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제국 쇠망사 지만지 고전선집 662
에드워드 기번 지음, 이종호 옮김 / 지만지(지식을만드는지식) / 2011년 2월
평점 :
구판절판


《로마제국 쇠망사》를 쓴 에드워드 기번(Edward Gibbon, 1737~1794)은 로마의 역사를 대체로 다음 세 시기로 구분해 저술했습니다. 


제1기는 트라야누스(재위 98~117)황제와 안토니우스(138~161)황제 시대로부터 게르만족과 스키타이의 야만족 등(기본적으로 훈족을 의미)에 의해 서로마 제국이 멸망하는 시기까지입니다. 

제2기는 동로마 제국의 영광을 회복한 유스티나마누스 1세 (527~565)로부터 아랍인의 소아시아 및 아프리카 정복과 800년의 서로마제국 부활, 즉 샤를 마뉴(카를 대제, 768~814)의 등극까지입니다.

마지막으로 제3기는 서로마제국의 부활로부터 터키인에 의한 콘스탄티노플 공략 그리고 로마 황제 계보가 완전히 소멸할 때까지의 약 6세기 반의 기간을 포함합니다.


또한 이 책은 이 기간 동안 등장하는 십자군의 역사를 포함해 다루고 있습니다. 한 마디로 100년에서 1500년에 이르는 서유럽의 역사와 서방에 중요한 영향을 미친 동방의 역사를 총괄합니다.


가장 보편적으로 제시되는 로마 제국의 멸망 요인은 군사적인 현상이 아니라는데 그 특징이 있습니다. 경제적 취약성과 여러 도시의 쇠퇴, 인구 감소, 식민지 문화나 야만인 문화에의 동화, 그리스도교의 채택, 그리고 콘스탄티노플로의 천도 등의 모든 것이 고대 로마의 종말을 재촉한 원인이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하나의 제국이 노화할 때 나타나는 필연적인 현상이며, 강력한 제국을 운영하던 국가들 모두에게서 이 같은 쇠퇴의 흔적을 찾을 수 있다고 대부분의 학자들은 말합니다. 


이 책은 발간된 이후 시종일관 종교적 불경이라는 비난을 받았는데, 그는 신의 존재는 기꺼이 받아들이면서도 기독교가 전파됨에 따른 폐해에 대해 집중적으로 서술했던 것입니다. 특히 제1기의 제15장과 제16장, 마지막 부분인 제38장의 〈서로마제국 멸망의 개관〉에 기록한 종교, 즉 기독교에 대한 그의 시각이 우선적 공격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그가 로마 제국의 쇠망사를 다루면서 시종일관 견지한 맥락은, 로마 멸망의 가장 큰 요인으로 야만족의 침입을 우선시 하면서도 로마 제국이 기독교를 받아들였기 때문에 나약한 로마인이 이에 적절하게 대응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물론 그의 이러한 견해가 당대의 종교인과 지식인들을 설득하지는 못했습니다. 특히 그의 서술에 대한 종교계의 공격은 매우 혹독했는데, 토머스 보들러는 종교적인 요소를 모두 삭제한 《로마제국 쇠망사》의 특별판을 편찬하기도 했습니다. 세인트 폴 성당의 딘 밀먼은 다음과 같이 말할 정도였답니다.


“이 책은 기독교에 대한 뻔뻔스럽고 비정직한 공격을 자행하고 있다.”


기번의 《로마제국 쇠망사》는 발간 직후 역사학뿐 아니라 정치, 경제, 문화에도 커다란 영향을 미쳤습니다. 나폴레옹에게는 제국의 야망을 갖게 했고, 처칠도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자신의 《회고록》을 집필 할 때 이 책의 영향이 컸다고 말했습니다. 또한 영국의 수상 클레멘트 애틀리가 1949년 아일랜드의 분리 독립문제와 같은 중요한 일이 산적해있던 와중에도 《로마제국 쇠망사》를 두 번이나 읽었다는 것은 이 책의 비중을 단적으로 보여 줍니다. 특히 시오노 나나미는 《로마인 이야기》를 집필한 이유의 하나로 이 책의 매우 커다란 영향력에 대한 반발심이 작용했다고 고백했습니다.


로마사를 전공하는 일부 학자들은 현재의 시각으로 볼 때 기번의 《로마제국 쇠망사》를 완전히 맹신해서는 안 된다고 하지만, 이 책의 대부분의 내용이 일반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사실에 대한 정확한 기술과 그러한 역사적 사실에 대한 기번의 평가와 작업이 아직도 여전히 유효하다는 대접을 받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그가 역사학자로서 갖추어야할 정확성과 엄밀성을 갖고 《로마제국 쇠망사》를 저술했음을 보여 줍니다. 이러한 점이 이 책을 현 시대의 세계인들도 선호하는 고전으로 꼽는 이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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