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광주(光州)에서 성장했다. 다섯살에 이사를 와서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서울로 상경할 때 까지 나는 15년의 성장기를 줄곧 광주에서 보냈다. 3년전 부모님 마저 조상의 터전이었던 남도를 떠나 서울 근교에 자리 잡으시자 그나마 명절때라도 낙향하던 일마저 없어져 버리고 어언 서울에서의 삶의 길이가 광주에서의 그것보다 길어져 버렸을 지라도 여전히 나는 "속살은 광주사람" 이다.

빛고을로 칭해지기도 하고 예향(藝鄕)이라는 애칭을 갖고 있는, 굴곡많은 현대사를 끌어안은 도시 광주가 좋은 또 하나의 이유는 바로 시내 어느곳에 있던지 고개를 들면 넉넉하게 도시를 보듬고 있는 '무등산'이 있어서다.

"무등산 폭격기"라는 별명을 가진 선동렬 선수때문에 더욱 유명해 지기도 한 무등산은 해발 1187 미터의 만만치 않은 높이와 거칠지 않고 포근한 느낌을 주는 유순한 산세를 가진 산이다. 백제 때는 무진악, 고려때는 서석산이라 불리웠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광주에는 지금도 "무진"이나 "서석"을 이름으로 한 고유명사들(학교나 교회 등의 이름으로 많이 쓰인다)이 많이 있다. 그만큼 이 곳 사람들의 일상과 무등산이 맞닿아 있다는 증거이리라.

서울에서 북한산 가기 보다도 도심에서 가까운 거리에 위치해 있는지라 광주의 중, 고등학교 학생들의 소풍은 늘쌍 무등산행이 되기 일쑤이다. 정말 지겹게도 봄 가을로 무등산을 헤집고 다녔던 그 시절, 지척에 두고 살다 보니 그 산의 고마움을 미처 몰랐지만 서울로 올라온 이후 간혹 찾게 되는 광주에서 무등산은 고향이 주는 안락함의 또 다른 일면이 되었다.

그러나 정상에 미사일 기지가 있다는 이유로 현재까지도 무등산의 정상은 개방되지 않고 있다. 정상 가까이에 있는 우뚝 우뚝 하늘로 치솟은 바위들의 절경인 입석대(立石臺)와 서석대(瑞石臺)가 일반인들에게 다시 개방된 것도 불과 15년 남짓이다. 그때 까지 광주 시민들은 눈 앞에 보이는 산을 두고도 산 중턱까지 밖에 오르지 못했던 아쉬움을 삭여야만 했다. 분단과 냉전은 반도 남단 국민들의 생활에 까지도 이런 저런 영향을 미치고 있다.

십수번을 등반한 무등산 이지만 그 중 가장 기억에 남는 등반기 하나.

대학 4학년 추석때로 기억한다. 명절을 맞아 '놀고 대학생'의 신분을 이용해 하루쯤 먼저 귀향한 나는 고향 친구인 K와 P를 만나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의기투합, 거창하게 산악회를 발족 시킨다. 당시 어디선가 들었던 리영희 교수, 고은 시인등이 회원으로 활동한다는 산악회 '거시기'의 영향을 받은 우리는 우리들의 산악회 이름을 '있어'로 명명한다. '있어'산악회의 회 결성 기념 등반 이자 결국 마지막 등반이 되어 버린 무등산 등반은 가을이 무르익어 가던 추석 직전의 어느 날이었다. 다음날 아침 1000원에 두 줄하는 김밥 3인분을 달랑 사들고 우리는 무등산에 올랐다. 서석대 정상(해발 1100 미터로 무등산 개방 구역 중 최정상이다)에서 구름을 품으며 김밥을 먹자던 우리의 포부는 전날의 피로와 술기운으로 인해 중턱부터 흔들리기 시작했다.
'졸업을 앞둔 복잡한 머릿속을 정리도 할겸 가을산에서 호연지기를 함양하리라'던 나의 야심찬 계획은 초가을 남도의 따사로운 햇살에 바람처럼 날아가 버리고 머릿속은 "목말라"와 "배고파"의 원초적 형이하학만이 온통 맴돌뿐이었다.  어찌 비스킷 하나라도 준비를 하지 않았을까라는 회원들의 자책속에 결국 기아 선상에 허덕이던 우리는 서석대 정상을 100여 미터 목전에 두고 "도저히 배고파서 걸을 수가 없다!!"라는 단말마 외침과 함께 바위위에 드러눕고 말았다. 굶주린 청년들은 3인분 김밥 중에 한 개를 아귀처럼 까먹고 나서야 정상에 도달할 수 있었다. 맑은 가을 하늘 아래 또렷하게 한 눈에 내려다 보이던 광주 시내를 품에 안은 채 20대 중반의 젊은 사내들은 무엇을 생각하고 있었을까.

그로부터 딱 10년이 흐른 지금. 그 날의 기억을 아련하게 등에 업은채 다시 한 번 그 산에 오르고 싶다.

눈 내린 무등산, 입석대의 설경


댓글(6)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파란여우 2004-09-07 16: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알라딘의 성철 스님(?)이 무등산에 오르신단 말이죠?^^ 꼭 멋진 등반 끝내시고 후기 기다려보고 싶습니다.

oldhand 2004-09-07 16: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성철 스님이라니요... 저는 용렬한 소인배인걸요. 성철 스님이 눈을 번쩍 뜨시겠습니다. 저의 개인적인 경험에 비추어 볼 때 산은 산이고 김밥은 김밥이더라구요. 무등산도 식후경.
그리고 무등산 등반 희망은 아직은 기약없는 희망일 뿐이랍니다. 이제 거의 연고도 없어서 광주에 가는것도 쉽지 않네요. 내려갈 일이 있으면 꼭 올라보고 싶기는 합니다만.

물만두 2004-09-07 19: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산이라면 쳐다보기도 싫은 만두... 한라산 오르다 죽을 뻔했다는...

oldhand 2004-09-08 09: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수학여행 때 한라산 등반이 일정에 있었는데 비가 오는 바람에 못 갔었답니다. 아직도 백록담 구경 못 해 봤어요.

미완성 2004-09-08 21: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있어' 산악회와 1000원에 두줄 준다는 김밥에 눈이 번쩍(!), 그후부턴
'oldhand님은 아, 1000원에 김밥 두줄을 사셨대- 아아, 맛있는 김밥이었을까?'
생각만 머리 속에 가득 차다가 단말마의 외침과 함께 바위 위에 드러눕고 마셨다는 얘기에 또 폭소를..ㅜ_ㅜ
아아, 동네 뒷산도 정상까지 올랐던 게 벌써 몇 년 전이었는지요. 그래두 대단하십니다-

oldhand 2004-09-08 21: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야! 사과님 오셨군요. 그동안 우리가 격조했지요? 흑흑. 댓글은 안남겨도 사과님 글 잘 읽고 있답니다.
지금 생각해봐도 이미테이션이긴 하지만 산악회 이름은 괜찮게 지은것 같단 말이죠. 핫핫. 1000원에 두줄하는 김밥은 당시 광주에서 되게 유명한 "광주김밥"이라는 시내에 있는 김밥집에서 팔던 김밥인데요, 장사가 잘되서 분점도 있고 그랬었지요. 아직까지 그 가게가 남아있는지, 남아 있다면 가격은 얼마나 할까.. 참 궁금합니다. 광주가면 상추튀김도 먹으러 가야되는데..
 

여름 휴가를 다녀오느라 (사실은 다녀온데는 없고 집에서 딩가딩가 했습니다.) 서재를 팽개쳐 두었었습니다. 한번쯤 들어가야지.. 생각만 하고 그냥 계속 뒹굴뒹굴. 제가 원래 게을러서 집에서는 컴퓨터 켜는 일도 흔치 않습니다. 뭐 워낙에 찾아오는 이 많지 않은 널널한 서재라서 게으름 피워도 문제 없거든요. 핫핫.

월요일부터 목요일까지, 늦잠자고, 책 보다가 낮잠자고, 올림픽 중계 방송 밤늦게 까지 보고 그랬습니다.  이제 휴가도 끝나고 무슨 낙으로 살아가야 하나요. T_T

그 동안 밀린 이웃분들의 글을 읽으려면 오늘 근무 틈틈이 땡땡이 깨나 쳐야 하겠습니다.


댓글(4)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아영엄마 2004-08-20 11: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휴가란 것이 꼭 어딜 가야 하나요.. 저희 남편도 집에서 쉬는 걸 최고의 휴가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읽은 책 소개나 많이 해주셔요~

oldhand 2004-08-20 12: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맞아요. 집에서 쉬는게 최고지요. 더더군다나 비까지 내려줘서 금상첨화였답니다. 읽은 책은... 사실 올림픽 중계방송 보느라 한권 밖에 못 읽었습니다. T_T

파란여우 2004-08-20 13: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휴가 끝났으니 근무중에 땡땡이 치는 알라딘 낙으로 살아야지요..^^

oldhand 2004-08-20 13: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집에서 놀때는 안하는 서재질을 근무시간에 꼬박꼬박 하는거 보면, 이거 일하기 싫어서 하는것도 같습니다. 으하하.
 

3. 제 2의 고향 광주

다섯살되던 해의 봄, 나는 광주에 왔다.
청운의 푸른 꿈을 안고 도시로 온 젊은이는 아니고, 그저 부모님을 따라서.
형과 누나는 다니던 학교를 옮기는 등 큰 변화가 있었지만, 나에게는 그저 앞길에 개울이 없어졌고 집의 마당이 조금 좁아졌다는 정도의 변화였을 뿐이었다.

새로 살게될 집의 마당은 길다란 편이었으며 마당 구석에 연탄창고가 있고 창고위로 장독대가 있었다. 이 구조는 매우 긴요한 것으로 후일 눈싸움등을 할 때 좋은 요새가 되어 주곤 했다. 그리고 마당의 1/3 이상을 차지하는 꽃밭겸 화단이 있었는데, 아주 큰 향나무가 있었다. 꽃을 좋아하시는 아버지 덕에 그 화단은 오래지 않아 갖가지 꽃들로 가득차게 되었는데, 여러 색깔의 철쭉, 수국, 앵두나무, 장미 등이 계절에 따라 우리집을 수놓았다. 꽃 피는 계절에는 마당에서 기념사진 한판 찍는것이 우리의 연중행사가 될 정도로. 이 화단은 굉장히 울창해져서 공놀이를 하다가 공이 들어가면 거의 찾기를 포기해야 할 정도였고 후일에는 다람쥐가 발견되기도 하였다. 무엇보다 새 집에는 '다락'이 있었다. 안방과 부엌방 사이, 재래식 부엌의 위에 위치한 다락은 어린 나의 놀이공간으로, 온갖 잡동사니가 모여있는 보물창고로 부족함이 없었다. 약간 퀴퀴한 냄새가 나던 어둑어둑한 다락방에서 나는 책도 보고, 낮잠도 잤다.

나는 새로운 집을 아주 좋아하게 되었으며 나는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그 집에서 살았다.

친구가 생겼다. 옆집에 살던 남자아이로 나이는 나보다 한 살이 많았다. 우리는 창틀에 올라 매달린 채 타잔 소리를 신호로 해서 담 너머로 이런 저런 이야기들을 하곤 했다. 그 친구는 우리 동네 딱지치기계의 1인자였으며 아직 딱지에 입문하지 않았던 나의 훌륭한 스승이 되었다. 그러나 수업료는 비쌌다. 나는 강자인 그에게 번번히 패했으며 그때마다 뒷마당에서 혼자 맹렬한 연습을 했다. 세상에 태어나서 처음으로 '승부의 세계'에 발을 들여 놓은 것이다.

나는 어렸을때 성격이 꽤나 포악했다. 반면 나보다 다섯살이나 위인 형은 무척 관대하여 나는 늘상 형을 이겨보려고 덤비기 일쑤였다.
그날도 그랬다. 무엇때문이었는지 기억은 나지 않지만 화가난 나는 형을 쫓아다니며 소리지르고 있었다. 마당을 뱅글뱅글 돌며 추격전을 펼친끝에 장동대 계단에서 형을 몰아세운 나는 내 키만 한 삽을 들고 형을 위협했다. 장난치듯 방어하던 형과 실랑이를 벌이다가 결국 사고가 터졌다. 삽모서리에 내 머리가 찍힌 것이다. 크게 찢기진 않았지만 피가 얼굴로 줄줄 흘렀고 나는 자지러질듯이 울며 어머니에게 달려갔다. 형도 무척 놀랐으리라.
요새 같으면 응당 병원으로 달려갔을테지만 때는 70년대 중반 아닌가.
나는 폼나는 환자가 되는 대신 된장을 바르고 쑥을 입히고 머플러로 머리를 감은채 하루를 보내야 했다. 그것도 성냥팔이 소녀 스타일로 말이다.

시간은 흘러 나는 학교에 입학한다. 유치원을 다니지 않은 나에게 학교는 처음으로 '제도'라는 것을 가르쳤다. 부모님 말씀만 잘 들으면(듣지 않을때가 훨씬 많지만) 세상을 살아 가는데 부족함이 없었던 아이들은 학교에 들어감으로써 책임과 의무, 규칙에 대해 배운다. 사실 그것들 중 진정으로 학교에서 우리가 배워야 하는 것들이 몇개나 있을까?
'아, 이곳이 그토록 내가 동경해오던 학교의 정체인가?'
오늘도 많은 아이들이 학교에 대한 환상을 깨고 지나간 자신의 어린 시절의 행복했던 처지를 돌이킬수 없음에 괴로워 하고 있지는 않은지.

초등학교 시절 잠시 외삼촌이 우리집에 지내게 되면서 새로운 심부름이 생겼다. 바로 그것은 '담배 심부름'. 아버지는 담배를 피우지 않으셨기 때문에 담배라는 물건은 내게 꽤나 생소했다. 당시 일반인들이 가장 많이 피우던 담배는 500원짜리 '거북선'과 '태양'(일명 썬). 외삼촌은 500원짜리 지폐를 건네주며 이렇게 말하곤 했다.
"눈썹이 휘날리게 가서 거북선 한갑 사오너라"
담배가게에 거북선도 떨어지고 태양도 떨어진 날이 있었다. 나는 고민 끝에 거북선은 아니지만 거북선이 그려진 담배를 샀다. 그 담배는 바로 '한산도'. 가격은 330원.
'어라? 거북선이 한개도 아니고 여러개 그려져있는데 값은 더싸네? 크하하. 칭찬받을지도 몰라'
결과는?  '은하수'로 바꾸기 위해 나는 다시 열나게 뛰어가야만 했다.
돈이 마침 떨어진 외삼촌이 100원짜리 담배을 사오라고 시켰고, 100원짜리 담배가 어딨냐고 반항하다 두들겨 맞고 울면서 가게에 갔던 일도 있다.
"잉잉.. 아저씨, 100원짜리 담배 하나만 주세요"
"여기 있다"
'엉? 정말 100원짜리 담배가 있잖아? 으... 이럴줄 알았으면 매 맞기 전에 사오는건데..'
내심 억울했던 나는 지금도 주황색 포장의 100원짜리 담배 '환희'를 기억한다.
세월이 적지않게 흐른 지금, 50줄에 접어든 외삼촌은 오래전에 담배를 끊으셨고 10년 넘게 애연가였던 나도 금연을 위해 노력중이다.

의외라고 생각하는 분들도 있겠지만 광주는 서울보다 눈이 많이 온다. 눈이 거의 오지 않는 순천 등지에서 자라던 나는 광주에서 처음 눈오는 광경을 보고 신기해했다. 기온이 높아 녹는 속도도 빠르지만 그것은 아스팔트나 콘크리트 위에서 일뿐, 80년대 초반까지 동네 어귀의 골목은 비포장 흙길이었던 우리 동네는 눈이 한번 오면 응달은 봄이 올때까지 눈이 쌓여있곤 했다. 그리고 그 시절엔 지금보다 훨씬 많은 눈이 내렸다. 당시 내 무릎이나 정강이까지 눈이 쌓이는 일이 빈번했으니 말이다.
눈 내리는 겨울날 누나와 밖에 나가 동네의 눈쌓인 비탈길에서 썰매를 타며 시간가는 줄 모르고 놀던 기억이 난다. 너무 늦어 아버지와 어머니는 우릴 찾아 나서기도 하셨다. 겨울의 빙판타기는 부모님의 꾸중을 각오할 만큼 신나고 재밌는 놀이였다. 눈쌓인 비탈에서 비료부대를 타고 질주하는 그 재미란!


.....

1979년 10월 26일 궁정동의 총성에 대통령이 죽고 그 이후 이어지던 숨가쁘던 정치상황. 12.12 사태, 서울의 봄. 계엄령...
그리고 80년 5월에 나는 광주에 있었다.

1980년 5월의 광주는 나의 유년시절의 막바지를 알리는 상징적인 사건이었다. 물론 철없던 내가 당시의 사태를 파악하고 있었을리는 없지만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른지 혼동되던 그 시기는 나에게 합법의 탈을 쓴 국가권력이 절대적으로 선한것만이 아니라는 것을 가르쳐 주었다.

철없이 멋모르고 까불던 나의 유년 시절은 그렇게 끝나가고 있었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파란여우 2004-08-12 15: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제 다음편에는 청소년기의 방황이 그려지겠군요. 기대 됩니다. 이것은 서사시입니다.^^

oldhand 2004-08-12 15: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머낫. 이거.. 이게 마지막인데요.. 6년쯤 전에 썼던 글을 약간 손봐서 올린겁니다. 서사시씩이나요. 지금이라도 청소년기 이야기를 쓰자니 제가 너무 평범해놔서 별로 쓸 이야기도 없구요. 흑흑흑. 기대를 저버려서 죄송해요. 흑흑흑.
 

2. 대덕과 고흥의 짧은 추억

순천에 사는 동안 아버지의 근무지가 몇번 바뀌었고, 그에 따라 몇달간 어머니와 누나, 나 (방학중에는 형까지)는 아버지의 근무지에서 보낸 적이 있다.

대덕, 충남에도 대덕이란 곳이 있지만 여기서 대덕은 물론 전남에 있는 지명이다. 아주 작은 면으로 전남 장흥군에 속해 있다. 바다가 가깝고 이조백자 도예지가 있는 대덕, 내가 3-4살때 몇달간 지낸, 아주 몇몇의 단편적인 기억들만 남아 있는 곳이다.

 - 오토바이 아저씨
당시 아버지의 직장에 근무하던 아저씨 였던 것 같다.
내 눈에 그야말로 신기하고 멋있어 보이던 커다란 오토바이(실제로는 커다랗지 않았을 지도 모른다.)를 타고 다녔으며 우리집에 자주 오셨었다.
당시 우리가 머물던 집은 관사에 해당하는 듯한 집이었고 마당이 굉장히 넓고 앞뒤가 트인 대청마루를 사이에 두고 양쪽에 방이 있는 전형적인 일본식 가옥이었다. 마당에는 개구리들이 굉장히 많아서 개굴개굴 소리가 끊이지 않고 들렸다.
오토바이의 뒤에 나를 태우고 마당을 빙글빙글 돌던 아저씨의 넓은 등과 신이 나서 더 태워달라고 조르던 내모습이 생각난다.

 - 풍차바지와 찐빵
어머니는 가끔 누나와 나를 집에 남겨두고 외출을 하셨는데, 집에 남겨진 어린 남매는 TV를 보거나 하며 시간을 보냈었다. 그때 나는 풍차바지(어떻게 생겼는 지는 아실것이다.)를 입고 있었다는데 내가 넓은 마루를 돌아다니며 여기저기 흘려놓은 '부산물'들을 6살배기였던 누나가 다 치워 주곤 했다고 한다. (물론 나는 그런 지저분한 기억은 추호도 없다.)
지금도 누나는 그 이야기를 하며 조숙했던 자신을 자랑스러워 하며 공치사를 하곤한다. 물론 풍차바지를 입고 있었다는 놀림도 빼놓지 않고.
그 때가 겨울이었는지 어머니는 외출하셨다가 집에 오실때 꼭 찐빵을 사가지고 오셨는데 그때의 찐빵 맛은 기억이 없지만 모락모락 김이 나던 봉지에 들어있던 하얀 찐빵의 탐스러움은 잊을 수 없다.


고흥, 광주에서도 차로 2시간이 넘게 걸리는 남해의 끄트머리에 불쑥 튀어나온 고흥반도에 자리잡은 곳. 국립 나병환자 요양소가 있는 소록도가 있고 다도해에서도 아름답기로 유명한 내나로도, 외나로도가 있는 곳이다. 4살때 몇달간을 보낸 고흥의 기억은 대덕에서의 어렴풋한 기억에 비해 비교적 소상하다.

고흥에서는 세를 들어 살았었는데, 주인집과 마당을 사이에 두고 마주보는 구조였다. 가운데 있던 마당에는 화단이 있었고, 해바라기가 많이 피어있었다.

 - 막냉이 이모
주인집에는 딸이 둘 있었는데, 언니는 하얀 칼라가 달린 교복을 입던 고등학생이었고, 동생은 단발머리의 중학생이었다. 중학생이었던 동생을 나는 '막냉이(막내) 이모'라고 부르며 무척 따랐었는데, 자주 주인집에 놀러가 '아카시아꿀'에 밥을 비벼달라고 조르곤 했었다. 막냉이 이모도 나를 좋아하여 우리는 자주 동네의 놀이터에 놀러가거나 이런저런 놀잇감을 찾아 나와 놀아 주곤 했다.
막냉이 이모... 지금은 40대 중반의 중년 부인이 되어 있겠지.

 - 어깨동무
당시 초등학생이던 형과 누나는 방학때 고흥에 와 있었는데, 어머니를 졸라서 <어깨동무>란 어린이 잡지를 사보게 되었다. (익히 아시겠지만, <어깨동무>는 <새소년>, <소년중앙> 등과 함께 70-80년대 어린이 잡지의 전성시대를 이끌었었다.) 눈오는 날 어머니가 사들고 온 75년 1월호 <어깨동무>, 그로부터 10 년 가까이 - 내가 초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거의 몇번 빼먹지 않고 열심히 구독했던 잡지이다. 지금은 폐간되었지만 '주먹대장', '요철발명왕', '도깨비 감투'등은 글을 모르던 나에게도 만화라는 매체의 마력을 심어주기에 충분했고 어린 시절의 감성과 교양을 형성하는데 큰 도움을 주었다고 생각한다. 지금은 세월이 흘러 단한권도 남아 있지 않지만 <어깨동무>는 유소년기 나의 보물이었다.

아버지는 고흥에서 다시 광주로 발령을 받으셨다. 순천의 집을 정리하고 어머니는 고흥에 있던 몇몇 짐을 싸서 우리는 광주로 이사를 가게 된다. 커다란 트럭에 짐을 싣고 트럭 앞자리의 어머니 옆에 앉아서 광주로 향하던 그날의 내 모습이 떠오른다.

어린 나에게 세상은 굉장히 넓었으며 이제껏 겪어보지 못한 큰 도시인 광주는 새로운 낯설음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댓글(1)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oldhand 2004-08-11 10: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고흥 살던 그 시절에 먹었던 기억은 납니다. 어떤 맛이었는지는 기억이 안 나지만요. 좀 호사스러웠나요? 핫핫. 어차피 얻어먹은 건데요 뭐.
 

98년 당시 활동하던 하이텔의 모 작은 모임에 올렸던 잡글을 옛 글의 보관 차원에서 약간 수정하여 올림

요사이 부쩍 옛날 생각이 많이 난다. 어머니나 형, 누나 등 식구들이 모이면 우리 어릴적 이야기가 주요 화재가 된다. 사람들은 나이가 들수록 추억을 먹고사나 보다.

1. 나의 살던 고향

내가 태어난 곳은 전남 순천시이다. 지도를 보면 전라남도의 동남쪽, 여수반도의 바로 위에 자리잡고 있다. 6.25 전쟁전에 여수.순천 사건이 있었으며 조정래의 '태백산맥'의 배경으로 등장하기도 한다.

광주로 이사오기전 5살때까지 나는 순천에서 자랐다.
나는 자잘한 일들에 대한 기억력이 좋은 편으로 아주 어렸을적 지냈을 뿐이지만 제법 많은 고향의 기억을 지니고 있다.

1970년대 초반 그곳은 행정구역상 '市'였지만 시골이나 마찬가지였다.

순천을 떠올릴 때면 집보다도 먼저 떠오르는 곳이 있다.
집앞에는 제법 큰 개울이 흐르고 있었으며 시멘트로 된 다리가 있었다.
어린 나의 눈에는 무척 큰 개천과 다리로 기억되지만 다리에 난간이 없었던 점이나 누나가 다리에서 떨어졌으나 이마만 약간 깨진 일등을 미루어 볼때 그다지 큰 하천도, 높은 다리도 아니었던 것 같다.
당시에는 물이 맑아서 동네 아이들이 물에 들어가 물장구도 치고 송사리나 피래미도 잡으며 놀았지만 불행히도 나는 너무 어렸었는지 냇가에서 헤엄을 치며 놀았던 기억은 없다.

우리집은 뒷마당이 꽤 넓었으며 뒷마당 맨 구석에 화장실(변소라 함이 옳을듯)이 있었고 마당을 빙둘러 화단이 있었다.
형과 함께 마당에서 공을 차거나 세발자전거를 타기도 했으며 안방인지 건넌방인지 기억은 확실치 않으나 창문에 매달려 뒷마당을 내다보며 놀았던 기억도 있다.
앞마당은 약간 좁았으나 무화과 나무가 있어서 곧잘 나무에 올라 열매를 따먹기도 했다. 무화과의 그 달콤한 맛은 어린 나에게 큰 유혹이어서 위험을 무릅쓰고 자주 나무에 올랐었다. 어머니에게 들켜 혼난적도 있지만 할머니께서는 눈감아 주셨던 것 같다.

내가 어느정도 문밖 출입을 할 수있는 나이가 되었을 때에 이미 형과 누나는 초등학교에 다니고 있었고 나에게는 자연스레 친구가 생겼다.
앞집에 사는 남자아이 였는데 나이는 나보다 한살 많았으나 키는 내가 더 컸다. 세상에 태어나서 처음 사귄 친구였기에 당시에는 눈만 뜨면 친구를 찾곤 했다.

하루는 그 친구와 집앞 길에서 놀고 있었는데 지나가던 아저씨가 우리를 보고 "너희 몇 살이냐?"
하고 물어본 적이 있다.
 "세살이요" 라고 답했던 기억이 나는 걸 보면 나는 꽤나 오래전 일을 기억하고 있는 셈이다.
(내가 기억하기로는 이것이 나의 가장 오래된 기억이다. 그다지 중요한 일인것도 아닌데 이 일을 기억하고 있다는 것이 나에게도 미스테리이다.)

집 뒷쪽 냇가 옆으로 언덕이 있었고 언덕너머에 군용 비행장이 있었다.
친구와 함께 언덕에 올라가 헬리콥터나 경비행기가 뜨고 내리는 것을 구경하는 것도 당시의 주요한 놀이중 하나였다.

우리집이 있는 골목 끝의 모퉁이에 할아버지가 주인인 구멍가게가 하나 있었고 구멍가게의 좌판에 놓여있던 과자, 풍선 따위를 구경하는 것도 놓칠 수 없는 하루 일과 중 하나였다.
그 중 나의 눈에 강렬하게 들어왔던 좌판위의 물건이 있다.

바로 그것은 '하얀 밀가루를 발라 놓은 분홍색 막대기 풍선'. 한 뼘 정도의 크기지만 불면 꽤나 커진다.

당시뿐만 아니라 그 이후에도 막대기 풍선에는 밀가루가 발라져 있었다. 아마도 고무로 된 재질이 서로 늘어 붙지 않기 위함이었을 듯. 요새 어린 아이들은 막대기 풍선하면 야구장에서 나눠주거나 판매하는 응원용 막대기 풍선을 떠올릴 지도 모르겠지만 적어도 70년대에 어린 시절을 보낸 사람이라면 누구나 밀가루가 발라진 막대기 풍선이 어떻게 생겼는지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

기억은 꽤나 선명했던지 아직도 어렴풋하게 분홍색 막대기 풍선의 영상을 떠올릴 수 있다. 물론 풍선이나 과자를 샀던 기억은 없다. 단지 구경만 하는 것으로도 어린 나에게는 흥미진진한 일이었으니까.

아버지는 당시 전자제품 구입에 굉장히 선구적인 의욕을 갖고 계셨다.
당시 우리집에는 동네에 흔치 않던 TV, 선풍기, 세탁기등이 있었으니 부자도 아닌 우리집으로서는 초호화판 전자제품으로 중무장 한 것이었고 그것도 TV나 선풍기는 내가 태어나기도 전부터 있었던 것이니 동네 사람들의 이목을 끌기에 충분하였다.

TV는 긴 다리가 4개 달리고 여닫이 문이 있는 고전 TV의 전형적인 모델이었다.
그 TV를 통해서 나는 우리의 영웅이었던 '타잔'을 만날 수 있었고 영원한 어린이의 친구 '우주소년 아톰'과 '배트맨과 로빈'도 볼 수 있었다.
당시 몇년간은 보자기를 목에 묶고 배트맨 흉내를 내는 아이들(슈퍼맨이 국내에 등장하기 전이다.)과 "아아아~~~아아아아"를 외치고 다니는 작은 타잔들로 동네 골목길들이 시끌벅적 했었다.

어릴적 아이들에겐 학교는 동경의 대상이며 미지의 영역이다.
나도 초등학교에 들어가기 전까지 꽤나 학교에 빨리 다니고 싶어서 안달을 했었다.
형과 누나가 다니던 초등학교에 놀러간 적이 있었다. 아마도 할머니를 졸라서 갔던 것 같다.
학교에 가서 봤던 끝없이 넓던 운동장!
우리집 뒷마당 보다도 100배는 넓어보이는 운동장!
운동장 구석에 있던 능목, 구름다리, 시소, 그네.
그 운동장에서 체육수업을 하고있는 학생들.
쉬는시간이면 각 교실에서 떠들석거리며 밖으로 몰려 나오는 아이들.
아, 나도 빨리 학교에 다녔으면!

그러나 광주로 이사를 하게 되는 바람에 나는 결국 그 학교와 운동장에 정식으로 발을 들여 놓지 못한다.

그리고 몇몇 기억의 단편들을 남기고 '순천시 매곡동' 우리집과 동네는 나의 삶에서 멀어져 갔다.

 


댓글(1)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oldhand 2004-08-09 11: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과찬의 감상입니다. 누구에게나 어린 시절의 추억은 아름답게 기억되는것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