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클리오 > '역사란 무엇인가'를 읽은 후라면...
역사의 풍경 - 역사가는 과거를 어떻게 그리는가
존 루이스 개디스 지음, 강규형 옮김 / 에코리브르 / 2004년 3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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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에 대한 뒷 표지에는 다음과 같은 서평이 있다.

- 마르크 블로크가 살아있었다면 이 책을 썼을 것이다. / 마르크 블로크의 '역사를 위한 변명'과 카의 '역사란 무엇인가'의 뒤를 잇는 최고의 역사학 입문서! -

사놓은지 꽤 되었고, 그다지 두껍지 않은 책이라 읽는데 오래 걸리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는데 생각보다 리뷰 올리는 시간이 늦어졌다. 저러한 화려한 서평들에도 불구하고 사실, 그다지 이 책에 많은 기대를 하지는 않았었다. 마르크 블로크와 카의 명성을 어쩐지 파는 듯 했고, 요즈음 역사학 관련하여 읽은 책들이 현학적인 나열들 끝에 재미 혹은 지겨움 이외에 아무 것도 남겨주지 않는 것 같은 반복의 연속이었기 때문이다. 사실은 그런 것에 조금 지쳤었나보다.

읽고나서의 느낌은 '최고'의 역사학 입문서인지는 몰라도, 최근의 논의를 반영하였으며 또한 방법론들 사이에서 헤매다가 아무런 실질적 연구업적을 내지 못하는 역사가들과는  달리 실질적인 역사 연구작업을 했던 한 폭넓은 학자의 평생의 사유결과를 보는 듯 했다. 첫 장을 여는 프리드리히의 방랑자 그림이나 셰익스피어 인러브의 기네트 펠트로 이야기를 비롯하여, 역사가가 역사 연구 과정에서 느끼는 호기심과 두려움, 압박감이 골고루 표현되어 공감하면서 함께 웃고, 대단한 필력에 놀라워했다. 저자는 스스로 서문에서 이 책을 <역사를 위한 변명>과 <역사란 무엇인가>의 업데이판의 필요성에 이 책을 저술했다고 밝힌다.

카나 블로크의 작업 위에서 출발하므로, 저자는 역사학에 대해 구구절절히 설명할 필요는 못느낀다. 다만 그들의 의견에 대한 업데이트(인과관계에 대한 재규정, 도덕적 판단에 대한 인식 등)와 최근의 연구경향을 말할 뿐이다.  책 전체에서 저자가 특별히 신경썼다고 느낀 것은 역사가들의 연구방법에 대해 설명하고 방어하는 것이다. (방어한다고 해서 밀려나는 듯한 소극적 방어는 아니고 오히려 예찬하는 수준이다. )

특히 인상적인 부분은 과학의 최근 연구경향과 비교하여 역사가 과학과 연구방법론이 비슷하다고 설명하는 것이다. 물론 저자는 여기서 엄밀하게 여러번 실험을 거쳐 법칙을 만들어내는 물리학 등의 실험실 순수과학을 말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실험실에서 실험할 수 없는, 고생물학, 천문학 등의 학문의 결과를 만들어내는 방법은 역사학의 방법과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또한 오히려 최근의 과학에서 밝혀진 성과 - 카오스 이론, 프랙탈(잘 이해는 못했다!) -는 역사학에서는 옛날부터 명확하게 인식하지 못했어도 이미 쓰고 있는 방법이었다는 것이다. 즉, 역사는 과학적 방법론을 사용하고 있으며, 이것은 역사가 과학화되는 것이 아니라, 최근의 경향에서 보건데 과학이 '역사화'되어가고 있다는 것이다.

또한 이렇게 자연과학과 비슷해진 역사학이지만, 오히려 사회와 인간에 대해 다루는 유사학문인 듯한 사회과학과는 전제부터 다르다고 거리를 둔다. 사회과학의 목적인 일반화와 미래 예측은 역사학에서는 하지 않는 것이며, 미래 예측을 위한 단일한 종속변수의 규정은 실제 인간세계에 적용이 불가능할 뿐 아니라 사회과학이 기반하고 있는 '(자연)과학'에서조차 한물간 이론이라는 것이다.

저자는 현재 유행하고 있는 포스트모더니즘 역사학에 대해서도 과격하게 거부하지도 적극적으로 변명하지도 않는다. 다만 담담하게 관찰에 따라 대상이 달라진다고 해서, 그 대상이 실제로 없다는 결론을 내릴 수는 없지 않은가..라고 말할 뿐이다. 책에 저술된 범위는 가까이는 역사학의 포스트모더니즘 뿐 아니라, 더 멀리는 사회과학, 자연과학의 최근 연구동향에까지 펼쳐져가고 있다. 그야말로 저자가 대단할 뿐이다.

이 모든 대단함에도 불구하고 이 책을 가장 크게 마음에 든다고 말할 수 있는 이유는 역사의 필요성, 가능성과 한계를 보는 마지막 장 때문이다. 저자는 인식이 유연할 뿐 아니라, 역사가로서의 책임을 인식하고 있다. 또한 현재에 적용되고 있는 대부분의 억압이 그 시대적 산물이라는 것을 밝힘으로써 해방을 향해 나아가는 것을 도와주는 것이 역사가의 역할이라고 규정하고 있다. 그가 역사에 대한 인식이 건전하고, 지식인으로서의 책임감, 특히 역사를 배운 지식인으로서 사회적 책임을 명확히 인식하고 있는 것이, 이 책이 단지 허황된 탁상공론이나 방법론 수준에 그치지 않는 그 이상의 것을 보여주는 가장 큰 증거라고 생각한다.

리뷰가 좀 복잡해진 것 같은데, 실제로 <역사의 풍경>은 시작하는 부분을 편안하게 처리하고 있는 것 만큼이나 재미있게 여러가지를 생각하게 하고 있다. 물론 중간의 과학이론 부분 설명이 좀 어렵긴 했지만, <역사란 무엇인가> 를 급진적으로 벗어나지 않는 역사학 입문서를 읽어 여러가지를 생각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되었다. 그러나, 역자는 이 번역에 여러 사람의 자문을 얻었다고 했으니 많은 신경을 쓰셨겠지만, 읽다보니 도저히 무슨 말인지 맥락을 보아도 해독불가능한 문장이 몇 번 나온다. 그 점이 좀 아쉽고, '이야기'나 '역사', '과거' 등의 단어를 쓸 때에 분명히 같은 단어인 듯해서 확인해보고 싶은 부분이 있었다. 몇몇 단어들에 대해 필요한 경우에는 원단어를 함께 써줬어도 되었을텐데, 라는 생각도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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