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멘 호수.백마의 기사.프시케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64
테오도어 슈토름 지음, 배정희 옮김 / 문학동네 / 201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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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은 기억을 흐릿한 아름다움으로 빚어낸다.

 

1. 그 기억이 이루지 못한 첫사랑이라면 더 더욱 애틋하고 아련할 수 밖에 없다. 어느 늦가을 오후, 삶의 여정이 끝나가는 계절, 라인하르트는 추억에 잠긴다. 언제나 기억 속엔 어리고 아름답고 맑은 그 모습 그대로인 엘리자베트가 있다. 그리고 그녀와 함께 한 모든 순간들도. 돌이켜보면 그 모든 순간들이 반짝였고, 생동감이 넘쳤다. 소설은 노인을 그 시절로 데려간다. 기억을 더듬는다기보다는 실제로 그 일이 일어났던 그 때로 말이다. 그의 입이 간절하게 뱉어낸 이름은 엘리자베트. 그 이전도 어쩌면 그 이후도 다시는 없을 사랑. 소꿉 친구였던 둘은 사랑이 사랑인 줄 모르고 다정하게 지내다 사랑인 줄 알게 되어도 아무 약속 없이 헤어진다. 넓은 세상으로 나갈 수 있던 라인하르트는 대학을 가면서 자신의 마음을 비밀로 남겨둔 채 고향을 떠나게 되고, 그 비밀이 무엇인지 알 것도 같은 엘리자베트는 기다린다. 엘리자베트도 떠날 수 있다면 좋을텐데. 보다 넓은 세상을 겪으면서 어머니의 강요를 이겨내고 자신이 원하는 삶을 살 수 있는 힘을 얻으면 좋을텐데. 

 

그러나 삶은 원하는대로 되지 않는 법이다. 아무 약속도 주지 않은 채 떠나 온 고향에서 엘리자베트가 홀로 버티기엔 한계가 있었고, 결국 그녀는 라인하르트의 친구이자 그녀에게 헌신하는 에리히와 결혼하고 만다.

 

<임멘 호수>는 그들의 채 피우지 못한 꽃 같은 사랑과 떨어질 기회조차 갖지 못한 낙엽 같은 이별 이야기이다. 엘리자베트의 결혼 이후 라인하르트는 그녀를 한 번 더 보게 된다. 에리히에게 초대 받아 그의 집에서 한동안 머물게 되었지만, 만났다는 환희보다 어쩌지 못할 고통이 더욱 크게 덮쳐와 라인하르트는 결국 도망치듯 그녀 곁을 떠나고 만다. 그 뒤 그의 삶이 어떻게 펼쳐지는지 우리는 알지 못한다. 다만, 삶의 황혼 무렵에도 여전히 엘리자베트를 추억하고 있다는 것만 알 수 있을 뿐. 사랑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2. 여기, 시간이 영웅으로 만들어 준 이가 있다. 평범한 집안에서 태어나 비범한 능력으로 한 마을의 제방 감독관이 되어 마을을 홍수로부터 지켜 준 하우케 하이엔. 관습이란 이름 아래에 이루어지던 불합리한 일들, 그저 좋은 게 좋은 거라는 이유로 손대지 않고 버려둔 일들, 비용보다 결과가 가져오는 혜택이 더 크더라도 당장 드는 비용 때문에 마다하던 일들... 이 모든 일들을 묵묵히 거인처럼 홀로 바로잡아가던 하우케는 점점 더 외로워진다. 거인은 외로운 법이라지만, 하우케의 외로움은 어느 정도 자신이 만든 부분이 있었다. 똑똑하고 지혜로운 그의 반려 엘케는 충분히 하우케의 짐을 나눠 질 역량을 가졌지만, 시대상과 하우케의 자격지심 때문에 그저 당시 여자에게 주어진 일에 충실할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9년만에 둘은 딸을 얻었다. 그 딸은... 백치였다.

 

어찌보면 무신론자인 듯한 그, 악마가 씌인 듯한 백마를 타고 다니는 그, 미신과 싸우면서 얻어낸 강아지, 백치 딸, 누구보다 현명한 반려 엘케... 그리고 변명 없이 합리적인 성격은 하우케를 악마로 몰기 충분했다. 자신보다 똑똑하고 자신보다 뛰어나면 유령이나 귀신으로 만들어버리는 일은 언제나 일어난다는 선생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살아있을 적에는 마을의 적이자 시기 질투의 대상, 백마를 타고 다니는 악마였고, 죽어서는 마을을 지켜주는 백마의 기사.

 

북구의 시린 바람과 덮쳐오는 파도에 맞서 제방을 떠 받치는 거인, 햇빛 때문에 눈이 부셔 하얗게 번져 보이는 모습으로 하우케를 기억하고 싶었지만, 사실 음울한 느낌이 계속해서 배어나와 태양과는 어울리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그믐달 아래, 어스름한 달빛에 빛나는 하얀 말을 탄 길고 마른 형체... 가끔 가슴 시린 나즈막한 목소리로 한 두마디 던지고 사라지는 그런 유령이 더 어울렸다.

 

<파우스트>의 북해 버전이라고 불리는 이 책은 <파우스트>처럼 웅장하지는 않지만, 한 인간의 고뇌와 시련, 아픔과 의지가 배어있다. 자연에 대항하는 인간, 미신에 대항하는 인간, 탐구하는 인간, 그리고 위로받는 인간... 하우케의 삶 속엔 우리 모두의 일부가 들어 있다.

 

제방을 만들 때, 살아 있는 것을 제물로 바쳐야 한다는 마을 사람들의 주장에, 하우케는 아랑곳하지 않고 강아지를 자신의 품에 안는다. 사실, 하우케여... 당신은 이미 트린 얀스의 고양이를 죽이지 않았던가... 게다가 미신의 대상인 백마의 기사가 되어 마을을 지켜준다 믿어지고... 미신을 믿지 않는다지만, 결국 미신과 전설, 역사는 복합적으로 얽혀 사람들의 삶을 이어주고 있는 것이다.

 

3. 어린 소녀와 젊은 남자는 아직 성장하지 못했다. 그들에게는 계기가 있어야 했고, 그 기회를 통해 성장할 시간이 필요했다. 자연이지만 인위적인 공간, 남녀가 분리된 공간인 해수욕장에서 둘은 서로를 만났고, 불온한 마음을 품는다면 충분히 수치스럽고 고통스러울 상황이 만들어진다. 그러나 또한 서로에게 강렬한 인상을 남기기에 충분한 상황이기도 했다.

 

아프로디테의 청을 들어주기 위해 프시케에게 화살을 쏘러 간 에로스는 되려 자신의 심장 깊숙이 화살을 박아 버린다. 이룰 수 없는 사랑에 가슴 아파하며 그녀 근처에 남자라고는 얼씬도 못하게 막아보다 결국 신탁을 내려 그녀를 자신의 아내로 맞이한다. 하지만 정체를 숨긴 채로는 둘의 앞날이 밝을 리 없는 법. 자신의 남편이 어떤 이인지 궁금했던 프시케는 남편을 훔쳐보고, 자신의 일방적인 요구를 들어주지 않았다는 이유로 에로스는 저 멀리 날아가서 상사병으로 시름시름 앓는다. 이제 자신의 남편이 누구인지 알게 된 프시케는 저승까지 다녀오는 시련을 겪고 나서야 에로스의 아내이자 신의 반열에 들게 된다. 인간이면서 신이 된 프시케. 그녀로 인해 신들의 세상은 막이 내리고 인간들의 세상이 시작된다.

 

<프시케>의 프시케는 소녀라고 하지만, 실상은 프란츠였다. 프시케는 에로스를 맞이하기 위해 신의 지위까지 올라야 했고, 프란츠는 소녀를 아내로 맞이하기 위해 어른의 세상에서 지위 혹은 명성을 얻어야 했다. 철부지였던 소녀는 자신이 경험한 그 강렬한 감정이 주는 희열 때문에 두려움에 가득 찬다. 서로에게서 멀어져 있는 시간이 길어지면서 그 사건은 잊혀지는가 했지만, 그 감정만큼은 생생하게 살아서 서로가 성장하도록 부추겼다.

 

소녀의 명예를 위해 모든 것을 잊으려 했지만, 더 강하게 남아있는 그녀의 모습 때문에 프란츠는 냇물의 신과 프시케를 조각한다. 소녀는 그 조각상을 보기 위해 모험을 강행한다. 성장통은 아픈 법이고, 사랑은 많은 것을 가능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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