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털짱 > ‘사기(史記)’를 펼쳐들기 전에 사마천을 읽다

 사마천. 그의 전기를 쓰고 싶다는 생각이 ‘사기’의 연구자인 저자에게 들지 않았다면 그게 더 이상했을 것 같다. ‘사기’의 위대함만큼이나 궁형이라는 삶의 굴절이 사마천이라는 역사적 인물에 사람들을 몰두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중국 산터우 대학 중문과 교수로 사마천과 ‘사기’에 대한 연구성과를 장기간 접해왔던 저자의 경력이 어우러져 허구적 구성 속에서도 학술적 근거를 제시하는 초장을 접하고 보면 과연 전문가가 쓴 전기소설은 다르다는 느낌을 준다. 그러나 저자의 그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소설이라는 장르에 맞추어서 이야기하자면, 섬세한 감수성을 토대로 한 심금을 울리는 언어구사력을 보여주지도 못했으며, 하나의 긴 호흡 속에 독자를 묶어두고 결국에는 후련한 카타르시스를 경험하게 해주는 치밀한 극적 구성을 갖추고 있지도 않았다. 한 마디로 문학적 텍스트 그 자체로는 그렇게 큰 매력이 없었다는 게 솔직한 감상이다. 어린 시절이나 자료수집 과정, 서남 정벌 과정에서의 활약 등을 재현한 장(章)들의 이미지는 진부하고 장면 묘사는 평범했다.

 그러나 실존인물에 대한 평전은 제아무리 소설의 형식을 빌어도 완전한 소설과는 다르다. 허구적 상상력의 부산물이 아니라 과거에 진짜로 존재했었다는 사실(史實) 때문에, 인물의 생애는 역사적 사건들과 그 인물의 됨됨이를 씨줄과 날줄처럼 엮어 역사적 컨텍스트를 만들어내고 때로는 현재적 상황에 따라 그 의미를 새롭게 부여받는다. 그 자신이 한 명의 역사적 실체이자 사실(事實)을 사실(史實)로 남긴 위대한 역사가란 점에서, 사마천이 ‘사기’와 더불어 영원한 고전이 될 수 있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그런 점에서 오히려 저자의 담담한 서술은 사마천의 역사적 실존성에 집중할 수 있게 해주는 미덕을 발휘한다. 그리고 책의 후반기, ‘사기’를 집필하며 황제(黃帝)를 거쳐 춘추전국을 지나 내려가는 사마천의 목소리는 불을 뿜는다.


 역사적 실존인물에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어느 시대 사람이었는가 하는 점이다. 사마천은 추정되는 생몰 연대가 거의 한무제의 치세기간과 일치한다. 따라서 한문제의 시대에 태어나 한무제의 시대에 죽은 사마천에게 한무제는 단순히 한 사람의 황제로서가 아니라 시대적 배경 그 자체였다고 할 수 있다. 저자가 아버지 사마담보다 한무제에게 더 무게감을 둔 것도 이런 이유에서일 것이다. ‘진시한무(秦始漢武)’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진시황제와 닮은 점이 많았던 한무제는 영토확장과 체제정비를 이룬 위대한 황제였지만 아내와 친자식들을 행행히 죽인 잔인한 아버지였고 동방삭과 같이 불로장생을 꿈꾼 불합리한 인간이었다. 이런 점에서 합리적 인간 사마천이 비합리적 절대권력 한무제를 감내해야 했던 상황 자체가 사마천이 평생에 걸쳐 풀어야했던 역사적 질문이 된 셈이다.

 궁형 이후의 치욕스러운 삶을 이어나가며 경험했을 극렬한 내면적 갈등은 육체적 고통을 넘어서는 괴로움이었을 것이다. 불합리를 불합리로 거부할 수 없다는 것. 죽음 아니면 그저 감내하는 것 이외에는 방법이 없다는 현실은 그 상황에 대한 단순한 분노로 그치지 않는다. 자신을 둘러싼 상황에 무기력하다는 사실 자체가 그 상황에 처한 자신을 순순히 인정하게 된다는 의미가 아니기 때문이다. 왜 이런 상황이 벌어지고 있는가에 대한 끝없이 반복되는 질문과, 그 상황에 직면한 자신의 존재가치는 무엇인가에 대한 자학적인 물음을 절망적일 만큼 되풀이하며 그 답을 찾아가는 과정을 거치게 된다. 바로 이 책의 주인공, 사마천이 위대한 역사가로 다시 태어나는 내면의 탄생기 역시 마찬가지이다.

 ‘사기’ 열전의 첫 장은 은나라 제후국인 고죽국의 왕좌를 버리고 산에 숨어살다 주왕조의 천하를 부정하며 굶어죽은 백이, 숙제로 시작한다. 이들의 죽음 앞에 “과연 하늘에 도가 있는냐”며 절규하는 사마천은 현실에서 불합리와 무도(無道)를 이기지 못한 역사적 정의(正義)의 내면적 힘을 과연 어디서 얻어야 하는가 하는 피를 토하는 물음을 역사에 던지고 있다.


어떤 사람은 이렇게 말한다. “하늘의 도는 공평무사하여 늘 착한 사람의 편을 든다.” 하지만 백이, 숙제는 착한 사람이라고 할 수 없는가? 그들은 이처럼 은덕을 쌓고 고결하게 행동하였음에도 굶어죽고 말았으니! 또한 제자 72명 가운데 공자는 오직 안연만을 학문을 좋아하는 사람이라 칭찬하였다. 그러나 안연 역시 뒤주가 늘 비었으며, 지게미나 쌀겨도 배불리 먹지 못하다가 끝내 요절하고 말았다. 하늘이 착한 사람에게 보답한다면, 이것은 어떻게 된 일인가? ...(하략)...


 사실 정의가 불의에게 좌절당하는 현실에서 정의에게 유일한 위로가 되는 것은 그에 대한 사후 평가뿐이다. 그러나 이것도 공자와 같이 위대한 성인의 손을 빌어야만 가능한 일이다.


백이, 숙제가 현인이기는 하지만 공자의 칭송을 얻음으로써 그 이름이 더욱 드러났다. 안연은 독실한 선비이지만 공자의 덕에 힘입어 그 덕행이 더욱 드러났다...(중략)...세상 사람들의 마을 속에 살면서 행실을 닦고 이름을 떨치고자 하더라도, 공자와 같은 성현에 의지하지 않는다면 어찌 그 이름을 후세에 남길 수 있겠는가?


 여기서 사마천은 궁형을 당하면서까지 죽지 못한 자신의 존재가치를 발견할 수 있었다. 정의가 불의를 이기지 못하는 현실 자체는 어쩌지 못해도, 정의가 정의였다는 사실을 기록하고 평가하여 후세에 명예롭게 기억되게 만드는 것! 그것은 오로지 역사의 기록자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다. 공자가 전국시대 천하의 어지러움을 바로잡고자 하였으나 뜻을 펼치지 못하자 물러나 ‘춘추’를 지어 군자와 천하의 난신적자를 포폄하여 세상의 바른 이치를 드러낸 것처럼, 사마천 자신 역시 그것을 가능하게 할 수 있다는 내부적 자신감을 찾아낸 것은 아닌지. 저자가 책의 제목을 ‘역사가의 혼 사마천’이 아니라 ‘역사의 혼 사마천’으로 한 것도 사마천이 ‘사기’를 저술하는 행위 그 자체가 불합리한 현실을 헤쳐나가는 역사(歷史)의 정신이라는 인식의 궤를 사마천과 같이 하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사람은 자신이 아는 만큼 세상을 보고 깨달은 만큼 세상을 느낀다. ‘사기’에는 다양한 신분만큼이나 인생역정도 천차만별인 역사 속 인물들이 등장하고 있지만, 실제로 사기에서 목소리를 내고 있는 것은 사마천 그 자신이다. 책 속의 인물들은 불합리한 현실에 “천하에 도가 있느냐”는 비분에 찬 질문과 직면한 사마천의 분신들에 불과하다. 백이와 숙제는 굶어죽고 굴원은 멱라강에 몸을 던졌지만 한신은 개백정의 가랑이 사이로 기어갔고 계포는 죄인으로 팔려 가는 것을 용납하였다. 이들 각자는 자신들이 대면한 어찌할 수 없는 물리적 상황에 대하여 다르게 대답한 것이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이 답으로 받아들지는 것은 이들 자신이, 결국은 사마천 자신이 제나름의 당위성을 찾아낸 덕분이다. 궁형이라는 치욕에 대부의 이름을 지키며 죽음으로 맞설 수 있었던 것처럼, 스스로의 존재 자체에 대한 환멸에도 불구하고 삶으로써 맞서 싸워나갈 수 있는 것과 같은 이치다. 사마천이 굴원의 비극에 깊이 공감하면서도 같은 길을 가지 않은 것은 자신의 삶에 당위성을 굴원과는 다른 지점에서 찾아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가 굴원을 비운의 시인으로 기억하는 것과는 달리 사마천을 위대한 역사가로 기억하는 것 역시 그 차이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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