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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색 광선 ㅣ 꿈꾸는돌 43
강석희 지음 / 돌베개 / 2025년 9월
평점 :
#녹색광선 #강석희 #돌베개 #돌봄 #장애
이모에게 주차장까지 오라고 할 수는 없었다. 내가 캠핑장으로 가야 했다. 나의 기력이나 체력으로 누군가를 배려한다는 것이 우스운 일이었지만, 이모에게 이동은 내가 겪는 어려움과는 차원이 다른 일이었다. 이모에게 혼자서 수행해야 하는 이동이란 예측 불허의 난관을 돌파해야 하는 일이자 때로는 안전과 생명을 담보로 해야 하는 과업이었다. 62쪽
강석희작가의 <녹색광선> 속 윤재의 삶은 텍스트로 보는 데도 마음이 가라앉는다. 누군가의 삶을 두고 이런 표현을 한다는 것 자체가 예의가 아닌 줄 알면서도 읽는 내내 그런 마음을 쉽사리 떨치지 못했던 것 같다. 소설 그리고 영화 등에서 상대방에게 ‘내가 그리로 갈게’라는 표현의 설레임 혹은 그리움이 떠올랐다. 이모 윤재를 만나지 못했던 날들 동안 연주의 마음 역시 설레임과 그리움이 분명 존재했다. 그런 마음으로 이모가 있는 곳까지 간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 더 아프게 다가왔다. 서로가 서로에게 돌봄이 되어준다는 것은 어쩌면 서로의 아픔을 존중해야 가능한 것만 같다.
비가 언제 오는지 이모에게 물었다. 이모가 찌푸린 얼굴로 어깨를 연신 만지며 말했다.
“모르지. 내가 어떻게 알겠니.”
“대충 짐작이라도 해 보라고.”
내가 들어도 이상한 말을 하고 이모의 반응을 기다렸다. 이모는 어이없어 하는 얼굴로 나를 잠시 봤다. (…)
이모가 화를 내고 있는 대상이 내가 아니라는 걸. 비와 통증. 이모를 예민하게 만드는 것. 91쪽
마흔이 넘고 보니 만나는 사람들마다 ‘질병’에 관한 이야기가 떠나질 않는다. 단순한 신경통이나 피로가 아닌 ‘진단’이 내려진 아픔에 대해 이야기하다보면 과연 얼마나 이런 아픔과 통증에 대해 이해와 배려를 받고 있는가 싶어 씁쓸하다. 얼마전 모 미술관 포럼 발표에서 주제발표자가 얼굴 외에는 자의로 움직일 수 있는 부분이 없는 지인에 대해 이야기 해주었다. 그 지인이 느끼기에 먹는 것, 입는 것은 물론 아주 조금의 이동이 필요할 때마다 자신을 돌봐주는 사람들의 몸을 빌려올 수 밖에 없다고 했다는 것이다. 만약 윤재 이모가 그토록 간절히 바라는 이동의 자율성 보장은 결국 이동의 제한을 가진 사람들 뿐 아니라 그렇지 않은 사람들에게도 필요한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완벽, 집착.
병원에서는 내가 마주해야 할 가장 큰 벽을 그렇게 요약했다. 그게 전부는 아니지만 내가 알아야 할 나의 가장 중요한 면이라고 했다.
완벽하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것. 136쪽
두 단어를 이어 보았다. 완벽에 대한 집착이라고. 이렇게 붙여보니 거의 모든 사람들이 가진 몇 안되는 집착 중 하나가 바로 ‘완벽에 대한 집착’이란 생각이 들었다. 물론 ‘완벽’의 기준자체가 잘못되어 있기 때문에 연주가 아파하고 스스로 상처를 내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완벽과 집착을 내려놓아야 할 사람이 연주라고 말하기에 앞서 ‘완벽에 대한 집착’을 사람들이 내려놔야 한다고 느꼈다. 소설을 읽으면서 씁쓸함을 넘어 부끄러움이랄까 미안한 마음이 드는 이유이기도 했다.
장편 <녹색 광선>을 쓰며 해결해야 했던 첫 번째 질문은 그들이 왜 ‘서로를 돌볼 수 없는가?’였고, 다음 질문은 ‘그렇다면 이들은 누가 돌보아야 하는가?’였으며, 마지막 질문은 ‘돌봄에서 희생을 어떻게 분리할 수 있을까?’였습니다. 176쪽
저자는 <녹색 광선>을 위의 질문의 서툰 답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그 답을 ‘뭉치고 뭉쳐 잘 빚은 것이 우리의 검은 돌, 묵묵’(같은 쪽)이라고 말했다. 묵묵과 같은 책을 들고 다른 이들의 답을 너무 듣고 싶었다. 부디 이 책이 학교안팎의 아이들에게 잘 읽히길, 또 각각의 이유로 그들과 서로 ‘돌봄’의 관계에 놓인 어른들도 읽고 나눌 수 있음 좋겠다. 서로의 바람이 잘 비치는 묵묵이가 되어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