벽으로 드나드는 남자
마르셀 에메 지음, 이세욱 옮김 / 문학동네 / 200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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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만약 내가 벽을 드나들 수 있다면 뭘 하고 싶어질까... 사실, 게으르고 소심해서 벽을 통과하는 건 딱히 부러운 능력은 아닌 듯 싶다. 하지만 사람은 경험을 통해 배우기에 뭔가 나쁜 짓을 하고 벽을 통과해 사라지는 것으로 책임을 피하고 나면, 나도 모르게 벽을 드나들며 금기에 도전하게 될지도 모른다. 여기 뒤티유윌처럼.

 

소심하고 변화를 원하지 않는 그는 등기청의 하급직원이다. 그에게는 벽을 아무렇지 않게 드나들 수 있는 능력이 있다. 처음에 그는 그닥 벽을 드나들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러나 레퀴예가 상관으로 오면서 상황은 바뀌게 된다. 평화롭던 일상은 모욕과 질책으로 가득찬다. 일상의 불만은 그의 삶을 점점 거칠게 만들고, 그는 일탈을 감행하고 더 나아가 그 일탈을 즐기기까지 한다. 그러나 거듭되는 일탈 속에서도 그는 만족하지 못한다. 행복하지도 않다. 그리고 삶의 목적을 찾았다고 생각하는 때, 그 순간을 길게 누리지도 못하고 그 삶 자체를 잃어버리고 만다.

 

벽이란 무엇일까. 그 벽을 드나든다는 것은 무엇일까. 그가 자신의 삶에 불만을 느끼지 않았을 때는 벽을 드나드는 능력이 쓸모있지 않았다. 그가 자신의 삶에 불만을 느끼게 되자, 그 능력은 곧 화풀이에 이용되었고, 자신을 과시하는데 쓸모가 있었다. 그리고 삶에 행복을 주는 열정을 찾아내자 그 능력은 꼭 필요해졌고, 사라졌다.

 

그 능력이 쓸모없을 때 병원에서 처방받은 약은 효과가 있었다. 의사는 기계적으로 증상을 듣고 약을 처방해줬다. 벽을 드나드는 능력을 가졌다는데, 정신안정제가 아니라 벽을 드나들지 못하게 하는 약을 말이다. 마치 고혈압이라는 병에 약을 지어주며 '식습관 고치고 운동을 병행하세요'. 라고 처방하는 것처럼, '이 약을 먹고 체력을 과도하게 소모하세요'. 라고.

 

지어준 약 자체도 의미가 있겠지만, 체력을 소모하라는 데 눈길이 갔다. 체력을 소모한다. 열정을 가지고 육체를 혹사한다. 그럼 왜 벽을 벽으로 느끼게 되는걸까. 그가 탈옥을 하고, 미워하던 상사를 놀려먹을 때에도 벽이 벽이 아니었는데, 열정에 휩싸여 사랑을 나누고 난 뒤에는 그 벽이 벽이게 되는 걸까.

 

사람을 놀리고 자신을 과시하고 다른 이를 헛수고하게 만드는 그런 일들에 힘을 쏟는 건 진짜 내 힘을 쓰는 게 아니고, 나 자신을 던져 사랑을 하는 것이 내 힘을 올바르게 쓰는 것이라는 걸까. 사실, 아직도 잘 모르겠다.

 

2. 인류의 미래는 어떠할까. 지금 우리가 어떻게 사느냐에 따라 미래가 아름다워질까. <생존 시간 카드>를 읽는 내내 커트 보니것이 쓴 <2BR02B>과 마거릿 애트우드가 쓴 <시녀 이야기>가 생각났다. 인구가 너무 많아 혹은 인구가 너무 적어, 사람을 사람이 아닌 물건처럼 취급하며 통제하는 시대. 한 사람, 한 사람이 가지는 절대적인 가치는 사라지고, 전체로 치환되어 국가가 정해주는 대로의 삶을 받아들여야 한다. 나 자신의 목숨까지도 말이다. 일하지 않는 사람은 생존하지 못한다고 하는데, 그 일이란 것을 정하는 것도 국가가 한다. 그러나 사람은 전체로서만 살 수 없다. 결국 암시장은 이 제도 자체를 무력화시킨다. 대단하다. 개개인이 이 제도에 불만을 느껴서 변한 것이 아니었다. 사람답게 살고자 불의에 맞선 게 아니라, 사람의 탐욕과 자본이 이 제도를 무력화시킨 것이다.

 

작가인 쥘 플레그몽은 한 달 중 보름만 살 수 있다. 절반은 살아있는 채로, 절반은 죽어있는 채로. 아카데미 회원들은 불멸의 존재라 한 달을 온전히 살 수 있는 특혜를 얻었다. 어느 곳이나 특혜를 받는 자들은 늘 있고, 불합리는 늘 존재하는가보다. 그러나 여기서는 어쩌면 죽어있는 것이 더 짜릿할지도 모른다. 자신에게 상관없는 것에는 관심조차 두지 않는 플레그몽을 보며 삶이란 무엇인지, 그저 살아있는 것이 삶인지 다시 생각해보게 된다.

 

3. 어릴 때 동생 숙제를 대신해 준 적이 있었다. 철사로 조형물을 만드는 건데, 없는 손재주로 그네 타는 사람을 만들었다. 내일 가져가라고 막내한테 줬는데, 마침 변기를 고치던 아빠가 왠 '철사 덩어리'냐 하며 냉큼 가져다 변기 고치는 데 쓰셨다. 동생은 킬킬대며 자기가 다시 만들었다.

 

그래서인지 <속담>은 좀 마음이 아렸다. 자코탱 씨가 나쁜 사람은 아니지만 좋은 사람도 아니다. 성실하긴 하지만, 지나치게 자기중심적이고 가부장적이다. 그런 그가 아들에게 자신이 잘났다는 걸 보여주려다 삼천포로 가 버리는 이야기라고나 할까. 그래도 애써 글을 썼는데, 그 글이 퇴짜 맞으면 참 가슴이 아플테다. 그나마 아들이 아버지와는 달리 배려를 한다고 했는데, 그게 또 과연 배려일까 의문이다. 자신의 일은 자신이 하고 그 결과 역시 자신의 것이어야겠지.

 

4. 한 번에 칠십 리를 가는 장화가 있다면 정말 좋겠다. 칠십 리는 27 킬로미터가 조금 넘는 거리다. 한 번에 칠십 리만 갈 수 있다면 먼거리용으로만 쓰겠지만, 칠십 리 내에서 거리 조절이 가능하다면 아주 유용할테다. 마치 축지법을 쓰는 것처럼 말이다. 

 

<칠십 리 장화>는 동화 같은 이야기다. 어쩌면 평범한 삶을 살고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 일자리를 구해야 하고, 가진 자들의 갑질에 견뎌야 하고, 어떤 때에는 투명인간처럼 소외되는 이 시대 사람들의 이야기 말이다. 제르멘은 미혼모에 가난하지만 아들인 앙투안과 행복하다. 앙투안 역시 엄마와 함께 사는 삶이 행복하다. 그렇지만, 또래들끼리 하는 놀이 중에 사고가 생기게 되고 자신의 삶이 특히나 가난하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 그래서 작지만 큰, 크지만 작은 거짓말을 하고 만다. 멋지고 부자인 빅토르 삼촌의 또다른 이름은 혹시 '신'이 아닐까.

 

그 고물상 주인과 새의 정체는 무엇일까. 왜 그 새는 제르멘에게 기회를 줬을까. 진짜 가치 있는 것들을 고물상에 모아놓고 합당한 가격을 붙였지만 그 가격을 인정하는 사람은 없다. 하지만 그만큼 값비싼 물건을 다시 싸게 제르멘에게 준 이유는 무엇일까.

 

비싸고 화려하고 많은 수의 초를 바친 부자보다 가난한 이가 내민 단 한자루의 초가 더 가치 있다고 했던 석가모니의 일화가 떠오른다. 진실로 서로를 걱정하는 그들이었기에 그 장화를 얻을 수 있었던 걸까.

 

4. <천국으로 간 집달리>는 많은 생각을 들게 한 이야기이다. 내가 베푼다고 생각한 선행은 결국 내 마음 편하자고 한 일들이 많다. 지금 이렇게 안 하면 내 마음이 너무 불편할 것 같아서 말이다. 그럼 그건 과연 진짜 선한 일일까. 내 처지와 아무 상관없이 진실로 상대를 위해 한 일이 얼마나 될까.

 

자신이 맡은 일을 열심히 한 것은 죄가 될까. 군인이 전쟁터에서 적을 죽인다든지, 경매업자가 파산한 이의 집을 경매에 붙인다든지, 사형 선고받은 죄수의 사형을 집행하는 간수라든지 말이다. 누군가의 목숨, 재산을 빼앗는 일이지만, 사회가 만든 법에 의해 정당화된 일이기도 하다. 또한 전쟁 같은 경우는 정당방위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 일이 결국 다른 이의 눈에서 피눈물이 나게 할 수도 있는 일이다.

 

집달리는 천국에 갔지만, 과연 그 한 가지 일로 수많은 눈물들이 사라지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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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7-09 16:06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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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7-09 17:20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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