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래 - 제10회 문학동네소설상 수상작
천명관 지음 / 문학동네 / 2004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몇 년이 흘렀다. 그녀는 홀로 벽돌을 굽고 있었다. 공장을 찾아온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라는 문장으로 <고래>는 끝이 난다. 에필로그가 이어지지만 어쨌거나 본 이야기는 ‘고독‘으로 끝맺는다. 심사평을 둘러보면 ‘인간의 욕망‘의 관한 이야기며, 익히 알고 있는 소설적 작법에서 벗어난 것이 약점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상작으로 선택할 수 밖에 없는 ‘이것이야 말로 소설이다‘라고 밖에 할 수 없는 ‘대작‘이라는 것이다. ‘평대‘라는 큰 화재로 이제는 사라진 한 마을에서 국밥을 팔았던 노파, 다방과 고래모형의 대극장을 지은 여장부 금복, 그리고 그녀의 딸 춘희의 서사가 담긴 이 작품에 ‘신은 분명히 존재한다. 다만 그것을 깨닫는 것이 사는 동안일지 죽고난 이후일 지는 하찮은 인간이 알 수 없다.‘라고 우선 짧은 평을 내려본다.

여러 가지 정황으로 미루어 그 많은 벽돌을 찍어낸 것이 바로 그 유골의 주인공이라는 사실이 밝혀지자,
건축가는 그 통뼈의 주인공에게 존경의 마음을 담아 ‘붋은 벽돌의 여왕‘이란 호칭을 붙여주었다. -본문-

1,2부는 노파와 금복을 중심으로, 3부는 춘희를 중심으로 그녀가 죽은 뒤 잠시나마 사후세계까지 다루었다. 금복이 소위 말하는 파란만장한 삶을 살다간 ‘여인‘을 대표한다면 노파의 삶은 수 많은 ‘여성‘들의 애환과 인생사가 펼쳐지는 ‘터전‘이자 ‘시련의 시초‘가 된다. 국밥집 노파는 박색 중의 박색으로 요즘 세상이었다면 성형을 위해서라든가, 자본주의의 가장 큰 이점인 ‘돈 앞에선 모두가 평등하다‘(작중에선 법 앞에선 모두가 평등하다고 했지만)를 실현하기 위해 돈을 모으기 보다 신분이 천한데다 여자이며, 여자인데 박색이기에 온갖 수모를 당연시하게 여긴 ‘세상에 대한 복수‘를 위해 돈을 모았다. 돈의 목적이 불순해서 였을까, 아니면 불순한 그 욕망을 쫓는 이들의 최후가 지옥과 다름없다는 것을 깨닫기 위해서였는지 그 돈을 소유한 자의 삶은 그야말로 ‘지옥‘이었다. 아직 성인이 되기 전 생선장수를 따라 바다로 온 금복의 눈에 그 무엇보다 신기하고 놀라움을 준 것이 바로 ‘고래‘였다. 고래는 단순하게 말하자면 ‘희망‘혹은 ‘이상향‘에 가까웠다. 동생을 낳다가 죽은 어미가 어린 금복에게는 억눌림, 육체를 지닌 존재의 한계성을 느끼게 하지만 생전 처음 보는 커다른 생선이 마찬가지로 끝없이 푸르고 깊은 바닷속을 유유히 헤엄치는 모습은 자유와 무한을 느끼게 해주었다. 정복의 대상이 아닌 이상향 그 자체였기에 고래가 사람들 손에 의해 이리저리 해지고 분리되는 장면을 보며 희열이 아닌 괴로움을 느낄 수 밖에 없었다. 자신의 영혼마저 홀라당 뺏길 만큼 강렬했던 극장을 고래의 형태로 지은 까닭도 결코 죽지 않는, 인간들에 의해 해체되는 것이 아니라 그 시대의 가장 강력한, 어쩌면 인간이 사는 동안 영원할 자본의 힘으로 굳건하게 재생시키고 싶었을지 모른다. 다만 금복이 죽기 직전에도 깨닫지 못한 것은 자본이란 결국 영원할 수 없는 ‘물질‘에 지나지 않으며 육체를 가진 살아있는 고래와 마찬가지로 인간들에 의해 소멸할 수 있다는 사실이었다. 게다가 자식을 쉽게 떠날 수 있는 존재이자 애초에 존재의 대한 어떤 감정도 남지 않은 이들과 달리 그것이 설사 증오만 남은 관계라 할 지라도 명백하게 이어지는 ‘후손‘이 있다면 그 지옥 또한 이어질 수 밖에 없었다. 금복의 딸 ‘춘희‘의 삶이, ‘홀로 벽돌을 굽고, 공장을 찾아온 사람이 아무도 없다‘로 귀결되는 것이 이를 설명한다. 위의 발췌한 내용을 보면 ‘붉은 벽돌의 여왕‘은 춘희를 가르킨다. 춘희는 말도 못하고 지능도 모자르다란 설정이 그녀가 빚어내어, 결국 그녀를 ‘여왕‘의 자리로 올려주는 ‘벽돌‘의 물성과 많이 닮아있다. 벽돌은 그 굳기가 단단하고 무르지 않으며 당연히 ‘말‘이 없다. 하지만 자연과 세월에 그 흔적들이 새겨지고 남겨진다. 마치 춘희처럼. 춘희의 삶은 소설을 읽는 내내 ‘아, 아, 아‘싶을 정도로 고통이 거의 대부분을 차지한다. 마치 지금은 ‘신‘으로 많은 이들에게 희망을 주고 대속하여 구원을 준 ‘예수‘의 삶과 별반 다르지 않다. 개망초 꽃과 점보라는 코끼리 등을 통해 춘희가 자연이라는 그 무엇과 비교할 수 없는 ‘선‘과 ‘순리‘에 따라 삶을 살았지만 그녀에게 애정을 준 사람보다 이유없는 분노와 학대를 가한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하지만 춘희가 미워했던, 아니 미움이라는 단어를 붙인 존재는 아무도 없었다. 그저 ‘두려움과 무서움‘으로 폭력의 행태를 몇 번 보였을 뿐 춘희는 늘 이해할 수 없었다. 사랑을 베풀러 온, 인간을 구원하러 온 자신을 십자가형으로 죽이지 못해 안달난 인간을 바라보는 예수의 어느 부분을 떠올리게 한다. 인간들이 저들의 욕망으로 교회를 만들고 예배를 드려도 죄가 사라지지 않고 오히려 더 많은 죄로 열매를 맺을 때 춘희 역시 한 생명을 세상에 내 놓았다. 그녀의 딸이 순결한 ‘눈 속‘에서 죽지 않고 살았다면, 엄마 춘희처럼 신이 아닌 인간의 도움으로 생을 연명했더라면 엄마인 춘희가 말도 못하고 타인의 말도 제대로 이해할 수 없기에그 딸의 삶도, 무명에서 그치지 않고 유명이나 무명보다 못한 삶을 살지 않을 수 없었을 것 같다.

*로베르토 볼라뇨의 단편소설이 생각나는 데, <두 편의 가톨릭이야기, [참을 수 없는 가우초] 수록>의 눈으로 뒤덮인 장소를 ‘신성‘과 ‘살인이라는 죄악‘이라는 극과 극의 이야기를 담고 있기 때문이다. 차가운 눈속에서 넘어진 춘희가 아픈 아이를 안고서 일어나야 한다는 의지와 동시에 그냥 그대로 묻히고 싶다는 본능에 져, 아이는 결국 죽고만다. 하지만 앞서 언급한 것처럼 폭설이 내리지 않았던들 아이가 살 수 있었을까. 또 그 고비를 넘긴다고 해결 될 것은 아무것도 없기에 춘희나 그 무명의 아이에겐 그보다 덜 고통스러운 죽음은 없지 않을까 싶다. 하지만 이런 생각이 드는 것도 교만이며 죄라는 생각이 들었다. 작품 속 ‘점보‘가 간수의 고문으로 차라리 어서 죽길 바라는 춘희에게 ‘죽음 보다 못한 삶은 없다‘라고 하지 않는가.

딸의 친부를 수장시킨 과거를 떠올리게 한다는 이유로 제 손으로 딸의 눈을 멀게하는 노파나, 마찬가지로 못견디게 괴로운 과거를 지우고 싶어 자신의 딸을 외면하는 금복, 또 그런 어미를 그리워한 춘희 모두 죽음은 늘 그들곁에서 떠나지 않는다. 메멘토모리. 죽음이 가깝게 느껴질수록 노파와 금복은 악랄해졌고 춘희는 평화를 느꼈다. 양쪽 모두 ‘생 자체에 대한 기쁨‘은 가지지 못한 것 같아 안타까웠다.


그러고보니 읽을 당시에는 깨닫지 못했지만 ‘엄마와 딸‘을 ‘엄마‘도 아니고 ‘딸‘일 수도 없는 작가가 어떻게 이렇게 잘 쓴 것인지 신기하게 다가온다. 간만에 400여 페이지의 소설을 만 12시간 내에 읽어버렸다. 생각이 많은데 정리가 안되지만 그렇다고 이렇게라도 적지 않으면 흐릿해질 것이 염려되어 읽은 이들만 이해되는 소감을 적고 말았다. 마치 춘희가 벽돌 한 장 한 장에 그림을 그려넣듯이.

댓글(0) 먼댓글(0) 좋아요(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인센디어리스
권오경 지음, 김지현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23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종교의 힘이 어느정도까지 커질 수 있는지를 말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믿음만으로 암이 나았다고 하는 경우도 있고, 반대로 부모의 잘못된 믿음으로 귀한 아이가 생명을 잃기도 한다. 권오경의 소설 <인센디어리스>는 얼핏 보면 극단적인 종교에 미쳐버린 한 여성과 그 여성을 끝까지 놓지 못하는 남자의 연애소설처럼 보인다. 개인적으로는 이 소설은 부서진 영혼이 제대로 치유받지 못했을 때 어떤 비극이 일어날 수 있는지에 대한 보고서라고 생각되었다.

존은 그리스도께서 우리 고통의 밖이 아니라 그 안에 함께 거하신다고 말했어요. 내가 상처 입힌 사람들을 되새기로 내가 실패한 시간들을 열거하는 일은 곧 용서하는 법을 배우는 일이기도 해요. 그리스도께서 내리는 정화의 불길은 고통이 아니라 죄예요. 242쪽

피비는 엄마를 잃었다. 사고였다. 하지만 피비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자신이 운전대를 잡았기 때문에 사고가 났고 자신이 기적과 같은 힘을 발휘하지 못했기 때문에 엄마를 구해내지 못했다고 자책하고 있다. 피비에게 엄마는 마치 절대적인 존재였다. 마치 신처럼. 엄마와 아이가 분리되었을 때 일어날 수 있는 안타까운 상황을 일반적인 사람이라면 누구나 짐작할 수 있다. 얼마나 속상할까. 세상에 저 혼자인듯 외롭고 무기력해질거라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런 무기력을 이성들과의 만남과 약으로 견뎌보는 피비. 하지만 마음 속 공허함, 자신이 스스로 지운 무게를 누군가 걷어내주길 바라던 피비에게 다가온 '존 릴'은 처음에는 그녀로부터 이야기를 꺼내어 놓게 하고 그 과정을 치유가 아닌 자신의 극단적인 결의를 이행하는 데 이용한다. 뉴스에서 마주하는 사이비 교주들의 폭력적인 성향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지만 피비가 괴로운 사건들을 토해내며 자신의 주변을 돌아보는 과정만 보더라도 주변에서 잘못된 길로 빠지고 마는 사람들 스스로의 나약함 때문에 그렇게 되는 것이 아니란 것을 깨닫게 된다. 성서에 예수가 시험을 당하던 상황을 떠올려보라. 상황이 단단하고 주변에 믿을만한 사람들이 여럿 존재하고 행복과 안정적인 상태가 아니었다. 혼자여서 외로웠고 굶주려있을 때였다. 여기에 자신의 죄 마저 결국 속죄받을 수 있다는 제안마저 받게된다면 넘어가지 않을 수 없게 된다. 그런 피비를 처음에는 구해낼 수 있다고, 존 릴의 거짓을 다 밝힐 수 있다고 생각했던 윌이 독자입장에서는 더더욱 안쓰러웠다. 윌 또한 신의 사랑을 시험하고 스스로 놓아버린 나약한 인간이었기 때문이다. 폭력적인 행위를 일으키는 종교단체는 성서 속 신도 그렇게 벌을 내렸다고 변명한다. 그리고 자신들은 그런 신의 대리자라고. 하지만 진정한 의미의 신은 처벌을 대신 처리해 줄 대리자가 필요하지 않다. 신에게 필요한 것은 사랑을 전해줄 '죄인'들을 부르러 왔다는 것을 잊지 않았으면 좋겠다. 누군가 종교에 지나치게 빠져있는거나 '미쳐'있는 것처럼 느껴진다면 그에게 지금 필요한 것은 아마도 무조건적인 사랑일 것이다. 피비가 속죄나 믿음이라는 말 대신 사랑을 제대로만 잘 알았더라면, 끝까지 사랑을 선택하지 못한 것은 그녀에게 제대로 된 사랑을 보여준 이가 없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권오경은 신앙의 상실이 너무나 고통스러웠던 나머지 더 이상 살아갈 이유를 찾을 수 없었다고 고백한다. 그 고통이 이 소설을 쓴 가장 큰 동력이 되었다. 자그마치 10년의 세월에 걸쳐 <인센디어리스>를 집필하며 그가 목표로 했던 것은 신앙인과 비신앙인 사이의 간극에 다리를 놓는 것이었다.

317쪽, 옮긴이의 말 중에서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코끼리도 장례식장에 간다 - 동물들의 10가지 의례로 배우는 관계와 공존
케이틀린 오코넬 지음, 이선주 옮김 / 현대지성 / 2023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의례를 종교적인 의식으로만 여길 때가 많다. 하지만 의례는 넓은 의미로 종교, 숭배, 영적인 관습의 경계를 훌쩍 뛰어넘는다. 정확한 절차에 따라 자주 되풀이하는 구체적인 행동은 모두 의례다. 차례대로 이어지는 행동들도 의례라고 할 수있다.
27쪽
이 책은 10가지의 의례, 인사, 집단, 구애, 선물, 소리, 무언, 놀이, 애도, 회복 마지막으로 여행 챕터로 구성되어 있다. 의례라는 단어를 보았을 때 책의 내용 중 집단의례에 해당되는 이미지만 떠올랐는데 읽다보니 가볍게는 타인과 나누는 인사, 호감있는 대상을 향한 구애와 선물 등 많은 것이 의례에 속했다.


우리에게는 두 가지 힘이 있다. 이 행성 위의 서식지와 모든 생명을 보호할 힘과 파괴할 힘이다. -중략-
자연재해든 인재든 모두가 영향을 받는다. 동물과 서식지를 구하기로 결심하면 우리 자신도 구원할 수 있다. 이 것이 바로 이 책의 10가지 의례가 중요한 이유다. 우리는 10가지 의례를 통해 자신과의 관계, 사람들과의 관계, 세상과의 관계를더욱 튼튼하게 구축 할 수 있다. 301쪽


타이틀에 언급된 코끼리외에도 여러 학자들의 각기 다른 동물들의 연구결과를 포함 해 한마디로 자연과 인간의 의례의차이와 의례의 지속성이 반드시 필요한 이유를 설명하고 있었다. 설명이라고 표현하자니 조금 딱딱하게 들릴 수도 있는데 챕터사이에 등장하는 아포리즘이나 사진, 음악, 소개되는 책들 무엇보다 수화로 자신의 감정과 과거를 소개하는 등의놀라운 동물 일화들로 결코 지루하지 않다.


이 책에서 가장 공감했던 의례는 아직 어린 아이를 기르고 있어서인지 ‘놀이 의례’가 크게 와닿았다. 사자나 코끼리들은어린 시절부터 놀이를 통해 자연스럽게 먹이를 공격하고 위험한 상황에서 탈출하는 방법을 배운다. 인간도 크게 다르지않다. 아이와 놀아주다보면 장난감을 함께 가지고 노는 법을 통해 또래사이에서 지켜야 할 기본적인 규칙을 배우게 되고그림그리기와 같은 행위를 통해 감정을 표현하고 조절하는 방법을 배운다. 무언가를 배우기 위해서만 놀이 의례가 필요한 것은 아니다. 스트레스를 해소나 부정적인 감정을 누르고 웃음과 활동을 통해 긍정적인 기운을 끌어올리기 위해서라도 놀이는 반드시 필요하다. 당연히 과한 중독 현상이 염려되기는 하지만 나또한 저자의 말처럼 비디오 게임도 그런 맥락에서 호의적으로 생각하고 있다. 타이틀이 된 ‘코끼리도 장레식장에 간다’는 8장 애도 의례에서 등장한다. 애도와 사체를 처리하는 것을 인류학자들은 구분하고 있는데 크게 두 가지 행동이 존재하느냐의 따라 달라진다. 만약 어떤 행위가 애도에 포함되려면 무리에서 누군가 죽었을 때 그 곁을 지키는 동료가 있는지, 또 죽음 이후의 행동이 달라지는, 가령 음식을 먹지 않는다던가 무리에서 떨어져 나오거나 하는 등의 행동들로 저자가 소개한 ‘코끼리 버논’이 죽었을 때 코끼리들이흙을 뿌려 사체를 덮어준 후에도 다른 여러 마리의 코끼리들이 번갈아 찾아오고 그 곁을 지키는 등의 행동, 즉 애도 의례가 있었다는 것이다. 그야말로 ‘코끼리도 장례식에 간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폭풍이 쫓아오는 밤 (반양장) - 제3회 창비×카카오페이지 영어덜트 소설상 수상작 창비청소년문학 114
최정원 지음 / 창비 / 2022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최정원 작가의 <폭풍이 쫓아오는 밤>은 전혀 새로울 게 없는 소재임에도 불구하고 엄청나게 몰입하게 만드는 놀라운 소설이다. 고등학생 이서와 아직 어린 6살 이지는 엄마는 같지만 아빠가 다르다. 아빠와 셋이 오랜만에 떠나온 야영지에서 그들은 이전에 본 적 없는 엄청나게 크고 공포스러운 '그것'과 마주한다. 엄마없이 셋이서 여행을 떠나온 이유를 작가는 굳이 숨겨두고 터뜨리지 않고 오히려 엄마의 죽음이 자신의 잘못이라고 자책하는 이서의 감정을 독자가 공감하고 함께 아파할 수 있도록 유도한다. 성인이라 해도 누구나 한 가지, 자신의 잘못으로 일이 잘못되었다고 느꼈던 가슴아픈 기억은 하나씩 있기 마련이다. 어른이 되면서 스스로를 다독이거나 주변의 지인 혹은 여러 매체를 통해 상처가 아무는 경우도 있지만 이서처럼 그저 참고 견디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이서와 함께 '그것'과 대적하는 또 한명의 상처받은 아이 '수하'. 수하는 가정폭력으로 인해 아버지를 피해 엄마와 도망쳤던 아픈 상처를 가지고 있다. 분노를 자제하는 것이 버거워진 수하는 결국 자신이 좋아하던 운동을 그만두게 되고 엄마의 부탁으로 교회 수련회에 참가해 이서네가 놀러온 수련장에 오게 되었다. 이서와 수하 모두 또래가 가지는 벅찬 희망, 성인이 되어서 마주하게 될 환상적인 미래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저 오늘을 사는 것이 아니라 버티고 있는 것이다. 어찌보면 삶의 의지가 약하다고 할 수 있는데 그런 이들에게 '그것'과의 만남은 주어진 삶을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지켜내는 것임을 자각하게 만든다. 엄청나게 비대한 몸으로 이 두 사람을 쫓아오는 그것은 그야말로 닥치는대로 파괴하는 폭풍이나 다름없다. 도대체 '그것'은 무엇인가. 늑대와 곰을 닮았으나 눈빛은 인간의 눈을 가졌다는 인물들의 목격담을 통해 그것이 외형을 짐작해볼 수 있다. 활자로 읽는 소설의 가장 큰 강점인 상상의 나래를 맘껏 펼칠 수 있는데다 영화로 만들어질 경우 과연 어떻게 구현할 것인가 기대가 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나라면 나와 결혼할까? - 매일 조금씩 나아지는 나를 응원해
후이 지음, 최인애 옮김 / 미디어숲 / 2022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이 책 제목을 보고 단박에 "응"이라고 답할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아니면 왜 '응'이라고 답하지 못하는가? 스스로가 생각하기에도 별로인 삶을 살고 있는거냐며 비난할 수도 있겠다. 베스트셀러 작가의 후이의 <나라면 나와 결혼할까?>라는 책은 결혼상대로서의 조건적인 문제에 국한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됨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었다. 여러 챕터와 또 소제가 따라 붙지만 타이틀을 전부 무시하고 한 번에 쭈욱 읽었는데 어쩌면 이편이 더 나을지도 모르겠다. 읽고나니 명확하게 분류해서 읽을만한 내용이라고는 느껴지지 않았다.

대략의 내용은 결혼상대를 고를 때 여러가지 우선순위와 반드시 갖춰야 할 부분이 있겠지만 '품위 있는 사람'을 골라야 한다는 이야기를 시작으로 연애를 시작하기도 전에 고민하느라 시간을 허비하지말고 우선 실행에 옮기라는 다소 진부한 이야기도 포함되어 있었다. 사실 이부분은 내 의견과 일치하지 않는다. 과거 영화<광식이 동생 광태> 속 광식이가 사랑하는 여인에게 고백한 번 못하고 결국 친구에게 자신이 좋아하던, 알고보니 상대도 같은 마음이었던 여자와 이뤄지지 않는 것을 보면서 '안하는 것 보다는 하는 것'이 더 낫다는 측면이긴 했다. 하지만 그 이후로 시간이 또 십여년 흐르고 보니 의외로 하지 않으면 '후회'로 끝나는 일이 저질렀을 때 최악의 경우 극복할 수 없는 '사고'가 된다는 것을 알게되었고, 인연이라는 것이 거부하려고 해도 만나지는 것이 '인연'이라는 생각에 맘이 기울었다. 그러니 내가 진부하다고 했다고 해서 저자 후이의 글들이 진부하다고 단순하게 결론짓지는 말았으면 좋겠다. 반면 크게 와닿았던 이야기도 있는데 저자가 8살이었을 때 자전거를 타고 가다가 어떤 자동차와 살짝 부딪힌 사건이었다. 와서 부딪힌 것이 아니라 서로 지나치다가 생긴 긁힘이면 당연히 어린 아이를 붙잡고 시비를 걸 문제가 아닌데 인성이 덜 된 운전자가 아이를 붙잡고 집이 어디냐, 부모에게 보상받아야 한다는 등으로 겁박을 하는 것을 주변 어른들이 도와줄 생각은 않고 둘레를 만들어가며 같이 비난했던 것이다. 결국 울음이 터지고 주저 앉아버리기 직전, 평소에 인사만 하던 이웃집 할머니가 모여든 어른에게 '남의 일'에 참견하지 말고 돌아가라고 아이를 보호해주었다. 사람들이 흩어지고 나자 운전자와 아이, 그리고 이웃집 할머니만 남았을 때 가족이 아니면 참견하지 말라는 말에 해당 도로가 일방통행이었던 점을 알려주며 운전자마저 별무리 없이 돌려보낸다. 그러면서 아이에게 할머니가 해주었다는 이야기가 크게 와닿았다.

다른 사람의 하늘이 무너질 때 네가 받쳐줄 수 없다면,

그저 눈 감고 못 본척하는 게 도와주는 거란다.

8살의 저자가 저 말을 제대로 알아듣고 기억할 수 있었을까 싶으면서도 '남의 일'에 참견하기 좋아하는 세상에서 저 말보다 더 새겨들어야 할 말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 말과 함께 '도와줄 수 있을 때는 돕고, 그렇지 못할 때는 모른 척 해줘야 한다'라고 말해주었다. 성서에서 막달라 마리아가 사람들에게 붙잡혀 돌팔매질을 당하기 전, 예수님께 그녀를 어떻게 처리하면 좋을지 묻는 장면이 떠오른다. 그때 예수님은 그녀를 나서서 옹호하지도 그렇다고 함께 돌을 던지시지도 않았다. 그저 한 마디, '죄 없는 자가 먼저 돌을 던져라.' 하셨을 뿐이다. 저자가 예로 든 것처럼 친척 중 누군가에게 불행한 일이 닥쳤을 때, 걱정을 가장한 수덕거림 보다는 그저 조용히 그들이 잘 해결해 나가기를 바라는 것이 훨씬 낫다. 소셜에 자주 등장하는 '마녀사녕'도 마찬가지로 누군가의 잘못된 행위를 비탄할 수는 있지만 일을 더 크게 부풀리거나 확인되지도 않은 일들을 퍼나르는 일들도 결국 지나치게 남의 일에 관여하면서도 그로 인해 벌어질 수 있는 모든 일들에서 책임은 전혀 지지 않으려는 행위도 결국 마찬가지일 것이다. 도와줄 수 없을 때는 모른 척 해주는 것. 무관심이 아닌 가장 숙연한 상태의 도움이 아닐까 싶다. 

이런 류의 책들은 사실 읽지 않아도 사는 데 큰 문제는 없을지 모르겠다. 하지만 한 번이라도 읽게 되면 나조차 잊고 있었던 나를 돌아보게 되고 지금 내가 고민했던 문제, 특히 인간관계에서 비롯된 문제들을 한 발짝 물러서서 바라볼 수 있게 해준다. 내게 문제가 있었던 것인지, 아니면 상대인지 그것도 아니면 그저 둘 모두 운 혹은 타이밍이 맞지 않았던 것은 아닌지 알게된다. 일흔의 나이에 젖먹이 손녀를 이웃들의 도움으로 잘 길러낸 할머니의 말처럼 '누구보다 내가 나를 가장 많이 돕는 것'이 중요하다. 저자의 이야기 중 앞서 언급했던 타인의 불행을 보았을 때의 처세와 '누구보다 내가 나를 도와야 한다'는 이 말을 건진 것 만으로도 책을 읽은 시간이 전혀 아깝지 않게 느껴졌다. 무엇보다 책 제목만 보고서도 주관적인 시선이 아닌 객관화된 시선으로 나를 돌아보게 해주니 추천하고 싶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9)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