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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의 발걸음 - 풍경, 정체성, 기억 사이를 흐르는 아일랜드 여행
리베카 솔닛 지음, 김정아 옮김 / 반비 / 202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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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이 몸의 위치뿐 아니라 기억의 위치, 상상의 위치를 바꾸어놓는다는 것, 처음 가본 곳들, 몰랐던 곳들이 주로 망각 속에 묻혀 있는 묘한 연상들과 욕망들을 끄집어내준다는 것, 그러니 여행자가 가장 많이 걷게 되는 길은 마음의 길이라는 것을 나는 그때실감했다. 여행은 내가 나라고 생각지 않았던 나를 발견할 기회가 되어준다. 나의 무너지는 정체성이 내가 가보고 싶은 땅으로이어지는 것이 여행이기에. 32쪽

영문학 수업 때 제임스 조이스의 <더블린 사람들>을 읽으면서 처음으로 문학을 배우는 것이 재미있다고 느꼈다. 그때부터 언젠가 꼭 더블린에 가보겠다고 생각만하다가 실제 곳곳에 서 있는 조이스의 상을 마주한 건 10년이나 지난 후 였다. 오히려 영국 초상화갤러리에서 조이스를 먼저 만났을 정도라 더블린에 도착했을 때 제일 먼저 찾은 곳은 셜록 홈즈 기념관과 영화 원스의 배경이 된 거리였다. 이 책의 목적이 아일랜드 여행 자체가 아니라는 저자의 의도가 내게는 그래서 더 와닿았는지 모르겠다. 누군가의 ’마음의 발걸음‘을 따라가다 그때 정리하지 못했던 내가 걸었던 ‘마음의 발걸음’을 떠올리며 웃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특히 철저히 관광객으로서 방문한 내겐 양과 클로버가 기념품으로 반드시 소장하고픈 품목이었던 반면 더블린을 중심으로 시외곽이 모두 푸르른 초원, 극과 극의 개발형태를 띄고 있다는 말에 클로버가 담긴 워터볼을 한참이나 쳐다보게 됐다.

*
나의 세계, 나의 것이라고 칭해지는 세계는 많은 경우 내가 내 손으로 정성들여 세우는 세계이니만큼, 나의 세계가 끊임없이 불러내는 나라는 존재는 내가 하는 말, 내가 하는 일, 내가 보는 풍경, 내가 먹는 음식으로 이루어져있다. 그런 나의 세계, 그렇게 세워놓았던 세계를 토대만 남기고 없애는 것이 여행이다. 211쪽

저자는 자신의 선대 어디에서 아일랜드와의 연결이 있었다는 사실이 전혀 생각지도 못한 유산을 받은 것 같다고 초반에 이야기한다. 유럽인과 미국인, 같은 언어를 쓰지만 많은 것이 다르고 더군다나 아일랜드는 유럽과도 다른 역사적 배경을 가지고 있다. 이런 사연을 알고 마주하는 거리와 장소들 심지어 자연마저도 다시금 아일랜드에 가고자 열망했던 스무살의 나로 돌아가게 만들었다. 밑줄을 치고 또 치다보나 단색이었던 본문이 온통 붉게 물들고야 만다. 그 어떤 아일랜드 여행책보다, 그 어떤 뿌리를 쫓는 소설보다 더 눈길을 사로잡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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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나운 애착 비비언 고닉 선집 1
비비언 고닉 지음, 노지양 옮김 / 글항아리 / 202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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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가 뜨거운 가슴에 날 마구잡이로 끌어안도록 내버려 두었다. 몸을 빼지 않았다. 내가 속한 사람은 엄마였다. 엄마와 함께 있으면 여러 가지 확실한 문제가 있다. 숨이 막힌다. 그래도 안전하다. 109-110쪽



이민자 아파트에서 머물던 지난 시절 ‘엄마‘와 ‘나‘의 이야기를 공간을 이동하고 때로는 그들 사이에 있는 내면의 거리 또한 좁혔다 늘어나길 반복하면서 활자로 듣는다. 듣는다라고 한 것은 그들의 상황이 마치 동화나 경험한 적 없는 연애, 역사소설을 상상하며 읽는 것이 아니라 지극히 보통스러운 ‘모녀‘의 대화 범주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다만 그런 대화를 이토록 공감되고 또 전혀 납득할 수 없도록 의아하게 잘 담아낸 것만으로도 비비언 고닉이라는 작가에게 부러운 마음이 들었다. 나도 누군가의 딸이고, 또 동시에 누군가의 엄마이지만 그런 관계를 떠나 ‘부엌‘이라는 공간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고 싶어졌다. 사랑받는 아내로 사는 것이 여자로서 가장 행복한 삶이라고 믿었던 엄마가 남편, 즉 아빠와 사별했을 때의 풍경을 요약하면 절망이었다. ‘고아‘가 되어버렸다는 말로 ‘일축‘할 수 있는 그 상황에서 엄마는 부엌에 들어오지 않았다. 엄마의 부엌을 차지한 것은 아파트에 살던 누군가의 ‘엄마‘들이었다. 그녀가 엄마로서의 역할을 망각하고 남편을 잃은 여인으로서의 상실감에 빠져있을 때 나에게 음식을 챙겨주고 유혹적일 만큼 너른 품을 내어주기도 한다. 사별은 관계의 끝이지만 엄마의 삶에서는 ‘시작‘을 이야기 한다. 모든 존재의 생명이 아마도 그러할테지만 ‘말도 안돼‘를 입버릇처럼 하던 엄마에게 그야말로 정말 말도 안되는 사회인으로서의 시작이 바로 남편과 사별했기에 가능했기 때문이다. 반면 흔히 제2의 인생이라 할 수 있는 ‘나‘의 결혼은 시작이지만 결국 ‘이혼‘이라는 어떤 ‘종결‘된 상황을 염두하지 않을 수 없다. 어쨌거나 한 날 한 시에 하늘의 부름을 받는 게 아닌이상 크게보면 결혼이라는 시작은 이혼이거나 사별로 끝나기 때문이다.



결혼식 전날 여자들 한 무리가 대거 우리 부엌을 점령했다. 모두가 우리 부엌에 들어왔다. 세라 이모, 지머먼 아줌마, 매릴린과 그의 모친이 와서 청소하고 요리하고 웃고 떠들어댔다. -중략-

그러나 신난 건 그 사람들, 우리를 뺀 일가친척과 이웃 여자들뿐이었다. 211쪽



딸인 나의 결혼식을 준비하며 엄마와 ‘나‘는 ‘공연을 하는 한 쌍의 연기자들‘(211쪽)이라고 표현한다. 서두에 발췌문을 보면 ‘나‘는 불편한 엄마와의 관계일지라도 그것은 곧 안전을 의미했다. 하지만 자신의 결혼식 전날 부엌에서 모녀의 모습은 ‘공연‘이라는 어떤 장치아래 존재하는 ‘허구‘이자, 과장되게 표현하면 ‘날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부엌은 온전하게 한 여성의 공간일 때 지극히 자유롭고 풍요로울 수 있다. 끝이 곧 시작이라고 했을지라도 정작 엄마의 공간이었던 ‘부엌‘에 엄마가 없었고, 딸의 시작을 준비하는 자리에서는 존재했으나 ‘가면‘을 쓰고 있었다. 엄마가 온전하게 부엌에서 빛을 발했던 시절의 분위기는 어땠을까. 설사 그곳이 진짜 자신의 부엌이 아니었을지라도 온전히 그녀가 자신의 모습으로 몰입만 한다면 부엌에서의 ‘엄마‘는 빛이었다.



한번씩 엄마는 네티의 부엌으로 쳐들어가 팔을 걷어붙이고 세 시간 동안 작정하고 부엌을 정리한 다음 반짝반짝하게 닦아주고 나왔다. 그러곤 이렇게 말하는 듯한 표정으로 네티를 돌아보았다. ‘이 정도면 정리 다 됐지? 이제부턴 알아서 해봐.‘ 네티는 아마 엄마를 향해 환하게 웃어 보이며 엄마를 안고 키스해주었을 것이다.78쪽



결국 이 책을 읽으며 내가 느낀 것은 엄마와 딸의 관계라던가, 육아를 처음부터 능숙하게 하는 여성이 전혀 없지는 않지만 그렇지 않은 것이 오히려 굳이 표현하자면 ‘정상‘에 가깝다라는 미숙한 엄마로서의 공감이 아니었다. ‘부엌‘. 이라는 공간에 대한 고찰이었다. 자신만의 방을 가져야 한다거나, 최소한 자신만의 책상을 가져야 한다는 말을 떠나 자신만의 ‘부엌‘을 가져야 한다고 말하고 싶은 것이다. 살림이나 하는 여편네로 전락하라는 의미가 아니라 이유야 어찌되었건 주어진 공간이 부엌인 사람에게 온전한 자신만의 ‘부엌‘을 가지지 못한다는 것은 결국 비극적인 상황에 놓여있거나 혹은 그런 상황에 내쳐지게 된다. 부엌 안 팎에서 자신의 엄마를 바라보던 ‘나‘를 떠올려 정리하자면, (시)어머니들은 딸(며느리)의 부엌에 더이상 간섭하지 않기를, 또 자신의 부엌에서 생성된 어떤 결과물이나 이야기들을 강압적으로 떠넘기거나 왜곡하지 않기를.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시)어머니의 부엌에 있는 동안 만이라도 부디 그녀의 입장에서 거룩하게 머물 줄 알았으면 좋겠다. 부엌에서 이 책을 읽고, 이 책의 리뷰를 적고 있는 내가 내린 가장 솔직한 결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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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래 - 제10회 문학동네소설상 수상작
천명관 지음 / 문학동네 / 200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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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년이 흘렀다. 그녀는 홀로 벽돌을 굽고 있었다. 공장을 찾아온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라는 문장으로 <고래>는 끝이 난다. 에필로그가 이어지지만 어쨌거나 본 이야기는 ‘고독‘으로 끝맺는다. 심사평을 둘러보면 ‘인간의 욕망‘의 관한 이야기며, 익히 알고 있는 소설적 작법에서 벗어난 것이 약점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상작으로 선택할 수 밖에 없는 ‘이것이야 말로 소설이다‘라고 밖에 할 수 없는 ‘대작‘이라는 것이다. ‘평대‘라는 큰 화재로 이제는 사라진 한 마을에서 국밥을 팔았던 노파, 다방과 고래모형의 대극장을 지은 여장부 금복, 그리고 그녀의 딸 춘희의 서사가 담긴 이 작품에 ‘신은 분명히 존재한다. 다만 그것을 깨닫는 것이 사는 동안일지 죽고난 이후일 지는 하찮은 인간이 알 수 없다.‘라고 우선 짧은 평을 내려본다.

여러 가지 정황으로 미루어 그 많은 벽돌을 찍어낸 것이 바로 그 유골의 주인공이라는 사실이 밝혀지자,
건축가는 그 통뼈의 주인공에게 존경의 마음을 담아 ‘붋은 벽돌의 여왕‘이란 호칭을 붙여주었다. -본문-

1,2부는 노파와 금복을 중심으로, 3부는 춘희를 중심으로 그녀가 죽은 뒤 잠시나마 사후세계까지 다루었다. 금복이 소위 말하는 파란만장한 삶을 살다간 ‘여인‘을 대표한다면 노파의 삶은 수 많은 ‘여성‘들의 애환과 인생사가 펼쳐지는 ‘터전‘이자 ‘시련의 시초‘가 된다. 국밥집 노파는 박색 중의 박색으로 요즘 세상이었다면 성형을 위해서라든가, 자본주의의 가장 큰 이점인 ‘돈 앞에선 모두가 평등하다‘(작중에선 법 앞에선 모두가 평등하다고 했지만)를 실현하기 위해 돈을 모으기 보다 신분이 천한데다 여자이며, 여자인데 박색이기에 온갖 수모를 당연시하게 여긴 ‘세상에 대한 복수‘를 위해 돈을 모았다. 돈의 목적이 불순해서 였을까, 아니면 불순한 그 욕망을 쫓는 이들의 최후가 지옥과 다름없다는 것을 깨닫기 위해서였는지 그 돈을 소유한 자의 삶은 그야말로 ‘지옥‘이었다. 아직 성인이 되기 전 생선장수를 따라 바다로 온 금복의 눈에 그 무엇보다 신기하고 놀라움을 준 것이 바로 ‘고래‘였다. 고래는 단순하게 말하자면 ‘희망‘혹은 ‘이상향‘에 가까웠다. 동생을 낳다가 죽은 어미가 어린 금복에게는 억눌림, 육체를 지닌 존재의 한계성을 느끼게 하지만 생전 처음 보는 커다른 생선이 마찬가지로 끝없이 푸르고 깊은 바닷속을 유유히 헤엄치는 모습은 자유와 무한을 느끼게 해주었다. 정복의 대상이 아닌 이상향 그 자체였기에 고래가 사람들 손에 의해 이리저리 해지고 분리되는 장면을 보며 희열이 아닌 괴로움을 느낄 수 밖에 없었다. 자신의 영혼마저 홀라당 뺏길 만큼 강렬했던 극장을 고래의 형태로 지은 까닭도 결코 죽지 않는, 인간들에 의해 해체되는 것이 아니라 그 시대의 가장 강력한, 어쩌면 인간이 사는 동안 영원할 자본의 힘으로 굳건하게 재생시키고 싶었을지 모른다. 다만 금복이 죽기 직전에도 깨닫지 못한 것은 자본이란 결국 영원할 수 없는 ‘물질‘에 지나지 않으며 육체를 가진 살아있는 고래와 마찬가지로 인간들에 의해 소멸할 수 있다는 사실이었다. 게다가 자식을 쉽게 떠날 수 있는 존재이자 애초에 존재의 대한 어떤 감정도 남지 않은 이들과 달리 그것이 설사 증오만 남은 관계라 할 지라도 명백하게 이어지는 ‘후손‘이 있다면 그 지옥 또한 이어질 수 밖에 없었다. 금복의 딸 ‘춘희‘의 삶이, ‘홀로 벽돌을 굽고, 공장을 찾아온 사람이 아무도 없다‘로 귀결되는 것이 이를 설명한다. 위의 발췌한 내용을 보면 ‘붉은 벽돌의 여왕‘은 춘희를 가르킨다. 춘희는 말도 못하고 지능도 모자르다란 설정이 그녀가 빚어내어, 결국 그녀를 ‘여왕‘의 자리로 올려주는 ‘벽돌‘의 물성과 많이 닮아있다. 벽돌은 그 굳기가 단단하고 무르지 않으며 당연히 ‘말‘이 없다. 하지만 자연과 세월에 그 흔적들이 새겨지고 남겨진다. 마치 춘희처럼. 춘희의 삶은 소설을 읽는 내내 ‘아, 아, 아‘싶을 정도로 고통이 거의 대부분을 차지한다. 마치 지금은 ‘신‘으로 많은 이들에게 희망을 주고 대속하여 구원을 준 ‘예수‘의 삶과 별반 다르지 않다. 개망초 꽃과 점보라는 코끼리 등을 통해 춘희가 자연이라는 그 무엇과 비교할 수 없는 ‘선‘과 ‘순리‘에 따라 삶을 살았지만 그녀에게 애정을 준 사람보다 이유없는 분노와 학대를 가한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하지만 춘희가 미워했던, 아니 미움이라는 단어를 붙인 존재는 아무도 없었다. 그저 ‘두려움과 무서움‘으로 폭력의 행태를 몇 번 보였을 뿐 춘희는 늘 이해할 수 없었다. 사랑을 베풀러 온, 인간을 구원하러 온 자신을 십자가형으로 죽이지 못해 안달난 인간을 바라보는 예수의 어느 부분을 떠올리게 한다. 인간들이 저들의 욕망으로 교회를 만들고 예배를 드려도 죄가 사라지지 않고 오히려 더 많은 죄로 열매를 맺을 때 춘희 역시 한 생명을 세상에 내 놓았다. 그녀의 딸이 순결한 ‘눈 속‘에서 죽지 않고 살았다면, 엄마 춘희처럼 신이 아닌 인간의 도움으로 생을 연명했더라면 엄마인 춘희가 말도 못하고 타인의 말도 제대로 이해할 수 없기에그 딸의 삶도, 무명에서 그치지 않고 유명이나 무명보다 못한 삶을 살지 않을 수 없었을 것 같다.

*로베르토 볼라뇨의 단편소설이 생각나는 데, <두 편의 가톨릭이야기, [참을 수 없는 가우초] 수록>의 눈으로 뒤덮인 장소를 ‘신성‘과 ‘살인이라는 죄악‘이라는 극과 극의 이야기를 담고 있기 때문이다. 차가운 눈속에서 넘어진 춘희가 아픈 아이를 안고서 일어나야 한다는 의지와 동시에 그냥 그대로 묻히고 싶다는 본능에 져, 아이는 결국 죽고만다. 하지만 앞서 언급한 것처럼 폭설이 내리지 않았던들 아이가 살 수 있었을까. 또 그 고비를 넘긴다고 해결 될 것은 아무것도 없기에 춘희나 그 무명의 아이에겐 그보다 덜 고통스러운 죽음은 없지 않을까 싶다. 하지만 이런 생각이 드는 것도 교만이며 죄라는 생각이 들었다. 작품 속 ‘점보‘가 간수의 고문으로 차라리 어서 죽길 바라는 춘희에게 ‘죽음 보다 못한 삶은 없다‘라고 하지 않는가.

딸의 친부를 수장시킨 과거를 떠올리게 한다는 이유로 제 손으로 딸의 눈을 멀게하는 노파나, 마찬가지로 못견디게 괴로운 과거를 지우고 싶어 자신의 딸을 외면하는 금복, 또 그런 어미를 그리워한 춘희 모두 죽음은 늘 그들곁에서 떠나지 않는다. 메멘토모리. 죽음이 가깝게 느껴질수록 노파와 금복은 악랄해졌고 춘희는 평화를 느꼈다. 양쪽 모두 ‘생 자체에 대한 기쁨‘은 가지지 못한 것 같아 안타까웠다.


그러고보니 읽을 당시에는 깨닫지 못했지만 ‘엄마와 딸‘을 ‘엄마‘도 아니고 ‘딸‘일 수도 없는 작가가 어떻게 이렇게 잘 쓴 것인지 신기하게 다가온다. 간만에 400여 페이지의 소설을 만 12시간 내에 읽어버렸다. 생각이 많은데 정리가 안되지만 그렇다고 이렇게라도 적지 않으면 흐릿해질 것이 염려되어 읽은 이들만 이해되는 소감을 적고 말았다. 마치 춘희가 벽돌 한 장 한 장에 그림을 그려넣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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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센디어리스
권오경 지음, 김지현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2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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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의 힘이 어느정도까지 커질 수 있는지를 말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믿음만으로 암이 나았다고 하는 경우도 있고, 반대로 부모의 잘못된 믿음으로 귀한 아이가 생명을 잃기도 한다. 권오경의 소설 <인센디어리스>는 얼핏 보면 극단적인 종교에 미쳐버린 한 여성과 그 여성을 끝까지 놓지 못하는 남자의 연애소설처럼 보인다. 개인적으로는 이 소설은 부서진 영혼이 제대로 치유받지 못했을 때 어떤 비극이 일어날 수 있는지에 대한 보고서라고 생각되었다.

존은 그리스도께서 우리 고통의 밖이 아니라 그 안에 함께 거하신다고 말했어요. 내가 상처 입힌 사람들을 되새기로 내가 실패한 시간들을 열거하는 일은 곧 용서하는 법을 배우는 일이기도 해요. 그리스도께서 내리는 정화의 불길은 고통이 아니라 죄예요. 242쪽

피비는 엄마를 잃었다. 사고였다. 하지만 피비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자신이 운전대를 잡았기 때문에 사고가 났고 자신이 기적과 같은 힘을 발휘하지 못했기 때문에 엄마를 구해내지 못했다고 자책하고 있다. 피비에게 엄마는 마치 절대적인 존재였다. 마치 신처럼. 엄마와 아이가 분리되었을 때 일어날 수 있는 안타까운 상황을 일반적인 사람이라면 누구나 짐작할 수 있다. 얼마나 속상할까. 세상에 저 혼자인듯 외롭고 무기력해질거라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런 무기력을 이성들과의 만남과 약으로 견뎌보는 피비. 하지만 마음 속 공허함, 자신이 스스로 지운 무게를 누군가 걷어내주길 바라던 피비에게 다가온 '존 릴'은 처음에는 그녀로부터 이야기를 꺼내어 놓게 하고 그 과정을 치유가 아닌 자신의 극단적인 결의를 이행하는 데 이용한다. 뉴스에서 마주하는 사이비 교주들의 폭력적인 성향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지만 피비가 괴로운 사건들을 토해내며 자신의 주변을 돌아보는 과정만 보더라도 주변에서 잘못된 길로 빠지고 마는 사람들 스스로의 나약함 때문에 그렇게 되는 것이 아니란 것을 깨닫게 된다. 성서에 예수가 시험을 당하던 상황을 떠올려보라. 상황이 단단하고 주변에 믿을만한 사람들이 여럿 존재하고 행복과 안정적인 상태가 아니었다. 혼자여서 외로웠고 굶주려있을 때였다. 여기에 자신의 죄 마저 결국 속죄받을 수 있다는 제안마저 받게된다면 넘어가지 않을 수 없게 된다. 그런 피비를 처음에는 구해낼 수 있다고, 존 릴의 거짓을 다 밝힐 수 있다고 생각했던 윌이 독자입장에서는 더더욱 안쓰러웠다. 윌 또한 신의 사랑을 시험하고 스스로 놓아버린 나약한 인간이었기 때문이다. 폭력적인 행위를 일으키는 종교단체는 성서 속 신도 그렇게 벌을 내렸다고 변명한다. 그리고 자신들은 그런 신의 대리자라고. 하지만 진정한 의미의 신은 처벌을 대신 처리해 줄 대리자가 필요하지 않다. 신에게 필요한 것은 사랑을 전해줄 '죄인'들을 부르러 왔다는 것을 잊지 않았으면 좋겠다. 누군가 종교에 지나치게 빠져있는거나 '미쳐'있는 것처럼 느껴진다면 그에게 지금 필요한 것은 아마도 무조건적인 사랑일 것이다. 피비가 속죄나 믿음이라는 말 대신 사랑을 제대로만 잘 알았더라면, 끝까지 사랑을 선택하지 못한 것은 그녀에게 제대로 된 사랑을 보여준 이가 없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권오경은 신앙의 상실이 너무나 고통스러웠던 나머지 더 이상 살아갈 이유를 찾을 수 없었다고 고백한다. 그 고통이 이 소설을 쓴 가장 큰 동력이 되었다. 자그마치 10년의 세월에 걸쳐 <인센디어리스>를 집필하며 그가 목표로 했던 것은 신앙인과 비신앙인 사이의 간극에 다리를 놓는 것이었다.

317쪽, 옮긴이의 말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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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끼리도 장례식장에 간다 - 동물들의 10가지 의례로 배우는 관계와 공존
케이틀린 오코넬 지음, 이선주 옮김 / 현대지성 / 202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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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례를 종교적인 의식으로만 여길 때가 많다. 하지만 의례는 넓은 의미로 종교, 숭배, 영적인 관습의 경계를 훌쩍 뛰어넘는다. 정확한 절차에 따라 자주 되풀이하는 구체적인 행동은 모두 의례다. 차례대로 이어지는 행동들도 의례라고 할 수있다.
27쪽
이 책은 10가지의 의례, 인사, 집단, 구애, 선물, 소리, 무언, 놀이, 애도, 회복 마지막으로 여행 챕터로 구성되어 있다. 의례라는 단어를 보았을 때 책의 내용 중 집단의례에 해당되는 이미지만 떠올랐는데 읽다보니 가볍게는 타인과 나누는 인사, 호감있는 대상을 향한 구애와 선물 등 많은 것이 의례에 속했다.


우리에게는 두 가지 힘이 있다. 이 행성 위의 서식지와 모든 생명을 보호할 힘과 파괴할 힘이다. -중략-
자연재해든 인재든 모두가 영향을 받는다. 동물과 서식지를 구하기로 결심하면 우리 자신도 구원할 수 있다. 이 것이 바로 이 책의 10가지 의례가 중요한 이유다. 우리는 10가지 의례를 통해 자신과의 관계, 사람들과의 관계, 세상과의 관계를더욱 튼튼하게 구축 할 수 있다. 301쪽


타이틀에 언급된 코끼리외에도 여러 학자들의 각기 다른 동물들의 연구결과를 포함 해 한마디로 자연과 인간의 의례의차이와 의례의 지속성이 반드시 필요한 이유를 설명하고 있었다. 설명이라고 표현하자니 조금 딱딱하게 들릴 수도 있는데 챕터사이에 등장하는 아포리즘이나 사진, 음악, 소개되는 책들 무엇보다 수화로 자신의 감정과 과거를 소개하는 등의놀라운 동물 일화들로 결코 지루하지 않다.


이 책에서 가장 공감했던 의례는 아직 어린 아이를 기르고 있어서인지 ‘놀이 의례’가 크게 와닿았다. 사자나 코끼리들은어린 시절부터 놀이를 통해 자연스럽게 먹이를 공격하고 위험한 상황에서 탈출하는 방법을 배운다. 인간도 크게 다르지않다. 아이와 놀아주다보면 장난감을 함께 가지고 노는 법을 통해 또래사이에서 지켜야 할 기본적인 규칙을 배우게 되고그림그리기와 같은 행위를 통해 감정을 표현하고 조절하는 방법을 배운다. 무언가를 배우기 위해서만 놀이 의례가 필요한 것은 아니다. 스트레스를 해소나 부정적인 감정을 누르고 웃음과 활동을 통해 긍정적인 기운을 끌어올리기 위해서라도 놀이는 반드시 필요하다. 당연히 과한 중독 현상이 염려되기는 하지만 나또한 저자의 말처럼 비디오 게임도 그런 맥락에서 호의적으로 생각하고 있다. 타이틀이 된 ‘코끼리도 장레식장에 간다’는 8장 애도 의례에서 등장한다. 애도와 사체를 처리하는 것을 인류학자들은 구분하고 있는데 크게 두 가지 행동이 존재하느냐의 따라 달라진다. 만약 어떤 행위가 애도에 포함되려면 무리에서 누군가 죽었을 때 그 곁을 지키는 동료가 있는지, 또 죽음 이후의 행동이 달라지는, 가령 음식을 먹지 않는다던가 무리에서 떨어져 나오거나 하는 등의 행동들로 저자가 소개한 ‘코끼리 버논’이 죽었을 때 코끼리들이흙을 뿌려 사체를 덮어준 후에도 다른 여러 마리의 코끼리들이 번갈아 찾아오고 그 곁을 지키는 등의 행동, 즉 애도 의례가 있었다는 것이다. 그야말로 ‘코끼리도 장례식에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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