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역사를 바라보는 시각, 새로우면서도 낯설지 않은

     '트로이'. 아름다운 스파르타의 왕비 헬레네를 납치한 파리스와 현명한 예지자 헥토르의 나라. 그리고 그러한 그들과 10여년의 전쟁을 하게 되는 아킬레스와 오디세우스의 이야기를 담은 호메로스의 장엄한 대서사시 『일리아드』, 『오디세이아』를 원작으로 하는 영화 '트로이'를 보았다. 화려한 전쟁 장면과 영화 전편에 걸쳐 흐르는 장송곡, 그리고 피할 수 없는 운명을 맞이하는 두 영웅의 비장한 각오는 충분히 감동적이었다. 영화를 보는 내내 계속 울어야 했다. 트로이를 너무나 사랑하기 때문에 죽을 수밖에 없는 자신의 운명을 거역하지 못하는 현명한 왕자 헥토르와 교만하지만 너무나 인간적인, 그래서 결국 자신의 죽음을 피할 수 없었던 전쟁 영웅 아킬레스의 모습이 나를 울게 했다. 그리고 결국 패망하고 마는 거대한 나라 트로이의 모습이 그 후 쇠망하는 그리스의 모습, 그리고 먼 훗날 같은 운명을 맞이하게 되는 로마까지 대제국을 건설했던 나라들과 겹쳐져 보였다. 그리고 잊을 수 없는 대사 하나. "역사는 왕을 기억한다. 병사는 기억하지 않아." 야심만만한 패왕 아가멤논의 말이다. 여기서 오디세우스는 자신과 헥토르 그리고 아킬레스를 기억해주기를 원한다. 트로이 전쟁이라는 비극적이고도 거대한 전쟁의 영웅으로써. 이 영화를 보며 많은 것을 생각했다. 이 트로이 전쟁이라는 역사적 사실 속에서 우리가 기억해야 하는 것은 무엇일까. 왕인가. 영웅인가. 아니면 이름 없이 죽어간 수많은 병사들인가.     
 

    19세기 랑케는 역사학에 과학성을 부여하였다. 랑케는 엄정한 사료의 비판 및 원(原)사료에 대한 엄밀한 연구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그 대상으로 국가를 선정했다. 자연스럽게 랑케의 사학은 정치와 외교가 중심이 되었고, 1인 중심의 역사를 쓰는 것이 당연해졌다. 그러나 20세기 중반 정치사는 사회사의 도전을 받게 되었다. 정치사에는 몇 몇 지배자들과 영웅이 등장한다. 카이사르가 주사위를 던져서 로마를 변화시켰고, 나폴레옹이 신성로마제국을 해체시키고 유럽 대륙을 정복하였다는 식이다. 즉, 카이사르나 나폴레옹이 이끈 군사들이 아닌 카이사르와 나폴레옹 개인만이 부각된다. 사회사는 그런 영웅 중심적이고 지배자 중심적인 정치사를 비판한다.  

     사회사는 '밑으로부터의 역사'를 쓰기를 원했다. 이러한 사회사는 마르크스주의적 역사학과 아날학파에 의해 주도되었다. 그들은 역사에서 소외되었던 계층이 갖는 사회적 성격을 규명하고, 평범한 대중들의 일상 생활을 연구 대상으로 삼았다. 그러나 마르크스주의 역사학은 계급 구분에 너무 치중한 나머지 인간을 계급 구분을 위한 도구로 격하시킨 면이 있고, 아날학파는 '장기지속'적인 것들에 치중한 나머지 사람의 일상을 통계와 수치로 나열하는 우를 범하고 말았다. 그렇기 때문에 점차 역사가들은 사회사의 방법이나 인식론에 의문을 품으면서 단점을 수용, 보완할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하게 되었다. 많은 역사가들은 그 답을 인류학적 역사학이나 소설, 그림, 포르노그라피 등 문화적 산물의 분석을 통해 찾으려고 했다. 그것이 바로 신문화사이다.

     신문화사에서는 무엇이든 사료가 될 가능성을 지니고 있다. 신문화사가들은 두껍게 읽기, 다르게 읽기, 작은 것을 통해 읽기, 깨트리기 등의 방법을 이용해 민담이나 포르노그라피 혹은 무명의 한 개인의 역사를 복원시켜 그를 통해 그 시대를 알고자 한다.
 

    신문화사가 요구하는 역사를 인식하는 방법 중 첫 번째가 "두껍게 읽기"이다. 저자는 이 "두껍게 읽기"를 설명하기 위해 클리포드 기어츠의 저서 『문화의 해석』에 실린 윙크에 대해 이야기한다. 쉽게 설명하자면, 이 윙크란 것이 그저 눈의 깜박거림일 뿐이냐, 아니면 어떤 의미를 함축하고 있는 것이냐 인데, 그저 눈의 깜박거림일 뿐이라고 설명한다면 그것은 "얇은 묘사"이다. 그러나 이 윙크를 설명할 때, 윙크가 의도적으로 특정인에게 특정의 의미를 전달하기 위하여 사용하는 사회적으로 인정된 코드라고 한다면 "두꺼운 묘사"가 된다. 그저 현상의 모습을 묘사하는 것과 그 현상에 내재된 의미를 파악하는 것은 다르며, 이것을 자연과학과 인문과학에 적용시켜야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현상만을 관찰하는 자연과학과는 다른 인문과학을 이해할 때 이 "두꺼운 묘사"가 힘을 발휘하는 것이다. 즉 역사학의 탐구대상이 지닌 '두꺼운 의미를 층위를 뚫고 들어가기 위해 상징에 대한 해석'을 강조하는 방법론이다. 저자는 이 "두껍게 읽기"를 『마르탱게르의 귀향』과 『고양이 대학살』에 적용시켜, 이 텍스트들이 가진 의미의 층위를 캐내어 본다.

     『마르탱게르의 귀향』은 영화로 만들어졌는데, 이 영화에서 제라르 드파르디외가 가짜 마르탱을 연기할 때, 그는 최소한 7단계의 해석을 거쳐야 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의미의 층위는 두꺼울 수밖에 없으며, 이러한 인류학적 기록이 행하고 있는 바는 두꺼운 묘사가 된다. 
 

    『고양이 대학살』은 1730년대 파리 생세브랭 가의 한 인쇄소에서 일어난 고양이 대학살에 관한 이야기이다. 주인(부르주아)에게 사랑 받던 고양이들을 처형시켰던 이 소동은 1730년대의 노동자들에게 큰 웃음을 선사했다. 현재의 우리가 이 시대의 노동자들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마르탱게르의 귀향』의 제라르 드파르디외처럼 여러 단계의 해석을 거쳐야만 한다. 먼저 17세기 후반의 인쇄공들의 생활과 노동관계에 대한 고찰이 필요하며, 다음 단계로 대중들의 의례와 상징을 통해 그 당시 고양이가 가졌던 통속적인 의미를 파악하여야 하는데, 이러한 배경지식을 갖춘 다음 『고양이 대학살』을 읽으면, 상징적인 모독의 의미를 찾아낼 수 있게 된다. 즉, 우리는 1730년대 파리 인쇄공들의 웃음을 두껍게 이해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신문화사를 통해 역사를 인식할 수 있는 두 번째 방법은 "다르게 읽기"이다. "다르게 읽기"는 그 동안 역사학이 전통적으로 유지해왔던 역사를 보는 관점과는 다른 맥락에서 역사를 파악하려는 시도이다. 그리하여 『고양이 대학살』에서 보였던 인간이 바라 본 고양이가 아닌 고양이가 인간을 바라보는 관점으로, 프랑스 대혁명에서 나타난 남성중심주의적 시각이 아닌 여성의 입장에서, 백인과 뉴잉글랜드의 청교도들이 아닌 흑인 노예의 관점에서 역사를 바라보고자 한다. 고양이가 본 인간은 헛된 미신으로 무고한 자신의 동족들을 살해하는 혐오스러운 대상이다. 여성의 입장에서 프랑스 대혁명은 자유, 평등, 박애라는 정신의 산물이 아니라 남성중심의 사회가 재 반복되는 과정으로써, 여성이 정치에 참여할 수 있는 권리를 '마리 앙투아네트'를 희생양 삼아 박탈해 버린, 그리하여 가부장적 틀을 재 복원시킨 사건에 지나지 않는다. 흑인 노예의 시각에서 본 노예무역은 결코 무역이라 이름 붙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백인 청교도들의 도덕적 모순의 한 모습이며, 노동 착취와 수탈의 역사이며, 그들이 그토록 감추려고 한 추악한 한 단면이다. 이렇듯 "다르게 읽기"는 우리를 타자의 입장에 놓도록 하여 더 객관적인 관점에서 우리 스스로를 바라볼 수 있도록 한다. 이상이 "두껍게 읽기"와 "다르게 읽기"의 방법으로 영·미에서 발달한 '인류학을 접목시킨 문화사'와 관련된 내용이다.
  

     다음으로 우리가 알아야 할 세 번째 방법은 "작은 것을 통해 읽기"이다. "작은 것을 통해 읽기"는 이때까지 지배자, 다수, 주류라 일컬어지며 역사를 지배하던 '큰 것'으로부터 벗어나 '작은 것'으로 관점이 옮겨지는 것을 의미한다. 저자는 "작은 것을 통해 읽기"를 설명하며 미시사를 끌어온다. 마르크스주의나 아날학파의 거시적, 구조적 역사 인식에 반발하여 등장한 미시사는 로버트 단턴이 『고양이 대학살』에서 부딪혀야 했던 평범한 사람들의 기록이 안고 있던 사료의 대표성 문제를 논리적으로 해결한다. 
 

    이탈리아의 역사가 카를로 긴즈부르그는 『치즈와 구더기』, 『베난단디』등을 통해 미시적이고 질적인 역사를 내세운다. 긴즈부르그는 그의 저작들을 통해서 '의심의 눈초리'로 역사를 파악한다. 어떤 사료도 그 시대의 사고 방식을 벗어날 수 없으며, 에도아르도 그랜디가 한 말처럼, "정상적 예외"가 존재할 수 있으며, 그렇기 때문에 엘리트들이 남겨놓은 사료 속 민중의 모습이 오히려 왜곡되어 틀린 것일 수도 있다. 또한 양적으로 많은 것이 '옳다'와 직결되는 것은 아니다. 그리하여 긴즈부르그는 '실마리 찾기'라는 추론적 패러다임을 제시한다. 의사나 탐정, 미술 감정가들처럼 역사학자들도 겉으로는 의미가 없는 것처럼 보이는 조그만 실마리를 통하여 그 뒤에 놓인 역사적 실재를 식별해야 한다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우리가 보아야 할 네 번째 방법은 "깨뜨리기"이다. 신문화사는 이 모든 읽기 - 두껍게 읽기, 다르게 읽기, 작은 것을 통해 읽기 -를 통합하여 "깨뜨리기"로 나아간다. 신문화사가는 그 동안 우리가 역사를 인식하고 파악하던 이해방식과 서술방식을 해체시켜 아무런 비판 의식 없이 당연하다고 여겨 온 역사서술의 중심점을 깨뜨리려고 한다. 미셸 푸코, 헤이든 화이트, 도미니크 라카프라와 같은 사람들이 역사학에서의 "깨뜨리기"를 실천하였다. 미셸 푸코는 『말과 사물』, 『지식의 고고학』, 『담론의 질서』, 『감시와 처벌』, 『성의 역사』등의 저서를 통해 역사학이 유지해오던 객관적인 과거 사실의 확인에 대한 믿음을 깨뜨렸다. 그러면서 푸코는 역사의 연속성이 아닌 단절기를 중요하게 부각시키면서 담론을 역사 연구의 대안적 방법으로 제시한다. 헤이든 화이트나 도미니크 라카프라 역시 푸코와는 달랐지만 그 귀결점은 비슷했다.

     '포르노그라피'는 사료로써의 가치가 있을까. 신문화사에서는 포르노그라피를 중요한 사료로써 제시한다. 전통적인 역사학을 깨뜨리는 구체적인 연구로서 포르노그라피를 들 수 있는 이유는 그것이 개인적인 성의 문제가 사회적으로 문제를 지니게 되는 접합점에 위치하고 있다는 사실 때문이다. 이러한 포르노그라피는 "깨뜨리기"의 시각을 갖는다면 무시되고 버려졌던 자료를 통해서도 과거의 사실에 대해 많은 중요한 사실을 알 수 있음을 보여주는 단적인 예이다. 

    이 책의 저자는 문화로 보는 역사를 알기 위해 그 배경이 되는 정치사에서 사회사까지 설명하고, 신문화사의 등장을 역사학 내부의 필연적 요구와 외부 세계의 변화에서 설명한다. 신문화사는 결코 뚝딱 생겨난 것이 아니라 여러 가지 상황과 연구를 통해 거듭난 것이고, 학자들은 그것에서 이념적, 인식론적인 역사학의 대안을 발견했다. 그리고 문화사는 절대적인 틀을 거부하므로 한국인도 서양사를 생산하는 입장에 설 수 있게 한다. 또한 문화사는 우리의 역사를 새롭게 조명할 기회를 제공한다. 저자는 이상의 세 가지 이유로 우리가 문화사를 알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면서 신문화사라는 현상이 나타난 배경을 설명하며 문화를 통해 본 역사의 방법론과 그 의미를 짚어보고자 하였다.
 

    역사는 결코 강자의 것이 아니다. 그 동안 역사는 강자만을 기록하고, 지배자의 기록만을 인용하였고, 지배자보다 훨씬 많은 일반 대중이 역사의 전면에 나서는 것을 거부해왔다. 하지만 20세기 중반 사회사의 등장으로 역사의 베일 속에 묶여 있던 일반 대중들이 모습을 드러냈고, 문화사에 들어서는 과학적이고 엄숙한 느낌의 역사는 한결 가볍고 친근한 역사로 바뀌고 있다. 이제 역사는 모두의 역사로서 개개인에게 자연스럽고 친근한 학문 분야로 남아있게 될 가능성을 지니게 된 것이다.

     그러나 시대가 변함에 따라 강산이 변하는 것처럼 역사의 방법론도 바뀌었다. 역사의 방법론이 바뀌는 이유는 무엇일까? 강산이 변하기 때문에? 어쩌면 그럴지도 모르겠다. 아니면 키스 젠킨스가 말하듯, '역사담론'이란 일정한 사회 구성 내의 권력 관계에 기반한 역사가에 의해 만들어진 언어적 구성물에 불과한 것이므로 인간이 변화하기 때문일까. 그것도 아니라면 헤이든 화이트가 지적한 것처럼 역사학이 19세기에 기원하는 문학적·과학적 패러다임 속에 안주하려는 경향이 있기 때문일까. 그러나 그 구조상의 관계가 어떻든 그 이유가 어떻든 현대에 있어서 역사가 대중에게 손을 내민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트로이 전쟁에서 우리가 기억해야 하는 것은 이름 없이 죽어 간 병사들일까? 그렇지는 않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트로이 전쟁에서 기억해야 하는 점은 원인 제공자였던 아름다운 헬레네와 유약한 왕자 파리스. 트로이의 버팀목이었던 후계자 헥토르, 죽을 수밖에 없었던 불사신 아킬레스, 이들을 기억하는 오디세우스, 트로이의 목마, 이러한 전쟁 속에서 죽어간 많은 사람들과 파괴된 문명, 전쟁의 참혹함, 남겨진 사람들의 아픔, 그리고 전쟁이란 얼마나 잔혹하고 덧없는 것인가 하는 교훈이다. 정말로 우리가 알아야 하는 것들은 어쩌면 영웅, '그리고'라는 연결어를 붙여 대등한 입장에서 대중들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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꼬마요정 2004-06-07 21: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서양사 개설 서평 리포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