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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코 복음 -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여정
에르네스트 R. 마르티네즈 지음, 양해룡 옮김 / 가톨릭출판사 / 202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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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째, 우리가 따르는 예수 그리스도는 누구인가?

둘째, 우리는 어떤 길로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가?

셋째, 우리는 어떻게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야 하는가?


이 세 가지 의문에 관한 답을 하나하나 찾아 가며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여정이 시작된다.

뒷표지

마르코 복음은 세례여부와 상관없이 예수님이 누구인지를 알고자 할 때 순차적 접근이 아니라면 가장 먼저 그리고 가장 많이 접하게 되는 복음이다. 그만큼 많이 알려지기도 했지만 무작정 성경을 읽는 것보다는 구체적인 목적을 가지고 읽는 것이 중요하다. 예수님이 누구인지에 대해 먼저 묻는다. 마르코 복음에는 예수님을 어떤 분으로 생각하고 있는지에 대한 사람들의 답이 나온다. '하느님의 아들' 이시며, '바람과 호수마저 복종하는 분'이자, 요한 세례자는 '나보다 더 강한 분'(47쪽)이라고 고백한다. 그럼 나는 예수님을 누구라고 답할 수 있을까에 대한 답을 관련 복음이 매일 미사에 등장할 때 마다 묻곤 한다. '하느님의 아들'임이 가장 적확하지만 무언가 다른 답을 스스로 자꾸 요구하게 된다. 왜냐면 저자의 말처럼 '우리가 따르는'이란 수식어가 결코 가볍지 않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 군중을 먹이실 때, 이스라엘 땅에 있는 하느님의 양 떼를 먹이신 것이다. 이렇게 마르코는 예수님의 정체성을 밝히고자 한다. 다시 마르코는 예수님께서 당신의 신적인 아버지가 하시는 일을 정확히 행하신다는 것을 보여 주면서, '하느님의 아드님'이라는 칭호에 본질과 내용을 부여한다. 80쪽


우리가 따르는 이의 성품이 즉흥적이거나 불성실하고 약속 이행에 있어 때에 따라 달라지며 차별대우를 한다고 했을 때, 그 믿음이 지속될 수 있을까? 혹은 그런 믿음이 과연 사랑에서 시작되고 영원할 수 있을지 굳이 답을 듣지 않아도 알 수 있다. 마르코는 복음 안에서 하느님의 아드님이신 예수님을 통해 예수님과 하느님이 어떤 분이신지 동시에 보여주고 있다. 그런 분이시기에 우리가 순명할 수 있다.


2장에서는 '어떤 길로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지'에 대한 답을 들려준다. 예수님이 가시려는 길은 제자들에게는 결코 있어서는 안되는 일처럼 보이기도 하고 무엇보다 '제 목숨은 버려야 하는 길'이자 '제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만 하는 길'이기도 하다. 한마디로 그다지 내키지 않을 수도 있는 '십자가의 길'이다. 가톨릭 신자들은 성 금요일이면 '십자가의 길'을 걷는다. 그 길은 예수님과 하하호호 신나서 걸어가는 길도 아니고 맛있는 도시락을 준비하는 식도락도 아니다. 누군가의 배신을 목도하는 길이며, 나의 모든 것을 빼앗길 뿐 아니라 피, 땀 그리고 눈물이 흐르는 길이다. 그런 길로 예수님은 우리를 초대하신다.


3장에서는 하느님의 아드님이신 예수님을 따라 십자가의 길을 걸어가는 데 어떻게 가야하는 지에 대해 마르코 복음을 통해 알려준다. '어린이처럼 하느님 나라를 받아들이는 것은 하느님을 그의 "아빠"로 인식한 사람이 하느님 나라를 받아들이는 것이다.'(222쪽), '실제로는 두 얼굴을 가진 사랑의 계명은 단 하나, 즉 이웃 사랑과 하느님 사랑을 모두 포함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마르코는 '이것 보다 더 큰 계명은 없다.'라고 말할 수 있었다.'(241쪽)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예수님이 누구시냐?'라는 내용이 나올 때마다 자문할 때, '사랑이십니다.'라고 답할 때가 대부분이다. 그 분이 원하신 것이 오직 '사랑'이기 때문이다. 그 사랑은 다른 어떤 수식이나 여지없이 그저 사랑이다. 그런 사랑이 없이 '십자가의 길'을 순명하게 갈 수 없을 것이다. 그렇게 예수님과 걸어갈 때, 바로 하느님을 뵐 수 있음을 알 수 있다. 마르코 복음은 그러니 '사랑'이신 예수님을 더 잘 알게 해주는 복음이라고(본문 중에 이부분에 대한 내용이 있어 맨 하단에 발췌문을 참고 바란다) 생각한다.


"복음"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하느님 나라가 온다는 기쁜 소식을 의미한다. 그래서 마르코의 글을 '마르코의 복음'이라고 말하는 것은 옳지 않다. 오히려 '마르코에 따른 복음', ' 마르코에 따른 예수님의 복음'이라고 말해야 한다. 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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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로 사는 걸 깜박했어요 - 루카 복음서에서 찾은 진짜 나로 살아가는 힘
홍성남 지음 / 가톨릭출판사 / 201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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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남 신부님의 ‘나로 사는 걸 깜박했어요‘의 부제는 ‘루카 복음서에서 찾은 진짜 나로 살아가는 힘‘이라고 적혀 있다. 더위가 끝이 없을 것 같던 시절도 지나고 이제 새 플래너를 장만하는 요즘, 기대했던 것 보다 더 차분하게 주님안에서 나를 돌아볼 수 있게 해준 책이었기에 부끄럽지만 지난 날, 내가 ‘나로 사는 걸 깜박‘했던 것이 무엇인지, 어떤 부분을 통해 깨달음을 얻을 수 있었는지 고백하는 마음으로 적어본다.

신앙생활은 우리 자신에게 아픈 곳이 있음을 인정하는 데서 시작되는 것입니다. 58쪽

우리가 죄인이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 부터가 신앙의 시작이라고 말씀하시는 분들도 계신다. 성경을 보면 예수님께서 죄인을 부르러 오셨고, 아픈사람을 치유하러 오셨기 때문이다. 교회안으로 들어간 것은 내 의지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주님의 초대이기도 하다. 그런 맥락으로 보자면 죄인이자 병자인 스스로를 외면하는 것은 주님과의 관계를 멀어지게 하는 주요 원인이 되기도 한다. 그런데 이때 주의해야 할 부분이 바로 ‘죄인‘인 것을 인정하다 못해 겸손을 넘어 자기학대로 까지 이어지는 경우다. ‘아픈 마음‘을 치유해야 하는 데 오히려 스스로 상처를 내고 있지 있을 때가 있다. 이런 마음 상태로는 비슷한 행동을 하는 이웃의 잘못에 더 크게 분노하게 되고 더 많은 잣대로 자신과 이웃을 죄에 가두게 된다.

자신이 크게 변화하리라고 너무 기대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71쪽

위의 상태에 빠져 있다가 다행히 신부님의 강론이나 피정 혹은 독서나 강연을 통해 문제를 발견하게 되면 즉시 성령의 힘으로 다시 태어난 듯 한 기분이 들곤 했다. 한동안은 평일 미사에도 빠지지 않고 영성체하며 하루에 3시간 이상 가족 뿐 아니라 세계 곳곳에 기도가 필요한 이들을 위해 기도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런 무리함은 지속하기가 쉽지 않고 다시 자기비하와 학대로 까지 이어졌다. 나는 할 수 없지만 ‘성령‘의 힘이라면 못할 것이 없는데 내 믿음이 부족하다며 감사하는 마음이 아닌 스스로를 원망하는 마음이 커졌기 때문이다. 이 책을 읽을 당시에 내 마음이 꼭 그랬다. 좋은 강론과 도서를 읽으면서 왜 이전의 상태로 자꾸 되돌아가는지 한심스러웠기 때문이다.

그래서 감사하는 훈련을 시작했습니다. 이러한 내 안의 문제아가 자라지 못하게 하는 방법은 감사하는 훈련을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75쪽

감사일기가 한창 유행했을 때 직접 적어도 보고 관련 책도 읽고, 유명 대학 연구기관에서 감사일기 쓰기를 통해 실제 행복지수가 올라가는 변화된 모습을 보기도 했었다. ‘다 알고 있는 내용이야.‘라며 오히려 외면해왔음을 깨달았다. 감사한 일 3가지를 매일 기록하는 훈련을 다시 시작할 때가 온 것이다.

성인은 주님뿐만 아니라 모두에게 항상 감사하는 사람입니다. 자신이 죄를 많이 짓고 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하느님과 사람들이 자신을 많이 용서해 주고 있음을 알기에 감사한 마음을 잊지 않는 사람이지요. 91쪽

긴 시간 봉사활동을 해오면서도 뿌듯한 마음보다는 늘 부족한 것 같아 마음이 편치 않았다. 위와 같은 마음 상태로 누군가를 돕는 것이 기쁠 수 없었을 것이다. ‘묵상 시간‘코너에 적혀 있던 ‘어딘가 불편한 심정으로 하고 있나요?‘(95쪽) 문장을 보며 짧지 않은 묵상 기록을 남기기도 했다. 이런 약한 마음의 방에 단 한 분을 모셔야 한다면 누구일까. 다름아닌 하느님, 그 분의 자리를 내어드린다면 신부님의 말처럼 비로소 삶이 달라질 것이다. 내가 죄인인 것을 인정하고, 마음이 아프다는 것까지 깨달았을 뿐 아니라 이를 방해하는 것으로 부터 지키기 위해 ‘감사일기‘ 쓰기를 시작했고, 잊고 있던 내 마음의 방에 그분의 자리를 내어드렸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을 계속 유지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내가 내 문제를 인식하고 주님께 기도하면, 주님께서 나에게 필요한 사람들을 보내 주셔서 내가 건강해질 수 있도록 도와주십니다. 240쪽

사제가 된지 만으로 60년이 지난 한 신부님께서 강론중에 ˝이웃을 도와주는 것 뿐 아니라 이웃의 도움을 받을 줄도 알아야 합니다.˝라는 말씀을 하셨을 때는 그 말씀의 뜻이 확 와닿지 않았었다. 헌데 이 책의 마지막 페이지에 적힌 위의 발췌문을 보고서야 ‘이렇듯 내게 필요한 책을 보내주셨구나!‘하고 감사할 수 있었다. 이 서평은 처음부터 끝까지 ‘나의 마음, 나의 신앙 생활‘에서 얻어진 감상을 고백했다. 그러니 부디 마음의 상태를 점검하고, 무언가 심리적으로 도움이 필요한 분들이라면 직접 이 책을 읽으며 귀한 묵상 시간을 가질 수 있길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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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물들 - 숭배와 혐오, 우리 모두의 딜레마
클레어 데더러 지음, 노지양 옮김 / 을유문화사 / 202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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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제공 #을유서포터즈5기 #을유문화사 #에세이추천 #몬스터즈 #괴물들 #클레어데더러

그제야 나는 생각만으로 로만 폴란스키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음을 알았다. 시인 윌리엄 엠프슨은 인생이란 결국 분석으로 풀 수 없는 모순 사이에서 자신을 지키는 일의 연속이라고 했다. 나도 그 모순 한가운데에 있었다. 20쪽

저마다 좋아하는 예술가(혹은 아이돌)이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대상의 작품이 좋아지면 좋아질수록 부디 헤드라인 기사로 마주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도 함께 자라난다. 혹은 이미 괴물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작품을 계속 찾아보려는 마음을 억제하기 힘들어지기도 한다. 이 책은 그런 이중적인 마음을 어떻게 해결해야 할 지를 찾아가는 과정이다. 몇 해전 한 여가수의 생애를 다룬 영화를 보면서 가족이란 친밀한 관계에서 일어날 수 있는 최악의 상황, 자녀를 사랑하고 소중하게 여기는 마음도 이겨내지 못하는 우울, 중독증세에 관해 안타까움을 넘어 정리되지 않은 감정으로 불편했던 적이 있었다. 저자의 말처럼 내 침대에서 혹은 내 집 안에서라는 안전하고 편안한 울타리 안에서 그들을 마주하는 것은 온전하게 그를 마주하는 것과는 전혀 다르다. 개인적으로 가족이 가족에게 주는 상처가 큰 이유도 극과 극의 감정을 처리하지 못하는 감정적 장애를 불러오기 때문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헤밍웨이가 개자식이었다는 평판은 피카소와 마찬가지로 그를, 혹은 그의 작품을 앞선다. 헤밍웨이라는 이름은 난투극과 여성 편력과 폭력의 동의어다. (...) 그는 아들들을 너무나 사랑하면서도 괴롭혔다. 특히 아들 그레고리와는 점점 소원해지다 만나기만 하면 서로 폭력을 행사해 결국 만날 수 없는 사이가 되기도 했다. 129쪽

위의 사례처럼 드러내놓고 괴물의 면모를 보여주었지만 대중의 뇌리에 ’천재‘의 모습만 남은 예술가들을 보여준다면 이번에는 작품에서 보여지는 인물의 성격 혹은 성향을 작가에게 투영시켜 그를 괴물로 만드는 것에 대해서도 이야기한다.

우리는 주제 때문에 그 예술가를 벌할 수는 없다.하지만 우리는 그렇게 한다. 예술가의 주제 때문에 예술가를 항상 비난한다. (...) 과연 ’롤리타‘가 오늘날 출간될 수 있었을까? 난 아닐 거라 생각한다. 177쪽

과거 드라마에서는 나이차이가 많은 남녀의 사랑, 특히 키다리 아저씨를 표방한 내용을 보며 희망을 갖기도 했던 시절도 있었지만 지금은 방영하기도 전에 시청자의 항의로 인해 두 사람 사이의 러브라인은 실현될 수 없다. 이와 관련해 저자는 다시금 열 세살 어린 소녀를 성폭행 한 폴란스키를 소환한다. 그리고 그 비열함에 다시금 분노한다. 왜냐면 그런 일들이 소설에서 일어나는 일이 아니고, 한 저자의 비정상적 사고와 잘못된 호기심이 아닌 지금 어딘가에 여전한 일이기 때문이다.

나는 이런 끔찍한 일들을 저지르지 않았다. 그러니 나는 괴물이 아닐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 또한 다른 모든 인간처럼 살면서 나쁜 행동들을 저질러 최소한의 내 몫을 채우기도 했다. 더 나아가 이딴 행동을, 그러니까 책을 쓰는 짓을 저질렀다. 203쪽

이 책의 서평은 처음부터 다시 쓰기를 반복했다. 자극적인 사건(혹은 아티스트의 유명도에 따른)을 배치할 것인가, 아니면 저자의 괴로움의 공감하는 내용들을 기반으로 할 것인가, 이것도 아니라면 이렇게 집필 자체도 고통스러운 책과 독자도 만만치 않은 괴로움을 느끼게 하는 책을 왜 읽어야 하는지에 대한 필요성과 당위를 적어야 할 지 고민했다. 그리고 또 한가지. 누군가의 엄마라는 존재로서 책 쓰기와 읽기에 관한 유대감. 그러다가 모든 것을 한꺼번에 넣어 쓰고 있다. 그러니 이제는 ’엄마‘에 대해 쓸 차례다.

다음은 아이 버린 엄마로 매도당할 가능성이 있는 행동들이다.

서재나 작업실의 문을 닫고 아이를 들어오지 못하게 (...)
아이를 어린이집에 맡긴다 244쪽

위의 목록을 보고 자유롭지 못해 놀랐다. 역자 서문에 적힌 ’비평서와 자서전의 결합‘이란 내용을 먼저 읽었더라면 좀 덜 놀랐을까 싶기도 하고, 어쩌면 후기를 후기로 읽어서 혼란스러움과 평정의 순서를 차례로 겪을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어쨌거나 저자는 예술가든 누구든 도덕적 잣대로 그 사람을 추앙하거나 외면해야 한다거나 하는 이분법적인 결론을 내리진 않는다. 하지만 저자처럼 투명한 프리즘으로 들여다 볼 기회를 가져보는 것이 중요하다. 특히 이 책에서 언급된 예술가 혹은 그들의 작품을 좋아했던 독자라면 (게다가 누군가의 엄마라면) 함께 읽고 감상을 나누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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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일러스트
이종수 지음 / 아트북스 / 202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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즐거운 그림 감상, 너무 무겁게 시작할 필요는 없지 않을까? (...)

물론 알고 보면 좋은 그림도 있지만, 그림 감상이라는 게 꼭 그렇지만은 않다. 설명이 더해지지 않아서 감상할 수 없는 그림이라면, 어느 정도는 그림의 책임이다. 5쪽

저자는 이 책을 통해 너무 어렵게 그림에 접근하지 말라고 말한다. 총 73점을 우리가 느끼는 감각에 맞게 구분하였지만 순서를 따르기보다는 편안하게 아무 페이지나 펼쳐지는대로, 눈(마음)이 가는 대로 보길 권한다고도 말한다. 그런 저자의 제안을 따라 시월이지만 너무 더웠던 지난 어느 날, 내 맘속으로 총총 걸어들어온 몇 작품들을 소개해본다.

김홍도의 '무동' (18세기, 국립중앙박물관 소장)은 원으로 동그랗게 모여 앉아 화면 바로 앞쪽에 한 아이가 입꼬리를 슬쩍 올려가며 신명나게 춤사위를 보여주는 작품은 나뿐아니라 대부분의 사람들이 TV광고를 통해서도 쉽게 접했던 그림이다. 이전에는 별다른 감흥을 주지 않았던 작품인데 저자의 조언대로 분석하는 마음 대신 악기를 연주하는 사람들까지 두루두루 시선을 던져가며 바라보니 이전에 느끼지 못했던 '흥'이 느껴졌던 것이다. 동그란 원 안에 빈틈이나 사방 곳곳에 여백이 있는 것이 '삶의 여유'마저 느껴졌다. 한참을 내 맘대로 흥겨워하다가 저자의 부연설명을 읽는 맛이 참 달았다. 이어지는 김홍도의 '황묘농접'은 아이들마저 사랑스러운 고양이와 팔랑거리는 나비의 날갯짓에 눈이 머물거 같다. 이 작품은 간송미술문화재단 소장품으로 앞서 소개한 작품과 달리 전시작품으로 만난 적은 없었다. 그래서 '묘접도'란 말대신 '모질도'라고 부르기도 한다는 것, 노년의 장수와 평안함을 기원한다는 그림의 의도도 잘 알지 못했다. 그러니 다음의 해석에 '그저 사랑스럽다'라는 말로 퉁쳐서 바라보았던 것도 영 부끄러울 일만은 아닌 듯 싶다.

고양이가 놀리고 있는 게 나비인지 봄볕인지. 어쩌면 볕에겨워 졸고 있는 고양이를 건드린 건 오히려 나비 쪽인지도 모른다. 아니, 그마저도 모르겠다. 이 따스한 풍경에 휘둘리는 건 그저 우리들 마음인지도. 83쪽

이번에는 단순히 흥겹거나 사랑스러운 분위기 때문이 아니라 제법 사색에 가까운 상태로 머물게 했던 작품, 윤두서의 '유하백마도'다. 이 작품은 앞서 소개한 작품들과 마찬가지로 18세기 작품으로 고산윤선도박물관 소장품이다. 한 가운데 말 한 마리가 서있는데 안장을 채운 것도 아니고 말의 표정 또한 심상치가 않아 더 궁금해졌다. 책 모서리에 당시의 감상을 적었는데, '말의 표정이 얕지도 깊지도 않은 '적당함'이 느껴진다. 그래서 자구 자꾸 보게 된다.'라고 쓰여있다. 저자의 설명에 따르면 '윤두서는 여느 문인 화가와는 달리 사실적인 그림에 능한 인물이다. 대상에 대한 치밀한 관찰을 바탕으로 그림 연습 또한 성실하게 이어나간 화가(101쪽)'이라고 하니 더더욱 말의 표정을 어떤 까닭으로 저렇게 표현했을지 궁금해진다.

마지막 작품은 김홍도의 '포의풍류도'로 화가의 방안을 보여준 듯한 그림으로 개인소장품이다. 저자의 말처럼 '나를 보여주기에 소품만한 것도 없다(169쪽)'. 화가가 자신이 사랑하는 것 혹은 자주 사용하는 것을 모두 펼쳐보이는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저자의 말처럼 그렇게라도 무언가를 증명해보이고 싶었거나 아니면 백남준의 '버마 체스트'처럼 반쯤 열린 서랍장처럼 누군가의 호기심을 자극하는 것을 넘어 교류하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짐작할 뿐이다. 그리고 이어지는 생각, 나라면 내 방안에 있는 소품 중 무엇을 꺼내어 그렸을까 싶은 것이다. 어쩌다보니 김홍도의 작품이 세 작품이나 소개되었다. 책을 다 읽고 밑줄 그어진 페이지를 펼쳐보다 내 스스로도 놀라며, 이렇게 되뇌었다.

'나 김홍도 좋아하네. 어쩌면 동양화를 좋아하는지도.' 같은 날 한국화와 관련된 책을 산 것도 굳이 숨기지 않겠다. 저자의 말처럼 시작이 이렇듯 자유롭고 가벼우니 오히려 동양화에 관심도 가지게 되는 것 같다. 무겁지 않게 감상하고 싶은 분들이라면 이 책을 적극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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딕테
차학경 지음, 김경년 옮김 / 문학사상 / 202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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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 참여했던 펀딩 중 가장 기다렸던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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