공공적 효용성에 있다고 보지 않았다. 그는 <모든 사람들은, 가장 우매하고 사려가 없는 사람들까지도 사기·배신·부정을 혐오하고 그런 자들이 처벌받는 것을 보고 기뻐한다>고 하면서, 보통 사람들이 정의를 판단하는 근거는 효용(效用)이 아니라 동감(同感)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이러한 동감정의론(同感正義論)이 실은 중상주의적인 각종 정책·법에 대한 비판이라는 실천적 문제와 깊은 관련이 있음은 지적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공공복리, 효용이 정의의 근거라고 하는 사고야말로 국가에 의해 강제할 만한 법의 범위를 부당하게 확대시켜, 중상주의적인 각종 정책·법의 존재를 지지하는 근거가 될 수 있고, 종국적으로 <자유의 체계>에 대한 부정을 결과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당면 문제 698

단순상품생산 양식의 시대가 끝나고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이 본격화되면서, 한쪽에는 노동만을 가지고 생산에 참가하는 노동자와 다른 쪽에는 생산수단만을 제공하며 생산에 참가하는, 즉 노동하지 않는 자본가(資本家)가 등장하여, 자본과 노동의 완전분화가 일어나게 된다. 그렇게 되면 재화는 더 이상 노동의 생산물이라고만 보기 어렵게 되고, 노동가치설은 더 이상 자유(自由)와 공정(公正)의 양립을 증명하는 이론으로서의 설득력을 잃게 된다. 결국 아담 스미스의 낙관론은 더 이상 성립할 수 없다. 그리하여 아담 스미스 이후 200여년의 역사는 실은 자유와 공정(즉, 配分的 正義)의 양립 문제를 둘러싼 고뇌의 역사였다고 볼 수 있고, 오늘날에도 이 문제에 대한 명쾌한 해결을 보지 못하고 있는 셈이다.

자유인의 창의를 사회발전의 원동력으로 존중하고, 자유경쟁 시장질서의 조화와 효율을 믿는, 모든 <자유의 체계>의 신봉자들이 반드시 해결해야 할 당면 문제가 바로 자유(自由)와 공정(公正)의 양립을 가능케 하는 사회구성 원리, 사회조직 원리의 제시이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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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 2013-01-29 02: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번역글이 조금 더 쉽고 부드럽다면 한결 아름답겠지만,
이만큼으로도 요즈음 사람들한테는
생각을 넓히는 좋은 이야기가 되겠어요.
잘 읽었습니다.

oren 2013-01-29 11:35   좋아요 0 | URL
번역에 아쉬움이 없을 순 없겠지만 그래도 저는 이 책을 여러 번 읽으면서 그때마다 번역하신 분들의 노고에 머리숙여 고마워하면서 읽었답니다. '역자후기'에 보니 번역하신 분들도 이 책을 우리말로 옮기느라 엄청난 고생을 하셨더라구요.

이 책은 찰스 다윈이 쓴『종의 기원』에도 심대한 영향을 줬는데(이 책이 『종의 기원』보다 무려 100년 먼저 나왔지요), 애덤 스미스가 그만큼 인간본연의 '천성'을 날카롭게 꿰뚫어봤다는 반증이 아닐까 싶어요. 진화생물학자인 최재천 교수도 이 책을 인용하면서 '베풂'이나 '상생' 혹은 '경제민주화'를 언급한 걸 본 적이 있답니다.
http://blog.joinsmsn.com/media/folderlistslide.asp?uid=bytylp&folder=26&list_id=10828265

페크pek0501 2013-01-29 15: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렌 님 덕분에 제가 이 책을 샀잖아요. 이 책을 사고 얼마나 뿌듯하고 즐거웠는지 몰라요.
마치 세상을 얻은 기분이랄까요?(좀 과장해서 말하면요...ㅋ)
제 책에도 군데군데 밑줄이 그어져 있고 군데군데 접혀져 있고 그래요.
인간을 이해하는 또는 인간에 대해 배우는 참고서로 생각합니다.
이 책을 두 번 읽는 게 목표인데, 그게 되려나 모르겠어요.
아직 전부를 읽지 못했거든요. 그러나 언젠간 다 읽게 될 것 같아요.
뽑아 놓으신 글을 읽으니 제가 읽었던 것도 많네요. ^^

oren 2013-01-29 23:31   좋아요 0 | URL
우와~ 페크님께서 이 책을 사신 후에 그렇게 좋아라 하셨는지는 미처 몰랐군요.

저도 이 책을 처음 읽을 땐 다소 생경한 한자어와 읽기에 다소 껄끄러운 번역문체 때문에 고생을 좀 했는데 어느 정도 적응하고 나니 술술 넘어가더군요. 페크님께서도 아마 이 책을 두 번째 읽으실 때는 틀림없이 빠른 속도로 읽기를 끝내실 수 있으리라 믿어요.

다크아이즈 2013-01-30 00: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페크언냐님 믿고 따라서(?!) 저도 일단 보관함에 담습니다. 오렌님은 알라디너의 보배. 왜냐면 철학서적들 가끔 읽고 싶어도 두루뭉술하게 짚어주시는 분들은 많아도 이렇게 섬세하게 안내해주시는 분은 드물잖아요.
번역의 한계를 넘어서서 반이라도 이해할 수 있었으면 좋겠는데, 설사 이해 다 못해도 건질 게 많을 것 같습니다.
인간 전반을 이해하기 전에 전 저 스스로를 모르겠다는 게 요즘 제 딜레마입니다.ㅠ
철학책 읽다 보면 하나하나 깨치게 될까요? 오렌님 오래오래 알라딘을 지켜주세요. 격하게 님 서재 아끼옵니다^*

oren 2013-01-30 01:16   좋아요 0 | URL
아이고... 너무 과분한 말씀만 남겨주셨네요..
팜므님께서도 어려운 철학책들을 평소에 두루 읽으시는 줄 익히 알고 있습니다. ㅎㅎ 그러니 애덤 스미스의 책에 대해 너무 걱정 마시고 마음편히 읽어보셔도 좋을 듯해요. 읽다보면 '인간 전반'이 아니라 가장 이해하기 어려운 '우리 자신'을 조금이나마 더 잘 이해할 수 있으리라 믿어요.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