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스라기 - 전3권 세트
진산.민해연 지음 / 캐럿북스(시공사) / 2005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가스라기. 죄를 짓고 그 업보를 이고 사는 죄인을 뜻하는 용어로서 가스라기를 거둔 마을은 천벌을 받는다고 전해진다. 주로 부모나 형제를 살해한 사람들이 가스라기가 되는 경우가 많은데, 연좌되기 때문에 가스라기의 부모, 자식은 모두 가스라기가 되어버린다. 결국 한 사람만 가스라기가 되어도 그 핏줄은 전부 가스라기로 취급되어 마을 안에서는 살 수 없고 동구 밖에서 혼자 기거하며 뭇사람들에게 욕을 먹으며 살아야 한다. 그러나 이 책에 나오는 가스라기의 의미는 보다 깊다. 여주인 가스라기가 가스라기가 된 이유. 그것은 너무나 놀랍고 뛰어난 그 능력 때문이었는데, 사실 따지고 보면 결자해지이다. 자기가 버린 것은 자기가 책임을 져야하니까.

 

그러나 저러나 가스라기와 천군, 그리고 지한의 사랑은 타오르는 불길처럼 격정적이지도, 꽁꽁 얼어버린 얼음처럼 차갑지도 않다. 그들은 주어진 운명을 거스르고 또 거스르며, 가는 실이 끊어지지 않고 갸날프게 이어지는 것마냥 애닯고 서럽게 서로를 사랑한다. 천군에 대한 증오로 시작된 지한의 사랑은 결국 잃었던 기억을 찾아 모든 미련을 버리면서 완성된다. 천군은 모든 사실을 알때나 모를때나 상관없이 오로지 그녀를 위해 움직이고, 그녀가 남을 세상마저 사랑한다. 지한과 천군은 자신들이 이루었던 몇 십년, 몇 백년의 수행을 모두 무너뜨리면서까지 가스라기를 지키고자 노력한다.

 

가스라기는 너무나 솔직한 여자이다. 어린 시절 엄마와 살다가 엄마가 돌아가시자 천군을 만날 때까지 줄곧 동네 사람들에게 돌팔매질을 당하며 혼자 외롭게 지냈다. 그녀는 오랜 시간 배척당했기에 자신이 사람임을 몰랐고, 예의를 배운 적이 없었으므로 예의범절을 몰랐다. 그런 그녀가 엄마 이외의 사람을 만나 그에게 정을 주었으니, 목숨이 다하고 또 다하여도 포기할 수 있을리 없었다. 그리하여 1000일의 낮과 밤을 고통으로 지새어 드디어 그를 만날 수 있는 곳까지 왔으나 그녀 앞에 놓인 시련은 끝이 없었다. 그러나 그녀는 그 시련을 넘어 운명을 바꾸었다.

 

선인들의 이야기를 다룬 로설은 이게 두번째이다. 첫번째는 이월화. 그리고 이번에는 가스라기. 이 두 작품을 통해 선계가 등장하는 로설은 복잡하다는 사실을 느꼈다. 선인, 선녀들의 특성상 그들은 열정적인 사랑은 하지 못한다. 언제나 인과율을 따지고, 시간에 구애받지 않으며, 청정하려고 수행하는 이들이 정념, 애욕이란 인간의 감정을 드러내려고 하지 않으니까. 그러나 그들에게는 힘이 있다. 그렇기에 그들은 그들 나름의 반전을 시도한다. 이월화에서도, 가스라기에서도.

 

뭐, 그래봤자 그들이 시도하는 반전은 둘이다. 죽거나 인간이 되거나. 이거나 저거나 모두 몇 십년, 몇 백년의 수행으로 얻은 것들과 무한한 생명을 모두 포기하고 찰나일지라도 사랑하는 이와 함께하겠다는 굳은 의지의 표출이다. 그래서 선인들의 사랑은 허무 아니면 희생이며, 그 대가로 그들이 얻는 건 짧지만 가슴 벅찬 행복. 수행으로 버리려 했던 인간적인 감정을 그때서야 비로소 감사하게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리하여 그들은 정념으로 가득 차 있으되 정도를 걷고, 애욕으로 물들어 있어도 추하지 않다. 천군과 지한, 가스라기. 이들의 사랑처럼.

 

아쉬운 게 있다면 천군의 과거가 아스라하게만 나온다는 것. 앞으로 나올 삼라의 이야기 중 천군의 과거 이야기도 들어있다면.. 하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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