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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루인 수사의 고백 ㅣ 캐드펠 시리즈 15
엘리스 피터스 지음, 송은경 옮김 / 북하우스 / 2000년 10월
평점 :
절판
캐드펠 시리즈의 첫 권 성녀의 유골을 처음으로 읽은 것이 시리즈가 국내 완간되고도 한참이 지난 2006년의 일이다. 쉬엄쉬엄 생각날 때 마다 몇 권씩 사두고 묵혔다 읽고를 반복, 싸목싸목 쌓여 햇수로 5년여가 넘어서 어느덧 15권 <할루인 수사의 고백>에 이르렀다. 완독의 고지가 이제 멀지 않은 셈이다.
캐드펠 시리즈가 국내에 소개된 것이 비교적 최근의 일이었기에 작가 앨리스 피터스는 비교적 현대 미스터리 작가라고 오인하기 쉽다. 하지만 고故 피터스 여사는 무려 1913년 생으로 고전 작가의 반열에 올라 있는 앨러리 퀸, 딕슨 카 등과 불과 10년 차이도 나지 않는 연배다. 작가 데뷔 연도는 1936년.
작가 정보에 의하면 본격적으로 작품활동을 시작한 해도 1959년이기에 20년 가까이 활발히 활동하다가 그의 나이 60대 중반부터 시작하여 여든 살을 넘어서까지 완성시킨 시리즈가 바로 캐드펠 시리즈인 것이다. 작가의 고향인 잉글랜드 시로프셔를 공간적 배경으로, 작품이 씌여질 때로부터 800여년 전인 12세기 중반을 시대적 배경으로 삼았다.
지금까지 열 다섯 권의 캐드펠 시리즈를 읽어온 경험으로 미루어 피터스 여사는 대단히 낭만적인 로맨티스트라고 짐작함에 부족함이 없다. 첫눈에 사랑에 빠지는 젊은이들은 왜 그리 많은지. 내전의 시기에 더해 살인이 난무하는 중세를 배경으로 하지만 궁극적으로는 로맨스 소설이 아닌가 싶을 정도의 천착이다. 크리스티의 소설도 로맨스 소설의 변형이라는 이야기들도 많긴 하지만 로맨스 소설적인 강도로는 캐드펠 시리즈가 한 수 위라고 생각한다. 사진으로 본 작가의 인상 또한 어찌나 선한 얼굴인가! 사랑과 보편적 인류애에 대한 작가의 무한한 낙관이 캐드펠 시리즈 곳곳에 흘러 넘친다. '작가는 대체 어떤 사랑을 해왔고 어떤 결혼 생활을 해왔기에 6,70 대의 나이에 이러한 이야기를 만들어 낸단 말인가!'라는 생각까지 해봤다.
'제인 오스틴을 읽을 시간이면 뒤마를 한번 더 읽겠다. 브론테 자매보다야 당연히 디킨즈지!'라는 마초적 독서관觀을 갖고 있는 나는 이런 로맨스 지상주의가 다소, 어쩌면 많이, 오글거린다. 처지와 상황이 다른 선남 선녀가 첫눈에 반하고, 적어도 감정적으로는 별다른 갈등 없이 외부적인 고난만을 겪어낸 후 순조롭게 맺어지는 이야기들은 재밌게는 읽힐지라도 가슴에 맺히는 이야기가 되기에는 부족한 것이다. 그들이 앞으로 남은 수십년을 과연 처음처럼 열렬하게 사랑할 수 있을까라는 의문을 굳이 보태게 된다.
지금까지 봤던 15개의 작품 중 가장 기억에 남는 것 하나가 시리즈 11권 <반지의 비밀>인데, 여타의 다른 작품들에 반해 이 이야기가 오랜 세월의 기다림과 깊은 신의를 주제로 한 사랑 이야기였기 때문일 것이다.
<할루인 수사의 고백> 역시 꽤나 깊은 울림을 안겨주었다. 소설의 중반까지만 해도 너무 빤히 보이는 설정과 예측되는 결말로 인해 그저 그런 시리즈 소설 중 한 권임이 유력했으나, 무한한 로맨티스트로만 알고있었던 작가는 작품의 후반부에서 영원성, 영속성이 아닌 사랑의 찰나적 속성에 대한 통찰을 보여준다. 예측된 결말에 이르렀지만, 그동안 알아왔던 작가의 다른 면모를 접하는 것이 반전이라면 반전이다. 거기에 더해 에들레이스 노부인의 그 압도적인 캐릭터는 선악과 호오를 떠나 시리즈 역대급이라 하기에 부족함이 없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로셀린과 헬리센드 두 젊은 연인들의 애타는 간절함과 해피엔딩보다 지난했던 18년 세월을 오롯이 가슴에 담아두고, 기꺼이 기쁘게 돌아서는 할루인 수사의 뒷모습이 더 찬란해 보이는 것이 어찌 나 뿐이겠는가.
지금 그 옛날의 첫사랑으로 돌아가라 하더라도 그녀는 등을 돌릴 터였다. 그럴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사랑도 한철인 법이다. 이제 그들의 계절은 봄의 폭풍우와 여름날의 열기를 넘어 초가을날 낙엽 떨어지기 전의 황금빛 평온으로 접어들었다.
"제 뒤에 남겨진 것들이 모두 잘 있는데요 뭐. 아주 행복하게. 제가 어디에 묶여 있든 거기서 할 수 있는 것은 이제 아무것도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