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을 다 읽고 난 지금, 잘 만들어진 사극 한 편, 내지는 17세기 우리네 삶을 세세하고, 친밀하게 보여주는 다큐를 한 편 보고 난 기분이랄까? 아주 생생한 글맛과 술술 풀어가는 옛 이야기 속으로 나도 모르게 스르르 빨려 들어가고 만다. 그러나 그렇게 스르르~~흘러들지만 결코 여유부리며, 마냥 옛이야기 읽듯 흐느적거리면서 읽을 책은 아니였다. 다름아닌 한 여자의 자살을 둘러싼 시대적 이야기이니 말이다.
이 책은 향랑 사건으로 본 17세기 서민층의 생활사와 가족사를 면밀하게 보여줌과 동시에 당시 급변하던 당시의 결혼제도와 그것으로 수많은 여자들이 불이익을 감수하거나, 향랑처럼 스스로 죽음을 선택하도록 만든 시대적 이야기가 이 책을 주를 이룬다. 그리고 중간 중간 향랑의 이야기와 연결되는 다른 옛이야기들이 버무려져서 책 읽기의 맛과 방대한 자료들만으로도 아주 좋은 책임에 분명하다 하겠다.
향랑이 살았던 선산은 오늘날로 보면 구미시 형곡동에 위치하고 있고, 현재는 거대한 주택단지를 이루고 있는 지역에서 살던 옛 여인이였다. 그곳은 일반 백성만이 아니라 짐승들까지도 절의를 지킬 줄 안다고 자부하는, 다른 지역에 비해 유교적인 성향이 매우 강한 지역이였다. 그런 지역이다보니....그런 지역답기 위하여 알게 모르게 그 마을 사람들의 뇌리엔 절의에 대한 강한 억압이 자리하고 있을 터이다. 사실, 향랑이 또한 망나니같은 서방과 이혼하고 다시 재가를 할 수도 있는 신분이였음에도 그러지 않고 결국 죽음을 선택한 것을 보면 향랑 스스로도 그런 억압을 무의식적으로 가지고 있었는듯 하다. 물론 향랑이가 몸 붙힐 곳이 하나 없을만큼 가족들이나 시집에서 그녀를 내 몰은 이유도 있었지만 말이다.
요즘은 많이 나아졌다곤 하지만 아직도 우리 사회에선 이혼한 사람, 특히 이혼한 여자들에 대한 시각이 곱질 못하다. 이혼한 여자가 다시 결혼을 하고, 게다가 계모가 된다면...그것은 주위 사람들 입방아의 소재거리로 오르기 일쑤인 시대가 부끄럽지만 아직 우리 시대다. 물론 일부에선 나아졌다고 말하지만 아직 그런 시각으로 고통받는 여자들이 어디 한 둘이냔 말이다. 그런 사람들의 잘못된 인식의 시작을 이 책은 지적하고 있다.
그러나 이 책을 통해서 난 아주 충격적인 사실을 알게 되었다. 원래 우리나라 혼인 풍속은 남자가 여자의 집으로 가서 혼례를 치루고 그대로 처가에 눌러 사는 '남귀여가'와 '처가살이'였다고 한다. 자식들이 다 큰후에 시집으로 돌아가 살았기에 아들만을 선호하지도 않았고, 친손주, 외손주를 차별하지도 않았다고 한다. 이런 결혼 풍속은 고대삼국, 고려, 조선을 망라하고 계속 이어져 왔는데, 조선조에 와서 중국의 '주자가례'가 도입되면서 이른바 친영론(親迎論)이 제기되고, 태종은 남귀여가를 비판하고 친영을 실시하도록 주장하게 되고, 점점 가부장제도가 정착하면서 여자들의 재가금지가 되고, 이전시대엔 활발하던 여성들의 예술이나 문학활동이 집안으로 축소화되면서 가문보조자의 역할만 수행하게 되었다고 한다. 이 얼마나 안타깝고, 아까운 일인가!!
그런 시대의 이혼하거나, 이혼 당한 여자들은 갈 곳이 없었다. 친정엘 가면 출가외인이 되고, 시집에선 내몰리고....재가를 하면 평생 사람들로부터 '더러운 년' 소리 듣기에 딱이였다. 자존심도 강하고, 자기 주장이 강하던 향랑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다가 결국 스스로 목숨을 끊고 만다. 이것은 그녀 스스로 자살한 사건이라고 하기 이전에 사회의 결혼제도와 그 제도들로 만들어진 사람들의 인식들이 만들어낸 집단적 타살이기도 하다. 사회적 타살 사건!!!
그러나 선산의 양반과 벼슬아치들은 향랑의 자살을 두고, 자기 고장의 이미지답게 재가하지 않고 목숨을 끊은 하나의 지아비만을 섬기려한 열녀로 포장하려 든다. 지금도 고소설이나 고문서에는 향랑은 열녀로 전해진다. 그러나 이 책의 저자는 당시의 시대적, 지역적 요소들을 고려하여 향랑을 열녀라는 어색한 포장 대신 억울하게 죽음을 선택한 인간으로 다시 제대로 돌려 놓았다고 본다. 그것이 이 책의 가장 큰 가치라 하겠다.
향랑이 죽기전 노래한 [산유화]는 원래 백제 망국의 한을 노래한 것이지만 향랑의 마음도 고스란히 담긴 노래이기도 하다. [산유화]를 끝으로 리뷰를 마친다.
하늘은 어이하여 높고도 멀며
땅은 어이하여 넓고도 아득한가.
천지가 비록 크다하나
이 한 몸 의탁할 곳이 없구나.
처라리 이 강물에 빠져
물고기 배에 장사 지내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