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브리즈 > '비스듬히' 세상을 받치는 시

지난해 11월 언젠가 정현종의 새 시집 <견딜 수 없네>가 나온 것을 알게 됐다. 그리고 일간지 문화면에 여러 차례 소개된 시집의 내용이나 시인의 근황도 들여다보았다. 그러다 보니 새 시집이 읽고 싶어졌다. 하지만, 시집을 읽지는 않았다. 그러고 보니 그때 이미 꽤 오랜 동안 시집을 읽지 않고 있었다. 그것은 새 시집을 읽을 만큼 겨를이 없어서이기도 했지만, 사실은 새로운 시인을 알고자 하는 욕구도 이전에 알던 시인의 새 시집을 통해서 기대하는 것도 거의 없어져버린 탓이었다.

그러다가 얼마 전에 정현종의 새 시집 <견딜 수 없네>를 구입했다. 그리고 천천히 읽어 나가기 시작했다. 진작에 읽을걸 하는 아쉬움이 들 만큼 이번 시집은 마음에 여러 가지 울림을 전해줬다. 그것은 아직도 정현종 시인이 당대의 중요한 시인이 보여줄 수 있는 시적 발언과 세계를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며, 또 다른 시적 성취를 열어주고 있기 때문이다. 이 짧은 글은 그 울림에 대한 기록인 셈이다.

<견딜 수 없네>를 지배하는 정서는 거칠게 말해, 연민과 분노라고 말할 수 있을 듯하다. 몇 년 전까지 시인은 <세상의 나무들> <갈증이며 샘물인> 등의 시집을 통해 혼탁한 세계 속에서도 살아남은 작은 생명의 숨결들을 건져내며 죽음의 세계를 껴안았었다. 하지만, 이번 시집을 통해 시인은 여전히 이전 시집에서 보여준 세계를 지속하면서도, 나날이 비인간화되고 단절화되는 세상 속에서 벼랑 끝까지 몰리고 있는 삶의 몰락을 연민과 분노라는 상반된 감정으로 통찰한다.

'권력이나 돈이 걸린 싸움이 너무 상스럽고 맹목적이면 / 그 탐욕의 난경은 우리 모두의 고통이 된다. / 국가든 정부든 정당이든 무슨 기관이든 개인이든 / 그 탐욕과 맹목은 / 사회 전체를 거지 같은 난경에 처하게 한다. / 난경에도 종류와 질(質)이 있다. / 오늘날 이 나라의 난경은 거지 같지 않은가.' '난경'이라는 시의 부분이다. 또 다른 시를 보자. '이 세상은 / 나쁜 사람들이 지배하게 되어 있다. / (그야 불문가지) / '좋은' 사람들은 '지배'하고 싶어하지 않고 / '지배'할 줄 모르며 그리하여 / '지배'하지 않으니까. / 따라서 '지배자'나 '지배행위'가 있는 한 이 세상의 불행은 그치지 않을 것이다.' '나쁜 운명'이라는 시의 전문이다.

인용한 두 편의 시에서 두드러지는 것은 분노이다. 시인의 낮게 가라앉은 분노는 시적 여과를 거치고 있음에도 상당히 '날것'의 냄새가 난다. 우리네 삶을 벼랑 끝까지 몰아가고 있는 세상사를 바라보는 시인의 참담한 심경이 이렇듯 '날것'의 냄새를 풍기면서 노출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시인은 분노하는 동시에 연민의 시선도 보여준다.

'말하지 않은 슬픔이 얼마나 많으냐 / 말하지 않은 분노는 얼마나 많으냐 / 들리지 않는 한숨은 또 얼마나 많으냐 / 그런 걸 자세히 헤아릴 수 있다면 / 지껄이는 모든 말들 / 지껄이는 입들은 / 한결 견딜 만하리' '말하지 않은 슬픔이...'라는 시의 전문인데, 시인의 분노가 연민과 만나 '난경'의 세상을 '견디는 힘'을 가리키고 있다.

시인이 가리키는 견디는 힘은 연민에서 오고, 그 연민은 자연과 생명이 보여주는 작은 이치와 아름다움에서 다시 자양분을 얻는다. 시인 특유의 생명 의식이 있기에 분노를 다스리는 연민을 갖고 자연과 생명이 보여주는 작은 이치와 아름다움을 기릴 수 있는 것이다. '생명은 그래요. / 어디 기대지 않으면 살아갈 수 있나요? / 공기에 기대고 서 있는 나무들 좀 보세요. // 우리는 기대는 데가 많은데 / 기대는 게 맑기도 하고 흐리기도 하니 / 우리 또한 맑기도 하고 흐리기도 하지요. // 비스듬히 다른 비스듬히를 받치고 있는 이여.'('비스듬히' 전문)

이미 몇 해 전에 환갑을 넘긴 시인은 세월이 흐를수록 유연해지고 유연해져서는 이제는 '비스듬히' 세상을 받치는 시를 쓰고 있다. 누가 있어 비스듬히 세상을 받칠 수 있을까. 정현종 시인이 있어 잠시, 비스듬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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