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께 있다
파카인 지음 / 페리버튼 / 202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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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있다 #반려견 #파카인 #그림책 #선물하기좋은책 @peributton

표지에 그려진 빙그레 웃는 개와 아저씨를 보고 그냥 지나칠 수 없었다. 한 장의 그림만 보고도 마음이 따뜻해진다. 추운 겨울, 시려운 손을 녹여주는 장갑이나 핫팩처럼 마음이 시릴 때 이 책의 페이지를 넘기는 것만으로도 따뜻하게 나을 것 같다.

‘그날도 그랬어.
적막한 어둠 속 까만 내일을 기다렸지.’

아저씨가 살아온 일상은 ‘적막한 어둠’이었고, 기다리는 내일마저 환한 빛이 아닌 ‘까만 내일’이었다. 반려동물을 대하는 과한 애정이 때로는 누군가에게 직간접적으로 불편한 일이 생길 때가 있다. 인간이었어도 크게 다르지 않다. 자녀에게 혹은 배우자나 연인에게 과한 관심 또는 표현은 불편을 낳는다. 하지만 서로에게 ‘빛’이 되어준 이들이라면 불편한 시선 정도는 가뿐히 무시할 수 있다. ’서로의 희미한 빛‘을 알아봐주고 살려내 준 서로는 매일 매 순간을 함께 한다. 기쁠 때도 슬플 때도 함께다. 어쩌면 반려동물을 자식처럼 여기는 사람들이 불편한 게 아니라 자식이라더니 결국 ’물건‘버리듯 버리는 변덕스럽고 무책임한 사람들이 문제다. ’가족’과 ‘가족 같은’을 절대 혼동하거나 혼용해선 안된다.
아저씨와 개는 ‘가족 같은’사이가 결코 아니다. 눈이 오나 비가 오나 함께 견디고 함께 이겨낸다. 이 둘은 ‘가족’이니까 당연하다. 같은 공간에 모여 사는 사람, 밥을 함께 먹는 식구. 봄이면 꽃길을 함께 걷고, 여름이면 푸른 들판에 함께 눕는다. 이런 식상한 단어들을 실제로 살아낸다는 것의 어려움을, 그리고 위대함을 마지막 ‘이렇게 늘 함께 있자.‘란 문장을 통해 팝콘이 터지듯 마음안에서 가득히 채운다. 함께 있자. 함께 있다. 지금 나와 함께 하는 사람들의 얼굴이 떠오른다. 또 ’함께 하고 싶다’라는 말이 얼마나 다정하고 애틋한지도 느껴진다. 어른인 내겐 일을 마치고, 과제를 마치고 돌아와 가족과 함께 보고싶은 책이었다. 유치원에 다니는 아이는 농장에 사는 래브라도 봄이를 여러 번 이야기한다. 받는 사랑에 익숙했던 아이가 말한다.
“나도 봄이랑 함께 놀고 싶다.“
아이가 방학을 하고 농장에 가면 봄이는 이전 보다 더 친근하게 다가오는 아이 덕에 신이 날 것이다. 함께 있는 다는 건 마음을 나누어야만 진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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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이 럭 클럽
에이미 탄 지음, 이문영 옮김 / 들녘 / 202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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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이럭클럽 #원작영화 #에이미탄 #디아스포타 #엄마와딸 #들녘




마작 클럽 '조이 럭 클럽'에 모이는 4명의 엄마들과 딸들의 이야기. 엄마들은 중국에서 태어났고, 딸들은 그녀들이 미국으로 건너와 낳은 아이들이다. 중국어로 생활하고 차별과 억압이 당연했던 시대에 태어난 엄마들은 자유와 희망의 나라인 미국에서 딸들은 다르게 살길 바라면서도 자라온 문화에서 완벽하게 벗어나기란 쉽지 않다. 엄마는 딸에게 처음부터 자신의 과거를 전부 말하지 않는다. 딸은 엄마에게 지금 어떤 감정인지 말할 수 없다. 딸에게 들려줄 자신의 이야기가 딸에게 득이 될 지 아니면 상처 혹은 독이 될 지 알 수 없고, 딸은 자신의 감정을 본인도 잘 알 지 못하기 때문이다. '


나는 엄마의 구이린 시절 이야기를 그저 중국 전래동화 정도로 생각하고 있었다. 이야기의 결말은 항상 바뀌었다. 23쪽


상대의 내 이야기처럼 다가온다면 이미 그 두 사람의 관계가 안정적이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반면 전래동화처럼 들린다면 그건 어떤 관계일까. 모녀관계가 엄청나게 돈독할 수도 있지만 애증으로 뭉쳐 남보다 못한 사이라는 말을 서슴치 않게 하는 경우도 많다. 징메이 우가 바라보는 엄마 수 위안은 중국어에서 느껴지는 거리감, 그런 것이 존재했다. 린도와 웨벌리의 관계는 어떠할까. 이 둘의 관계는 강인한 엄마와 그녀를 두려워하면서도 배워가고 있었다. 뭐랄까. 다소 심하다 싶으면서도 이해가 가는 캐릭터랄까. 물론 아이들에게 좋은 것을 물려주기 위한 행동이었다고 해도 그것이 부담으로 느껴진다면 자녀의 입장에서 안정적이었다고 말하긴 어려울지 모른다. 


"네 시댁에 순종해라.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마." 어머니는 말씀하셨어. "그 집에 가거든 무척 행복하다는 듯 행동해. 정말로, 너는 굉장히 운이 좋은 거야." 69쪽


"중국 사람들은 많은 일을 하지."엄마는 간결하게 말했다.

"사업을 사고, 약을 만들고, 그림을 그려. 미국 사람들처럼 게으르지 않아. 물론 고문도 하지. 아주 최고로 한단다."125쪽


"새로운 미국식 규칙이다."엄마는 말했다. "메이메이는 체스를 하면서 이기기 위해 온 머리를 쥐어짜내는데, 너희가 노는 건 수건 짜는 값어치만도 못하잖아." 135쪽


딸에게 중국에서 어떻게 살았었는지 결코 말하지 않을 것 같던 잉잉이 그 이야기를 하게 된 이유는 그 이야기가 '딸을 위한'이야기가 될 것이라는 판단때문이었다. 서두에 밝혔듯이 엄마들이 딸에게 자신의 과거를 이야기 하는 이유는 자신의 결정에 대한 변명이거나 가벼운 농담이 될 수도 있지만 대부분 나름의 중대한 결정 끝에 터져나오기 마련이다.


나는 레나에게 내 수치에 대해 이야기해줄 것이다. (...)

딸에게 말해줄 것이다. 불과 열여덟 살에 내 뺨에서는 아름다움이 사그라들어버렸다고. 수치심을 못 견디고 호수에 빠져 죽었다는 여자들처럼 나 또한 그 안에 몸을 던지리라 생각했었다고. 그리고 그를 너무나 증오하게 된 나머지 내가 죽여버린 아기에 대해서도 이야기 할 것이다. 376쪽


자랑도 아닌 수치를, 자신이 누군가에게 버림받았고 그로인해 누군가를 버려야 했다는 이야기를 꺼내서라도 딸의 상황을 바꿔주고 싶은 엄마의 마음이란 어떤 것일까. ' 조이 럭 클럽'이 TV에서 방영될 때 스치듯 보았을 뿐 인데도 무슨 이유인지 계속 뇌리에 남아있었다. 성인이 되어 영화를 제대로 다 보고 난 후엔 원작 소설을 찾아 읽길 바랐기에 새로 출간된다는 소식에 누구보다 기뻐했다. 많은 사람들이 책을 읽었으면 하는 바람 때문에 책을 읽고서도 긴 시간 서평을 적지 못했다. 그러는사이 마음에 둔 인물이 계속 바뀌었다. 어떤 때에는 레나에게로 또 어떤 때에는 웨벌리에게로. 그리고 서평을 쓰려고 문장을 고르다 다음의 문장이 마치 정해진 듯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네 엄마는 둥지 트는 연습을 하는 거야. 그게 본능이야. 세상 모든 엄마들은 다 그래. 너도 이 다음에 나이 들면 알 거다." 154쪽


둥지 트는 연습을 하는 엄마들을 보며 자라온 것 같다. 그리고 지금 나도 내 주변의 엄마들도 둥지 트는 연습을 하리란 것을 의심치 않는다. 마음속에선 늘 여기저기에서 떠나와 무언가 새로운 장소에서 새롭게 둥지를 트기 위해 발버둥을 치는 사람이라면 그가 엄마든 아니든 이 책에서 위로를 받을 수 있으리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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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몸을 만드는 원자의 역사 - 나를 이루는 원자들의 세계
댄 레빗 지음, 이덕환 옮김 / 까치 / 202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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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진짜 재밌다. 누가 읽어도 이 책은 첫 페이지부터 마지막 페이지까지 완독은 무리없다. 물론 다 읽었다고 해서 누가 원자가 언제 어떻게 발생했고, 지구는 언제 만들어졌으며, 인간을 이루고 있는 원소의 종류와 갯수는 물론 물리학자와 생화학자, 천문학자 그리고 지질학자들이 어떻게 각자의 분야에서 이를 밝혀낼 수 있었는지, 역사속의 영재들은 얼마나 많고, 1920년대 여성 과학자가 왜 제대로 급여를 받지도 못했는지에 대해 설명하라고 하면 못한다. 다만 어떻왜 왜 재미있었는지를 물어보면 적을 수 있을 것 같아 그 이야기를 서평으로 적어보겠다.

결국 여러분은 이 책을 통해서 우리 몸이 저녁 식탁의 음식을 어떻게 우리 몸으로 변환시키는지를 이해하게 될 것이다. 우리 몸의 내부는 얼마나 복잡한지를 정확히 헤아리기도 어려울 정도로 엄청나게 광대하다.(...) 우리 몸에 들어 있는 원자의 수는 지구의 모든 사막에 있는 모래알보다도 10억 배나 더 많다. 13쪽

책을 읽기 시작하면서 가장 많이 들었던 2가지 생각, '인간이 이렇게 대단한 존재야?', '그런데 나는 왜이렇게 하찮은거야!'였다. 왜냐면 이 책은 제목에서, 그리고 저자가 직접 밝힌 그대로 '우리 몸을 만드는 원자의 역사'에 관한 책인데 이를 밝혀낸 과학자들의 놀라운 능력과 상대적으로 운이 따라주지 않거나 연구결과에 합당치 못한 대접을 받은 안타까운 과학자들에 대한 연민(누가 누구를)등에 자꾸 마음이 가서 책장을 넘기는 속도는 점점 더 빨라졌기 때문이다. 더 재미있는 사실은 어떤 과학자가(혹은 대학원생이)어떤 이론을 발표하면 '끔찍하군'이란 평가를 받다가 긴 시간과 노력끝에 이를 증명해내면 '노벨상 후보가 되거나 수상자가 되는 과정'을 반복하고, 이 과정에서 주변사람 모두에게 능력을 인정받는다고해서 반드시 노벨상을 받거나 부와 명예가 얻어지는 것은 아니라는 점에서 불공정한 인생이란 건 과학자라고 피해갈 수 있는게 아니라는 사실이었다. 신과 과학을 모두 섬겼던 성직자가 있는가 하면 정권에 의해 희생당하지 않기 위해 적당히 아첨을 할 수 있는 처세술에 능한 과학자도 있었고, 물론 양쪽 모두 큰 업적을 남긴 것은 분명하다. 만약 영화로 만든다면 2001년, 세상을 떠날 때까지도 빅뱅이론을 부정했던, 그러면서도 큰 기여를 했던 호일의 이야기나 여자라서 그리고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외면당했던 블라우, 실험실의 긴장감이 텍스트로도 느껴졌던 밀러 그리고 아인슈타인.

그리고 본격적으로 그래서 '우리는 무엇을 먹거야 하는지, 채식의 안정성에 관한 답'을 들을 수 있는 4부로 뛰어 넘어오면 "불같고 충동적이었던" 유스투스 폰 리비히로부터 시작(291쪽)"해야 한다. 그는 몇가지 실험을 통해 인간이 몸을 만들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단백질 지방 그리고 탄수화물을 밝혀냈지만 식물성 단백질 그의 엄청난 실수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계속 그의 이름이 언급되는 가장 큰 이유는 '연구대상이 아니었거나, 관심대상이 아니었던 것에 대한 관심과 연구하려는 시도'가 그로부터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모든 내용이 다 중요하고 재미있지만 여기서 연급하고 싶은 것은 '비타민'에 관한 내용이다. 이건 개인적으로 궁금했던 부분이기도 했는데 과연 비타민은 '먹어야 하는가, 말아야 하는가'의 문제다. 역사에서 비타민은 각각 해결하지 못했던 질병(괴혈병, 구루병 등)을 치료해주는 역할을 해왔지만 현대에서는 질병의 치료가 아닌 예방차원에서 비타민을 선택한다. 이에 대한 답을 저자는 간단명료에게 알려주고 친절하게 부연설명을 해준다.

'그러나 균형 잡힌 건강한 식사를 하는 사람이라면 식물과 박테리아를 통해서 필요한 비타민을 충분히 섭취할 수 있다. 비타민을 충분히 섭취하면 건강식품 매장에서 판매하는 비타민을 더 먹는 것은 아무 도움이 되지 않고, 자칫하면 몸(과 지갑)에 해가 될 수도 있다. 324쪽

까치에서 출간한 싯다르타 무케르지의 '세포의 노래'를 먼저 읽었었다. 이 책의 독자라면 지금 읽은 '우리 몸을 만드는 원자의 역사'도 맘에 들거란 책소개는 진짜였다. 그동안 나와 내 가족 그리고 지인들의 생일만 챙기며 살아왔는데 이 책을 읽다보니 이 모든 생일이 있기 위해선 '우주의 생일'이 존재해야만 가능하다. 특히 과학과 신이 같은 목표를 바라보고 걷는 것이 아니라 각자의 길을 걷는다고 생각하라는 말이 인상적이었다. 몇 억우리 인간이 우월한 것이 아니라 이 지구가, 모든 생명체가 존재하기 위해 필요한 여러 이유 중 하나라는 잊지 말아야겠다. 겸그리고 무언가에 의문을 가지는 것, 그 결과와 상관없이 그들에게 빚을 지고 있다는 사실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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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왜 진정성에 집착하는가 - 진짜와 허상에 관하여
에밀리 부틀 지음, 이진 옮김 / 푸른숲 / 202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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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정성은 본래 자유를 추구하는데, 그것이 하나의 교리가 될 때 오히려 자유를 빼앗는다는 것이 바로 진정성의 역설이다. 우리가 '자신의 진실에 따라' 살 수 있다면 그것은 분명 좋은 일이겠지만, 반드시 그래야만 한다는 개념에 나는 이의를 제기한다. 15쪽


진정성이란 무엇인가. 이 질문에 각자의 답변이 다 있을 것이고, 그 답변이 틀리진 않을 것이라고 확신한다. 또 진정성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저자처럼 나를 바라보는 시선이 달라질 수도 있을 것이다. 좋지 않은 쪽으로. 에밀리 부틀의 '우리는 왜 진정성에 집착하는가'를 읽기 전 후의 내가 바라보는 진정성에 대한 시선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다만 누군가에게 '진정성을 가지고'란 표현을 이전만큼은 자주 사용하지 않을 것 같다. 왜냐면 진정성을 운운한다는 것 자체가 이미 나의 진정성을 의심하거나 상대의 진정성을 의심한 것이기 때문이다.


부어스킨은 셀럽과 영웅을 명확하게 구분했다. 그것을 가짜 우상과 진짜 우상으로 해석할 수도 있겠지만, 그런 단순한 이분법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그는 이런 멋진 글을 썼다. '우리는 셀럽을 만들 수 있으나 영웅은 결코 만들 수 없다. (...) '영웅은 그들의 업적으로, 셀럽은 그들의 이미지나 상표로 식별된다. 영웅은 자신을 창조하지만 셀럽은 미디어에 의해 창조된다. 영웅은 큰 사람이고, 셀럽은 큰 이름이다.' 57쪽


셀럽과 관련된 드라마와 영화가 많이 등장한 이후 관심이 없던 사람들도 이젠 셀럽들의 영향력을 알게 된다. 그들이 누군인지는 모르지만 내가 살까 말까 고민하는 제품을 무료로 사용하는 건 당연하고 거액을 받으며 활동하는 것을 알고 난 후 이런 직업이 탄생할거라는 것을 가장 빨리 예견한 사람은 누구일까 하는 궁금증도 생겼다. 어쨌거나 셀럽과 영웅의 비교를 보고 다 동의할 수만은 없었다. 저자 역시 더이상 그의 말이 맞지 않다고 인정하는 데 과연 본인도 그렇게 생각할 지, 영웅들도 동의할 지는 알 수 없다. 


자신의 경험담을 이야기할 권리에 대해서는 누구도 반박할 수 없다. '자전적 소설'이라는 꼬리표 혹은 온라인 기사에 붙는 '사적인 에세이'라는 수식어는 독자와 작가 모두에게 안전망을 제공하며, 작가가 타인의 문화나 정체성에 대해 부적절한 발언을 하는 실수는 없을 거라고 보장한다. 77쪽


얼마 전 동료와 소설과 관련된 이야기를 나누면서 '자전적 소설'에 대한 의견이 다르다는 것을 확인한 적이 있다. 내게 자전적 이란 표현은 '안전망'이었지만 동료에게는 '진정성'이었기 때문이다. 해방 이후 한국전쟁을 겪은 소설가들은 '자전적 소설'이란 표현을 그리 긍정적으로 받아들이지 않았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안전망이 결코 될 수 없을 뿐 아니라 그런 작은 의심조차 검열에 의해 작품은 물론 삶 자체가 소멸할 수 있었던 시기였기 때문이다. 저자가 서두에 밝힌 것처럼 진정성이란 의미는 그렇게 시대에 변화에 따라 변화한다는 것을 한번 더 깨달을 수 있었다. 이런 맥락으로 보면 정체성과 진정성을 비교하는 파트로 흥미롭게 이어진다. (물론 본문에는 두 파트 사이에 제품이 있긴 하지만 여기서는 초반 셀럽과 겹치는 부분이 있어 생략한다)


에릭슨의 경험을 통해 우리는 정체성이 진정성과 어떻게 서로 충돌하고 또 의존하는지 알 수 있다. 사회적 정체성은, 스튜어트 홀이 표현한 것처럼 "집단적인 "하나의 진정한 자아"다. 에릭슨이 둘 중 어느 범주에도 쉽게 들어갈 수 없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130쪽


'정체성의 혼란'이란 표현을 종종 쓰긴 하는데 이 책을 읽으면서 과연 내가 혼란스러웠던 것이 '정체성'이었는지, '진정성'이었는지 가만 생각해보니 후자였던 것 같다. 내가 혼자 고독하게 살아가길 바라는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이를 무기로 공격성을 내보인 적도 없기 때문이다. 저자는 이에 대한 예로 영국의 '브렉시트 국민 투표' 상황을 가져왔고, 이를 찬성했던 사람들이 그려보았던 영국성이 무엇이었는지도 알게 된다. 


그러나 현대 사회에서 우리는 옳은 선택이 아닐지언정 선택해야 한다는 압박을 느낀다. 어쩌면 애초에 그것이 불가능한 일이라는 사실을 잊기 위해서 그 여정에 집착하는지도 모르겠다. 진정성이 추상적인 목표라는 사실마저 외면하고 나면 우리에겐 단 하나의 질문이 남는다.

어떻게 그곳에 도달할 것인가? 162쪽


서두에 언급한 것처럼 이 책을 읽기 전 후로 달라진 게 하나있다면 '진정성의 언급 빈도'일 것이다. 우리는 지나치게 진정성을 가지려고 노력하고 있다. 그래서 저자는 각 분야별로 나누어 그런 노력이 어떤 결과를 낳을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결국 진정성을 추구하는 것이 아닌 '집착'한다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니 그런 집착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은 그런 상황들이 무엇인지 아는 것부터가 시작일 것이다. 그렇다면 이 책이 그 답을 되어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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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 년 집사 백 년 고양이 래빗홀 YA
추정경 지음 / 래빗홀 / 202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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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제공 #천년집사백년고양이 #추정경  #래빗홀



"부디, 스스로 격을 갖춘 고양이를 만나길' 대목

사람은 반려동물을 들일 자격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으니까요

격이라는 , 많은 생각이 들게 만드는 말이더라고." 

18쪽


격을 갖추고 반려동물을 받아들인다면 과연 세상의 몇 사람이나 반려동물을 기를 수 있을까. 아니 그들과 함께 살아갈 수 있을까. 소설 '천 년 집사 백 년 고양이'에서 가르키는 집사란 주변에서 흔히 만날 수 있는 집사가 아니다. 앞에 수식어만 보더라도 아무 곳, 아무 때나 만날 수 없다. 이런 집사가 되고 싶단 생각도, 될 자격도 없지만 이 소설에 관심이 갔던 이유는 '동물의 말'을 다루는 부분이었다. 아이처럼 순수하다고 해서 들을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어쩌면 테오처럼 동물쪽에서 그 능력을 허락하거나 전하지 않으면 불가능하다. 얼마전 보았던 영화 '위키드'에선 분열된 사회를 통합하기 위해 동물을 희생시키고, 그러기 위해 더이상 동물들이 말을 후손에게 가르칠 수 없도록 케이지에 가둬버린다. 동물의 말이 별개로 존재하는 것과, 인간과 함께 나누어 사용했다는 전제가 서로 다른 것처럼 느껴지지만 결국 인간의 이기심으로 대화가 단절되었다는 점에선 양쪽 모두 똑같다. 뉴스를 봐도 한 쪽에서는 인간의 권리를 침해하면서 길고양이를 돌보는 사람이 있는가 반면, 누군가는 사람앞에 서 있을때와 동물과 함께 있을 때의 인격이 달라진다. '천 년 집사 백년 고양이'에도 그런 사람들이 존재한다. 그래서 분노가 타오르는 부분도 있지만 그보다는 두섬씽에서 일어나는 훈훈한 일들, 고양이와 집사들간의 대화 그리고 천 년 집사를 향한 각각의 상황이 흥미진진하게 펼쳐진다. 테오와 티그리스와의 만남과 헤어짐이 분노에 해당했다면, 이어지는 고덕이 능력을 얻게 되는 부분은 나라면 어떠할까 하는 상상을 이끌어낸다.


"내가 미친 건가?"고덕의 혼잣말에 고양이가 혀를 차듯 그르렁거렸다

"미쳤다기보다 상상력이 부족한 쪽이지." 

"정말 고양이랑 말을 하고 고양이가 환생한다는 , 이게 사실이란 거야?" 

145쪽


고덕과 같은 상황에 놓였을 때, 나는 과연 별다른 의심없이 받아들일 수 있을까. 이따금 지나가는 고양이를 보면서 그 날의 날씨에 맞는 안부를 전하긴 하지만 실제로 그 고양이가 내 말을 알아들었을거라고 생각했던 적은 없었던 것 같다. 그렇다보니 아마 고덕처럼 고양이에게 머저리라는 소리를 들을 확률이 높을 것 같다. 이렇듯 재미나게 읽으면서도 앞서 언급한것처럼 분노가 타오를 만한 사건도 세상 어딘가에서 여전히 일어나고 있었다. 그런점에서 이 소설은 동물 유기 및 학대 그리고 인간의 폭력성이라는 무거운 메세지를 다룬다는 점에서 결코 가볍기만 한 소설은 아니다. 나중에 기회가 된다면 청소년 또래의 아이들과 토론을 해봐도 좋을 책이라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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