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만한 철학 - 생각거리를 던져주는 12가지 이야기
미하엘 쾰마이어.콘라드 파울 리스만 지음, 이지윤 옮김 / 재승출판 / 2018년 8월
평점 :
절판


예전에 미하엘 쾰마이어의 그리스 로마 신화를 읽었다. 이 책은 토마스 불핀치의 그리스 로마 신화가 아니어서 새로운 기분으로 읽을 수 있었고 재미있게 읽었다. 그 때 아트리덴 가문의 저주도 알게 되었다. 그 덕에 괴테의 <이피게네이아>를 읽을 때 더 잘 이해할 수 있었다. 그래서 이 책을 만났을 때 반가웠다. 또 얼마나 새롭고 흥미로운 관점을 알려줄까 기대했다. 


이 책은 동화, 신화, 성경 등에 나오는 이야기들 중 모두 12가지의 이야기로 인간이란 무엇인지, 어떤 존재인지 생각하게 한다. 호기심, 노동, 폭력, 복수,욕망, 비밀, 자아, 아름다움, 장인정신, 권력, 경계, 운명 각각의 이야기들은 모두 짧지만 강렬하다. 


첫 번째 이야기는 천지를 창조한 신이 여차저차한 이유로 아담과 이브를 낙원에서 쫓아내는 것으로 시작한다. 금기는 두려움과 호기심이란 모순된 감정을 불러 일으켰고, 거기엔 복종하거나 반항하거나 두 길 뿐이다. 뱀의 유혹은 어쩌면 인간 내면에 깊이 잠들어 있던 어떤 욕구와 맞아떨어졌던 것일지도 모른다. 최초의 죄는 무엇일까? 금기를 어긴 것이 최초의 죄일까? 그렇다면 인간은 금기를 어겼기 때문에 죄를 지을 수 있게 된 것인가, 아니면 죄란 씨앗이 애초에 인간에게 있었기에 금기를 어길 수 밖에 없었던 것일까. 금기는 알지 못하는 세상을 향한 문이고, 인간은 그 문을 열 능력이 있으나 열어서는 안 되며, 결과는 그 문을 열어야만 알 수 있다. 모든 공포 영화가 호기심에서 시작하듯, 인류의 타락 역시 호기심에서 비롯됐다. 저 문을 열고 싶다, 궁금하니까. 이것은 인간의 자유의지일까? 키에르케고르는 선악과 사건의 주된 의미가 먹으면 죽는다고 말한 신은 처음부터 인간이 선악과를 따 먹게 되리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고 말한다. 두려움과 동시에 끝을 알 수 없는 어떤 가능성을 선택함으로써 인간은 처음으로 자유를 깨닫게 되었다고. 성 아우구스티누스를 혼란에 빠트린 질문이 '인간성이란 본디 죄를 짓고자 하는 의지를 포함하는 것이 아닌가' 라고 한다. 그렇다면 인간이 저지른 죄악은 신의 뜻이 아닌 인간의 뜻이고, 금기를 지키고자 하는 것은 외부의 규범에 기준을 맞춘 것이라고. 신은 자유와 자아, 책임과 같이 죄를 짓지 않았다면 몰랐을 개념으로부터 인간을 지키기 위해 금기를 만들었고, 그래서 도덕은 깨달음을 완강히 부정했다.(p.23) 그래서 니체는 모든 도덕의 첫째 계명으로 '깨닫지 마라'를 꼽았다고 한다. 


인간이 금기를 깨트리고 얻은 것은 인류와 세상이다. 이제 낙원은 사라졌다. 그 낙원이란 것은 도대체 무엇일까. 헤겔은 원죄 사건의 결과로 인간이 비로소 영혼을 획득했으며 어울리지 않던 에덴 동산을 떠나게 되었다고 했다. 또한 원죄 사건을 통해 얻게 된 지각 덕분에 오직 그 지각 덕분에 인간은 사실상 신과 같아지게 되었다고 말한다.(p.24) 낙원을 버리고 자유를 얻은 인간은 그 호기심의 대가를 치를만큼 자유를 소중하게 여기고 있을까? 


두 번째 이야기 노동에서는 다이달로스의 이야기가 나온다. 파시파에의 의뢰를 받아 나무로 아름다운 암소를 만들고, 미다스 왕의 의뢰로 미로를 만들고, 아리아드네에게 그 미로를 빠져나갈 수 있는 방법을 알려주고, 아들 이카로스와 미로에 갇히자 밀랍으로 날개를 만들어 그 곳을 탈출하는 그 다이달로스 말이다. 다이달로스는 선악이나 도덕에 구애 받지 않고 오로지 의뢰인의 요구에만 맞춰 무언가를 만든다. (자신이 이만큼 잘 만들 수 있다는 허영과 이기심 때문이다.) 하지만 저자는 그런 기술이 모든 것을 해결해 줄 수는 없다며 테오도어 아도르노와 막스 호르크하이머가 <계몽의 변증법>에서 제시하고 비판한 도구적 이성의 예시라고 말한다.(p.39) 또한 이카로스의 추락에서 볼 수 있듯이 기술에 대한 오만과 맹신은 재앙을 불러 올 수 있다. 임무가 맡겨지면 기술적 해법을 찾지만, 경고를 무시한 채 명령만을 따르는 것은 엄청나게 위험할 수 있다. 시스템은 있을 때 지키는 것이 최선일 것이다.


세 번째 이야기는 폭력이다. 슬픈 소녀는 그 슬픈 눈을 들어 사람들을 쳐다보는 것만으로 원하는 것을 얻었다. 슬픈 눈망울로도 얻을 수 없다면 눈물을 흘리며 울어 버린다. 결국 그녀는 원하는 모든 것을 얻었다. 주위가 황폐해지는 것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말이다. 슬픈 소녀가 흘린 눈물은 연민, 관심, 공감, 호기심 등을 불러일으켰고, 사람들은 나쁜 사람이 되기 싫어 소녀의 부탁을 들어준다. 하지만 슬픈 소녀가 원하는 것은 타인의 고통이었다. 소녀는 자신이 악하다는 것도 알고 악함을 다스리려고 하지도 않았다. 악의로 가득 찬 슬픔은 폭력적이었다. 연민이라는 선의가 악의에게 잡히면 결과는 무참하다. 단지 선한 일을 하려 했을 뿐인데 집을 불태우고, 사람들이 죽어나간다. 연민은 어떤 감정보다도 기만적일 수 있으며 가해자와 피해자가 분명하게 구분되지 않을 수 있다. 과연 우리는 그 연민 밑에 깔려 있는 악의를 찾아낼 수 있을까?


네 번째 이야기는 복수다. 그리스 로마 신화에서 가장 잔인하고 폭력적인 이야기로 손꼽히지 않을까. 신을 기만한 탄탈로스로부터 내려오는 그 저주는 수많은 피를 뿌리며 오레스테스까지 이어진다. 그런데 이 주제로 이야기하는 것이 사법제도라는 점이 의외였다. 아버지를 살해한 어머니에게 복수한 오레스테스에게 열린 법정에서 배심원 중 모든 여성은 유죄에, 모든 남성은 무죄에 투표했다. 표수는 동수, 이제 최종 판결은 아테나가 내리게 된다. 어머니 없이 아버지의 허벅지에서 태어난 아테나는 모든 아버지는 모든 어머니를 우선한다며 오레스테스에게 무죄를 선고한다. 비록 법률이 부당하다 해도 그저 복수로 점철된 난폭한 부당함보다는 낫다고 하는데 과연 그럴까. 


다섯 번째 이야기는 욕망이다. 어린 시절을 아주 유복하게 보낸 에기디우스 성인은 꿈에서 베드로 성인에게 이끌려 단테의 지옥에 다녀온다. 지옥을 보고 온 에기디우스는 모든 육체의 안온함을 버리고 고통 속에서 살기를 원한다. 고통을 향한 욕망만이 에기디우스를 채우고 있는 것 같다. 에기디우스는 무엇 때문에 고통 속에 머무르기를 원하는 것일까. 고통을 극복해가는 모습에 욕망을 느끼는 것일까? 살아있다는 감각을 느끼기 위함일까? 고통은 살아있기 때문에 느낄 수 있으니까. 에기디우스 성인이 성인의 반열에 오른 이유는 오직 신만이 알지도 모른다.


여섯 번째 이야기는 비밀이다. 이 이야기는 마치 우리네 전설과도 비슷하다. 구미호가 변신해서 막내딸 노릇을 하며 집안의 가축들을 잡아먹고, 가족들마저 도륙하는 이야기 말이다. 여기는 늑대 입을 가진 딸인데, 존재마저 감춰진 막내딸이다. 가정에 무관심한 아버지가 죽고 재산을 물려받은 아들들 중 일곱 째만이 살았는데, 그는 사랑하는 여동생을 피해 도망가서 뭔가 라푼젤 같은 여자를 만난다. 그 여자와 결혼하기 전에 가족을 만나기 위해 집으로 돌아왔다가 혼자 살아남아 다시 결혼 할 여자에게로 도망치지만 묘한 상태로 남게 된다. 한 쪽은 여동생에게 잡히고 다른 한 쪽은 결혼 할 여자에게 잡힌 상태. 그 어렵고 가혹한 모습을 보던 달이 말한다. "견뎌라" 비밀은 어쩔 수 없이 견뎌야만 하는 것이다.


일곱 번째 이야기는 자아에 관한 것이다. 크리스티앙의 속내라는 이 동화는 신기하다. 크리스티앙은 폭력을 휘두르는 아버지를, 사랑하는 여자를 죽이려는 남자를, 가족이 탄 비행기를 추락시키려는 바람을, 자신에게 찾아오는 두려움을 쫓아내기 위해 느끼고, 맛보고, 냄새를 맡고, 현재를 보는 능력을 허리띠와 식칼과 바람과 과거, 미래에게 줘 버린다. 그런 뒤 과연 그에게 남는 것은 무엇일까. 오롯이 자신 안에서 자아를 찾았을까 아니면 자신만의 환상에서 사는 것일까. 그런 감각들이 없다면 '나'라는 존재를 어떻게 느낄 수 있을까?


여덟 번째 이야기는 아름다움이다. 아테나 여신은 아울로스라는 관악기를 만들어 아름다운 음악을 연주했는데 막상 연주하는 자신의 모습은 추하기 그지 없어져서 아울로스에 저주를 내린 뒤 버린다. 그런데 하필 아울로스를 주운 게 사티로스인 마르시아스였다. 원래 추하게 생겼기에 부르는 중에 추해지는 건 상관없고, 오히려 불기만 해도 아름다운 음악이 연주되니 신이 난 마르시아스는 자신이 아폴론보다 뛰어나다고 말하기에 이른다. 결국 아폴론과 시합해서 진 마르시아스는 비참한 결과를 맞이한다. 예술은 아름답지만 모든 면이 아름답지는 않다. 아름다움이 발현되기까지 들이는 노력이나, 감당해야 하는 일들은 마치 물 밑에서 백조가 발버둥치는 것과 비슷하다. 신화가 계속 나오는데 나올 때마다 신들이 너무 잔혹하다. 그래서 아름다운걸까.


아홉 번째 이야기는 장인정신이다. 지그프리트와 미메는 훌륭한 장인들이다. 세상을 보고 싶었던 지그프리트가 대장장이 집단에 들어오게 되고 미메는 그를 가르치며 불가능한 것만 같은 과제를 내 준다. 시행착오 끝에 미메를 뛰어넘게 된 지그프리트는 대장장이로 인정받게 되지만, 다른 대장장이들의 질투로 용의 계곡에 들어서게 되고, 자신이 만든 그물로 용을 물리친다. 하지만 용을 물리치는 과정에서 나무들을 다 베어버렸기에 홀로 살아남은 보리수 나무는 그에게 복수한다. 마치 아킬레스처럼 용의 기름으로 온 몸이 갑옷을 입은 것처럼 되었으나 보리수 나뭇잎 하나가 등에 붙어 그의 약점이 된 것이다. 화살로 심장을 꿰뚫을 수 있는 그 곳. 그건 도대체 어떤 의미일까? 현대에서 장인이 더 이상 대접받지 못한다고 하는데 사실 이 이야기와 잘 연결되지 않았다. 아마 계속 생각해봐야 하지 않을까. 그저 완벽한 것은 없다는 것과 그 결과를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이 이 이야기의 교훈은 아닐까 생각해 본다.


열 번째 이야기는 권력이다. 욥의 이야기가 나온다. 하필 신과 루시퍼의 내기에 걸려서 온갖 고초를 당한 그는 끝까지 신을 버리지 않았기에 그는 더 큰 보상을 받는다. 하지만 그 내기로 인해 고초를 받은 건 멀쩡하던 소 떼, 양 떼, 식구들이 아닌가... 욥은 살아있지만 그를 괴롭히기 위해 나머지는 다 죽었다. 나에게 욥의 이야기는 너무 폭력적이라 좋아하지는 않지만 권력이라는 측면에서 생각해 볼 거리가 되기는 하였다. 신이 만든 세상에 악이 존재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하지만 신은 인간에게 그 이유를 말해 주지 않는다. 인간이 이해하지 못할 것이니까. 절대권력은 선도 악도 없다. 그저 절대적인 힘만을 행사할 뿐이다. 하지만 신에게는 대항하지 못해도 인간이 인간에게는 대항할 수 있지 않을까. 인간이 인간에게 혹은 자연에게 행사하는 권력에는 제동을 걸어야 할 것이다. 


열한 번째 이야기는 경계에 관한 것이다. 익시온과 아스클레피오스는 경계에 있는 인물들이다. 인간과 신의 경계에 있는 이들은 그 경계를 넘어도 그들의 정체성을 유지한다. 하지만 신이 아니다. 익시온은 얼마 전에 읽은 보리스 비앙의 <너희들 무덤에 침을 뱉으마>의 리와 겹쳐졌다. 복수를 위한 복수인가, 자기를 과대포장하여 생각하는 것인가. 아스클레피오스는 죽은 자를 살려냈기에 신의 지위를 얻을 수 있었으나 신을 제외한 모든 이에게 공평한 죽음이라는 것을 파괴했기에 죽을 수 밖에 없었다. 죽음은 경계인가 종점인가. 죽음이 종점이라면 아스클레피오스는 종점을 뒤로 밀어낸 것이다. 저자의 말처럼 대부분이 80살까지 사는데 소수의 특권층만 300살까지 산다면 어떨 것인가. 하데스가 말한 '모두가 아니면 아무도'란 원칙은 지켜져야만 하는 것이다. 모두에게 해당하는 경계를 소수에게만 개방하는 것은 무척 위험하다. 그리고 모두에게 해당하는 종점을 소수를 위해 폐지하는 것은 더욱 치명적이다.(p.199)


열두 번째 이야기는 운명이다. 운명하면 오이디푸스가 떠오르는데, 이 이야기의 주인공은 유다이다. 유다는 여러 면에서 오이디푸스와 닮았다. 처음에 정해진 운명은 피할 수 없는 것일까. 그렇다면 살면서 내가 선택하는 것은 무슨 의미가 있는 것일까. 끝이 정해져 있다면 어떤 선택을 하더라도 그 길로 간다는 것이니까. 하지만 그렇다고 선택할 자유가 없는 것은 아니다. 사실 다른 선택을 한 인생의 길을 가보지 않았기에 우리는 운명이 정해진 것이라고 이야기 하는지도 모른다. 그러니 순간 순간 최선을 다해 살아가는 수밖에 없지 않을까. 그러면 끝이 왔을 때 조금은 받아들일 수 있을지도. 

  

제목은 만만한 철학이었으나, 어느 이야기도 만만하지 않았다.


무언가를 깨달은 자에게는 그 깨달음의 대가를 빠짐없이 받아내는 것이 세상의 법칙이다. - P25

시스템이 무너진 다음에 경고를 떠올리면 그때는 이미 늦었다. - P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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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돌이 2022-11-07 14:3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철학책이 만만하다는 말을 달고 있는 것부터 뻥치고 시작하는거죠. ㅎㅎ
그래도 꼬마요정님 소개를 보니 재밌게 읽을 수는 있을거 같아요. ^^

꼬마요정 2022-11-07 22:36   좋아요 0 | URL
맞아요 뻥이었어요 ㅎㅎ 재미는 있는데 무슨 말인지는 모르겠어요 ㅎㅎㅎ ㅠㅠ

scott 2022-11-13 21:4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요정님 리뷰 읽다 보니 이 책은 동화, 신화, 성경 속에 나오는 호기심, 노동, 폭력, 복수,욕망, 비밀, 자아, 아름다움, 장인정신, 권력, 경계, 운명이라는 인간 세상의 모든 문제와 고민, 고난 등이 전부 들어가 있네요
절대 만만하지 않은 인생철학이 담긴 책인 것 같습니다 ^ㅎ^

꼬마요정 2022-11-14 14:06   좋아요 1 | URL
그러니까요... 이렇게 인간 세상 모든 문제와 고민과 고난이 다 들어있는데 심지어 두껍지도 않아요... 그러면서 만만하다네요? 저 머리 터지는 줄 알았어요 ㅎㅎ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