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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딴방
신경숙 지음 / 문학동네 / 1999년 12월
평점 :
외딴방의 문을 열다.
나에게 주어진 길을 걸어가며, 나는 몇 번의 잊고 싶은 기억과 숨기고 싶은 추억의 발자국을 새겼을까. 그 발자국 중에는, 되돌릴 수만 있다면 바꾸고 싶은 것들도 있고, 아애 지워버리고 싶은 것들도 있다. 할 수만 있다면 그 시간들은 빈 공터로 남겨두고만 싶다. 그러나 시간에 공터가 있을 수 있을까. 나는 끝까지 모른 척 하고 싶은 그 시간에도, 이름 모를 꽃은 피었다 지고, 한 아이가 태어나고, 또 어떤 이는 죽음의 문턱을 밟고 있었을 텐데. 과연 시간에도 공터가 있을 수 있을까 생각해본다.
추억을 먹고 산다는 우리 사람들에게는, 누구나 한 대만 때리면 울음을 터뜨려 버릴 것 같은, 눈물 그렁그렁한 눈을 가진 먹구름이 있다. 비록 그것이 담고 있는 비의 양은 다를지라도. 그 비를 쏟아내지 않고 담고만 있으면 먹구름은 사라지지 않는다. 그래서 때로는, 가슴에만 담아 놓았던 먹구름을 꺼내 소리 내어 울기도 하고, 지인과 술 한 잔 기울이며 털어내려고 하기도 한다.
신경숙 작가에게도 공터로 남겨두고 싶었던 시간이 있었다는 것은, 이 작품을 통해 알게 되었다. 건너 뛰고 싶었던 시간들. 그러나 결국은 그럴 수 없었던 시간들 속에, 외딴방의 그녀가 있었다. 위로 나이를 세어 가면 열다섯에서 바로 스무 살이 되었고, 아래로 세어 가면 스무 살에서 곧바로 열다섯이 되어 버리는, 공백의 시간. 어디로도 흐르지 못하게 공백의 시간들을 방죽 속에 고여 놓은 그녀는, 그 시간들이 햇빛에 말라가기를 기다렸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비가 한 번 오면 다시 불어나버리는 방죽의 물처럼 뭐 하나 툭 건드리면 다시 채워질 그 시간들을, 그녀는 이제 고백하기로 한다. 15살에 고여 있는 방죽의 물에 길을 터내어 열여섯, 열일곱, 열여덟, 열아홉으로 흐르게 한다. 20살의 그녀와 만날 수 있도록.
서른일곱 개의 방 중의 하나에 그녀와, 큰오빠, 외사촌의 외딴방이 있다. 동남전기주식회사의 스테레오과 A라인 1번인 그녀가 있다. 낮에는 공장에서 일하고, 5시에 퇴근해 영등포여고 산업체특별학급에 다니는 16살의 그녀가 있다. 그녀 소녀 신경숙.
시대의 풍속화를 그리다.
침묵으로 묵살해버렸던, 스스로 사랑하지 못했던 열여섯, 열일곱, 열여덟, 열아홉의 소녀시절과 마주보고 선 그 심정은 어땠을까. 낙타의 혹처럼 자신의 등에 짊어지고 있었다는 그 시간들을, 이제는 내려놓을 수 있게 되었을까.
여태 남아있는 그 시절의 잠버릇처럼, 결코 그저 지나가버린 시간이 될 수 없는 그 시간들은 이제 소설이 된다. 그리하여 그녀의 기억 속에 방죽의 물이 되어 고여 있던, 그 시절 그 사람들이 흘러나온다. 피아노에 앉은 여자의 두 손에서 끊임없이 열 마리씩 스무 마리씩 물고기가 쏟아진다는 한 시인의 표현처럼, 신경숙 작가의 두 손에서, 그렇게 그 시절 그 사람들이 튀어나온다. 캔디 싸는 일을 하다 오른손을 제대로 쓸 수 없게 되어 왼손잡이가 된 안향숙, 언제나 헤겔을 읽던 급장 미서, 미싱 바늘에 찔려 물에 손을 넣으면 부풀던 희재언니, 낮에는 방위로 근무하고 새벽과 밤에는 가발을 쓰고 나가 학원에서 강의하던 큰오빠, 살아가기 위해 꿈이 필요했던 소녀시절 그녀까지.
그들이 그려가는 소설 속 삶의 모습은, 비단 그들만의 이야기는 아닌 것 같다. 그 시간을 살아낸, 한 사람 한 사람의 이야기가 모여 결국은 우리의 이야기가 되기 때문이다. ‘80년대의 노동자들이 힘든 삶을 살았다’가 아닌 80년대 노동자의 가족 또는 친구가 되어 그들이 들려주는 이야기를 듣게 되는 순간부터는, 그것은 이제 남의 이야기가 아닌 나의 이야기가 된다.
이 글 속엔 그녀의 말대로 수많은 ‘나’가 등장한다. 그녀는 ‘우리’라 칭하지 않고 ‘나’라고 하였지만, 같은 시간을 살아간 사람들에게 그것이 ‘우리’가 아니 될 수 있을까. 문학이란 본래 ‘우리 모두’라고 말하는 식의 총체적이고 일반적인 어떤 것을 거부하는 본질을 가지고 있는 것 같다. 될 수 있는 한 구체적이고 세세하게 나타내려는, 그래서 더욱더 생생한 삶의 모습을 그려내려는 그런 것이 아닐지. 어쩌면 시시해보이기까지 하는 존재들을 품에 안고 존중하여, 그들의 목소리를 대신 내어주는 것. 개인의 이야기를 하여 결국엔 개개인의 공감을 얻어내는 것. 그냥 어떤 소녀가 아닌 ‘16살의 소녀 신경숙’의 이야기를, 그냥 광주 사람이 아닌 ‘화순이 고향인 왼손잡이 안향숙’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 그녀의 나직한 고백이, 한 시대의 풍속화가 된 이유가 이것은 아닐까.
소설과 픽션사이
이 소설의 첫 문장과 마지막 문장은, 글쓰기에 대한 그녀의 물음이다. 끝내 답은 내리지 못한 채, 또 한 번 질문하는 것으로 이 소설은 마무리 된다.
p15 이 글은 사실도 픽션도 아닌 그 중간쯤의 글이 될 것 같은 예감이다. 하지만 그걸 문학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인지. 글쓰기를 생각해본다. 내게 글쓰기란 무엇인가? 하고.
p424 이 글은 사실도 픽션도 아닌 그 중간쯤의 글이 된 것 같다. 하지만 이걸 문학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인지. 글쓰기를 생각해본다. 내게 글쓰기란 무엇인가? 하고.
‘작가’라는 직업에 대해 생각해본다. 자신이 살아가는 세상의 일들을 글로 쓰는 작가. ‘미래소설이나 가상소설이라고 처음부터 작정을 해둔 게 아니면 글쓰기는 결국 뒤돌아보기 아닌가.’라는 신경숙 작가의 말처럼, 작가는 자신의 겪은 일들을 글로 쓴다. 소설이라는 무기를 가지고, 세상의 일들을 고발하는 것이다. 가장 우아한 고발장을, 아니 고소장이라 해도 좋겠다. 돌이켜 생각해봐도 믿어지지 않는 저임금. 노조 설립을 방해하는 회사의 치졸한 행태. 노동자들의 힘겨운 투쟁. 재판도 없이 사람을 끌고 가는 삼청교육대. 이렇게 고발장을 적고 있는 그녀를 누구도 방해할 수 없을 것 같다. 그녀는 작가니까. 소설을 쓰고 있는 거니까. 그것이 그녀에게 주어진 최고의 무기니까.
그렇게 작성한 그녀의 고발장 속엔 사실 뿐만 아니라 적절한 연출도 있을 것이다. 소설이란, 진실과 픽션의 필연적 결함 품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발바닥과 발자국처럼. 소설은 ‘진실’이라는 발바닥을 쫒아가는 발자국이 아닐는지. 결국 발자국을 찍어낸 발바닥은 될 수 없지만, 끈질 지게 쫓아가 닮은 모습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닐지. 신경숙 작가의 말처럼 아무리 집착해도, 소설은 삶의 자취를 따라갈 뿐, 앞서 나갈 수도 나란히 걸어갈 수도 없을지 모른다. 하지만 그래서 소설이 무의미하다고 할 수 있을까. 외딴방을 고백하는 그녀의 노력이 헛되었다고 말할 수 있을까.
외딴방의 의미 그리고 그것이 남긴 것
발바닥을 따라가려는 발자국의 노력. 발바닥이 남긴 것을 정직하고 치밀하게 그려내려 한 그녀. 세상의 숨어 있는 골목의 발자국을 드러내게 하고, 때론 누군가의 슬픈 고성방가 소리를 들려주는 것이 소설이라면, 그것은 꼭 필요할 것 같다. 결국 발바닥은 되지 못하나, 이렇게 발자국을 쫓아 가다보면, 발바닥의 흔적은 알 수 있을 것이다.
이 글은 글쓰기란 무엇인가, 고민하는 그녀의 이야기와, 그녀의 소녀시절 이야기로 채워진다. 그녀는 이 글의 전면에 등장하여, 생생한 음성으로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글과 작가 사이의 단절이 느껴지지 않게 글을 쓰고 있는 그녀의 모습을 그대로 드러낸다. 쓰고 있다고. 지금 앉아서 글을 쓰고 있다고. 문학은 정리와 정의 그 뒤쪽에서 흐르고 있다고 생각한다고. 해결되지 않는 것들 속에 뒤쪽의 약한 자, 머뭇거리는 자들을 위해, 정리되고 정의된 것을 헝클어서 새로이 흐르게 하기가 문학인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고. 글의 사실성을 더해주는 새로운 글쓰기의 구성 방식을 보여준 것, 외딴방이 남긴 것임은 틀림없다.
또한 이 소설은 힘없고 약한 사람들을 주인공으로 그려내어, 힘 있고 가진 자들 때문에 다친 마음을 어루만져준다. 지금도 우리는, 우리의 분신이 주인공이 되는 소설을 끊임없이 갈구 하고 있다. 그래서 드라마에서 보는 화려하고 폼 나게 사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아닌, 외딴방에서 공장을 다니던 가난한 시절의 사람들의 이야기가 더 애틋하고 살갑다. 정리되고 정의된 것들을 헝클어주기를 바라는 마음이 있는 한, 우리의 이야기를 바라는 마음이 있는 한, 이 소설은 현재진행형이 될 것이다.『외딴방』의 마지막 장은 쓰여 졌으나, 아직 끝나지 않은 이야기가 된 이유이다.
그녀의 고발장을 읽으며 나는 때로는 치사하고 불공평한 세상에 대한 면역 주사를 한 대 맞은 것 같다. 그녀의 외딴방이 끊임없이 정리되고 정의된 것들을 헝클어주길 바란다. 비록 환한 가로등까지는 될 수 없을지라도, 세상의 작은 반딧불이 하나가 되어주기를. 자신의 외딴방을 고백할 수 있는 용기를 주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