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용래 시선 - 초판본 지만지(지식을만드는지식) 시선집
박용래 지음, 이선영 엮음 / 지만지(지식을만드는지식) / 201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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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 이루지 못하는 밤 고향집 마늘밭에 눈은 쌓이리.

잠 이루지 못하는 밤 고향집 추녀 밑 달빛은 쌓이리.

발목을 벗고 물을 건너는 먼 마을.

고향집 마당귀 바람은 잠을 자리.       _ 겨울밤



박용래 시인을 만나봅니다. '눈물의 시인', '정한의 시인'이라 불리웁니다. 두만강 철교를 지날 때 내리던 눈을 회상하며 아침 9시 반부터 그날 밤 잠들기 전까지 종일을 쉬지 않고 울었다는 일화가 전해지기도 합니다. 그러나 시인의 시(詩)에선 강한 서정성이 눈물보다 먼저입니다. 마치 한 폭의 수묵화를 보는 느낌입니다. 담담한 애틋함이 담겨 있습니다.  


 

살아 무엇하리 / 살아서 무엇하리

죽어  / 죽어 또한 무엇하리

겨울 꽝꽝나무 / 꽝꽝나무 열매

울타리 밑의 / 인연

진한 허망일랑 / 자욱자욱 묻고

'小寒에서 / 大寒사이'

家出하고 싶어라 / 싶어라.          _ 自畵像 3


     * 꽝꽝나무 : 감탕나뭇과의 상록 활엽 관목.


 

소리가 잘 조합되어 예술적 효과를 거둔 것이 음악입니다. 시에서도 특히 음악적인 요소, 리듬감은 詩를 詩답게 만들지요. 박용래 시인은 그런 음악적 리듬감을 그의 詩에 잘 녹여내고 있습니다.


호두 깨자
눈 오는 날에는

 

눈발 사근사근
옛말 하는데

 

눈발 새록새록
옛말 하자는데

 

구구샌 양 구구새 모양
미닫이에 얼비쳐

 

창호지 안에서
호두 깨자

 

호두는 오릿고개
싸릿골 호두.

        

         - '미닫이에 얼비쳐'


 

맑은 하늘에 갑자기 구름이 몰려오며 습한 바람과 함께 소나기가 내립니다.
제아무리 뒷짐 지고 양반 걸음을 걷다가도 소나기를 만나면 몸과 마음이 바빠집니다.
어쩌면 소나기는 우리 살아가며 만나는 일상의 변화일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누웠는 사람보다 앉았는 사람 앉았는 사람보다 섰는 사람
섰는 사람보다 걷는 사람 혼자 걷는 사람보다
송아지 두, 세 마리 앞세우고 소나기에 쫒기는 사람.

               

                             - '소나기'

 

 

이제 곧 산들은 새 옷을 갈아입을 것입니다.
스산한 겨을 바람을 여전히 잘 견뎌냈지요.
내 몸은 겹겹히 껴입은 채, 산 나무들의 벌거벗기운 형상을 보는 것은 참 미안합니다.
내 몸의 옷껍질을 하나, 둘 씩 벗을 때 나무들은 오히려 덧 입겠지요.
시인이 바라보는 산을 소개 해드리렵니다.


 

산은
산빛이 있어 좋다
먼 산 가차운 산
가차운 산에
버들꽃이 흩날린다
먼 산에
저녁 해가 부시다
아, 산은
둘레마저 가득해 좋다 

      

            - '둘레'

 

'가차운' 이라는 표현이 정겹습니다.  당신과 나의 거리는 가차운가요?


요즘 들어 아름다운 우리말, 사용을 안해서 잊혀져만 가는 우리말이 더욱 애틋합니다.
아니, 좀 더 진솔한 표현은 무슨 뜻인지 선뜻 그림이 그려지지 않는 말들에게 빚을 지고 있는 마음입니다.  시인, 소설가들 덕분에 국어사전 속에서나 자리하고 있을 언어들이 생명을 얻습니다.
그리고 보니 박용래 시인은 눈, 바람, 새, 꽃, 비(雨)를 많이 그렸군요.
그리 어려운 단어들은 눈에 띄지 않지만 장마가 지난 뒤 열기를 품었던 대지에서 풍기는 흙내음같은 우리말이 담겨 있는 詩를 옮겨 봅니다.


 

건들장마 해거름 갈잎 버들붕어 꾸러미 들고
원주막 처마 밑 잠시 섰는 아이 함초롬 젖어 말아 올린
베잠방이 알 종아리 총총걸음 건들장마 상치 상치 꽃대궁
白髮의 꽃대궁 아욱 아욱 꽃대궁 白髮의 꽃대궁 고향 사람들
바자울 세우고 외넝쿨 거두고.   

        

                    - 건들장마

 

 

이 시집에는 80편의 詩가 실려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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