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루스트가 우리의 삶을 바꾸는 방법들 - 개정판
알랭 드 보통 지음, 박중서 옮김 / 청미래 / 2010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제임스 조이스와 마르셀 프루스트. 이 두 사람의 공통점은 무엇일까.

문학 고전에 관심을 가진 사람이라면 누구나 금방 몇 가지를 떠올릴 수 있으리라. 첫째, 둘 다 문학사에 길이 남을 대단한 소설을 썼다는 점. 둘째, 두 작품 모두 그 어떤 작품에도 뒤지지 않을 만큼 대단한 분량의 소설이라는 점, 셋째, 읽기가 비교적 난해한 작품이어서 두 소설 모두 아무에게나 쉽게 읽히기를 허용하지 않는다는 점.

내가 여기에 재미있는 한 가지를 더 추가할 수 있다면 그건 (물론 이번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두 사람이 공교롭게도 서로의 작품을 전혀 읽어보지 않았다는 점이다. 적어도 프루스트가 죽었던 1922년 까지는 그랬다.

마침 1922년에 두 작가는 스트라빈스키의 작품 초연을 축하하는 파리의 저녁만찬에 함께 참석한 적이 있었다. 거기서 두 사람이 만찬 주최자로부터 서로 소개를 받은 뒤에 벌어진 일에 대해 훗날 조이스가 친구에게 밝힌 내용이 걸작이다. 
 

우리의 대화는 "아니요"라는 말로만 이루어졌네. 프루스트는 나더러 아무개 공작을 아느냐고 묻더군. 내가 그랬지. "아니요." 여주인은 프루스트에게 『율리시스(Ulysses)』의 이런저런 대목을 읽어보았는지 물어보더군. 그러자 프루스트가 말했지. "아니요." 이런 식이었지.(154쪽)


나 역시 방금 대화를 나눈 저 두 사람의 소설을 읽어봤냐는 질문을 받는다면 나도 "아니요."라는 대답밖에 내놓을 게 없다. 다만 거기에 덧붙여 뭔가 주절주절 잡다한 얘기를 더 이어나갈 수 있게 되었다면 그건 순전히 알랭 드 보통이 쓴 책『프루스트가 우리의 삶을 바꾸는 방법들』을 읽은 덕분이 아닐까 싶다.
 

내가 낯설게만 느껴지던 프루스트에게 조금 더 가까이 다가선 건 앙리 베르그송의 책『의식에 직접 주어진 것들에 관한 시론』을 읽으면서부터다. 그 후 프루스트의 그 유명한 소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구매하면서 우연히 알랭 드 보통의 이 책도 함께 주문했는데, 그건 내가 이 책에 대해 전혀 모른채 순전히 '즉흥적인' 판단에 따른 것이었다. 그런데 이 책이 생각보다 너무 재미있고 궁금해서 금새 후딱 읽어버렸다.(사실 며칠은 걸렸다. 다만 KTX를 기다리던 때, 그리고 KTX를 타고 엄청난 속도로 내달릴 때, 그리고 사무실에 앉아 일할 때, 그런 바쁜 틈만 골라서 말 그대로 '틈틈이' 읽었는데 금새 책의 끄트머리에 다다랐다는 얘기다.) 근래에 읽은 책 가운데 이 책만큼 빨리 읽은 책도 없을 듯한데, 우연히 구입한 책이 이렇게 재치있고 세련되고 재미있을 줄은 미처 몰랐다.
 
이 책에서 내가 느꼈던 가장 유쾌한 감정들은 아마도 거의 틀림없이 저자인 알랭 드 보통이 남몰래 추구한 '진부하지 않음에의 열망' 때문이지 싶다. 그런데 이 책에서 다루는 우리의 주인공 '프루스트'는 어떤 인물인가. 그는 그야말로 '진부한 표현' 즉 클리셰[Cliché]에 대해서는 극도로 싫어했던 인물이 아닌가. 그가 뭇 소설가들을 거의 절망에 빠트릴 만큼 놀라운 문학적 표현들로 가득한 이 걸작소설을 쓸 수 있었던 배경도 어찌보면 '클리셰에 대한 특유의 예민한 거부감'을 타고난 데 힘입은 바가 컸던 것으로 보인다. 결과적으로 이 책은 진부함과는 너무나도 동떨어진 작품과 어쩌면 그보다 더한 삶을 살았던 프루스트에 대해 쓴 책이며, 알랭 드 보통의 남다른 글솜씨 덕분에 '신선하고, 흥미롭고, 유머러스하고, 생기넘치고, 매력적이고, 눈부시다'는 온갖 진부한 찬사들을 역설적으로 얻게 된 듯싶다.

내가 이 책의 리뷰를 쓰면서 조금이나마 클리셰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 그런데 나만큼 진부한 표현을 자주 쓰는 사람도 그런 진부함에서 벗어난다는 게 가능하기나 할까. 어쨌든 내가 손쉽게 떠올린 생각 하나는 카메라 셔터를 좀 누르면서 글을 써보자는 것이다. 그건 물론 이 책을 쓴 알랭 드 보통의 방식(그림이 많이 포함된 글쓰기)을 얼마간 모방하는 일이고, 또 그의 책으로부터 직접 '이미지'를 불러내 온 것이긴 하지만 그건 중요치 않다고 본다.


시간 여유를 가지는 방법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라는 소설의 중심 주제는 '시간의 소실과 상실 뒤에 놓인 원인에 대한 탐색'이다. 그러나 프루스트가 자신의 책 제목을 두고 '오해받기 쉽다'고 말한 것처럼 '아름답고 서정적이던 시대의 추이를 추적하는 회고록'으로 생각하면 큰 오산이다. 오히려 이 작품은 어떻게 하면 '시간의 낭비를 중지하고 음미할 수 있는 삶을 시작할 것인가' 하는 문제에 관한 이야기이며, 그래서 프루스트가 '우리의 삶을 바꾸는 방법들'에 대해 쓴 소설을 기본 소재로 삼아 알랭 드 보통이 박학다식하고 장난스러울 정도로 아이러니컬한 방식으로 우리에게 다시 들려주는 '음미하는 삶을 사는 방법'에 관한 이야기이다.

<그림 1> 한 문장

 

마치 뱀처럼 길게 늘어진 위의 그림을 자세히 살펴보면 저건 '무려 4미터에 이르고, 웬만한 와인 병의 아랫부분을 17번은 충분히 감을 수 있을 정도'로 긴 '한 문장'이다. 프루스트 소설의 몇 가지 거북한 특징 가운데 하나가 문장 하나하나의 어마어마한 길이인데, 그걸 그림으로 그려 놓으니 마치 생텍쥐페리의 소설 「어린왕자」에 나오는 보아뱀 그림을 보는 것처럼 흥미롭기만 하다.

의사였던 프루스트의 동생이 말한 것처럼 "한 가지 슬픈 일은 사람들이 아주 많이 아프거나, 아니면 다리가 부러지거나 하기 전에는『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읽을 기회를 얻지 못한다는 사실" 말고도 우리는 또하나의 도전에 직면해야 하는 것이다. 저토록 긴 문장들을 마주 대하는 어려움 말이다.

프루스트는 왜 '잠들기 전에 침대에서 어떻게 뒤척이고 돌아눕는지를 묘사하기 위해 무려 30쪽이나 할애하는' 파격을 시도했을까. 그건 어떤 경험을 전달하기 위한 문장에서 단어의 적절한 개수를 규정하는 길이의 근본 법칙을 무시하는 것으로부터 많은 이득을 얻을 수 있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잠들기에 관해서 무려 30쪽이나 쓰도록 프루스트를 인도한 정신'에 대한 우리의 저항은 생각보다 너무 만연되어 있고 뿌리가 깊다.

<그림 2> 기차시간표 

 


그는 일생의 마지막 8년 동안을 파리를 떠나지 않았는데, 저 시간표를 마치 시골생활에 관한 흥미진진한 소설처럼 읽고 즐겼다고 한다. '취향이 고상한 사람들이 보기에는 시시하기 짝이 없을 이 인쇄물에는 그가 어린 시절 이래로 전혀 들어보지 못한 이름들이 가득한 까닭에, 그에게는 훌륭한 철학책보다도 훨씬 더 큰 가치가 있을 것'이라고 여겼다. 그럼으로써 그는 우리에게 충고한다. '여러분이 지금 하고 있는 일을 자신은 할 '시간이 없음'을 이유로 들어 '바쁜' 사람들-그들의 일이 제아무리 어리석다고 하더라도-이 느끼는 자기만족'에 대항하라고.


성공적으로 고통받는 방법

프루스트의 삶은 한편으로는 시련의 연속이었다. 분별없는 극단적인 유대인 어머니의 문제("어머니에게 나는 항상 네 살짜리에 불과헀다"), 거북한 욕망(어릴 적부터의 동성애적 취향), 데이트의 문제들(여자친구들로부터의 숱한 퇴짜), 연극계 경력의 실패, 친구들의 몰이해(천재에게는 전형적인 문제), 그 밖의 신체적 고통(천식, 식단의 애로, 소화불량, 과민성 피부, 추위, 기침, 침대에서 나오기 싫어함, 이웃의 소음, 다른 질환들(감기,발열,시력 감퇴, 치통, 팔꿈치 통증, 현기증), 타인의 불신) 등등.

"행복은 몸에 좋지만, 정신의 강인함을 발달시켜주는 것은 바로 슬픔이다"라는 그의 말에 담긴 암시로부터 생겨난 말은 '프루스트적 자극'이다.

가령 자동차가 잘 움직인다면, 무슨 이득을 바라고 우리가 굳이 그 기계의 복잡한 내부 작동에 관해서 배워야 할까? 연인이 충성을 맹세한다면, 우리가 왜 굳이 인간의 배신행위의 역학에 관해서 숙고해야 할까? 우리의 모든 만남을 존중해야 한다면, 왜 우리가 사회생활의 굴욕에 관해서 조사하고 싶은 의욕이 생기게 될까? 우직 슬픔 속에 빠졌을 때에야만 비로소 우리는 어려운 진실에 맞서고자 하는 프루스트적인 자극을 받게 된다. 우리가 이불 밑에서 울부짖을 때, 가을바람에 흔들리는 나뭇가지와도 같을 때에야 비로소.(96쪽)


 

걸작의 창조라는 야심이 전혀 없는 상황이라면, 우리는 어떻게 보다 성공적으로 고통을 체험하는 법을 배울 수 있을까? 비록 철학자들은 전통적으로 행복의 추구에 관심을 기울여왔지만, 사실은 적절하고도 생산적으로 불행해지는 방법을 추구하는 쪽에 훨씬 더 큰 지혜가 놓여 있는 것만 같다. 불행의 끈덕진 반복은 이 문제에 대한 어떤 효과적인 접근방식이야말로 행복을 향한 모든 유토피아적 추구의 가치를 거뜬히 능가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슬픔의 베테랑이던 프루스트는 이 사실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100쪽)


 "온전한 삶의 기술이란 우리에게 고통을 일으키는 개인들을 이용하는 것이다." " 슬픔이 생각으로 바뀌는 바로 그 순간, 슬픔은 우리의 가슴에 상처를 입히는 그 능력 가운데 일부를 잃어버린다." 프루스트의 말이다.

알랭 드 보통이 이 책의 제4장 '성공적으로 고통받는 방법'의 말미에서 주장하는 '교훈'은 이렇다.
 

타인이 얘기치 못한 그리고 상처가 되는 행동을 했을 경우, 단순히 안경을 닦는 것보다는 더한 뭔가로 반응하라는 것, 다시 말해서 그 행동을 우리의 이해를 확장시킬 수 있는 기회로 바라보라는 것이다. 비록 프루스트가 우리에게 경고한 것처럼, "우리가 다른 사람의 진정한 삶을, 그러니까 보이는 세계 아래에 있는 현실 세계를 발견할 때, 우리는 마치 평범한 외관에도 불구하고 그 안에는 감춰진 보물과 고문실, 또는 해골이 가득 찬 집에 들어갔을 때처럼 상당한 놀라움을 느끼게 된다.(116쪽)



감정을 표현하는 방법

프루스트를 가장 짜증나게 만들었던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앞에서도 언급했던 클리셰의 문제였다. 

 

클리셰의 문제란, 그것들이 잘못된 생각을 담고 있다는 점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들이 매우 좋은 생각의 피상적인 연결에 불과하다는 점이다. 해질녘에 해는 종종 불타는 듯하고, 달은 은은하게 마련이지만, 만약 우리가 해나 달을 볼 때마다 번번이 그렇다고 말한다면, 결국 우리는 이것이야말로 그 대상에 관해서 이야기되는 최초의 말이 아니라 최후의 말이라고 믿게 될 것이다. 클리셰가 유해하지 않은 경우는, 그것들이 표면만을 스치고 지나갔지만 어떤 상황을 적절하게 묘사하는 것처럼 믿도록 우리에게 영감을 제시했을 때뿐이다.(124쪽)



좋은 친구가 되는 법

프루스트가 죽고 난 뒤 (상당히 많았던) 그의 친구들은 한 목소리로 프루스트야말로 교우관계의 모범이었으며, 우정의 화신이었다고 주장했다. 그렇지만 그는 '우정은 피상적인 노력'에 불과하며, "우리가 치유 불가능할 정도로 혼자는 아니라고 믿게 만들려고 하는 거짓말'이라고 봤다. 그리고 대화 역시 쓸모없는 활동이라고 치부하며 "우리가 평생 동안 아야기를 한다고 해도, 어쩌면 단 일분의 공허함을 무한히 반복하는 것에 지나지 않을 수도 있다"고 말했다. 그리고 프루스트는 실제로 우정을 비호하는 예찬 위주의 주장들에 도전했고, 그건 앞에서 언급했던 1922년에 있었던 '제임스 조이스와의 대화'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그 두 사람은 그날 저녁식사 후에 택시에 올라탔는데, 동승한 내내 그들은 서로 한마디 말도 나누지 않았고, 프루스트의 아파트가 있는 아믈랭 거리에 도착하자, 프루스트는 동승했던 다른 만찬 주최자한테 "조이스씨께 이 택시로 집까지 모셔다 드려도 괜찮겠느냐고 여쭤봐주세요."라고 말을 건넸고, 택시는 부탁받은 대로 떠났으며, 그 이후 두 사람은 두번 다시 만나지 못했다고 한다. 대화는 '우리의 가장 깊은 자아를 표현하는 장으로 보았을 때' 너무나 많은 한계를 지닌 셈이다. <저자와의 대화>를 너무 기대할 필요는 없다는 게 저자의 주장인 셈이다.


<그림 3> 저자와의 대화



프루스트가 1913년에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제1권을 간행했을 때만 하더라도 이 작품이 그렇게 어머어마한 분량이 되리라고는 그 자신조차도 생각하지 못했던 건 잘 알려진 일화다. 그는 애당초 3부작이 될 것이라고 행각했지만 '말하고 싶은 새로운 것들을 상당수 발견'했고 결국에는 원래의 50만 단어가 100만 단어 하고도 25만 단어 이상으로 늘어나게 되었다. '일찍이 그가 완벽하다고 판단했던 요점들은 그가 들여다보자마자 다시 써달라고 또는 새로운 이미지나 은유를 이용하여 잘 다듬거나 더 발전시켜달라고 울부짖는' 듯했고, 그래서 결국 원고는 난장판이 되고 말았다고 한다.

<그림 4> 원고 ①




<그림 5> 원고 ②




프루스트는 친구와 사귀는 일과 독서 활동 모두 '다른 사람들과의 소통'과 연관되어 있는 점에 주목하여 우정을 독서에 비유한 적이 있는데, 친구가 아주 많았던 그도 '우정의 한계'를 깊이 인식하게 되면서 '독서 쪽에 핵심적인 이익이 있다'고 보았다.

<그림 6> 원래의 순수성 




<그림 7> 종이책과의 소통



눈을 뜨는 방법

무엇인가를 다시 한번 바라봄으로써 야기될 수 있는 행복이야말로 프루스트의 치료 개념에서 핵심적이라고 할 수 있었다. 이는 우리의 불만이 각자의 삶에 본래적으로 결여되었던 무엇인가의 결과가 아니라, 다만 우리가 각자의 삶을 적절하게 바라보기에 실패한 결과일 가능성이 과연 어느 정도까지인지를 밝혀준다. (193∼194쪽)



<그림 8> 프루스트의 핵심적인 구분


<그림 9> 전혀 다른 이미지에 근거해서 판단을 내리기 때문




<그림 10> 미숙한 화가의 봄그림



사랑 안에서 행복을 얻는 방법

우리가 프루스트의 소설 속 등장인물들의 이야기를 통해 '사랑과 행복'을 얻는 방법은 무엇일까. 그것은 우리가 심리적으로 너무나 빠지기 쉬운 '친숙한 것을 경멸하게 될 가능성'을 피하라는 것이다. (순전히 내 방식대로 진부하게 말하면) '결핍'을 겪고 나서야 그 소중함을 뒤늦게 깨닫게 되는 어리석음을 경계하라는 것이다. 우리가 애써 간절히 소망하던 온갖 다양한 대상들 혹은 목표들을 이루고 난 뒤에 우리가 그 친숙한 대상들로부터 '눈을 떼는 속도'는 참으로 놀랄 만하다. 하이데거式으로 말하자면 '호기심의 무정주성'을 주의하라는 것이다.

호기심의 무정주성(無定住性)

그러나 자유롭게 된 호기심은 본 것을 이해하기 위하여, 다시 말해서 그것에 대한 존재에 이르기 위하여 보려고 애쓰는 것이 아니라 그저 보기 위해서 보려고 애쓴다. 호기심이 새로운 것을 찾는 이유는 그 새것에서 다시금 새로운 새것으로 뛰어들기 위해서이다. 이러한 봄의 염려에서 중요한 것은, 파악하여 알면서 진리 속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를 세계에 맡겨버릴 수 있는 가능성이다. 그러기 때문에 호기심은 특이하게 가까운 것에는 머물지 않는 특성을 띠고 있다. 그러므로 호기심은 또한 고찰하며 머무는 여가도 추구하지 않으며, 언제나 새것과 만나는 것을 계속 바꿈으로써 생기는 동요와 흥분을 찾는다. 호기심은 아무 데도 머무르지 않음으로 해서 부단히 산만함[부산함]의 가능성을 배려한다. 호기심은 존재자를 경탄하면서 고찰하는 것, 즉 타우마체인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 호기심의 관심사항은 경이에 의해서 이해하지 못함에 인도되는 것이 아니다. 호기심은 앎을 배려하는데, 순전히 안 것으로 간주하기 위해서이다. 호기심을 구성하는 두 계기, 즉 배려된 주위세계에 머물지 않음과 새로운 가능성을 향한 산만함[부산함]은 이 현상의 세번째 본질성격의 기초를 부여하는데, 우리는 그것을 무정주성(無定住性)이라고 이름한다. 호기심은 도처에 있으면서 어디에도 없다. 세계-내-존재의 이러한 양태는 일상적 현존재가 그 안에서 끊임없이 뿌리 뽑히고 있는 그런 새로운 존재양식을 드러낸다.

  - 마르틴 하이데거, 『존재와 시간』中에서


어쩌면 프루스트의 소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는 '친숙함 때문에 잊어버리거나 진짜로 잃어버린 소중한 대상들'을 찾을 수 있도록 환기해 주는 그런 이야기가 아닐까 싶은 생각도 든다.


<그림 11> 창백한 모사품



이 책을 읽으면서 내가 한참 동안이나 여러가지 생각에 잠겼던 부분도 바로 이 대목이었다. 프루스트가 말하고 싶어했던 이야기가 얼마나 많은 '소중한 대상들'을 떠올리게 하는지 정말 놀라울 정도였다. 내가 그토록 애써 가지려 했던 그 모든 대상들에 대해서 나는 지금 얼마나 까마득히 먼 과거의 일처럼 잊고 지내왔는지, 혹은 얼마나 당연시 여기며 살고 있는지 그저 놀라울 따름이었다. 그런 대상들은 가령 (진부한 표현으로 되돌아와) 내차, 내집, 내방, 내가 좋아하는 물건들, 나만의 서재, 일자리, 내 계좌의 잔고뿐만은 아니다. 오히려 훨씬 더 소중한 대상들은 정작 나의 아내와 아이들, 나의 부모님과 형제들, 그리고 늘 함께 웃고 떠들 수 있는 소중한 친구들과 이웃들일 것이다.


<그림 12> 현존하는 어떤 것 




<그림 13> 거짓된 친숙함 




<그림 14> 음미와 부재간에 맺어진 관계




우리는 뭔가를 사기 전에 얼마나 오랫동안 생각을 거듭해야 했던가에 따라 그것을 성취했을 때 뒤따르는 만족감이 얼마나 달라지는지를 쉽게 예상할 수 있다. 프루스트 역시 소설 속 인물들을 통해 '지연에 수반되는 이익'을 예시했다. 알베르틴과 게르망트 공작부인은 모두 패션에 관심이 있었고, 알베르틴은 돈이 없었고, 공작부인의 옷장에는 옷이 넘쳐흐를 지경이었다. 그 결과 알베르틴은 비록 옷은 더 적었을지 모르지만, 옷에 대한 이해나 음미나 사랑은 훨씬 더 컸다.

<그림 15> 부가 욕망을 성취시키는 속도



책을 내려놓는 방법

알랭 드 보통이 이 책의 마지막 장에서 우리에게 들려주는 이야기는 '책을 내려놓는 방법'이다. 프루스트의 얘기를 먼저 들어보자.

······ 사람이 무엇을 스스로 느끼는지를 자각하게 되는 방법으로 말하자면, 어떤 거장이 어떻게 느꼈는지를 스스로 재창조하려고 시도하는 것보다 더 나은 방법은 없을 것이다. 이런 심오한 노력에서는 우리가 그의 생각과 함께 빛 속으로 끌어내는 것이야말로 우리의 생각 그 자체이다.(246쪽)

알랭 드 보통의 생각은 어떤가. 그는 말한다. '책이 우리를 눈뜨게 해주고, 우리를 예민하게 만들고 , 우리의 지각 능력을 향상시켜줄지는 모르지만, 어느 시점에 이르면 그런 작용은 중지되고 만다. 이런 중지는 우연에 의한 것도, 가끔 그런 것도, 운이 나빠서 그런 것도 아니며, 다만 불가피한 것이고, 오히려 자명한 것이다. 왜냐하면 저자는 우리가 아니다라는 순전하고도 단순한 이유 때문이다.' 결국 이것은 독서와 학문 전반에 '어딘가 속박된 차원'이 있다는 것이고 프루스트는 이 점을 제대로 인식했다. 그래서 좋은 책의 저자에게 '결론'이라고 불릴 수 있는 것들이 결국 독자들에게는 다만 '자극'이라고 불릴 수밖에 없다고 지적했다.

<그림 16> 자극에 불과한 것


이 말에 대한 알랭 드 보통의 부연 설명은 이렇다. '책이라는 것이 우리가 느끼는 특정한 사물을 자각하는 데에 큰 도움이 되기 때문에, 프루스트는 이런 대상에 대한 우리의 삶을 해석하는 일 전체를 순순히 내팽개치고 싶은 유혹이 얼마나 큰지를 인식했던 것'이라고. 따라서 우리는 책을 주의깊게 읽어야 하며 그 과정에서 우리의 독립성을 예속시키지는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을 경우, 우리는 '지나치게 의존적인 독자'가 될 수밖에 없고, '일리에 콩브레를 방문하고 싶은 유혹'으로부터 자유로울 수가 없게 된다.

우리가 방문해야 할 곳은 일리에 콩브레가 아닐 것이다. 프루스트에게 바치는 진정한 경의는 그의 눈으로 우리의 세계를 바라보는 것이지, 우리의 눈으로 그의 세계를 바라보는 것은 아닐 테니까.(272쪽)



십 년쯤 전에 가족과 함께 피렌체에 갔을 때 단테의 생가를 가본 적이 있었다. 나는 거기서 무엇을 보고 느꼈을까. 사실 아무것도 보고 느낀 게 없었다. 정작 단테를 제대로 만난 건 그로부터 몇 년 후『신곡』을 온전히 다 읽고 나서였다. 무려 100곡에 달하는 대서사시의 서곡인 제1곡을 펼치면 어두운 숲 속에서 헤매는 주인공 단테가 등장한다. 그런데 천국을 향한 머나먼 여정을 시작한 그에게는 다행히도 친절한 안내자 베르길리우스가 곁에 있었다. 그런데 그 서사시의 주인공인 단테는 '죽어서' 지옥과 연옥과 천국을 다닌 것이 아니다. 우리처럼 생생히 살아서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와는 또다른 세계를 두루 여행한 것이다. 단테는 그걸 통해 결국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에서의 삶을 되돌아보게 한다. 푸르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역시 프루스트가 창조해 낸 또다른 세계이다. 그가 만들어낸 낯선 세계로 불쑥 들어서기가 조금은 두려운 나같은 사람에겐 이 책의 저자 알랭 드 보통이 어둠 속 베르길리우스처럼 반갑기 그저없는 훌륭한 안내자인 셈이다. 나는 아직 프루스트의 소설 마지막 제7부「되찾은 시간」에 이르기까지 너무나 까마득한 길을 내 앞에 남겨두고 있지만 이제 그리 머지않아 잃어버린 무엇을 되찾기 위해서라도 프루스트가 만든 가상의 마을 콩브레로 나볼 생각이다.

이쯤에서 책들을 다 내려놓고 다시 되돌아 보는 '나의 문제'는 무엇일까. 그것은 결국 이 책의 저자가 그토록 강조했던 클리셰에서 조금도 벗어나지 못했다는 점이 아닐까 싶다. 소설가는 언어를 통해 우리의 삶을 되돌아보게 한다. 위대한 소설가는 그들만의 언어로 우리가 무심결에 놓치고 마는 삶의 온갖 다양한 측면들을 끊임없이 부각시킨다. 그런 소설가들 가운데 프루스트는 분명 '언어의 한계'를 뛰어넘으려는 눈부신 역작을 우리에게 남겼다. 그러나 내가 최근에 만난 철학자 베르그송은 '언어 예술'이 지니는 '통약 불가능한' 대목을 기어이 지적하고 만다. 그것이 철학자의 임무일 것이고 프루스트 또한 그점을 절실히 인식하면서 자신의 소설을 써나갔을 것이다. 결국, 도대체 낯선 단어인 Cliché와 incommensurable이라는 두 단어가 여전히 문제로 남는다.

······ 이처럼 우리들 각자는 사랑하고 미워하는 나름의 방식이 있으며, 그러한 미움과 그러한 사랑은 인격 전체를 반영한다. 그러나 언어는 모든 사람들에 대해 동일한 말로 그런 상태를 지시한다. 따라서 그것은 사랑, 증오, 그리고 영혼을 흔드는 수천의 감정들의 객관적이고 비개성적인 면만을 고정할 수 있을 뿐이다. 소설가는 다수의 세부들을 병렬함으로써 감정과 관념들에 그들의 원시적이고 살아 있는 개성을 되돌려 주려고 애쓰는데, 우리는 그 감정과 관념들을 공공의 영역-언어가 그처럼 그것들을 내려가게 했던-으로부터 끌어내는 힘에 의해 그의 재능을 판단한다. 그러나 한 운동체의 두 위치 사이에 점들을 무수히 끼워 넣어도 지나간 공간을 결코 메울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가 말한다는 사실만으로도, 우리가 관념들을 서로 연계시키며 그 관념들이 상호 침투하지 않고 병치된다는 사실만으로도, 우리는 우리의 영혼이 느끼는 것을 완전히 번역하는 데 실패한다. 즉, 사유는 언어와 통약 불가능한incommensurable 것으로 남는다.
  - 베르그송, 『의식에 직접 주어진 것들에 관한 시론』中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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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페딘1T 2020-12-26 13:0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아. 시간가는 줄 모르고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oren 2020-12-26 15:40   좋아요 0 | URL
아아...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