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악한 목소리 휴머니스트 세계문학 4
버넌 리 지음, 김선형 옮김 / 휴머니스트 / 202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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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알지만 통제하지 못하는 무언가 혹은 알지 못하는 존재에 대한 공포를 드러낸 소설이다. 유령 연인에서 오크 씨는 아내인 앨리스가 과거의 사건에 집착한다고 생각한다. 250년 전 니컬러스 오크는 버질 폼프릿의 영애인 앨리스와 결혼했다. 그리고 그 앨리스 폼프릿, 앨리스 오크는 지금 앨리스 오크와 놀랍도록 닮았다. 그래서인지 앨리스 오크는 과거 앨리스와 과거 앨리스의 연인이었던 크리스토퍼 러브록에게 집착했다. 물론 남편인 윌리엄 오크는 러브록에 집착하는 아내 앨리스에게 집착했고 말이다.


윌리엄 오크와 앨리스 오크는 사촌 간이다. 그런 식으로 근친혼이 계속되었다면, 당연히 닮지 않았을까? 무엇이 윌리엄 오크를 공포로 몰아갔을까? 아내인 앨리스가 부정을 저지른다는 의심? 아니면 오크허스트 저택에 스며들어 있는 유령의 소리? 그런 윌리엄을 비웃듯 앨리스는 자주 러브록을 언급했고, 자신의 조상인 앨리스가 했던 것처럼 방을 꾸미고 혼자만의 시간을 가지고 '유령 연인'을 만나는 것처럼 보이게 했다. 조상 앨리스가 남편인 니컬러스와 함께 러브록을 살해했다는 그 끔찍한 사건은 누구에게 죄책감을 불러일으켰으며, 누가 배신감을 느꼈을까? 조상 앨리스는 어째서 연인을 살해했을까? 과연 그런 사건이 있기는 했을까? 어쩌면 니컬러스는 앨리스를 핑계 삼아 러브록을 유인한 뒤 살해하고 앨리스에게 공범의 혐의를 씌운 것일지도 모른다. 그 사실을 알게 된 앨리스는 겉으로는 순응하는 척 하면서 니컬러스를 미치게 만들었던지, 혹은 그 사실이 대대로 오크 씨들에게만 전해졌기에 러브록 이름만 들어도 경기하고, 조상 앨리스의 피를 혐오하게 된 것일지도. 그리고 조상 앨리스가 드디어 복수를 감행한 것인지도 모른다. 만약 그렇다면 후손 앨리스는 희생양이 되어 버리니 과거는 반복되는 것인가... 죄책감으로부터 나오는 공포와 혐오는 알지 못하는 존재에 대한 공포와는 다르겠지만, 이 이야기를 읽는 내내 전해져 내려오는 그 일이 사실일까 생각했다. 사실이라면, 조상 앨리스는 자신의 욕망을 정확히 알았던 여자일지도 모른다. 여기서 정말 무서운 것은 사건의 사실 여부도 아니고, 현재를 살던 윌리엄 오크와 과거를 살던 후손 앨리스 오크 사이를 떠도는 유령도 아니다. 인간성을 잃어버리고 편집증과 권태에 휩싸인 그들의 모습과 그들을 바라보는 연민을 잃어버린, 관음증을 가진 화가의 모습이다. 


끈질긴 사랑은 말 그대로 아주 끈질기고 잔혹한 사랑이며 죽음도 갈라놓지 못하는 사랑이다. 현실의 여자를 사랑하지 못하고 과거의 한 이야기에 매몰되어 현실과 비현실의 경계를 잃어버린 스피리디온의 이야기라고나 할까. 어딘가 살짝 부서진 듯한 이 남자는 여자를 무서워하는 것이 틀림없다. 그러니 그렇게 사랑하는 여자인 메데아 다 카르피는 지독한 악녀이고, 죽어서도 남자들을 홀리는 존재가 되어 버린다. 메데아를 한 번이라도 본 남자는 그녀를 사랑하지 않을 수 없고, 지독한 고통이 오더라도 결코 그녀를 배신하지 않았다. 스피리디온은 비겁한 추기경이 세운 청동 기마상을 훼손하고 연적의 칼에 찔리지만, 현실에서 도피한 채 거듭된 망상 속에서 행복했을까? 


사악한 목소리 역시 여성적 카스트라토를 경멸하던 남자 작곡가가 결국은 자신의 꿈을 이룰 수 없게 되어버리는 이야기이다. 성악가인 차피리노가 작심하고 부른 세 곡을 들으면 죽는다는데, 죽기는 싫었나보다. 북유럽의 신화를 오페라로 만들고 싶었던 작곡가는 결국 자신이 혐오하는 목소리에 사로잡혀 벗어나지 못한다. 자신이 만들고 싶었던 남성적인 곡은 사라지고, 그의 귓가에는 차피리노가 남긴 소리만이 남았다. 좋은 걸 좋다고 말 못 하고 자신만이 옳다고 우기던 자의 말로인가.


위 세 가지 이야기들은 모두 화자가 남자들이다. 그리고 그들은 모두 갈망하면서도 무서워한다. 여성이라는 존재를. 


부록인 마법의 숲은 있지만 없는 곳이다. 잘 알지 못해서, 통제하기 어려워서 공포를 가지고 폭력을 휘두르던 이들이 없는 곳, 그런 이들이 생기지 않는 곳. 마법의 숲이다. 

메데아 같은 여자를 가진다는 건 필멸의 인간이 감당할 수 없는 과도한 행복이니, 그만 우쭐해져 - P132

그녀가 베푼 은혜마저 잊기 마련이다. 그녀를 소유할 권리가 있다고 자만하는 남자라면 명줄이 길어서는 안 된다. 일종의 신성모독이기 때문이다.오로지 죽음만이, 그런 행복에 죽음으로 값을 치르겠다는 각오만이 그녀의 애인이 될 자격을 부여할 터이기 때문이다. 기꺼이 사랑하고 고통받고 죽을 각오를 해야 한다. 이것이 그녀를 상징하는 글귀의 의미다. "아무르 뒤르, 뒤르 아무르." 메데아 다 카르피의 사랑은 빛이 바랠 수 없으나 애인은 죽음을 맞을 수 있다. 영속하나 잔인한 사랑이다. - P1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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