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클리오 > 김혜린 '북해의 별', '불의 검' 의 여주인공 비교

                                                     vs               

                       <북해의 별, 아니타 아델라이드>                                   <불의 검, 아라>


최근에 '북해의 별'을 다시 보다가 문득, 같은 작가의 작품이지만 여주인공의 이미지가 참 다르다는 생각을 했다. 물론 둘다 나쁘다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두 여주인공 모두, 그보다 더 이상적이고 모든 것을 갖출 수가 없다. 미모와 사랑하는 사람을 위한 헌신, 꿋꿋한 마음, 주위 사람들에 대한 따뜻한 배려 등 이상적인 여성상이라는 것을 놓고 보면 둘다 매우 적합하다. 남자에게도, 여자에게도 미움받지 않을 아주 여리고 따뜻한 여인들인 것이다. 그러나 두 여주인공은, 거의 혁명가에 가까운 자신의 사랑하는 사람을 기다리고 찾아간다는 똑같은 인물임에도 불구하고 사실 다르다. 그것은 1983년(북해의 별 출간 연도)과 2005년(불의 검 완간 연도) 만큼이나 멀리 떨어져있다. 이것은 김혜린이 바라는 여성상이 그만큼 바뀌었다는 말도 되지만, 다른 측면에서는 그 시대가 바라는 이상적 여성상이 바뀌었다는 말과도 통한다고 생각한다.

 

 

운동권 학생들에게 학습교재로까지 읽혔다는 북해의 별은 멤피스가 너무 이상적인 영웅으로 나와서 지금으로봐선 낯설긴 하지만, 혁명이 성공하려면 어떤 조건이 이상적인가 하는 것들을 생각하게 한다. 가장 큰 역할을 했던 주인공 멤피스가 더이상 권력에 연연하지 않고 물러나는 것까지를 포함해서 말이다. 그렇다면 그러한 이상적 혁명가의 사랑을 받는 사람의 조건은 어떠해야 했나? 어차피 궁정 중심 줄거리이긴 하지만 아니타는 공주인데다가, 모든 사람의 추앙을 한 몸에 받는 미모. 권력 투쟁 속에서도 오직 청순가련한 한떨기 꽃이다. 그저 겸손하고 사람들을 불쌍하게 여기는 것일 뿐. 어느 남자와 사랑에 빠져도 결코 나쁜 여자가 되지는 않겠지만, 권력욕에 가득찬 대귀족과 사랑에 빠졌더라도 민중의 편, 혁명의 편에 자신을 헌신할 수 있었을까. 그런 면에서 아니타는 자신의 선택이이 그렇게 강한 여자가 아니다. 그러면서도 한번 사랑에 빠져 청혼을 받은 남자를 마음 속에서 끝까지 기다린다. (이건 좀 남성 판타지의 실현같다.)

 

그러나 아니타는 오빠가 명령하는 결혼을 거절하지는 않는다. 선택받은 자신의 삶을 버리고 소박하게 민중 속으로 갈 것을 결정했던 것도 오직, 사랑하는 남자의 곁으로 가는 길, 말하지 않더라도 사랑하는 남자가 가장 좋아할 길이 그것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공주로 호화롭게만 살아온 그녀가, 오직 착한 마음 하나로 이전과 완전히 달라질 그 삶을 사랑하는 사람과 행복하게 살리라고 생각할 수 있을까. (하기야, 멤피스는 계속 부자로 살 것 같긴하다...) 한 마디로, 주인공이지만 이 만화에서 주체적, 능동적으로 아니타가 해내는 일은 거의 없다. 물론 굉장히 자기 의지가 강하고 정신적으로 현명한 여성이라는 것은 인정한다. 그러나 그것이 어쩐지 혁명을 이끄는 남자 주인공 머리 속에 그려지는 이상형인 것 같다는 느낌이 강하게 든다. (한마디로, "희생하는 여성")

 

불의 검의 아라는 아니타와 출생배경부터가 다르다. 깊은 산 속에 대장장이인 아버지와 숨어살던 이름도 없던 소녀가 아라이다. 그녀는 기억상실증에 빠지고, 적일지도 모르는 이름모를 남자 산마로와 사랑에 빠진 후, 헤어진 그를 다시 만나는 일, 그리고 일족의 가장 큰 소원이었던 강철검을 만드는 일에 평생을 바친다. 그 과정에서 적의 대장에게 잡혀가 그의 아이를 낳는 질곡의 삶을 살고, 당연히 동족에게서 멸시당하고, 사랑하는 남자는 자신을 전혀 기억하지 못하는 힘든 삶을 살지만... 그녀는 결코 좌절하지 않는다. 오직 묵묵히 자신의 판단에 따라 사랑하는 남자와, 그리고 자신의 일족에 도움이 되는 삶을 살며, 어느 한 순간도 자신의 삶을 함부로 팽개치지 않는다. 집념과 끈기로 자신의 삶을 살아내고 결국 자신의 동족의 역사적 운명까지도 바꾸어나가는 힘을 보여주는 강한 여인이 바로 아라이다.(한마디로, 여성적으로 "힘있는 여성") 또한 불의 검에는 사랑하지만 사랑에 매몰되어 모든 것을 걸지는 않는, 이상적 여성 정신지도자 '소서노'가 등장하기도 한다.

 


한 10년 정도 사이에도 사람들의 삶은 많이 바뀌었다. 진보 운동의 물결 속에서도 여성들은 거칠고 험한 임무를 띄고 떠나는 남자들의 뒤를 묵묵히 쳐다보며 삶을 지키는 그런 것만이 이상이라고 생각할 때가 있었다. 자신이 앞으로 나가는 것은 상상도 못했고(하기야 상상해봤댔자 허용될 수도 없었고), 사랑하는 남자의 사상에 스스로 자신을 일치시킬 때에만 이상적인 여자로 생각되었었다. 유명한 여성혁명가들은 누구누구의 부인..으로 유명하거나, 혹은 권력투쟁 속에서 제거되었다. 이제 여자들의 생각도 많이 변하고 있다. 이제는 남자들의 생각에 뒤를 받쳐주고 그 일이 성사되면 나의 몫이 저절로 이루어지겠다는 것이 얼마나 환상인지를, 지난 시간들 속에서 이미 느껴버린 것이다. 내가 바라는 것은 내가 움직여야 이루어진다는 것, 그리고 그것은 때로 주변 사람들과의 원치않은 충돌을 일으켜 내가 상처받기도 한다는 것,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 스스로가 움직여 얻은 것만이 진정한 내 것이라는 것을 눈치채버린 것이다. 그 거리는 끊임없이 멤피스의 그늘과 그의 기억 속의 이상형과 똑같은 모습을 간직하고 있는 아니타와, 아버지와 사랑하는 남자 산마로의 기억 속에서 잊혀지는 비극을 겼지만 그들이 가장 원하던 것을 결국은 자신이 스스로의 힘으로 이루어내는 아라 만큼의 시간적 거리를 가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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