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서 우리는 『일리아스』가 훨씬 더 방대한 전체 이야기의 자그마한 일부라는 사실을 한번쯤 고찰할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고대 그리스의 수많은 영웅 서사시가 얼마만큼 많이 존재했는지, 고대의 트로이아 전쟁을 둘러싼 거대한 이야기가 얼마만큼 인류의 문명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는가는 호메로스의 양대 서사시를 '거대한 전체 속의 일부'로서 들여다볼 때 보다 분명해지기 때문이다. 이 분야를 연구한 학자들의 설명에 따르면, 호메로스의 『일리아스』와 『오뒷세이아』는 '트로이아 서사시권(敍事詩卷)'이라는 큰 전체의 일부분이다. 하나의 통일된 전체를 이루는 서사시들은 모두 8편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한다. 이들을 차례로 하나씩 살펴 보자.
그 첫 번째는 『퀴프리아』다. 여기서는 이른바 '파리스의 심판'에서부터 그리스군의 트로이아 도착까지를 취급한다. 우리가 『일리아스』를 통해 희미하게나마 그 전말을 알고 있는 '황금의 사과' 이야기 또한 『퀴프리아』에 자세히 담겨 있으리라고 쉽게 유추할 수 있다. 두 번째가 바로 『일리아스』다. 우리는 무엇보다도 일리아스의 다음 이야기가 제일 궁금하다. 그 내용이 바로 세 번째인 『아이티오피스』에서 이어진다. 여기에는 아킬레우스가 여인족 아마조네스의 여왕 펜테실레이아와 아이티오페스족의 왕 멤논을 죽이고 나서 자신도 아폴론 또는 파리스가 쏜 화살에 죽는 장면이 담겨 있다. 여기에 갑자기 등장하는 멤논이라는 인물은 고대 그리스 문학에서 상당한 비중을 차지하는 인물이고, 고대 이집트의 도시인 테베(오이디푸스 왕이 다스렸던 고대 그리스의 도시 테바이도 여기서 이름을 따왔으며, 호메로스의 『일리아스』에도 이 고대 도시에 대한 이야기가 등장할 정도로, 옛날부터 유명한 도시였다.)에도 그의 거대한 석상이 있을 정도로 유명한 인물인데, 『일리아스』에서는 이 인물의 이름조차 찾아보기 어렵다.
아킬레스와 펜테실레아, 암포라의 그림 부분, BC 525년경, 런던 대영박물관
나는 10여 년 전에 이집트의 고대 도시 테베에 갔을 때 '멤논의 거상'을 직접 본 일이 있었지만, 그에 관한 이야기가 헨리 데이빗 소로우의 『월든』에 무척 자주 등장한다는 정도로만 어렴풋이 알고 있을 뿐 더 이상은 자세히 몰랐다. 사정은 지금도 마찬가지다. 단지 그가 새벽의 여신 에오스의 아들이라는 사실과, 헥토르가 죽은 뒤에야 뒤늦게 그가 트로이아 전쟁에 참가했다가 아킬레우스에게 죽었고, 나중에는 제우스의 배려로 불사의 존재가 되었다는 정도만 알 뿐이다. 『일리아스』에는 단 한 번도 등장하지 않는 인물이 『일리아스』와 『오뒷세이아』를 포함하는 거대한 전체인 '트로이아 서사시권'의 일부를 장식하는 핵심 인물이 될 수도 있고, 그런 인물을 기리기 위한 거대한 석상이 이집트 고대 문명의 중심이었던 테베에 오늘날까지도 여전히 남아 있다는 사실이야말로 '트로이아 서사시권'이 얼마나 방대한 이야기를 담고 있으며, 인류 문명에 얼마나 오랫동안 지속적인 영향을 끼쳤는지를 새삼 반증하는 셈이다.
트로이아 서사시권의 네 번째인 『소(小) 일리아스』와 다섯 번째인 『일리오스의 함락』에는 아킬레우스가 죽은 뒤 그의 무구(巫具)들을 놓고 오뒷세우스와 아이아스가 서로 치열하게 경쟁하는 이야기인 '무구 재판'과 '트로이아의 목마 작전'에 따라 트로이아가 함락되는 이야기를 노래한다. '대장간의 신'인 헤파이스토스가 만들었다는 그 유명한 아킬레우스의 무구를 두고 그리스를 대표하는 두 영웅이 벌였을 엄청난 경쟁이 어떠한 결과를 초래했는지는 소포클레스의 비극 『아이아스』에서 너무나 상세히 묘사된 덕분에 후세에 널리 전해질 수 있었다. 이 이야기 하나만으로도 숱한 예술 작품들이 탄생했음은 새삼 강조할 필요가 없다. ☞ 소포클레스의 『아이아스』
- 『소포클레스 비극 전집』에 담긴 '아이아스의 자결'을 형상화한 모습을 담은 도자기
또한 『일리오스의 함락』에 등장하는 '트로이의 목마 이야기'야말로 트로이아 전쟁을 상징하는 가장 희귀한 창조물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그러나 오늘날 트로이아의 목마에 얽힌 이야기가 온전히 전해지는 문헌은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다. 그토록 놀라운 발명품을 만들어낸 꾀많은 오뒷세우스가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오뒷세이아』에서도 그 이야기는 그저 흘러간 옛 이야기 중에서 희미하게 잠깐씩 비칠 뿐이다. 숱한 고대 그리스의 비극 시인들도 트로이의 목마를 핵심 포인트로 삼은 작품을 남기지는 못했다. 이토록 대중적인 관심을 집중시킨 사물이 온전한 텍스트도 없이 3,000년이 넘도록 인류의 기억 속에 지속적으로 살아 움직이는 사례도 찾기 어렵지 싶다. 어쩌면 트로이아의 목마에 관한 이야기는 고대 로마 최고의 시인이었던 베르길리우스가 쓴 『아이네이스』에서 드문드문 엿보는 게 더 좋을지도 모르겠다. 로마 건국 신화를 담은 그 이야기 속엔 '트로이아가 얼마만큼 비참한 모습으로' 몰락했는지를 빼어나게 묘사하고 있고, 그런 이야기에 '트로이의 목마'가 결코 빠질 리 없기 때문이다.
그때 라오코온이 수많은 무리가 뒤따르는 가운데
앞장서서 성채 위에서 쏜살같이 뛰어내려오며
멀리서 외쳤습니다. '오! 가련한 동포들이여,
그대들은 그토록 제정신이 아니란 말이오? 그대들은 적군이
배를 타고 떠난 줄 아시오? 일찍이 다나이족의 선물에
음모가 없었던 적이 있나 생각해보시오.
그대들은 울릭세스(=오뒷세우스)를 그런 사람으로 알고 있었소?
이 목조물 안에 아키비족(=아카이오이족)이 숨어 있거나,
우리의 집들을 들여다보고 위에서 시내로 내려와
우리의 성벽들을 공격할 목적으로 만들어졌거나
아니면 어떤 다른 계략이 숨어 있음에 틀림없소. 말(馬)을 믿지 마시오,
테우케르 백성들이여. 그것이 무엇이든,
나는 다나이족이 선물을 가져올 때에도 두렵소.'
이렇게 말하고 그는 짐승의 옆구리에, 널빤지들을 둥그스름하게
이어붙인 복부에 힘껏 큰 창을 던졌습니다. 창은 떨면서 그곳에 꽂혔고,
충격이 가해지자, 텅 빈 뱃속이 공허하게 울리며
신음 소리를 냈습니다. 우리의 마음이 뒤틀리지만 않았더라면,
신들께서 내리신 운명대로 우리는 아르골리스인들의 은신처를
칼로 열어젖혔을 것입니다. 그랬더라면 트로이야는
아직도 서 있을 것이고, 프리아무스의 높은 성채여, 너도 남아 있겠지.
- 베르길리우스, 『아이네이스』, 제2권 40∼56행
이제껏 살펴본 '트로이아 서사시권'의 다섯 편이 전쟁을 노래하는 데 반해 나머지 세 권에서는 전쟁 이후의 이야기를 노래한다. 여섯 번째인 『귀향』은 오뒷세우스를 제외한 다른 그리스군 장수들의 귀국을 노래하며, 일곱 번째가 바로 호메로스의 『오뒷세이아』이다. 여덟 번째는 『텔레고노스 이야기』인데, 고향 이타케 섬으로 돌아온 오뒷세우스가 또다시 여행에 나서는 이야기와 그의 아들 텔레고노스에 의해 오뒷세우스가 살해당하는 이야기를 노래한다.
이처럼 많은 이야기가 호메로스의 양대 서사시 말고도 여섯 편에 더 담겨 있었다니 그것만으로도 숨이 벅차고 충분히 놀라운데 그리스인들은 이것 말고도 트로이아 전쟁 이야기만큼 흥미로운 '테바이 서사시권' 이야기까지 남겼다. 그나마 '테바이 서사시권'은 규모가 훨씬 단촐하기는 하다. 이것은 오이디푸스 왕의 놀라운 운명을 노래한 『오이디푸스 이야기』(Oidipodeia)와 오이디푸스 왕의 추방된 아들 폴뤼네이케스를 중심으로 모두 일곱 장수들이 테바이를 공격한 이야기를 노래한 『테바이 이야기』, 그리고 이들이 테바이 공략에 실패한 뒤에 그의 아들들이 결국 테바이 공격에 성공한 이야기를 담은 『후예들』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이다.
호메로스의 『일리아스』가 아무리 방대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고 하더라도 이 작품은 결국 '트로이아 서사시권'과 '테바이 서사시권'을 아우르는 방대한 전체의 일부라는 사실은 『일리아스』를 읽는 동안에도 실감할 수 있다. 왜냐하면 트로이아 전쟁에 참가하는 무수히 많은 영웅호걸들 가운데에는 '테바이 서사시권'에 속하는 이야기인 <테바이를 공격한 일곱 장수>의 후손들까지도 자주 엿보이기 때문이다. 그 가운데 가장 대표적인 인물이 튀데우스의 아들 디오메데스다. 그는 힙폴로코스의 아들 글라우코스와의 일전을 앞두고 서로의 조상들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다가 '그렇다면 그대는 먼 옛날 부조(父祖) 때부터 나의 빈객(賓客)이오'라는 말을 건네면서 전차에서 뛰어내려 서로의 손을 잡고 우정을 다짐한다. 그리고는 서로의 무구들을 교환한다. 이때 글라우코스가 얼마나 분별력이 없었는지는 플라톤의 『향연』에서도 인용될 정도였다. 그는 황소 백 마리의 값어치가 있는 자신의 황금 무구들을 황소 아홉 마리의 갑어치밖에 안 되는 디오메데스의 청동무구들과 맞바꾸고 말았던 것이다.
호메로스의 『일리아스』가 거대한 전체의 일부분에 불과한 이야기라는 사실을 가장 극적으로 드러내는 증거는 고대 그리스의 비극작가들의 작품들이다. 흔히 고대 그리스의 3대 비극작가로 불리는 아이스퀼로스, 소포클레스, 에우리피데스는 모두 305편에 달하는 어머어마한 작품들을 썼다고 알려져 있는데, 지금까지 온전히 전해지는 작품들은 불과 33편에 불과하다. 그 33편 가운데 트로이아 전쟁을 둘러싼 이야기를 다룬 작품들은 그 절반인 16편에 이르지만, 그 가운데 사건이 발생한 시간으로 따져보면 『일리아스』와 겹치는 작품은 『레소스』 밖에 없다.
아이스퀼로스의 『오레스테이아』('오레스테스 이야기'란 뜻으로, 『아가멤논』,『제주를 바치는 여신들』,『자비로운 여신들』로 구성된 현존하는 유일한 비극 3부작이다.)만 하더라도 『일리아스』에서 다루는 사건들과는 얼마나 멀리 떨어져 있는가. 트로이아 전쟁을 승리로 이끌고 돌아온 아가멤논은 아내 클뤼타임네스트라와 그녀의 정부(情夫) 아이기스토스의 손에 무참하게 살해된다. 아가멤논이 살해될 때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은 오레스테스는 훗날 청년이 되어 누이동생 엘렉트라와 함께 '아버지의 원수'를 갚기 위해 어머니인 클뤼타임네스트라를 죽인다. 호메로스의 『일리아스』에서 벗어나면 이토록 비극적이면서도 흥미진진한 이야기가 또다시 새롭게 펼쳐지는 셈이다.
<현존하는 고대 그리스 비극 작품 개요>
(트로이아 전쟁과 헬레네의 행방을 둘러싼 이야기에서 인용)
소포클레스의 비극 작품 『필록테테스』도 『일리아스』에서 다루는 시기를 벗어난다. 그의 이름은 <함선 목록>에도 당당히 올라 있을 정도로 트로이아 전쟁에서는 꽤나 비중 있는 인물이었지만 『일리아스』에서는 딱 한 번만 언급될 뿐이다. 그렇다고 해서 호메로스가 이 희귀한 인물에 얽힌 가슴 아픈 사연들까지 몰랐던 건 결코 아니었다. 『일리아스』에서 잠깐이나마 그의 운명을 넌지시 암시하기 때문이다. 서유럽에서는 오늘날까지도 이 인물에 대한 회화와 조각작품들이 도처에 널려 있을 정도인데, 『일리아스』에서만큼은 그저 잠깐 스쳐가는 인물일 뿐이다. 그가 서양예술의 온갖 분야에서 오랫동안 비중있는 인물로 기려지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가 로빈슨 크루소의 진정한 원조(元祖)여서? 아니면 그 유명한 헤라클레스의 신궁(神弓)을 물려받은 인물이어서? 아니면 그가 전쟁의 원흉인 파리스를 쏘아 죽여서? 아무튼 그는 『일리아스』를 벗어나면 꽤나 유명한 인물로 돌변하는 인물임엔 틀림없다. ☞ 소포클레스의 『필록테테스』
메토네와 타우마키에에 사는 자들과,
멜리보이아와 울퉁불퉁한 올리존을 차지한 자들,
이들의 함선 일곱 척은 궁술에 능한 필록테테스가 지휘했다.
배마다 선원들이 쉰 명씩 타고 있었는데, 이들은 모두
궁술에 능한 용감한 전사들이었다. 그러나 이들의 지휘자는
심한 고통으로 괴로워하며 신성한 렘노스섬에 누워 있었다.
파멸을 꾀하는 물뱀에게 심하게 물려 괴로워하던 그를
아카이오이족의 아들들이 그곳에 남겨두고 왔기 때문이다.
그는 그곳에 괴로워하며 누워 있지만, 아르고스인들은 머지않아
함선들 옆에서 바로 그 필록테테스 왕을 생각해야 할 운명이었다.
- 『일리아스』, 제2권, 716∼725행
에우리피데스의 비극 작품들은 트로이아가 함락된 이후에 '트로이아 여인들'이 겪는 끔찍한 참상들을 낱낱이 묘사하는 작품들이 많아서 『일리아스』 이후의 사정들을 파악하는데 더없이 요긴하다. 한때 가장 많은 부와 명예를 누렸던 트로이아의 왕비 헤카베가 전쟁통 속에서 가까스로 살아남은 딸과 막내 아들을 어떻게 비통하게 잃었으며, 헥토르의 아내였다가 패전 후에는 아킬레우스의 아들인 네옵톨레모스의 첩으로 전락한 안드로마케가 어떤 기구한 운명들은 두루 겪었는지는 『일리아스』에서 예고편으로 슬쩍 엿보여준 내용들과는 비교조차 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투구를 번쩍이는 위대한 헥토르가 그녀에게 대답했다.
"난들 어찌 그런 모든 일들이 염려가 안 되겠소, 여보!
(…)
나는 물론 마음속으로 잘 알고 있소.
언젠가는 신성한 일리오스와 훌륭한 물푸레나무 창의
프리아모스와 그의 백성들이 멸망할 날이 오리라는 것을.
그러나 트로이아인들이 나중에 당하게 될 고통도,
아니 헤카베 자신과 프리아모스 왕과 그리고 적군에 의해
먼지 속에 쓰러지게 될 수많은 용감한 형제들의 고통도,
청동 갑옷을 입은 아카이오이족 가운데 누군가 눈믈을 흘리는
당신을 끌고 가며 당신에게서 자유의 날을 빼앗을 때
당신이 당하게 될 고통만큼 내 마음을 아프게 하지는 않소.
(…)
그때는 당신이 눈물을 흘리는 것을 보고 누군가 말하겠지요.
'저 여자가 헥토르의 아내야. 사람들이 일리오스를 둘러싸고 싸울 때
그는 말을 길들이는 트로이아인들 중에서 으뜸가는 전사였었지.'
누군가 이렇게 말할 것이고, 그러면 당신은 굴종의 날에서
당신을 구해줄 그러한 남편이 없음을 새삼스레 슬퍼하게 될 것이오.
당신이 끌려가며 울부짖는 소리를 듣기 전에
쌓아 올린 흙더미가 죽은 나를 덮어주었으면!"
- 『일리아스』, 제6권 440∼465행
이토록 많은 이야기가 『일리아스』의 밖에서 또다시 차고 넘치도록 쏟아져 나왔다고 하더라도 호메로스의 양대 서사시가 지니는 불후의 위상이 낮아지는 이유가 되지는 못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시학』에서 바로 이 점을 날카롭게 파고들었다. '트로이아 서사시권' 가운데 유독 호메로스의 두 작품만이 온전히 전해진 데에는 그만큼 특별한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호메로스의 양대 서사시는 '플롯의 통일'이라는 점에서 너무나 완벽하기 때문에 그 사이를 헤집고 들어갈 틈이 엿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이 점에 대해서는 호메로스를 따를 시인이 없다는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말을 직접 들어보자.
그런데 호메로스는 다른 점에 있어서도 뛰어나지만, 이 점에 있어서도 숙련에 의했든 천분에 의했든 바로 이해했던 것 같다. 그는 『오뒷세이아』를 쓸 때 주인공에게 일어난 사건을 모두 취급하지 않았다. 이를테면 오뒷세우스가 파르낫소스 산에서 부상당한 일이라든지, 출전 소집을 받았을 때 광증을 가장한 사건은 취급하지 않았다. 그것은 이 두 사건 사이에 필연적 또는 개연적 인과 관계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하는 대신 그는 앞서 말한 바와 같은 통일성 있는 행동을 주제로 하여 『오뒷세이아』를 구성했던 것이다. 『일리아스』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그러므로 다른 모방 예술에 있어서도 하나의 모방은 한가지 사물의 모방이듯, 시에 있어서도 스토리는 행동의 모방이므로 하나의 전체적 행동의 모방이어야 하며 사건의 여러 부분은 그 중 한 부분을 다른 데로 옮겨놓거나 빼버리게 되면 전체가 뒤죽박죽이 되게끔 구성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있으나마나 두드러지게 차이가 나지 않는 것은 전체의 부분이 아니기 때문이다.
- 아리스토텔레스, 『시학』제8장 中에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시학』을 통해 '호메로스의 탁월한 점'을 거듭 강조하는데, 다음의 인용문을 살펴보면 그가 왜 10년 동안 벌어진 '트로이아 전쟁' 가운데 단 며칠 동안의 사건만을 다뤘으면서도, 『일리아스』가 영원불멸의 작품이라는 극찬을 받는지 그 연유를 알 수 있게 된다. 아울러 우리는 아리스토텔레스 덕분에 '트로이아 전쟁'과 '고대 그리스 비극'과의 관계도 조금 더 알 수 있게 된다.
그러므로 호메로스는 앞서도 이미 말한 바 있지만, 이 점에서도 다른 시인들보다 탁월한 것 같다. 그는 트로이아 전쟁이 시초와 종말을 가진 전체임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전부 다 취급하려고 하지는 않았다. 그것은 필시 그 스토리가 너무 방대하여 통관하기가 쉽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든지, 혹은 그 길이를 제한한다 하더라도 그 속의 사건이 다양해서 너무 복잡할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전체에서 한 부분만 취하고, 그 외 많은 사건은 삽화로 이용하고 있다. 예컨데 「함선 목록」이나 다른 사건은 이야기의 단조로움을 덜기 위하여 이용하고 있다. 그런데 다른 시인들은 한 사람 또는 한 시기를 취급한다지만, 그들이 취급하는 행위는 하나라 하더라도 그 속에 여러 부분이 포함되어 있는 것이다.
예컨대 『퀴프리아』와 『소(小) 일리아스』의 작가들의 경우가 그렇다. 그 결과 『일리아스』나 『오뒷세이아』로부터는 각각 한 편, 또는 많아야 두 편의 비극이 만들어질 수 있는 데 비하여 『퀴프리아』로부터는 다수의 비극이,8 그리고 『소(小) 일리아스』로부터는 8편 이상의 비극이 만들어질 수 있는 것이다. 즉 『무구 재판』, 『필록테테스』, 『네옵톨레모스』, 『에우뤼필로스』, 『걸인 오뒷세우스』, 『라케다이몬의 여인들』, 『일리오스의 함락』, 『출범(出帆)』, 『시논』및 『트로이아의 여인들』이 그것이다.
주석
8 『파리스의 심판』, 『헬레네의 납치』, 『그리스 군의 집결』, 『스퀴로스의 아킬레우스』, 『텔레포스』, 『아킬레우스와 아가멤논의 말다툼』, 『아울리스의 이피게네이아』등 많은 비극의 소재가 되었다.
- 아리스토텔레스, 『시학』제23장
호메로스의 『일리아스』만 하더라도 '너무나 방대해서' 좀처럼 완독하기가 쉽지 않은데 여기에 더해 '트로이아 서사시권'의 나머지 6편까지도 지금까지 온전히 전해졌더라면 과연 어땠을까. 아마도 그 작품들을 모두 읽는 일은 누구에게나 벅찬 독서과제였을 게 틀림없다. 물론 몽테뉴와 같은 인물들은 우리와는 정반대로 두 팔을 들고 환호작약했겠지만 말이다. 이러한 사정은 고대 그리스 비극의 경우까지를 포함하면 더욱 심해진다. 소위 '그리스 3대 비극작가'의 작품만 하더라도 무려 305편에 이르는데 그 작품들이 온전히 다 전해졌더라면 어땠을까. 그나마 현재까지 온전히 전해 내려오는 작품이 고작 33편에 불과하다는 사실에 도리어 고마워해야 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