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마늘빵 > 2005년의 박정희, 박정희의 2005년(한홍구)

2005년의 박정희, 박정희의 2005년

 

 

 

 

 

 

 

 

 

 

 

 

 

 

 

 

 

 

 

 

 

 

 

 

 

 

 

 

 

[한겨레] 죽은지 26년이나 됐음에도 제대로 파묻히지 않은 그를 이제 편안히 장사보내주자
▣ 한홍구/ 성공회대 교양학부 교수·한국현대사

지난 10여일 동안, 신문이나 방송을 보면 박정희란 이름으로 도배되었다. 한-일 협정의 내막을 담은 문서 공개, 문세광 사건 관련 외교문서 공개, 그리고 영화 <그때 그사람들>의 개봉, 그리고 광화문 현판 교체 논란 등은 죽은 지 25년이 넘은 박정희를 다시 사람들의 관심의 초점에 불러놓았다. 시간이 가면 법에 따라 해마다 많은 문서가 공개될 것이고, 과거 권위주의 시대의 국가 범죄를 조사하기 위한 과거 청산 관련 위원회가 국정원, 경찰, 군, 검찰 등 주요 국가기관에서 활동을 시작했거나 준비 중이다. 이들 위원회가 다루게 될 사안들은 하나하나 폭발성이 아주 강한 사건들이다. 그리고 우리 현대사가 잘 알려지지 않은 무궁무진한 인간 드라마를 담고 있다는 점에서 현대사에서 영감을 얻거나 현대사의 주요 사건이나 인물을 소재로 한 영화는 계속 만들어질 수밖에 없다. 수구언론은 열심히 ‘박정희 일병 구하기’에 나서보지만, 박정희의 딸이란 것 말고는 그 어떤 정치적 자산도 보여주지 못하고 있는 박근혜 한나라당 대표는 자신이 누구의 딸인지 잊어달라고 부탁하기에 이르렀다.
박정희를 무덤에서 불러냈던 김영삼
왜 박정희는 2005년에 다시 관심의 초점이 되고 있는가? 역설적으로 박정희를 무덤에서 불러낸 것은 김영삼이었다. 오랜 군사독재의 터널을 지나 최초의 문민 대통령이란 화려한 수식어를 달고 나타난 김영삼은 처음에는 인기 연예인을 능가하는 인기를 끌었다. 그러나 기대가 크면 절망은 더 큰 법, 김영삼 말기에 부패와 실정, 그리고 경제난이 겹치자 사람들은 슬슬 박정희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당시 집권 진영 내의 대선 후보 경쟁에 나선 주자들은 저마다 박정희를 본받고, 심지어는 ‘아버지’로까지 모셨다. 그리고 도둑처럼 우리를 덮친 외환위기, 박정희 신드롬은 가히 폭발적이었다. 그럼에도 1997년의 대통령 선거는 박정희 정권 시기 목숨을 위협받았던 김대중의 승리로 끝이 났다.



그러나 김대중은 박정희 시대를 청산하려 하지 않았다. 아니, 청산할 수 없었다.

그는 박정희와 함께 총구를 거꾸로 들이대고 한강다리를 건넌 군사반란의 2인자 김종필과 손을 잡고 지역감정의 포위를 돌파하면서, 정권 교체에 성공했던 것이다.

김대중 시절 박정희 유산에 대한 청산이 시도될 수 없었던 것은 이른바 DJP연합의 산물이기도 했다. 그렇지만 더 큰 이유는 박정희와 전두환 시절 빨갱이, 거짓말쟁이, 말 바꾸기의 선수 등 온갖 음해에 시달렸던 김대중이 박정희 문제와 정면으로 맞서기보다는 박정희로부터 심한 박해를 받았다는 처지를 역이용해 박정희와 화해하는 모습을 보임으로써 보수층 껴안기에 나선 데서 찾을 수 있다.

사실 1961년의 군사반란 이후 18년간 집권하며 민주주의를 유린한 박정희가, 죽은 지 또 18년 세월이 흐른 1997년에 부활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제대로 묻히지 않았기 때문이다. 박정희가 죽고 권력을 잡은 자는 박정희의 정치적 아들이나 마찬가지인 전두환이었다. 일찍이 1961년 군사반란이 일어나자 육사생도의 군사반란 지지 시위를 조직해 박정희에게 강한 인상을 준 뒤, 박정희가 군부 내에 영남 출신 직계 세력을 육성하기 위해 후원한 사조직 하나회의 핵심 인물이었다.

그는 중앙정보부 인사과장, 청와대 경호실 작전차장보, 보안사령관 등의 경력이 말해주듯 박정희가 양성한 대표적인 정치군인이었다.

전두환이 1979년의 12·12와 1980년 5·17의 2단계 군사반란으로 집권한 뒤 실시한 프로그램은 박정희가 5·16 군사반란 이후 써먹은 수법을 그대로 빼닮았다. 동네에 큰 깡패가 나타나면 양아치들이 평정되듯이, 19년을 사이에 두고 탱크로 무장하고 출현한 이들은 기껏해야 회칼 정도나 들고 다닌 자들 몇몇에다가 무고한 시민들을 ‘깡패’ ‘불량배’라고 잡아다가 흠씬 두들겨팼다. 그리고 기성 정치인들을 정치정화법으로 발을 묶어놓고, 자신들은 정보기관을 이용해 사전조직을 통해 공화당과 민정당을 조직했다. 구 정권의 실력자나 기업인들을 부정축재자로 몰아 재산을 강탈한 것도, 그리고 새로이 등장했다는 ‘신악’(新惡)이 눈 깜짝할 사이에 ‘구악’(舊惡)을 찜쪄먹은 것도 그대로 닮은꼴이었다.



전두환, 노태우 등 신군부 세력은 박정희가 친위부대로 육성한 군벌들로서 박정희의 정치적 아들들이었다. 족보도, 일의 솜씨도 그대로 박정희를 빼닮았음에도 전두환 등은 마치 자신들이 박정희와 무관한 것처럼 행세했다.

규제의 상징이던 야간 통행금지는 해제되었다. 길거리에서 경찰이 장발과 미니스커트를 단속하던 박정희 시대와는 달리 전두환은 교복 자율화를 실시했다.

검열자들이 보기에 조금이라도 거슬리면 금지곡을 남발하던 박정희 시대와 결별이라도 하듯 여의도 광장에서는 ‘국풍81’이라는 대대적인 축제가 벌어졌다.

박정희의 딸 박근혜가 정치적으로 자신이 누구의 딸인지를 잊어달라고 하는 것처럼, 그 시절 박정희의 정치적 아들 전두환은 누구보다도 열심히 박정희의 흔적을 지워버렸다. 박정희가 키운 하나회의 군벌들은 박정희, 김종필이 군사반란 이후 자신들의 군 선배들을 고려장 지낸 것처럼, 박정희를 서둘러 묻어버렸다.

그를 죽인 김재규까지.

박근혜가 있건 없건 치러야 할 통과의례
민주화 운동 세력도 다른 이유에서였지만 박정희를 잊어버렸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전두환이 얼마나 흉악했나? 수백명의 동포를 학살한 자가 대통령이라고 뻐기는 세상에서, 광주의 끔찍한 사진을 머릿속에서 지울 수 없는 그런 시절에 죽은 독재자를 상대할 마음의 여유를 가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살아 있는 독재자를 상대하기도 힘에 부쳤다. 이렇게 아무도 박정희를 제대로 파묻지 못했기 때문에 박정희는 1997년에 되살아났다. DJP연합에 힘입어 등장한 뒤 보수 껴안기에 주력했던 김대중 정권은 되살아난 박정희의 망령을 다시 묻는 대신, 거액의 국고를 지원해 박정희 기념관을 짓겠다고 했다. 그리고 2002년 말의 대통령 선거를 거쳐 2004년 봄의 탄핵 사태를 겪게 되었다. 탄핵은 당시 <한겨레21>을 통해서도 강조했지만, 과거 청산 없는 민주화가 초래한 민주주의의 위기였다(2004년 3월18일, 501호). 그러나 수구세력의 탄핵은 시민들의 심판을 받아 4·15 총선을 거치면서 국회의 의석 판도가 급변했다. 이제 과거 청산은 단순히 재야 민주세력의 외침이 행정과 입법 두 권력의 지지를 받는 국가적 과제가 된 것이다.

한편, 탄핵 직후 위기에 몰린 수구세력의 구원투수로 등장한 것은 독재자의 딸 박근혜였다. 자연히 박정희 문제는 관심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었다. 연좌제를 반대해온 입장에서 박근혜가 박정희의 딸이라는 이유만으로 그를 거부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정치인 박근혜가 역사적 인물 박정희에 대해 갖고 있는 태도나 공인으로서의 역사인식은 정말 문제가 아닐 수 없다. 박근혜가 헌법에 대한 도전을 용납할 수 없다고 열을 올리는 모습을 보면 웃어야 하나 울어야 하나를 고민하지 않을 수 없다. 1961년의 군사반란으로 헌법을 짓밟고도 성이 안 차서, 1972년 또다시 헌법을 짓밟으며 유신 쿠데타를 감행한 박정희에 대해서 그는 어떤 평가를 내릴까? 박근혜가 헌법을 지켜야 한다고 말하는 것을 보면서 유신헌법을 비판하기만 하면 군법회의에 보내 사형까지 시키겠다고 엄포를 놓던 박정희 시대의 무시무시한 긴급조치가 떠오른다.

한나라당이나 수구언론은 현재 박정희에게 쏠리는 관심이 마치 박근혜를 흠집 내기 위한 정치공작인 것처럼 비판하지만, 사실 박정희로 대표되는 과거를 극복하고 역사의 영역으로 편입시키는 작업은 대한민국이 박근혜가 있건 없건 반드시 지나가야 할 통과의례다. 지금 박정희 시절의 잘못된 과거에 대한 문제가 여기저기서 터져나오기 시작한 것은 우연한 일이 아니다. 그동안 수구세력은 있는 힘을 다해 박정희 시대를 미화해왔고, 냄새나는 것은 기를 쓰고 덮어왔다. 그러나 이제는 힘이 다했다. 철봉에 오래 매달려 있으면 꼭 누가 때리거나 옆구리를 간질여서 떨어지는 게 아니다. 박정희가 살아 있을 때는 긴급조치와 중앙정보부가 막아주었고, 전두환 시절에는 전두환의 악행이 막아주었다. 노태우와 김영삼 시절, 박정희는 잊혀지는 듯싶었다. 그러나 김영삼 말기부터 수구세력은 박정희를 불러냈고, 김대중 시절에는 아예 기념관을 짓겠다고 법석을 떨었다. 그러니 박정희에 의해 얻어맞고 고문당하고 감옥에 갇히고 간첩으로 몰린 사람들이 가만있을 수 있는가? 1997년부터 친다면 근 8년 가까운 시절을 잘 버텨왔지만, 이제 더 이상 버틸 기력이 없어졌을 것이다.

수구세력이 박정희 문제와 관련해 기진맥진하게 된 것은 변화하지 않고 진보하지 않는 수구세력이 자초한 당연한 결과이다. 새로운 비전을 만들어낼 능력도 관심도 없는 수구세력은 박정희의 유산에 기대지 않을 수 없었다. 유산을 상속받게 되면 부채도 같이 상속받아야 한다는 것을 몰랐던 것일까? 박정희가 써버린 카드 고지서가, 그가 남발한 약속어음이 만기가 되어 정신없이 날아오고 있는 것이다.

수구세력은 뒤늦게 전열을 정비해 박정희를 비판하는 것을 자학사관으로 몰아붙이지만, 하필 빌릴 것이 없어 일본의 극우파 용어를 베껴와야 하는가? 아무리 박정희가 일본식 민족주의자요, 그의 발전 모델이 일본 군국주의자들의 모델, 특히 만주국 모델을 닮았다 하더라도, 그를 미화하는 것까지 일본 극우파의 논리를 빌려와야 하는가?

경제발전 칭찬하려면 우간다와 비교해야
박정희 찬양론의 핵심은 경제 성장이다. 만약 우리가 경제만 잘되면 다른 것은 볼 것 없다는 경제 지상주의에 기대 박정희의 군사반란과 헌정질서 파괴, 인권유린과 정보정치를 용인한다면, 우리는 일본 제국주의를 비판해서는 안 된다. 어디 일제뿐이랴. 히틀러도, 스탈린도, 무솔리니도, 심지어는 김일성도 일정 기간 동안에는 놀라운 경제 성장을 거두지 않았던가? 박정희는 그야말로 경제 성장에 모든 것을 걸었다. 그것은 경제가 중요했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민주주의와 헌정질서를 짓밟고 군사반란으로 집권한 박정희는 처음부터 민주주의의 발전을 통해 자신의 정치적 기반을 확대하는 일을 꿈꿀 수 없었다. 민주주의를 서구의 사상이자, 우리에게 맞지 않는 것으로 경멸하는 일본 군국주의적 사고방식을 갖고 있던 박정희는 처음부터 민주주의를 경멸했다. 그래도 박정희가 경제는 성장시키지 않았느냐 하는 주장은 처음부터 잘못된 것이다. 이런 주장은 박정희 같은 독재를 하고도 경제도 성장시키지 못한 우간다의 이디 아민이나 중앙아프리카의 보카사, 버마의 네윈 같은 독재자들과 비교할 때 쓸 수 있는 이야기일 뿐이다.



박정희는 3선개헌을 하면서, 유신을 하면서 안정이냐 혼란이냐를 선택하라고 강요했지만, 정말 민주주의와 경제 발전은 같이 추구할 수 없는 목표였을까? 근대화 프로젝트를 수행하던 많은 나라들, 특히 공산주의 국가들은 단기적인 강제 동원을 통해 이른 시일 내에 급속한 경제 성장을 거두었다. 그러나 조금 길게 보면 그 성과를 이어간 나라는 많지 않다. 한국 경제가 1997년 말 외환위기를 당한 것도 박정희식 경제 모델의 파탄이 아니었을까? 한-일 협정 관련 문서의 공개는 이미 최근에 알려진 내용이지만, 참으로 속이 쓰리다 못해 아리다. 이런 속을 달래느라 사람들은 ‘모르는 게 약이다’란 말을 만들어둔 게 아닐까? 유상, 무상에 차관까지 합한 8억달러. 박정희는 왜 겨우 그 금액을 받아내려고 청구권 문제를 그렇게 서둘러 포기했을까? 경제가 어려웠다는 말로 변명하지는 말자. 경제가 어려웠다면 이승만 시대도 어려웠다. 김일성이 다스리는 북인들 경제가 어렵지 않았겠는가? 이승만도 받지 않았다. 김일성도 받지 않았다. 냉전 문제가 걸려 있던 김일성은 그렇다 치더라도 이승만은 왜 일본과 그런 조건으로 한-일 협상을 마무리지으려 하지 않았을까? 독립운동가로서 이승만은 나름대로 상당한 상징성을 지닌 인물이며, 비록 분단을 확정지은 단독선거이긴 했지만, 선거를 통해 선출된 절차적 정통성을 보유한 인물이었다.

이승만은 박정희식으로 경제 발전에서 빠른 성과를 거두어 국민들을 달래는 데 목을 매야 할 상황은 아니었던 것이다.

반면, 정통성 있는 정부를 총칼로 뒤엎고 정권을 잡은 박정희는 일단 급전이 필요했다. 조건은 상관없었다. 정권의 이해관계 때문에 급전이 필요했고, 그 때문에 민족의 역사도, 피해 당사자인 개인의 권리도 고려사항이 아니었다. 독도 문제가 한-일 협상의 걸림돌이 되자 김종필이 “그까짓 바위섬 폭파시켜버리자”고 망언을 한 것도 정통성 없는 정권의 주역들이나 할 수 있는 일이었다.

그의 사생활이 보호받을 수 없는 이유
적어도 올 한해는 박정희 문제로 계속 시끄러울 전망이지만, 사실 지금의 20대나 30대는 박정희를 잘 모른다. 지금의 20대에게 박정희 시대는 시간상 지금 40대에게 이승만 시절만큼이나 먼 이야기다. 그러다 보니 박정희의 인간성이니, 청렴성이니 하는 것이 터무니없이 미화되곤 한다. 박정희의 사생활을 아주 살짝 다룬 <그때 그사람들>을 두고 논란이 이는 것도 그 때문이다. 박정희의 사생활, 영화 속의 대통령이 직접 말하는 일본 속담이지만, 사내의 배꼽 아래의 일을 갖고 왈가왈부해서는 안 되는 것일까? 박정희 자신이 누구를 크게 봐줄 때, 예컨대 박정희 자신을 곤경에 빠뜨렸던 정인숙 사건과 관련해 당사자인 모씨를 봐줄 때라든가, 야당의 2세 정치인인 모씨에 관한 첩보가 올라왔을 때 실제로 박정희는 이런 말로 보고를 덮은 일이 있었던 모양이다. 그러나 이게 전부가 아니었다. 여야 가릴 것 없이 박정희의 중앙정보부는 의원들의 약점, 특히 여자 문제를 캐어 협박했다. 민주화 운동에서 큰 역할을 한 이병린 변호사는 중앙정보부의 회유와 협박을 단호히 거부했다가 터무니없는 사건으로 간통죄로 구속되는 곤욕을 치르기도 했다.



반란의 주범 박정희가 최고권력자였던 시대는 불행하게도 그의 일거수일투족뿐 아니라 표정과 기분까지도 고도의 정치적 의미를 지닌 시대였다. 그의 사생활이 평범한 개인의 사생활처럼 보호받을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의 사생활은 이미 권력게임의 한 부분이 되어 있었다. 그가 측근들과 나눈 사적인 대화는 권력의 풍향계였다. 민주적 절차에 따라 선출되어 민주적으로 위임받은 권력을 행사하는 대통령이 있는 나라라면 그의 공적 활동과 사생활은 엄격히 구분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가 유신이라는 친위 쿠데타를 통해 다시 한번 헌법을 짓밟고 절대권력자가 되었을 때 공과 사의 경계는 무너지고 말았다. 권력의 사유화, 인격화가 이루어지고, 국가기관인 중앙정보부의 의전과장이 여자를 조달해야 하는 불행한 시대에 독재자의 사생활은 더 이상 개인의 사생활이 아니었다.

정보장교 출신의 박정희가 김종필, 이후락, 박종규 등 다른 정보장교 출신들과 나라를 주무른 18년은 큰 정치가 실종되고, 정보와 약점 캐기, 조작에 기초한 정치공학만 만발한 시대였다. 박정희교 신자들은 박정희를 가리켜 용인술의 천재라고 찬양하지만, 따지고 보면 그의 용인술이란 정보와 공작에 다름 아니었다.

박정희는 이 용인술에 기대어 권력을 적당히 위임했다가 거둬들였다 하면서 정권을 관리해갔다. 박정희의 용인술의 핵심은 자신의 측근 몇몇에게 권한을 위임해주고, 그들을 서로 경쟁시키며 감시하게 하는 것이었다. 박정희식 모델이 외환위기로 성수대교처럼 무너져버렸듯이, 그의 용인술도 박정희 자신을 죽음으로 몰아넣으며 파국을 맞았다. 용인술의 천재라는 박정희가 자신의 오른팔인 중앙정보부장, 왼팔인 경호실장, 그리고 술친구인 비서실장과 술을 먹다가 중앙정보부장에게 사살된 것이다.

그날 그 비극의 현장에 자리를 함께한 사람들은 박정희 이하 죄다 정보장교 출신들이었다. 중앙정보부장 김재규는 보안사령관도 지낸 인물이고, 김계원도 중앙정보부장을 지냈다. 경호실장 차지철은 공수부대 출신이지만, 경호실장이 된 뒤 김재규와 충성 경쟁을 벌이며, 전두환의 처삼촌인 헌병감 출신 이규광을 책임자로 하는 독자적인 정보조직을 거느리고 있었다. 10·26 사건도 권력의 최고 상층부 내에서 중앙정보부 대 중앙정보부를 견제하기 위해 직제에도 없는 비선 정보조직을 만든 경호실간의 갈등이 폭발한 것으로도 볼 수 있다. 박정희는 권위주의와 정보정치 속에서 판단력이 무뎌졌고, 그의 용인술 줄타기는 파국을 불러왔을 뿐이다.

다른 악명높은 독재보다 부드러웠다?
박정희의 유신독재는 그 권력의 악랄함으로 친다면 이디 아민의 우간다나 보카사의 중앙아프리카 같은 나라, 또는 피노체트의 칠레 등과 견주어 전혀 손색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박정희 시기에 일어난 의문사 사건의 수는 이런 나라에서 피살되거나 실종된 사람들의 수와 견주어볼 때 현격하게 적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박정희 시기에도 보면 의문사 사건도 있지만, <민족일보> 조용수 사장의 처형이나 인혁당 사건에서와 같이 반대파의 생명을 빼앗을 때도 일정한 법적 절차- 그렇기에 ‘사법살인’이라는 비판을 받게 되지만- 를 밟으려 한 사례도 적지 않게 찾을 수 있다. 이런 사실이 박정희 독재가 같은 시기 다른 나라의 악명 높은 독재들에 비해 훨씬 부드러웠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일까? 그렇지는 않다. 그 차이는 권력의 본질과 관련되는 것이라기보다는 권력이 출발한 역사적 조건의 차이라 할 것이다. 박정희 정권은 기본적으로 분단과 민간인 학살로 인하여 한국 사회에 멸균실 수준의 반공이 이루어진 토대 위에서 출발했다. 바꿔 말하면 독재권력이 잡아 죽여야 할 사람들을 이미 다 죽여놓은, 아니 그보다 훨씬 더 많은 사람들을 이미 제거해버린 상황에서 권력을 잡은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박정희의 군사독재는 비록 4월혁명을 거친 뒤이기는 하나, 일반대중들이 상당한 수준으로 ‘길들여져 있는’ 상황에서 출발했다고 할 것이다.

박정희는 집권 기간에 시민들의 거센 저항 때문에 여러 차례 군을 동원해야 했고, 집권 말기에 가서는 긴급조치와 같은 극도의 강압적 조치가 상시화돼 있었다.

‘긴급’조치는 긴급한 상황에서 발동된 것이 아니라 일상적인 상황을 통제하기 위해 발동돼 있었던 것이다. 박정희가 집권한 220개월 동안 긴급조치, 계엄령, 위수령 등이 발동됐던 기간은 무려 105개월이나 되었다. 박정희는 빈번히 군을 동원하고 유신헌법에 대한 비판 자체를 군법회의에서 처벌할 수 있도록 하는 등 상상을 초월한 비상대권을 휘둘렀지만, 시위대를 향해 발포하거나 집단 학살을 감행하지는 않았다. 어떤 의미에서는 독재권력 입장에서 한편에서는 총칼을 실제로 사용할 필요성이 적었던 것이고, 다른 한편에서는 또다시 대규모로 거리에서 피를 흘리는 상황을 피하려는 나름의 자제력을 발휘한 것이다.

그런데 유신의 마지막 나날에 가서는 나름대로 지켜지던 자제 규율이 양쪽 모두에서 무너지고 있었다. 1970년대 후반 학번들에게 민간인 학살은 완벽하게 잊혀진 사건이 되었고, 1960년의 4월혁명 당시의 유혈 사태조차도 머나먼 과거의 일이었다. 민간인 학살의 기억을 갖지 못한 당시의 학생들은 이 정권이 총을 쏠 수 있는 정권이라는 사실을 실감하지 못하고 있었다. 반면 독재권력은 독재권력대로 ‘겁을 상실’한 학생들을 다시 길들여야 했다. 1975년 인혁당 관련자 8명에 대한 사법 살인도 별로 약효가 없었던 것이다. 박정희가 살해당하기 직전, 유신정권 내부에서는 부산과 마산의 학생시위가 폭력시위로 발전하자 군대를 동원해서 ‘본때’를 보여야 한다는 강경론이 대두되었다. 10·26 사건이 일어나던 날 저녁, 당시 실질적인 2인자 역할을 하던 박정희의 경호실장 차지철은 캄보디아에서는 수백만명을 학살하고도 문제없었다며, “부마사태 같은 일이 또 일어날 경우, 탱크로 한 200만~300만명만 깔아죽이면 잠잠해진다”고 호언했다. 김재규는 이런 분위기를 들어가며 자신의 박정희 살해가 대규모 유혈 사태를 방지하기 위한 의거였다고 정당화했다. 그러나 김재규의 박정희 살해는 유신정권의 종식을 가져왔지만, 대규모 유혈 사태를 방지할 수는 없었고 다만 6개월가량 연기시켰을 뿐이다. 그리고 장소가 영남의 부산 또는 마산에서 호남의 광주로 바뀌었을 뿐이다.

그는 국헌 문란의 수괴가 아닌가?
박정희 시대가 그리운 사람들이 많이 있다. 그들은 정말 우리가 피와 땀으로 쟁취한 민주주의와 자유를 가벼이 여기는 자들이다. 그들에게 한 가지 부탁하고 싶은 것은 박정희 시대에 민주주의가 그립다고 말하다가 중앙정보부의 지하실에 푸줏간의 고깃덩어리마냥 매달려본 사람들 앞에서는 제발 박정희 시대가 그립다는 말은 삼가주었으면 한다. 박정희 시대가 그리운 사람들은 오늘의 기준으로 그 시절을 평가하지 말자고 한다. 좋다. 그런데 박정희가 한 짓, 다른 나쁜 짓 제쳐놓고 총 거꾸로 들고 민주정부를 뒤엎고 헌법을 두번씩이나 짓밟은 것은 그 시절 기준으로 해도 국가보안법은 봐주고, 형법을 적용한다 해도 “국토를 참절하거나 국헌을 문란할 목적으로 폭동한 자”로서 “수괴는 사형, 무기징역 또는 무기금고에 처한다”고 되어 있다. 당시 형법은 “국헌을 문란할 목적이라 함은” “1. 헌법 또는 법률에 정한 절차에 의하지 아니하고 헌법 또는 법률의 기능을 소멸시키는 것. 2. 헌법에 의하여 설치된 국가기관을 강압에 의하여 전복 또는 그 권능 행사를 불가능하게 하는 것”이라고 친절히 설명하고 있다. 박정희, 그 시절 기준으로 해도 1961년과 1972년 두 차례에 걸쳐 범행을 저지른 국헌 문란의 수괴 아닌가? 형법 어디를 찾아봐도 경제 발전에 기여하면 그 죄를 사해준다는 말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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