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덧 2011년도 2월이 되었다. 그래도 아직 설은 지나지 않았으니 나름대로 정리해서 올리는 2010년 결산이다. 물론 미스터리 부분으로 한정한 것이다.
나는 그다지 다독가도, 속독가도 아니다.
연간 읽어내는 책은 미스터리 소설이 대부분이지만, 그마저도 50여권 수준이고 최근 몇년은 신간에 눈독을 들여 읽지도 않았다. 2010년은 그동안 사놓고 묵혀두었던 책들을 제법 소진했고, 로마서브로사, 밀레니엄, 샤들레이크 시리즈 같은 대단히 뛰어난 시리즈 장편들을 새롭게 만났던 해로 기억될 것 같다.
작년에는 부문별 후보작까지 꼽아가며 열심히 결산을 했지만, 올해는 간략하게 처리하기로 했다. 세 권의 책이 워낙에 압도적이었으며, 별다른 경합이나 고민없이 선정되었기 때문이다.
올해의 베스트 : 존 딕슨 카 <유다의 창>
내가 존 딕슨 카의 소설을 처음 읽은 것이 초등학교 5학년 때 쯤이었으니, 햇수로도 어언 30년 가까이 되었다. <연속 살인 사건>을 계림 출판사에서 나온 아동판으로 읽었었는데 셜록 홈즈를 제외한 다른 작가의 장편 미스터리를 읽은 것이 거의 처음이었을 것이다. 재기발랄한 코믹함과 음산한 배경, 깔끔한 마무리 등 딕슨 카의 전형을 잘 보여주는 작품이었다. 추리소설의 인기가 풍성하고, 많은 독자층을 확보하여 유수의 고전 작품들이 번역되어 있는 상황이었다면, 나는 이 소설을 30년 전에 읽었을 지도 모르겠다.
우여곡절이 있었겠지만, 딕슨 카의 대표작 중 하나로 애호가들의 입에 오르내리던 <유다의 창>이 작품 발표 후 무려 72년만에 국내에 소개 되었고, 초등학생 꼬마는 이제 불혹이 되어 그의 대표작을 만날 수 있었다.
기대치가 크면 실망의 확률도 높은 법인데 <유다의 창>은 기대를 뛰어넘는 재미와 흥분을 안겨준다. 닳고 닳은 독자이지만, <유다의 창>을 읽으면서 나는 짜릿한 쾌감마저 느낄 수 있었다. 기립박수를 보낼만한 작품이다.
베스트에 못지 않았던 두 편의 소설.
스티븐 세일러 <로마 서브 로사 3 - 카틸리나의 수수께끼>
격동의 공화정 말기 로마를 배경으로 한 로마서브로사 시리즈는 각 권 하나하나가 깨알같이 훌륭한 작품이지만, 개인적으로 그 중 최고를 꼽자면 시리즈 3편 <카틸리나의 수수께끼>를 꼽는다.
역사적 사건의 장대한 스케일, 사회적 메시지, 실감나는 당대의 풍습과 집정관 선거에 대한 묘사, 묵직한 감동까지 흠잡을 데 없는 작품이다.
과격한 급진파로서 보수파인 키케로와 대립했던 카틸리나는 역사적으로는 패자로 남았지만, 스티븐 세일러가 소설로 재구성한 카틸리나 역모사건의 전말은 새로운 관점을 제시한다.
고르디아누스는 끊임없이 경계하고 의심하지만 카틸리나의 인간적 매력과 면모에 이끌린다. 고르디아누스와 메토가 결국 최후의 산 증인이 되기까지의 과정은 책을 덮은 후까지도 긴 여운을 남긴다.
빼어난 번역 및 교열도 이 시리즈의 미덕 중 하나다.
C.J. 샌섬 <어둠의 불>
전작 <수도원의 죽음>이 진중하기는 하지만 빼어난 재미를 주지 못한 까닭에 어쩌면 읽지 않았거나 한참 뒤로 밀려버릴 수도 있었는데 다행히도 그렇지 않았음에 가슴을 쓸어내린다.
정신없는 가독성, 잔혹한 묘사와 현란한 반전 등에 치중하지 않아도 진지함과 치밀함으로 얼마든지 독자를 즐겁게 할 수 있다는 것을 유감없이 보여주는 작품이다.
살인죄로 압살형에 처해질 위기에 빠진 소녀와 비잔틴 제국의 비밀 병기였던 정체 불명의 검은 액체를 둘러 싼 사건이 동시에 진행되는 만큼 전작에 비해 훨씬 박진감도 넘치고, 두번째 작품이니 만큼 캐릭터들도 생생하다.
<수도원의 죽음>에서 등장했던 조수 마크 포어에 비해 100배는 매력적이고 생동감 넘치는 잭 바라크의 등장은 향 후 시리즈에 대한 기대감을 무르익게 한다. 그렇지만, 어쩌면 이 작품이 마지막 출간이 될 것 같은 우울한 예감도 피할 수 없다.
작품의 소재로 쓰인 신비의 액체 '그리스의 불'은 해리 터틀도브의 <비잔티움의 첩자>에서 언급되기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