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약에 말이다. 내가 어떤 남자를 사귀고 있는데 어느날 그 남자가 한눈을 판다고 치자. 아니 마음이 흔들린다고 치자. 그런데 그 마음을 흔들어 놓는 여자가 보통 여자가 아니라 한참 잘나가고 있는 영화배우라면 어떨까? 언뜻 생각해봐도 이건 승산없는 게임이다. 거기다 그 영화배우라는 여자가 꼬리 아홉달린 여우도, 천하의 요부도아닌. 같은 여자가 봐도 매력적이고 순수하면서도 당당한 매력을 갖추고 있다면 정말로 이건 시작과 동시에 게임 오버요. 그녀의 완벽한 KO승이다.
영화 내 남자의 로맨스는 위에서 말한 설정을 기초로 하고 있다. 7년간을 사귄 연인사이인 현주와 그녀의 남자친구 소훈. 그런데 어느날 우연하게 소훈은 한잠 주가를 올리고 있는 여배우 은다영을 만나게 된다. 어찌어찌 하여 소훈에게 관심을 가지게 된 은다영. 그리고 그녀의 관심이 싫지는 않은 (너무 당연한 소리다. 대체 뉘라서 싫겠는가!) 소훈. 현주는 점점 멀어지는 소훈을 보며 '내 남자는 내가 지킨다'라는 케치플레이즈 아래 소훈을 지켜내기 위해 안간힘을 쓴다. 이리하여 별 볼일없는 스물아홉 현주의 내 남자 지켜내기 전쟁이 떠들썩하면서도 서글프게 펼쳐진다.
이 영화는 보기도 전에 감이 딱 오는 영화이다. 김정은에 의한 김정은의 영화. 즉 그녀의 원맨쇼가 얼마나 먹혀들어가는가가 이 영화의 성공키를 쥐고 있는 셈이다. 결과적으로 말하자면 김정은은 딱 상상한 만큼 보여준다. 이미 우리가 드라마나 영화에서 숱하게 봐 왔던 그 모습 그대로이다. 무지막지하게 아름답지도 않고 섹시한것과는 거리가 멀고. 내 새울꺼라곤 쥐뿔도 없지만 늘 당차고 씩씩하고. 그래서 천진하고 귀엽게 보이는 그녀. 내 남자의 로맨스에 등장하는 현주라는 인물도 역시 김정은이 여태 해 온 연기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 캐릭터이다. 그래서 재밌는 동시에 조금 물리는 감도 없잖아 있다.
김정은은 연기를 썩 잘 하는 편이다. 정통적인 연기는 아니지만 감각적이고 즉흥적인 연기에는 한마디로 났다. 하지만 듣기좋은 꽃노래도 하루이틀. 이제 김정은의 연기가 점점 지루하고 식상하다. 이런 연기를 하는 동급 배우로는 이나영을 들 수 있다. 김정은과 이나영 모두 이름만 생각해도 딱 하고 떠 오르는 연기와 캐릭터들이 있는 배우이다. 이런 배우들은 처음에는 정말이지 어디서 저렇게 연기를 잘 하는 보석들이 숨어있었을까 싶지만 바닥이 깊지 않을 뿐더러 또 너무들 퍼써 주시는 바람에 금방 그 한계를 드러낸다. 연기력이 떨어진다는 소리가 아니라 식상해진다는 얘기이다. 슈퍼에 새로운 과자가 나오면 언제나 사먹어보길 주저하지 않는 나. 마침 새로나온게 맛있기까지 하다면 한동안은 열심히 소비를 한다. 하지만 매번 똑같은 맛은 질리게 되어 있다. 김정은도 이제 슬슬 질리려고 하는 단계에 드러서는 새로나온 맛있는 과자가 되고 있는것 같다.
그렇다고 해서 그녀가 다른 연기를 해야한다고 주장하는건 아니다. 모든 배우들이 다 내면연기나 감정이입을 해야 할 필요는 없다. 그녀는 분명 그녀만의 장점이 있다. 하지만 지금은 시기가 좋질 않았다. 이미 그녀는 요즘 한참 인기리에 방영중인 '파리의 연인' 에서 자신만의 장점을 백분 발휘하고 있다. 그런데 거기다 또 동시에 가진거 없고 그렇지만 씩씩하고 귀여운 캐릭터로 나오는 영화를 개봉하는 것은 그녀를 질려할 만한 시기를 앞당길 뿐이다. 전지현이 내 여자친구를 소개합니다에 자신의 트레이드 마크를 너무 써먹어버리는 바람에 이제 전지현도 질린다라는 소리가 슬슬 나오고 있는 것 처럼 말이다.
파리의 연인을 하지 말던가. 아니면 이 영화를 하지 말았어야 한다고 나는 감히 생각한다. 물론 드
라마의 인기를 등에 업고 영화까지 대박이 날 수도 있겠지만 내가 보기에는 너무 단기간에 많이 노출시키는 것은 그녀에게 불리한것 같다. 그래도 여기서 김정은이 우릴 실망시키는 연기를 하지는 않는다. 우리가 기대하는 모든것을 그녀는 보여준다. 에드립인지 대본인지 구분 안가게 살아서 파닥파닥 거리는 대사 치기. 심각하게 눈을 똥그랗게 뜨고 헛소리를 하는 귀여움 등등. 그녀의 장기가 백분 발휘된다. 그런데 이 영화. 약간 엉성하다. 소훈과 은다영은 너무 뜬금없이 가까워지고 김정은이 소훈을 되찾으려는 노력은 애처롭다 못해 처참하다. 같은 스물 아홉먹은 여자로써 (극중 현주는 스물 아홉이고 김정은도 실제 나이가 스물 아홉이라고 한다.) 정말 이 한마디가 해 주고 싶었다. '야 가라 그래. 남자 없음 죽냐?'
내 남자의 로맨스에서 그려지는 스물 아홉의 여자는 지나치게 불쌍하다. 7년째 사귀는 남자로 부터 프로포즈를 받는것이 그녀 인생에 있어 가장 중요한 일이며. 그러다 그 남자가 바람을 피워버리자 직장에서도 짤릴 정도로 그 일에 집착을 한다. 그저 결혼만 하게 되면 회사 따위는 언제든 집어치울수 있다는듯이 말이다. (내가 남자라면 그런 여자 정말 부담스러울꺼다.) 은다영에게 소훈을 놓아달라고 애원하면서 그녀는 말한다. 너는 다 가졌으면서 내가 가진 전부인 하나를 빼았어야 하느냐고. 스물아홉의 현주는 자기가 가진 전부이자 유일한 한가지는 오로지 '내남친' 임을 눈물까지 흘려가며 호소한다. 나름대로 영화의 클라이막스여서 전부 짠한 표정으로 스크린을 응시했지만 나는 도저히 그럴수가 없었다. 나도 스물 아홉이고 나도 별 볼일 없고 나도 쥐뿔도 가진것도 없지만 내 인생에서 단 하나 내세우고 믿을 구석이 적어도 '내남친'이지는 않다. 소훈이 현주에게 바라는 것도 그런 것이었다. 그저 나 하나만 바라보고 프로포즈만 기다리는 여자는 싫다고. 그래서 현주는 갑자기 자기를 사랑하기 시작한다. 근데 그게 너무 간단하다. 어학원 다니고 번지점프 한번 하고 취직을 한다. 그걸로 현주는 '너 없이도 살수 있는 내' 가 되었다고 거짓말을 한다. 자존감이 어학원과 번지점프와 취직만으로 이뤄지는 쉬운 거라면 소훈이 바라지도 않았을거란게 내 생각인데 극중 현주의 생각은 달랐나보다.
내가 이 영화에서 매력적으로 본 캐릭터는 김정은의 현주가 아니라 은다영이다. 여배우라서 적당히 도도하기도 하지만 또 인간적이기도 하고 (그렇다고 해서 '여배우도 인간이여요 여러부운' 하는 식으로 지나치게 털털함과 소탈함으로 무장하는 역겨움은 없다.) 솔직하게 자기 의사와 감정을 표현할 줄 알며 안되는 일에 대해서 포기할줄도 안다. 소훈이 현주를 선택한다면 그건 순전히 7년간 쌓아온 그놈의 정 때문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은다영은 괜찮은 여자이다. 다만 좀 깊이있게 은다영을 표현하지 않아서 수박 겉핥기 식으로 지나가는게 아쉽다. 늘 외로워도 슬퍼도 나는 안우는 캔디. 이제 좀 지겹지 않은가? 이쁘거나 가진게 있거나 하는 여자들을 무조건 '다 죽어야 할 년들' 로 표현하는 것도 지겹다. 그나마 이 영화에서는 지겨운 캔디는 등장시켰지만 예쁘고 가진것도 많은데 성격은 겁나게 더러운 이라이자는 등장하지 않은게 천만 다행이다.
김정은의 연기를 무척 좋아하는 사람들이라면 아마 아주 재미있게 볼 수 있는 영화인것 같다. 물론 나는 김정은은 파리의 연인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중 하나지만 말이다. 어찌 되었건 이 영화에서 김정은은 우릴 실망시키지 않고 자기 몫을 최선을 다해서 잘 해낸다. 망가지길 두려워하지 않는 배우가 아니라 오히려 망가져야만 살아남는 배우 김정은. 여기서 원없이 망가지고 또 망가진다. 그래도 그녀가 밉지 않은건 아직 그녀가 매력이 있다는 소리 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