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오래, 그후 - 인어공주 에필로그
정선화 지음 / 청어람 / 2004년 7월
평점 :
절판


사랑하는 왕자를 만나기 위해 목소리를 빼앗긴 인어공주는 결국 왕자의 사랑을 받지 못하고 물거품이 되었답니다. 걸을 때마다 송곳으로 후벼파는 듯한 고통을 겪으면서도 왕자와 함께 하고 싶었던 그녀는 왕자가 이웃나라 공주와 결혼하게 되었다는 소식에 그저 목이 매일 뿐이었습니다. 결혼식날 배 위에서 언니들이 내미는 단도를 차마 왕자의 심장에 꽂을 수 없었던 그녀는 자신의 생명이 아닌 사랑을 택했습니다. 그런 그녀의 사랑에 감동한 신이 그녀에게 인간이 될 수 있는 기회를 선물했습니다. 그리고 그 인어공주는 오랜 시간이 흐른 후 사람으로 태어날 수 있었습니다.

안데르센이 그린 인어공주는 사람이 되지 못했지만, 생각해보면 인어공주는 아마 사람이 되었을 것이다. 왕자와의 사랑을 이룰 수 있는지 없는지는 잘 몰라도 말이다. 이 책은 그 인어공주가 오랜 시간 착한 일을 하여 인간이 된 후 일어나는 일을 다룬 듯 하다. 인어공주인 서은은 엄마 잃은 고아이자, 혜현의 집에서 일하는 하녀이다. 요즘 같은 시대에 하녀라고 하면 어이없다 할 지 모르겠지만, 그녀는 명백한 하녀였다. 보육원에서 서은을 데려온 윤의원은 그녀를 자신의 딸에게 줘 버렸다. 서은은 몸이 약한 혜현의 시중을 들고, 투정을 받아주고, 화풀이 대상이 되고, 시키는 일은 시키는 대로 해야만 하는 그런 처지였다. 서은이 이를 악물고 모든 것을 견디는 이유는 고등학교 졸업을 위해서. 배워야 어떻게든 혼자 일어설 수 있다는 생각 때문이었고, 그것은 그녀를 독하게 만들었다. 온갖 잡다구니 일을 다 하면서도 밤을 새워가며 공부한 결과 전교 1등을 놓치는 일이 거의 없었으며, 자신이 맡은 일은 끝까지 다 해내는 책임감을 가져 독종이라는 말을 들을 정도였으니까. 그런 서은에게 오냐오냐 떠받들림 받는 혜현은 일종의 열등감을 느낀다. 자신보다 못한 처지에 있는 서은이 자신보다 뛰어난 능력을 발휘하는데 공주님이 샘이 나지 않으면 이상하겠지. 거기다가 그런 공주님의 시샘을 더 부추긴 것은 멋진 왕자님의 관심이었다. 일도그룹의 후계자인 경휘가 서은에게 관심을 가진 것이다. 어릴 때부터 경휘를 좋아했던 혜현으로서는 화가 날대로 날 노릇이었지만, 이미 경휘의 마음은 서은에게 기운지 오래였다.

자신이 신처럼 믿어왔던 아버지가 배다른 형을 데려왔을 때, 경휘는 자신의 마음 속에서 믿음이라는 단어를 버렸다. 아버지의 자식이라는 상훈을 보며 절대로 사람을 믿지 않겠다고, 상훈의 엄마가 돈을 받고 상훈을 버리고 떠나버리는 것을 보며 사랑이란 감정도 믿지 않겠다고 굳게 다짐한 그는 서은에게 흔들리는 자신을 보며 소유욕일 뿐이라고 생각한다. 나쁜 환경 속에서도 자신이 해야할 일을 꿋꿋하게 하는 서은을 보며, 그렇지 못한 자신을 부끄러워하여 서은에게 자격지심을 가지고 있던 경휘는 언제나 그녀가 자신을 떠나버릴 것만 같은 두려움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그녀의 날개를 꺾어 자신의 품 속에만 가두고 싶어했다. 경휘는 고등학교를 졸업하자, 아직 고 3인 서은을 윤의원의 집에서 데리고 나와 그의 집에 머물게 했다. 물론 그는 미국에 유학간 터라 서은은 혼자 생활해야 했지만, 누구의 눈치도 받지 않고 공부할 수 있다는 생각과 더 이상 떨면서 경휘의 연락을 기다리지 않아도 된다는 생각에 행복해했다. 그러기를 5년. 일도그룹 내에서 확고하게 자리를 잡은 경휘와 사법고시 시험일을 얼마 남겨 놓지 않은 서은은 서서히 드러나는 불안감을 주체하지 못한다.

서은이 사법고시를 패스하면 자신의 곁을 떠날 거라고 생각한 경휘는 그녀를 몰아세운다. 자신의 어머니가 살해당했을지도 모른다는 단서를 잡은 서은은 혼자 사실을 알아보고, 경휘는 아무것도 모른 채 서은이 다른 남자를 만난다는 오해를 한다. 여전히 사랑을 믿지 않는 경휘는 버림받을지도 모른다는 공포에 서은에게 지독한 상처를 주고 이별을 선고한다. 경휘만 바라보던 서은은 졸지에 날벼락을 맞고 힘들어하다 자신이 재생 불량성 빈혈에 걸린 것을 알고 경휘를 놓아주기로 결심한다. 일도그룹의 후계자로 주체할 수 없을만큼 돈이 많은 경휘가 애인임에도 불구하고, 서은은 치료비가 없어 치료를 받지 못하고 자신의 죽음을 준비하며 어머니의 복수를 다짐한다. 자신의 미래를 과거의 원한과 바꿔버린 것이다. 아무것도 모르는 경휘는 혜현과 결혼한다고 서은에게 이야기하며 끝까지 그녀를 벼랑으로 몰아가고, 경휘의 어머니는 그런 그녀를 벼랑에서 밀어버렸다.

사랑을 믿지 않던 경휘가, 서은을 믿지 않던 경휘가 서은이 자신을 사랑하여 행복해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그녀의 병명을 알게 되고, 어이없게도 치료비가 없어 죽게 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자 그제서야 그녀 없이는 살아갈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종적을 감춰버린 그녀를 찾으면서 자신이 그녀에게 어떻게 상처를 줬는지, 그녀가 얼마나 아파했는지 그 흔적들을 대면하게 된다. 과거에도 사랑을 받지 못해 죽어버린 그녀였건만, 이 생에서도 그렇게 죽으면 안 되지 않을까. 해피엔딩을 위한 장치가 약간은 어설펐지만, 그래도 그녀가 웃을 수 있어서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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