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나 울프는 남아프리카에서의 경험을 담은 첫번째 소설의 인세에 의지해서 살아가고 있으나, 지금은 작가로서 글을 쓰지 못해서 고통을 겪고 있는 중이다. 세상이 이토록 끔찍하다면 자신이 무엇을 쓰든지간에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느낀다. 왜냐하면, 자신은 그저 현실의 부정확한 버전만을 창조해낼 뿐임을 알기 때문이다." (137)
가끔 그런 생각을 한다. 아니 자주 하는 것같다. '이게다무슨소용이야' 모드로 들어갈 때, 들어가 앉아있을 때, 내팽개쳐져있을 때. 글쓰기와, 그밖의 아주 사소한 것들까지, 뭣하러, 해서 뭐하게, 의미 없다, 무슨 소용이람. 이런 감정이 어쩌면 책에 나오는 '자기 회의'이겠지. '공격은 자기 회의의 또 다른 면이다.'(141) 나는 어째서 나를 공격하는가. 그러나 이 감정은 고정된 것이 아니어서 시시각각 조금씩 변화도 하고 그 상황에 맞게 치장도 한다. 공격과 동시에 수비가 이루어지는 방어의 기술이 또 현란하다. 이런 상태가 꽤 오래 지속될 때도 있다. 가장 최근에는 지난 두세 달이 그랬다. 무력감과 자기회의를 넘나들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무력감이 워낙 우세해서 자기회의가 쭈그러들 수밖에 없었다는 사실이다.
그렇게 대체로 못 읽고 못 쓰고 있다가 이런 구절을 만나면 언제 그랬냐는 듯 슬그머니 의욕이 솟는다.
" "여성은 자신의 몸으로부터 추방된 것처럼 글쓰기로부터 추방당했다. 여성은 여성 자신을 글로 써야 한다. 여성에 대해서 써야 하고, 여성을 글쓰기로 도입해야 한다 - 똑같은 이유로, 똑같은 법으로, 똑같은 치명적인 목표를 가지고" " (206)
엘렌 식수의 글이다. 작년부터 읽고자 하였으나 떄를 기다리느라(?) 읽지 못하고 있던 책을 마침 또 꺼내두었길래 인용구가 들어있는 부분, [메두사의 웃음] 챕터를 야금야금 읽기 시작한다.
그리고 이런 구절들!
"그대는 왜 글을 쓰지 않는가? 글을 쓰라! 글쓰기는 그대를 위한 것이다. 그대는 그대를 위한 것이다. 그대의 육체는 그대 것이다. 그것을 취하라. 왜 그대가 글을 쓰지 않았는지 나는 안다. (스물일곱 살 이전에 내가 글을 쓰지 않았던 것도 바로 그 때문이다.) 글쓰기가 그대에게는 너무나 높고, 동시에 너무나 위대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글쓰기는 위대한 자들, 다시 말해서 '위대한 남자들'에게 국한된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건 '바보짓'이다. 게다가 그대는 약간 글을 썼었다. 그러나 숨어서 썼었다. 그건 좋지 않다. 숨어서 썼기 때문이다. 글을 쓴다는 것을 스스로 벌했기 때문이다. 끝까지 가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니면 글을 쓰면서 저항할 수 없이, 우리가 몰래 자위를 하듯이, 멀리 가고자 한 것이 아니라 그저 긴장을 완화시키고자 했기 때문이다. 너무 지나쳐서 고통스럽게 되지 않을 정도로만 긴장을 풀고자 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향유하고 나자마자 우리는 서둘러 자신에게 죄의식을 부과했었다 - 스스로를 용서받게 만들기 위해서. 아니면 서둘러 망각하고 매장했다. 다음번까지.
글을 쓰라. 아무도 그대를 만류하지 못하리라. 아무것도 그대를 멈추지 못하리라. 남자도, 바보 같은 자본주의 기계도 그대를 멈추게 하지 못하리라.
......
나는 여성을 쓴다. 여성이 여성을 써야 한다. 그리고 남성은 남성을 써야 한다. 그러므로 이 글에서는 남성을 향한 간접적인 사색밖에는 찾아볼 수 없을 것이다. 남성의 남성성과 남성의 여성성이 남성에게 어떤 것인가를 말하는 것은 남성의 소관이다. 남성들이 자기 자신을 볼 수 있는 눈을 뜨게 될 때, 그때서야 그것은 우리와 상관있는 일이 될 것이다. " (<메두사의 웃음> 12~13)
얼결에 [메두사의 웃음] 챕터를 다 읽었다. 금방 기분'이가' 좋아져서 컴터를 켠다. 애나 울프의 불안과 자기회의를 떨치기에 차고 넘치는 메두사의 웃음이었다. 글쓰기를 강권(강력히 권유)하는 이 곳, 서재 이웃분들이 생각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