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라하의 소녀시대 지식여행자 1
요네하라 마리 지음, 이현진 옮김 / 마음산책 / 2006년 11월
평점 :
품절



 얼마 전에 친구와 함께 쇼핑을 갔었습니다. 여름휴가 때 입을 옷을 사기 위한 것이었지요. 시원해 보이는 원피스, 돌청색 스키니진, 새하얀 블라우스 등 여러 가지 옷들이 우리를 맞아주었습니다. 다양한 옷들 속에서 저에게 가장 잘 어울릴만한 옷을 찾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어요. 때문에 거울 앞에 서서 옷을 대보기도 하고 직접 입어보기도 하면서 옷 고르는 일에 열중하였답니다.

 그렇게 이옷저옷을 구경하다가 장식이 매우 요란한 블라우스를 보았습니다. 목 부분의 카라 전체가 레이스로 되어 있고, 밑 부분에는 커다란 리본까지 묶여 있어 조금은 부담스러운 옷이었어요. 저는 그 옷을 보고는 "이런 옷을 사는 사람이 정말 있을까?" 하고 친구에게 속삭였습니다. 그러자 친구는 "사는 사람이 있으니까 파는 거겠지." 하고 대답을 하였는데, 잠시 후 친구의 말대로 한 손님이 와서 그 옷을 사가는 것이 아니겠어요. 

 다른 옷을 구경하고 있던 저는 정말로 그 옷을 사가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에 놀랐습니다. 그러다가 문득, 너무 나의 잣대로만 옷을 평가했다는 생각이 들어 부끄러워졌습니다. 이 옷가게에 진열되어 있는 다양한 옷들만큼이나 다양한 개개인의 취향을 인정하지 못한 것에 대한 부끄러움이었습니다. 제가 예쁘다고 고른 옷도 다른 사람이 보기엔 그렇지 않을 수도 있을 테지요. 그래서 옷가게에는 그렇게도 다양한 디자인의 옷들이 있었나 봅니다.

 생각해보니 이 세상에는 나와 다른 사람이 참 많이도 존재합니다. 나와 비슷한 점을 가진 사람보다 다른 점을 가진 사람을 찾는 일이 훨씬 더 수월할 것입니다. 함께 쇼핑을 간 친구는 일란성 쌍둥이로 태어나서 똑같이 생긴 동생이 있습니다. 고등학교에 다닐 때까지만 해도 그 둘은 비슷한 점이 많아 보였어요. 두 사람 모두 교복을 입었었고, 머리 길이도 비슷했기 때문이었죠.

 
그러나 대학교에 들어오자 각자의 취향이 확실하게 드러났어요. 쌍둥이 중 언니인 제 친구는, 대학생이 되자 더욱 여성스러워졌습니다. 머리를 마음껏 기를 수 있게 되자 허리에 닿을 정도로 머리를 길렀고, 옷은 예쁜 치마만 골라 입었습니다. 친구의 쌍둥이 동생은 대학생이 되고서도 짧은 머리가 편하다며 머리를 기르지 않았고, 바지가 활동하기 좋다며 치마를 입지 않았어요. 상황이 이러하니, 그 둘은 신체 사이즈가 같은데도 옷을 나눠 입지 못한다고 합니다. 쌍둥이조차도 이렇게 다른 점이 많은데, 다른 환경에서 자란 사람들이 다른 시각을 가지고 세상을 살아가는 것은 어쩌면 너무도 당연하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래서 나와 비슷한 사람보다 다른 사람이 더 많은 것이겠지요. 

 
그렇게 서로 다른 것이 많은 세상이지만, 그럼에도 사람들은 함께 어우러져 살아갑니다. 그것은 어쩌면 다름이 가진 성질이 서로를 끌어당기는 자석의 양극과 같기 때문이 아닐까요. 갖지 못한 것에 대한 동경과, 가지 못한 길에 대한 미련이 '다름'이라는 단어에 '매력'이라는 옷을 입힌 것은 아닐까요. 

 이 책의 저자 요네하라 마리에게서, 다르다는 것이 꼭 틀린 것만은 아니라는 사실을 배웠습니다. 요네하라 마리, 그녀는 우리나라가 이데올로기의 대립으로 동족상잔의 쓰디쓴 잔을 마시던 해에 일본 도쿄에서 태어났다고 해요. 그리고 그녀의 나이 열 살 때에는, 공산주의 이념을 가진 아버지를 따라 체코의 수도 프라하로 건너가 5년 동안 공산당 간부자제 전용학교를 다녔다고 합니다. 그 시절의 이야기를 담아낸 것이, 바로 이 책 <프라하의 소녀시대>이지요.

 소설보다도 더 소설 같은 그녀의 삶에 연신 놀랐습니다. 놀란 가슴은 쉽사리 진정이 되질 않아 오래도록 제 심장의 뜀박질이 멈추질 않았어요. 몇 번이나 책을 들었다 놓았다 하며 놀란 가슴을 다독이고 나서야, 그녀가 남긴 인생의 흔적을 따라가 볼 수 있었답니다. 그녀의 독특한 인생행보를 따라가 보지 않고는 견딜 수 없었습니다. 그녀가 남긴 발자국을 따라가자, 아직 봄이 오기 전의 프라하와 파란만장한 동유럽의 현대사가 그려진 풍속화가 눈앞에 펼쳐졌습니다. 
결코 일반적이라고 할 수 없는 그녀의 이야기가 그녀만의 섬세한 문체와 버무려져 색감 진한 화폭이 되었더군요. 생생한 그 그림 속에서 그 시절 속 인물들이 툭 하고 튀어나올 것만 같았어요. 이념과 사상의 대립이 있던 그 시절에도 소녀들의 웃음소리가 있었습니다. 괜찮다면, 그 시절 그곳에 잠시 머물고 싶어졌습니다.   

 어쩌면 가장 아름답고 순수했을 그 시절 속엔, 멋진 추억을 함께 만들던 친구들이 있습니다.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자신의 고국 그리스의 하늘을 "그건 말야, 정말 쨍하고 깨질 듯이 파래" 라며 자랑스러워하던 리차, 왜 그런 거짓말을 하는지조차 알 수 없는 새빨간 거짓말쟁이 아냐, 언제나 객관적이며 누구에 대해서도 어떤 일에 대해서도 깨인 눈으로 약간 조소를 하던 야스나가 바로 그들입니다. 

 오래전에 헤어진 친구를 찾아나서는 일은 마음먹기는 쉬워도 실행으로 옮기기는 어렵습니다. 꿈을 꾸기는 쉬워도 그것을 이루는 일은 어렵듯이 말입니다. 저는 초등학교 다닐 적에 아버지의 일 때문에 이사를 많이 다녔습니다. 제일 오래 다녔던 학교가 초등학교 1학년 때부터 3학년 때까지 다녔던 곳입니다. 그런데 다른 곳으로 이사를 간 후에도 그곳은 도무지 잊히질 않는 거예요. 새로 이사 간 곳에 비하면 그곳은 전혀 멋스럽지도 않았고 학교도 멀어서 다니기 힘들었는데도 말이에요. 태어난 고향도 아니었는데 향수병에 걸린 것처럼 그곳의 모습이 너무도 생생하게 떠올랐습니다. 아마도 그곳은 제 마음속 고향이었나 봅니다. 이따금씩 그곳의 풍경이 가슴속에 밀려왔습니다. 참 커다랗게 느껴졌던 학교 운동장, 친구와 군것질하던 학교 앞 문구점, 아빠가 오실 시간이 되면 마당에 나가 기다리고 있다가 멀리 아빠의 모습이 보이면 동생과 함께 뛰어갔던 골목길, 그 모습은 눈을 감으면 더욱 생생해져 지워지지가 않았습니다. 그래서 이사 가고 얼마 되지 않았을 때에는 엄마를 졸라 그곳에 다녀오기도 했었어요. 


 그러다가 시간이 지나 중학교, 고등학교를 다니게 되면서 그곳에 대한 그리움은 작게 접어진 종이가 되어 마음 속 보이지 않는 곳에 담아졌습니다. 더 이상 그곳에 데려다 달라고 엄마를 조르지도 않았어요. 그러나 대학교에 들어오면서 시간이 많아지자 접어졌던 종이가 마구 펴지기 시작했습니다. 다시 그곳에 대한 그리움은 커져만 갔지요.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그리움과 비례하게 두려움도 커졌습니다. 혹시 그곳이 알아볼 수도 없을 만큼 변했을까봐 겁이 났던 것입니다. 우리 집이 있던 골목길이 사라지고 아파트가 들어서지는 않았을까, 학교 앞 문구점은 다른 곳으로 바뀌지 않았을까, 이런 생각들이 자꾸만 머릿속을 휘젓고 다녔습니다. 그렇게 제가 기억하는 그곳의 모든 것들이 그대로 있을 리 없다는 생각이 들자, 그곳을 찾아가기가 두려웠던 것입니다. 내 기억 속 그곳과는 너무 달라, 마음 속 고향을 알아보지 못할까봐 겁이 났습니다. 그곳에 대한 오래 간직한 추억이 무참히 무너져 내질까봐 두려웠습니다. 그래서 다시는 그곳을 찾아가지 못하게 되었죠. 

 요네하라 마리도 친구들을 찾아 나설 때 설레면서도 걱정되는 마음이 있었을 것 같습니다. 세월에 변했을 친구들의 모습이, 분명히 그때와는 다를 친구들의 모습이 조금은 걱정스러웠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녀는 용기를 냅니다. 동유럽의 격동의 시기를 겪고 있는 친구들의 안위가 궁금하기도 하고 세월에 변했을 친구들의 모습이 궁금하기도 했기 때문입니다. 결코 가까운 거리가 아닌데도 친구들을 찾아 나선 그녀에게 박수를 보내고 싶습니다. 저는 겁이 나서 하지 못한 일을 요네하라 마리는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녀가 친구들을 찾아나서는 과정을 지켜보면서 얼마나 손에 땀을 쥐었는지 모릅니다. 멀리까지 찾아왔는데 친구를 만나지 못하게 될까봐, 찾고 있는 친구에게 안 좋은 일이 생겼을까봐 그 과정이 담긴 페이지는 저도 모르게 빨리 빨리 읽고 있었습니다. 마치 그렇게 하지 않으면 요네하라 마리가 친구들을 만나지 못하게 되기라도 하는 것처럼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한장 한장 재빨리 넘겨갔습니다.

 그런 나의 마음을 알기라도 하는 듯 그녀의 친구들은 무사히 있어주었습니다. 그들이 재회하는 장면에서는, 제가 오래된 친구를 만나기라도 한 것처럼 기뻤습니다. 이 책을 읽는 동안 어느새 저는 마리의 친구들과 더없이 가까운 친구가 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온 마음을 다해 무사히 있어준 리차, 아냐, 야스나를 향해 인사를 하였습니다. 격동의 시기를 잘 견뎌주고 있어서 고맙다고 그렇게 저도 모르게 그들에게 말을 건넸습니다.
 
 그들이 겪고 있는 시기는 자신들의 선택으로 만들어진 것은 아닐 것입니다. 국가의 운명에 의해서 휘둘러져야 했을 테지요. 
그럼에도 그들은 누구도 거역할 수 없는 역사의 소용돌이를 온몸으로 받아내 견디고 있었습니다. 그런 시대를 받아들이는 각기 다른 방식을 통해 세상의 모순을 느끼기도 하고, 안타까움을 느끼기도 하였습니다.   

 나와는 너무도 다른 삶을 산 그녀들이지만 그것이 꼭 틀렸다고 말하기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 틀린 삶이 아닌 다른 삶을 산 것이겠지요. 각기 다른 삶의 방식을 인정한다면 이데올로기나 종교 분쟁으로 전쟁을 치루는 일은 없을 텐데요. 그녀의 발자국을 따라가 보면서, 이렇게 나와는 다른 이의 이야기를 듣는 것이 세상을 둥글게 만드는 힘이 되지 않을까 생각해 보았어요. 앞서 말했듯이, 우리는 같은 점보다는 다른 점이 많습니다. 어쩌면 헤아릴 수 없을 만큼의 다른 것들을, 헤아려 보는 것이 우리의 일생의 과제가 아닐까 생각이 들 정도로 말입니다. 그러나 다른 것들이 있어 세상이 더 재미있는 것이 아닐까요. 옷가게에 같은 옷들만 있으면 얼마나 재미없을까요. 모든 사람이 같은 소리만 낸다면 얼마나 재미없을까요. 서로 다른 음들이 모여야 멋진 화음을 만들어 낼 수 있는 거겠지요. 그것들이 만들어 내는 음이 불협화음이면 좀 어떻습니까. 그마저도 아름다운 것을요.



ps.  
이 책을 통해 느낀 감정을 이 책 속 한 구절로 말하고자 합니다.
p.233 그녀들의 모습은 어떤 소중한 추억을 불러 일으켜 주었다. 
아무래도 저는 제 마음속 고향을 찾아가 봐야 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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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철나무꾼 2010-08-03 17: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프라하의 소녀시대도 못 읽었는데,
읽은 후 님이랑 느낌을 나눠도 좋을 것 같아요~^^

어느멋진날 2010-08-03 18:44   좋아요 0 | URL
제 동지를 만난 것 같아요. 양철나무꾼님 정말 반가워요.^ㅡ^
앞으로 님 서재에 자주 놀러갈께요~~ㅎㅎ
프라하의 소녀시대도 재미있게 읽었어요.
양철나무꾼님도 읽어보셔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