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션 1
정보라 지음 / 읻다 / 202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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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약속은 믿을 수 있는가?


여우는 영물이다. 삼족오가 그렇듯 여우 중에 구미호 역시 장수하며 상서로운 존재이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아주 불길하고 위험한 존재이기도 하다. <삼국유사>에 보면 여우와 관련한 이야기들이 몇 편 있는데, 가장 긍정적인 모습은 원광 법사를 도왔던 여우 이야기이고, 부정적인 이야기로는 비형랑이나 백제 멸망 때 좌평의 책상 위에 올라간 여우 이야기 등이 있다. 어쩌면 여우 특히 구미호는 여우의 특기인 둔갑술과 가공할 능력 때문에 두렵고 믿지 못할 존재가 된 것일지도 모른다. 물론 <봉신연의>에 나오는 달기 때문에 부정적인 이미지가 각인된 것이 더 큰 이유겠지만 말이다. 


우리나라에는 역사 속 문헌에 여우각시담 같은 이야기류는 거의 없다. <천년 묵은 여우와 팔백이>가 있기는 한데 그 이야기는 <지네각시>와 유사하여 지네가 여우로 변형된 것이 아닌가 싶고, <금강산의 괴호>는 여우각시가 아니라 천상계가 아니고서는 누구도 제압할 수 없는 강력한 여우 산신의 모습을 그리고 있다. 그러니 우리가 알고 있는 인간 남자를 사랑하여 금기를 주고 그 남자와 가족을 이루고 살면서 인간이 되길 원한다는 구미호 이야기는 20세기 드라마 이야기일 확률이 매우 높다. 그리고 이 이야기 역시 그 이야기에 바탕을 두지만 보다 더 범접하기 힘든 여신의 모습이 드러난다.


그는 버스를 탔고, 말을 걸고 싶은 여자를 만났고, 여전히 말을 걸지 못하다가 그녀에게 간택 당한다. 왜 그는 살 수 있었을까? 그녀는 왜 그를 살렸을까? 그건 사랑이었다라고 말한다면 그럴 수 있을 것이다. 그는 그녀 없이는 살 수 없다고 생각했으니까. 그녀를 위해 100% 자신을 다 던질 수 있다고 말했으니까. 수줍게 청혼하고, 저도 모르게 상견례를 하게 되는 상황이 되었고, 할머니를 만났다. 


이 이야기의 진짜는 할머니와 지은의 이야기일지도 모른다. '그' 혹은 '나'를 사이에 두고 벌이는 목숨을 건 싸움이다. 조상신과 구미호의 대결이라고나 할까. 앞서 이야기 한 <금강산의 괴호>에서 여우 산신은 지상에 있는 신들이 이길 수 있는 신이 아니었다. 그러니 조상신, 저승신인들 구미호를 이길 수 있을까. 구미호의 천적은 삼족구로 다리가 셋 달린 개다. 할머니는 삼족구를 불러들여 구미호를 제거하고자 한다. 할머니는 무엇을 지키고 싶었던 걸까. 내 눈에 할머니가 가부장제로 보이는 건 착각인걸까.


하지만 그래도 결국은 사랑일 것이다. 오랜 시간 인간 세상을 거니는 구미호가 굳이 굳이 누군가와 인연을 맺고 인간이 되고 싶은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좋아하는 사람과 함께 하는 삶을 살고 싶은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삶을 함께 하고 싶은 이가 당신이라서, 같이 있어서 행복해서, 당신을 사랑해서...


'그'이자 '나'인 최기준은 그녀와의 모든 약속을 저버렸다. 못 믿을 것이 인간의 약속이라, 자신의 전부를 다 준다는 말도, 아무에게도 말 하지 않겠다는 다짐도 모두 잊어버렸다. 인간에게 삼도천을 지나고 기억을 지워주는 차 따위를 마셔도 기억해 낼 수 있는 세기의 사랑 같은 건 없는 건지도 모른다. 인간은 나약하고 수명이 짧고, 미련이 넘쳐나니까. 사랑의 도피를 생각하다가도 유교 사상 중 효 앞에서 무너질 수도 있다. 그래, 자신을 구하기도 벅찬데 다른 사람까지 구할 수는 없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결국 아무것도 하지 않으려던 기준이 무언가를 할 수 있게 된 것은 지은 때문이었다. 말 그대로 사람 구실을 하게 된 기준에게 지은은 삶을 구원해 준 구원자이기도 하지 않을까. 누구보다 자신의 마음을 따르면 될텐데 애초에 그는 그럴 수 없는 사람이었고, 일련의 사건들을 겪으며 그는 이제 어른이 되었다. 그러니 이번에는 제대로 사랑하는 사람을 잡을 수 있을까. 존재의 다름조차 사랑스러운 그녀를, 자신이 잊어버린 그녀를... 그런데, 구미호는 왜 기준을 선택한 걸까. 그래서 사랑인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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