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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지 세상의 끝 ㅣ 지만지 희곡선집
장뤼크 라가르스 지음, 임혜경 옮김 / 지식을만드는지식 / 2013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프랑스 작가인 장뤼크 라가르스의 희곡. 10년 만에 집을 떠났다 집으로 온 그 집의 장남 루이가 등장하면서 시작된다. 그에게 다가오는 죽음을 알리기 위해서다. "...서른 넷도 채 안 된 지금 이 나이에 난 죽을 것이다.(...) 위험을 무릅써 보지만, 살아 남을 수 있다는 희망은 결코 없기에, 두렵기만 하다. )...스스로에게, 다른 사람들에게 마지막으로 내가 나 자신에게 책임이 있고, 극단적으로는 내가 내 삶의 주인이라는 환상을 보여 주기 위해서다."
그러나 모처럼 큰 맘 먹고 집으로 왔지만, 더욱이나 그의 앞에 다가오는 죽음을 이야기하려는 비장한 마음은 식구들이 그에게 쏟아붓는 말들 속에 묻혀버린다. 오히려 그는 말하는 입장이 아니라 듣는 처지가 된다. 그 동안 그(루이)가 집을 떠난 후 소식이 없었다는 것이 대화의 중심이 된다. 따라서 그는 극중에서 독백을 할 수 밖에 없다.
쉬잔(루이의 여동생) : 큰 오빠가 떠났을 때 오빠가 그렇게 오래 떠나 있을 줄 몰랐어, 신경 안 썼어.(.....) 오빤, 가끔씩 우리한테 편지를 보냈지, 가끔씩 우리한테 편지를 보내는데, 편지가 아니라, 뭐라고 해야 하지? 쪽지 글, 단지 쪽지 글, 문장 한 두 줄, 그 외에는 아무것도, 그걸 뭐라고 하더라? 생략어법. "난 잘 있어 그리고 다들 그렇기를 바라" 라는..
그들의 대화를 듣는 것은 어수선하다. 루이의 복잡한 마음을 함께 느낀다. 어쩔수 없이 루이의 독백을 주목하게 된다. 루이는 이젠 집으로 가야겠다는 마음을 집으로 오기 약 열흘전 쯤 불쑥 결정하게 된다. 그저 식구들을 보러 가야겠다는 생각만 했다. 집으로 가야겠다는 마음만 챙겼다. 그리고 갈등의 며칠을 보내면서 스스로 집으로 안 가도 된다는 이유들을 생각하기도 했지만, 집으로 가서 가족들의 얼굴을 봐야겠다는 생각을 안 바꿨다.
루이는 어느 날 문득 불안감이 들었다. 비록 스스로 집을 떠나 가족들을 잊고 살다시피 했지만, 그의 죽음이 다가오는 느낌때문에 그랬을까? 가족들에게 잊혀져 가는 존재, 포기한 사람, 이젠 모두가 날 사랑하지 않을 것이라는 그런 생각이 그의 마음을 지배했다. 잊혀져 가는 사람. 헤어진 사람보다 더 불쌍한 사람이 잊혀진 사람이라던가? 김춘수 시인은 이를 詩語로 표현했다. "우리들은 모두 무엇이 되고 싶다 / 너는 나에게 나는 너에게 /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의미가 되고 싶다."
루이는 이제껏 알지 못했던 사실을 깨닫게 된다. 어느 날 아침. "지금까지는 전혀 알지 못했지만, 내가 불평했던 그 사랑의 결핍이 언제나 날 비겁하게 만든 유일한 이유였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사랑의 결핍은 언제나 나보다도 다른 사람들을 더 상처받게 했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한 마디 할 수도 없고 나한테 한 마디 할 의무도 없는 죽은 나를 사랑하는 것처럼 살아 있는 나를 그들은 이미 사랑하고 있었다는 이상하고도 절망적인 그리고 계속 사라지지 않는 생각으로 난 잠에서 깨어았던 것이다." 그 중 독백자가 한 사람 더 등장한다. 주인공 루이의 남동생 앙투안은 집을 떠나 소식이 없던 형에 대한 원망과 연민이 섞인 독백 같은 대사를 통해 그의 마음을 표현한다. "...아무도 형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이런 걱정, 이런 걱정이 이젠 내 불행이 되었어, 마치 언제나 어린 동생들이 형을 따라하거나 걱정하는 것 같이, 이제 나도 불행해, 그런데도 계속 죄의식이 들어, 내가 별로 불행하지 않는 것에 죄의식이 들고, 억지로 불행하다고 생각하면서, 불행하다고 생각되지 않아서 조용히 죄의식을 가질 정도로..."
작가는 이 희곡을 통해 무엇을 이야기하고 싶었을까? 관객들은 이 연극이 무대에서 공연되는 동안 무슨 생각을 하게 될까? 가족에 대해, 사랑에 대해 그리고 또 다른 무엇 책임감이나 연대감? 나는 이 작품을 읽으면서 '가족'이라는 것을 다시 생각해본다. '나'라는 존재는 가족이란 울타리와 공동체 안에서 어떤 의미를 갖고 있는가? 어려부터 같이 한 지붕 밑에서 한 솥밥을 먹고 생활한 가족들은 나를 얼마나 알고 이해하고 있을까? 나는 그들을 얼마나 잘 알고 있을까? 완전 이해하고 있다고 장담할 수 있을까? 이 질문에 명쾌한 답변을 할 자신이 없다.
이 책을 옮긴이 임혜경 교수에 의하면 이 작품은 두 가지 측면을 동시에 갖고 있다고 한다. 오랜만에 재회한 가족이 보내는 어느 일요일 하루 나절 이야기에서 시골 가정의 현실, 흔한 가족 풍경을 볼 수 있다는 사실적인 면. 그리고, 몽환적이고 환상적인 부분이 섞여 있다고 한다. 특히 주인공 루이의 의식 세계는 단순히 그날 하루라는 현실 시간을 넘어서 과거와 현재, 미래를 자유로이 넘나들고 있고, 현실과 비현실을 오간다.
결국 루이는 가족들 앞에서 그가 하고 싶었던 말(그의 삶의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그 말)을 못하고 다시 집을 떠난다. "그 다음에, 내가 한 건, 떠난다.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다, 몇 달 후 죽는다. 1년 안에...밤에, 산에서 길을 잃었다. 철길을 따라 걷는다.(...) 하늘과 땅이 맞닿아 있는 밤, 홀로 걷고 있다, 내가 생각하는 건 크고 멋진 소리, 계곡에 울려 퍼지도록 환희에 찬 긴 함성을 질러야겠다고, 나한테 선사해도 될 그런 행복, 힘껏 한 번 소리쳐 보는 것, 하지만 그렇게 하지 않는다, 그렇게 하지 않았다, 자갈 위에서 내 발소리와 함께 난 다시 길을 떠난다. 그건 망각이다, 후회하게 될, 내가 지르지 않은 함성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