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언젠가 만난다 (1주년 한정 리커버 특별판) - 나, 타인, 세계를 이어주는 40가지 눈부신 이야기
채사장 지음 / 웨일북 / 201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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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통 크기 만한 방망이로 직접 밀어서 만드는 만두피, 노트만큼 펼쳐진 밀가루를 찹찹 접어서 나무로 된 도마 위에서 써는 손칼국수의 면발, 양재기에 직접 쑤는 청포묵, 엿기름으로 만드는 식혜, 하루 왼종일 고아서 말간 국물이 우러나는 사골 국물, 시커멓고 찐득찐득한 껍질을 직접 벗겨서 방망이로 두드린 다음 쭉쭉 찢어서 양념장에 버무린 더덕무침. 당신에게 요리란 천연 재료로부터 출발하여 거의 모든 과정을 손으로 만들어 완성하는 과정이었다.

어머님의 세계는 달랐다. 슈퍼마켓 진열장에서 출발하며 비닐봉지를 뜯고 가열만 하면 바로 끝나는 내 세상과는 아주 많이. 결혼 후 많은 기간 동안 그 다름을 틀렸다고 생각했다. 이해할 수 없어 속으로 투덜댔다. 몇 시간이나 걸쳐 노동을 한 결과물이 허무하기 그지없지 않은가. 수학적으로 계산하면 늘 마이너스가 나왔다. 그냥 편하게 사먹으면 될 걸 힘들게 왜 저러실까, 금전적으로도 별반 차이도 없는데. 오히려 돈이 더 들어가는 경우를 종종 바라보면 답답했다.

 

모든 것은 다 때가 있다고들 한다. ‘이해의 앞에는 언제나 체험이 있다.(p178)’ 달라도 너무 달랐던 당신의 세계를 이해하는 데에는 20여년의 시행착오가 담긴 시간이 필요했던 거다. 10년 전 아니, 5년 전까지만 해도 당신을 소재로 글을 쓰게 되리라고는 상상조차 한 적이 없다.

뻑뻑했던 관계가 부드러워지기 시작한 시점은 작년이었다. 조계사에서 화쟁 사상을 주제로 한 독후감 공모를 주최했는데, 담론(신영복, 돌베개, 2015.4.)을 읽은 후 독후감을 보냈더랬다. 관계가 주제였기에 당시 가장 불편했던 어머님과의 관계를 글로 풀어갈 수밖에 없었다.

놀라운 변화는 그 후에 일어났다. 언행불일치의 삶을 적잖이 살아왔지만, 적어도 세상에 발표한 글과 너무 이질적인 삶을 이어간다는 건 양심에 찔렸다. 당신과의 관계가 서서히 풀려가는 시기였지만, 객관적으로 정돈된 이야기가 글로 나오자 그 속도는 급격하게 빨라졌다. 적절히 달궈진 프라이팬처럼 관계 위에 얹는 에피소드마다 알맞게 익어갔다. ‘이야기는 도구다. 그것은 세계와 나를 이어준다.(p144)’ 이야기는 세계뿐 아니라 타인과의 관계도 이어주었다. 당신과의 이야기가 당신과 나의 세계를 자연스럽게 이어주었다. 스스로도 당황스러운 변화였다. 그 후로 어머님은 지금처럼 종종 내 글의 소재가 되어 주셨다.

 

관계의 해동기에 이 책을 만난 건 차라리 행운이었다. 결정적인 한 방이랄까. 장르별로 책을 꽂을 수 있는 깔끔한 책장을 만난 느낌이었다. 채사장의 글을 따라가면서 지금까지의 이야기를 깔끔하게 정리해서 꽂을 수 있었다. 네가 이런 생각을 한 건 이것 때문이고, 그럴 때 이랬던 건 이래서야 하며 체계적으로 요점 정리를 해준 책이었다. 그의 풀이 방식이 마음에 들었다.

말과 글은 간결해도 충분하다. 꾸미거나 덧붙일 필요가 없다. 수식어를 걷어내고 정갈하게 정돈된 언어를 정확히 구사한다면 인위적으로 노력하지 않아도 나의 언어는 타인의 가슴에 강렬하게 박힌다.(p172)’ 그의 글이 그랬다. 빙빙 돌려 말하지 않고 간결한 문체로 핵심을 찔렀다. 미사여구 하나 없이 깔끔한 느낌이 철학적인 시를 읽는 것 같았다. 인문학 장르로 분류되어있지만 철학적인 내용이 다분히 많았다. 스피노자나 니체의 철학처럼 채사장의 철학이랄까. 나를 중심으로 존재하는 타인과 세계, 그들과 나를 이어주는 도구로써의 이야기, 이 모든 것들을 통찰하여 결론처럼 맺어주는 의미론적인 고찰에는 삶과 죽음과 관계가 담겨있었다. 그의 관점은 신선했고 이제껏 생각해보지 않은 방향에서 나와 타인과 세계를 바라보게 해주었다.

 

나의 세계에 강력한 영향을 미친 문장을 만났다. 처음 접한 순간 강하게 나를 흔들더니 마지막 책장을 덮고 한참이 지난 지금까지도 일상에서 여진이 되어 불쑥 불쑥 튀어나왔다. ‘우리는 각자의 세계 속을 살아간다. 당신과 나는 서로 다른 세계를 걷고 있다.(p32)’ 이 문장을 보는 순간 어머님 생각이 났다. 당신과 나는 다른 세계를 살고 있었다. 관계를 이해하는 데 이보다 더 적절한 생각이 있을까. 서로 다른 세계라니! 손으로 밥을 먹는 나라에서 숟가락을 안 쓴다고 뭐라고 할 것이 아니며, 우리나라에서 왜 포크로 밥을 안 먹느냐며 말하는 것은 누가 봐도 우습다. 각 나라의 식생활에 맞는 적절한 문화가 있으니까. 다른 세계에 계신 당신을 내게로 끌어와 왜 그리 하실까 여긴다는 건 억지스러운 생각이었다. 아무리 해도 이해가 되지 않던 건 당연했다.

 

방앗간 이야기, 아파트 경비 아저씨 이야기, 4층 사시는 할머니 이야기, 정년퇴직한 그 집의 할아버지 이야기, 말을 잘 옮기시는 경로당 할머니 이야기, 큰 길 건너 토마토 장수 이야기, 아파트 수요 장터의 견과류 파는 아주머니 이야기, 마트 계산대의 친절한 아주머니 이야기. 어머님의 주변에서 일어나는 소소한 이야기를 요즘 들어 자주 말씀하신다. 덕분에 나는 얼굴도 모르는 분들의 일상과 성격과 에피소드까지 알게 되었다.

어떤 이는 현재에 살지만 다른 이는 과거에 살고, 또 다른 이는 미래에 산다.(p99)’ 한 때 나는 과거에 살았다. 무채색으로 기억되는 30대에는 예전에 좋았던 시절을 자주 회상했다. 일어나지도 않은 미래를 끌어와 암담하게 재단하며 아득한 미래를 살기도 했다. ‘당신이 보아야 할 것은 보이지 않는 어딘가의 목표점이 아니라 지금 딛고 서 있는 그 들판이다.(p85)’ 어머님은 늘 현재의 풍경을 말씀하신다. 들판을 바라보시는 당신의 모습을 상상하니 은근히 미소가 지어진다. 관계가 부드러워지니 나도 당신의 따라쟁이가 된다. 무거운 과거를 내려놓고, 미래도 굳이 가져오지 않고 현재만 생각하니까 너무도 가뿐한 것이. 지금 이 순간이 편하고 행복하다.

옷 살 돈으로 책 산다며 지금 입고 있는 옷을 구멍 날 때까지 입기로 생각하니까 언니가 가끔 예쁜 옷을 물려주는 선물 같은 일이 일어났다. 늘 직진만 하며 걷던 삶의 방식이 점차 바뀌어갔다. 주변 사람들과 세상을 많이 둘러보게 되었다. ‘길가를 둘러보며 여유 있게 걷는다는 것. 그것은 한눈을 파는 것이 아니라 제대로 가기 위해 신중히 걷는 것이다.(p84)’ 이 문장을 보니 힘이 났다.

 

예전에는 별 느낌이 없었는데 요즘 들어 점점 연세 드신다는 사실이 진하게 다가온다. 짠 하는 마음과 함께. 나와는 딱 30년 차이, 올해 그냥 나이로 여든 되신다. 나이 들어 너무 오래 살면 자식들 고생시킨다며 그러지 않기를 바라신다는 말씀을 종종 하신다. 아직 못 들은 이야기도 많은데, 그 많은 음식에 깃든 노하우도 전수받지 못했는데 하는 생각이 들자 멀미를 하듯 울렁거린다. 이런 생각을 하면서 읽어서였을까. 다음 문장을 읽는 순간 울컥한다. ‘그곳에는 그의 세계가 남겨놓은 시간과 이야기와 성숙과 이해가 조개껍질이 되어 모래사장을 보석처럼 빛나게 하고 있을 테니.(p34)’

 

모든 보는 존재는 충분하고 완벽한 세계를 자기 내면으로 갖고 있고, 그 내면의 빛은 그 존재를 부족함 없이 사로잡는다.(p241)’ 나와 다르다 하여 틀리다 여기면 안 되는 것이었다. 당신과 공유한 시간 속에서 나는 세상에 단 하나 뿐인 음식을 먹어왔던 거다. 어머님의 세계는 완벽한 핸드메이드 월드였다.

아담한 초가집. 방금 비질을 한 너른 마당이 있고 온돌방 이불 속에는 메주가 띄워져 있는, 볕 좋은 마당 한편에는 장닭 몇 마리가 바닥을 콕콕 찍고, 빨랫줄에 널린 광목천이 바람결 따라 흔들리는, 마당 중앙에는 빠알간 고추가 한 층으로 펼쳐져 있는. 당신 안에 펼쳐진 세계는 이런 이미지일까. 인공의 것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MSG적인 풍경 하나 없이 담백한 두부 맛이 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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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민 독서 - 책은 왜 읽어야 하는가
서민 지음 / 을유문화사 / 201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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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는다는 것은 매번 설레는 여행이다. 책장을 보면 두근거린다. 꽂혀있는 책들을 보며 미지의 세상으로 가는 문이 첩첩 접혀있는 상상을 한다. 문을 열고 들어서면 어떤 세상이 펼쳐질까. 어떤 책을 읽어볼지 훑어볼 때에는 여행지를 고르는 순간처럼 기대감에 부푼다. 그 순간의 감정에 따라 선택지는 달라지는데 아니다 싶으면 순식간에 세상을 닫아버리면 그만이다. 반드시 가야 한다는 의무감이 없기에 홀가분한 자유가 있다. 여행하고 돌아오면 이전보다 커지거나 넓어지거나 깊어지거나 분명 다른 내가 되어있을 것이다.

외롭다는 생각으로 마음이 가라앉을 때 서민 독서로 들어가는 문고리를 잡았다. 스스로를 즐겁게 하는 일이 버겁다고 느껴질 때였다. 그럴 때면 바라보는 세상이 점점 탈색되어버리는 듯 스산하다. 이제껏 잊고 있던 무게감이 한꺼번에 몰려온다. ‘서민이란 작가가 주는 유머러스하고 긍정적인 에너지가 잠시나마 나를 가볍게 할 수 있을까. 작은 희망을 안고 문 안으로 들어갔다.

 

산책하듯 책을 읽었다. ‘책은 다른 책으로 가는 문을 열어 준다.(p373~374)’ 는 말처럼, 이 책을 읽은 후에 또 다른 책을 읽고 싶어졌다. 그의 서술 방식은 매번 취향저격이다. 부드러운 토론을 하는 느낌이랄까. 적절한 근거를 토대로 책 읽기의 중요성을 어필하는 주장에는 억지스럽지 않은 논거가 있다. 과학에서 깔끔한 증명으로 명쾌한 결론이 나듯 적절한 사례가 제시될 때마다 후련함을 느꼈다. 책읽기 관련 도서의 목적은 책을 읽고 싶어지게 만드는 것일 텐데 나에 대해서는 그 목적을 충분히 달성한 셈이다.

객관적인 활자로 들여다보는 내용은 거리만큼의 이성을 확보해준다. ‘책은 외로운 이가 나 혼자만은 아니라는 걸 알려준다.(p12)’ 들어가는 글에 있는 문장이 뭉클하다. 토닥토닥 응원 받는 느낌이다. 가상일지라도 등장인물의 고뇌와 갈등을 공감하면서 종종 위로가 되던 기억을 떠올린다.

책에서 온기가 느껴졌다. 이어폰을 낀 채 커피숍에서 어두운 표정으로 책을 읽다가 갑자기 빵 터져서 당황하기도 했다. ‘개미알(p369)’ 이란 세 글자는 최근 들어본 말 중 엄지 척을 추켜세울 정도로 가장 웃겼다. 마음에 서서히 혈색이 돌기 시작했다.

 

이 책의 저변에는 인터넷과 스마트폰의 폐해가 자주 언급된다. 저자의 생각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인터넷의 문제점은 그 정보에 참과 거짓이 섞여 있다는 것이다.(p31)’ 네이버 지식in을 처음 이용할 때만 해도 몰랐다. 놀라운 세상이었다. 검색어를 치기만 하면 관련 전문가들이 너무도 친절하게 척척 설명을 해 주었다. 세상의 모든 지식을 다 끌어다 모아놓은 것 같다는 착각이 들었다. 책이 필요 없겠다고 생각했다.

환상이 깨진 건 연수를 받을 때 강사가 한 말을 듣고 나서부터였다. “인터넷 너무 믿지 마세요. 특히 지식in은 더 더욱이요. 답변이 올라온 시각을 보세요. 그 시각에 전문가들은 그렇게 자주 글 못 올려요. 초등학생들이 대부분 답변을 올린답니다.” 잘 모르는 분야의 답변을 읽을 때에는 판단하지 못했다. 알고 있어서 굳이 찾아볼 필요가 없었던 전공 관련 글들을 몇 가지 검색해보았다. 말도 안 되는 답변들이 얼마나 많이 포진되어있는지 그제야 보였다.

식당에서, 모임에서, 지하철에서, 버스에서 스마트폰을 들여다보는 모습은 이제 일상이 되어버렸다. 언제부터 그랬을까 싶을 정도로 순식간에 퍼진 흔한 풍경이다. 스마트폰을 들여다보지 않는 사람이 드물 정도이다.

페이스북과 카카오스토리에 빠져 몇 년을 보냈다. 스마트폰으로 인터넷에 접속하거나 카카오톡만 주고받아도 한 시간이 후딱 가는 것은 일도 아니었다. 작년 후반기부터 정신을 차렸다. 이래서는 안 되겠다 싶었다. 이제는 커피숍에서 책을 읽거나 글을 쓸 때에는 스마트폰을 무음으로 해놓고 쳐다보지 않는다. 뇌에서 나름대로 부여하는 정당성의 유혹을 물리치고 스스로 자제하기까지 꽤 오래 걸렸다.

 

초등학교 때, 어머니께서는 없는 살림에도 어린이 문학 전집 50권을 사주셨다. 붉은 색 표지로 된 두께 1.5cm 정도의 책들을 몇 번이나 읽었다. 동화 속으로 들어가 상상을 하는 일은 매번 신나는 경험이었다. 그 중 소공녀를 가장 좋아했는데, 어린 나는 여주인공의 모습을 통해 가난 속에서 찾아가는 희망을 보았던 것 같다.

커가면서는 소설을 멀리 했던 적도 있다.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이야기를 읽는다는 것이 의미 없다고 생각해서였다. 현실과 아무 관계가 없는데 뭐 하러 읽나 싶었다.

이런 생각이 처음으로 들썩인 건 닥치는 대로 끌리는 대로 오직 재미있게 이동진 독서법을 읽고 나서였다. ‘인간의 실존적인 상황, 그 한계를 좀 더 체계적이고도 집중적인 설정 속에서 인식하게 하고 고민을 숙고하게 만들죠.(p29)’, ‘직접적인 경험보다 간접적인 경험이 더 핵심을 보게 하는 경우가 굉장히 많습니다.(p30)’ 그 책 속에 나온 두 문장은 소설을 바라보는 관점을 바꿔놓았다.

서민 작가 역시 소설을 많이 읽으면 감정이입을 잘하게 되고, 그 결과 역지사지의 능력이 생긴다.(p81)’ 고 말한다. 이 둘을 굳이 비교하자면, 이동진은 나를 바라보는 데에, 서민은 너를 바라보는 데에 좀 더 비중을 많이 둔다는 점이라고 생각한다. 후자에 조금 더 마음이 간다.

 

책 읽는 속도가 매우 느리다. 이해가 안 가면 몇 번이나 다시 읽어보고, 인터넷을 검색해보고, 책을 덮고 한참을 생각해본다. 책 한 권 읽는 데 보통 일주일가량 걸린다. 독후감을 쓰는 데에는 그리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는데, 읽는 속도는 왜 이런지. 점점 빨라지고는 있지만 가끔 답답한 마음이 들 정도로 여전히 느려 터졌다. 다음 문장이 마음에 훅 들어왔던 건 그래서일 거다. 이 책을 통틀어 내게 개미알(p369)’ 만큼의 위력을 발휘한 문장이다. ‘자신이 이해할 수 있는 속도에 맞출 수 있다는 얘기다. 책이 생각을 바꿔줄 수 있는 힘은 바로 여기서 나온다.(p131)’

영화를 별로 안 좋아하는 이유를 알 것 같다. 속도가 안 맞아서였다. 뭔가 생각할 점이 보여 골똘히 생각하려하면 바로 다음 장면이 등장하니 생각할 여유가 생기지 않는 것이다. 그렇다면 드라마를 좋아하는 이유는 뭘까. 드라마에서 좋아하는 부분은 표현 방식이다. 배우의 표정과 눈빛, 연기를 하는 방식, 몸동작, 대사를 이루는 문장 등. 영화는 두 시간 정도의 시간에 주제를 전달해야 하므로 사건이 더욱 빠르게 진행된다. 이런 점이 나의 속도와 잘 안 맞는 모양이다. 나는 디테일에 주목하는 편이니까.

책과 같은 친구를 사귀면 좋겠다. 나의 속도에 맞춰 기다려줄 수 있는 존재, 내가 변화되는 과정을 지켜봐주는 존재였으면 한다. 외로울 때 책이 나와 함께 나란히 걸어가 주는 것처럼.

 

책을 읽을 때 가장 먼저 앞뒤 표지를 보고, 표지 안쪽에 있는 저자의 약력을 읽는다. 이 때 빠짐없이 해보는 것은 뺄셈이다. 저자가 몇 살에 등단을 했는가, 혹은 어떤 작품을 발표 했는가 계산해본다. 항상 주저되는 부분은 너무 늦지 않았을까 하는 점이다. 대학 졸업 후 바로 직장 생활을 했으니 직업 세계로 빨리 뛰어든 편이지만, 글을 쓰면서 살아가기에는 많이 늦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늘 마음 한 켠에 있다. 저자가 소개한 김득신의 일화에서 많은 힘을 얻는다. ‘인간의 수명이 40세 남짓에 불과했던 과거와 달리, 100세 시대인 지금은 59세에 뭔가를 이루어도 충분하니까.(p178)’ 라는.

 

많은 책에서 공통으로 하는 말을 여기에서도 발견한다. ‘행동을 바꾸지 못하는 지식은 무용지물(p277)’ 이라는 말이다. 2005년 말 즈음부터 책을 읽기 시작하였다. 그 때의 나와 지금을 비교해보면 분명 변화가 있다. 직접적인 경험의 영향도 있지만 스스로 돌아보면 책의 영향이 가장 컸다. 책을 읽지 않았더라면 하지 않았을 행동도 했고, 책을 읽지 않았더라면 생각하지 못했을 생각을 한 적도 많았으니.

 

책에 관한 아킬레스건 중 하나는 고전에 대한 지식이 거의 없다는 점이다. 교과서에 나오는 부분이야 시험맞춤형으로 암기되어 있었지만, 이 책의 3부에서 언급한 대로 고전에 접근한다는 것은 주춤거리게 하는 일이었다. 축약본을 읽으며 종종 생각했다. 이 책이 왜 이렇게 유명한 거야? 어느 부분에서 감동을 느껴야할지 판단을 못한 적도 많았다. 작가가 언급한 축약본의 폐해를 읽어보니 납득이 간다. 제대로 읽고 싶어졌다. 각 나이 대를 거치면서 몇 번이나 읽어봐도 제각기 느낌이 달랐던 어린 왕자를 떠올린다. 지금 다시 읽으면 또 어떤 느낌이 추가될까. 세로줄로 어렵게 읽었지만 정말 재미있었던 제인 에어도 생각난다. 올해에는 틈틈이 고전 읽기에 도전해봐야겠다.

 

취미를 독서라고 적은 기억이 있다. 이 책을 읽고 나니 잘못된 생각이었음을 알겠다. 비약하면 저는 취미로 숨을 쉬어요, 취미로 밥을 먹어요.’ 란 말과 동급인 셈이니. 책을 읽는다는 것은 시간이 날 때 하는 일이 아닌 일상의 한 부분이 되어야 하는 일이었다.

책 읽기를 권유하는 책은 러시아의 목각 인형 마트료시카를 연상시킨다. 뚜껑을 열어 보면 그 안에 책이 있고, 그 책을 따라 들어가면 주인공이 들고 있는 또 다른 책이 있다. 성경에 등장한다는, 낳고 또 낳고 계속 낳고 쭉쭉 낳고 뭐 그런 식이다. 마트료시카와 다른 점은 뚜껑을 열어보면 겉과는 다른 새로운 세상이 들어있다는 점이다. 열어볼 때마다 매번 장면이 바뀌는 노트북의 배경 화면 같다는 점이다. 읽고 싶은 책을 열 권정도 메모했다. 예상치 못한 수확이다. 이제 또 다른 마트료시카의 뚜껑을 열고자 한다. 새로운 세상에 들어간다는 것은 언제나 설레는 일이다.

 

 

오타

p62 맨 마지막 줄, p177 5째줄 : . ,

p72 중간쯤 : 인류가 살 만한 새로운 별 ~ 행성(* 별은 스스로 타므로 인간이 발붙이고 살 수 없을 거라 생각한다.^^;;)

p201 댓글3 : 보내요. 보네요. (원문을 찾아보니, ‘보내요라 기재되어 있는 것이 맞긴 하다. 하지만 맞춤법을 수정해서 수록한 거라면, ‘보네요라 표기해야 한다. 만약 원문 그대로를 싣고자 하는 의도라면 그 앞에 있는 몰랐던 사실을도 원문대로 몰랏던 사실은으로 표기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p212 6째줄 : 새를 달리며 달래며

p217 밑에서 3째줄 : 중성자 중간자

p256 5번 주 : YNT YTN

p371 마지막 줄 : 히가시노 게이코 게이고

 

메모

<도시는 무엇으로 사는가> 유홍준,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 줄리언 반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밀란 쿤데라, <고전의 유혹> 잭 머니건, <마션> 앤디 위어, <82년생 김지영> 조남주, <고전문학 읽은 척 매뉴얼> 김용석, <빅 피처> 더글라스 케네디, <고래> 천명관, <호모 데우스> 유발 하라리, <세바시> 김창옥 편, 고전(을유세계문학전집, 민음사, 문학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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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8-01-18 08: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책과 함께하는 시간이 많아져서 그런지 영화를 잘 안 보게 돼요. 극장에서 보는 영화는 처음부터 다시 볼 수 없어요. 지나간 장면을 되돌릴 수도 없어요. 그래서 영화를 보고 난 뒤에 영화리뷰를 쓰는 것이 어려워요. 한 번 다 읽은 책은 얼마든지 다시 읽을 수 있어서 리뷰하기가 편해요. ^^

나비종 2018-01-18 11:24   좋아요 0 | URL
맞습니다. 애니매이션 영화는 영상미를 보는 재미에 그나마 덜 하지만, 근본적으로 저와 영화는 잘 맞지 않는다는 생각을 종종 한답니다.
원하는 부분을 언제든지 반복해서 펼쳐볼 수 있고, 내마음대로 빠르게도 느리게도 속도 조절이 가능하다는 점이 책이 가진 엄청난 매력인 것 같습니다.^^
 
군사주의는 어떻게 패션이 되었을까 - 지구화, 군사주의, 젠더
신시아 인로 지음, 김엘리.오미영 옮김 / 바다출판사 / 201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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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일째다. 다른 책을 단 한 줄도 읽지 못했다. 이 책을 읽고 나서 겪게 된 난감한 일이다. 책을 읽고 나서 느낌을 쓰는 데 그다지 어려움을 느끼지 않아왔건만. 무슨 말이든 해야 할 것 같은데, 무슨 말이든 하고 싶은 것 같기는 한데, 무슨 이야기를 해야 할지 모르겠다. 노트북의 빈 문서1을 앞에 두고 깜빡이는 커서만 바라보며 열손가락을 어정쩡하게 멈춘 채 방황하듯 며칠을 서성였다. 한 번도 진지하게 생각해보지 않은 문제였다. 때문에 나의 생각을 말하거나 내 삶에 적용하기도 어려웠다. 확실한 것 한 가지는 문제가 문제라는 것을 인지하지 못하고 일상을 지내왔다는 깨달음뿐이다.

 

썩 마음에 드는 책은 아니었다. 직역을 하는 듯한 문장이 군데군데 신경 쓰였다. 의미가 한 번에 들어오지 않아 몇 번씩 도돌이표를 찍으며 불편할 때가 있었다. 외국인 특유의 말투인걸까. 번역의 한계인걸까. 내 의식의 흐름과 잘 맞지 않는 낯선 문체 때문이리라. 다양한 각도와 분야에서 지구화된 군사주의를 바라보게 하는 내용은 알찼다. 우리나라 사람이 쓴 페미니즘 관련 책을 읽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그리스 신화의 아테나 여신처럼 전사의 이미지로 무장한 여성들에게만 갑옷처럼 장착된 사상이라 생각했다. 페미니즘은 나와는 거리가 먼, 아주 과격한 이들의 전유물이라 여겨왔다.

그나마 비슷한 유형의 책을 읽어본 경험이라고는 버지니아 울프의 <자기만의 방> 정도랄까. 잘 알지도 못하는 영역에 대하여 나의 얄팍한 지식으로 이것이 옳다 틀리다 말한다는 것은 분명 우스운 일이다. 다만 세상 어딘가에는 나와 비슷하게 무관심했던 사람들도 존재할 것이기에 그저 내 생각과 개인적인 느낌만을 조심스럽게 적어보려 한다.

 

갑자기 깨닫게 되는 사실로 소름이 돋을 때가 있다. 드러내놓고 피 질질 흘리는 귀신은 차라리 덜 무섭다. 아파트 10층에서 공부하다 고개를 들어보니, 창문으로 해맑은 여자 아이가 두 팔꿈치를 괸 채 당신을 바라본다. 심심해 보인다. “나랑 놀까?” 하는 말에 좋아라하며 팔꿈치를 통통 거리며 대가리만 다가온다는 옛날 괴담처럼.

저자의 말대로 페미니스트 호기심으로 바라보니 뭔가 잘못 되었다는 느낌이 훅 다가왔다. ‘여성에 관한 것은 자연스럽거나 사소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p36)’ 라고 했다. 책에 담긴 많은 내용들은 생판 모르는 일이 아니었다. 무심코 지나치던 일상들이었다는 표현이 적절했다.

자연스럽다고 이름 붙여진 것은 무엇이든 우리가 설명하지 않도록 만들기 때문이다.(p56)’ 여성과 관련된 많은 일들은 굳이 설명되지 않았고, 사람들은 설명할 필요성조차 느끼지 못했던 것이다. 당황했다는 말이 정확한 표현이었을 거다. 그동안 묻혀 졌던 일상들이 하나씩 열리는 포켓볼처럼 깨어났다.

 

어렸을 때 남동생에게 장군의 칼을 선물했다. 누나들은 번드르르한 칼집까지 장착한 플라스틱 칼로 장군 놀이를 하는 동생의 모습을 보며 흐뭇해했다. 탱크 모형을 조립하거나 비비탄을 장난감 총에 넣고 여기저기 쏘아대는 장면은 남자아이들 사이에서 흔히 보이던 모습이었다. 그 옆에서 나는 종이인형의 옷을 만들어 입혔다. 전쟁놀이는 사방치기, 고무줄놀이와 다를 바 없는 남자아이들의 일상적인 놀이었다.

전쟁이 놀이가 되고 게임으로 만들어지는 세상이라니. 조금만 더 생각하면 소름이 돋을 일이다. 칼이란 도구도 곰곰 생각하면 어떤 대상을 베기 위한 목적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과일 깎는 과도도 아니고 더군다나 장군의 칼이라면 총과 마찬가지로 사람을 해치기 위함이 아닌가. 민감하게 인식하지 못했다. 사람을 죽이는 도구로 놀이를 해왔다는 사실을, 이런 일상이 자연스러운 풍경으로 기억에 남겨져왔다는 점이 새삼스러웠다.

 

유난히 질문이 많은 책이었다. 그리고 나는 많은 질문에서 움찔거렸다.

가장 먼저 충격을 받았던 내용은 총과 탄약에 관한 이야기였다. 세상 모든 사람들은 전쟁을 싫어한다고 생각해왔다. 전쟁이 일어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사건이라고. 하지만 하나의 질문 앞에서 반드시 그런 것만은 아니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누가 이익을 취하는가?(p30)’ 한쪽에서는 살상이 일어나지만 다른 한편에서는 그들을 죽일 수 있는 총과 탄약을 만들면서 떼돈을 버는 것이다. 나라를 지킨다는 명목으로 군사화에 연루되어 있는 사기업들, 일부러 전쟁을 일으키는 국가들의 행태를 바라보았다.

어렸을 때에는 군인 아저씨들이 든든하게 보였다. 이 책을 읽고 나니 군사화를 통해서만 안보가 이루어질 수 있는 걸까 다시금 생각하게 된다. ‘누구의 안보가 우선되어야 하느냐(p92)’ 라는 질문을 앞에 두고 답답했다. 자신이 속한 나라나 집단의 이익을 위해, 때로는 개인의 사리사욕을 채우기 위해 사람의 목숨을 담보로 한다고 생각하니 화가 났다.

 

침묵도 행동이다. 외치고 싶어도 외칠 수 없는 힘없는 이들이 유일하게 할 수 있는 소리 없는 아우성이다. ‘침묵에 귀 기울이는 일(p135)’. 저자는 주목을 가리켜 이렇게 정의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침묵의 소리에 주목하지 않는다. 침묵이란 소리를 내지 않는 것이니 들릴 리 없다고 여기며 보지도 않으려한다. 언어만이 의사소통의 수단은 아니라는 사실을 잊고 있다. 주목만 한다면 비언어적인 표현을 통해서도 얼마든지 상대방의 마음을 헤아릴 수 있는 것을.

간혹 약한 이들의 모습이 보일 때도 있었다. ‘적어도 나는 강자가 되어 행동하지 않았으니까.’ 생각해왔는데 한 문장을 건널 때 뜨끔했다. ‘보고도 못 본 척하기는 그 자체로 하나의 행동 유형이다.(p190)’ 이제껏 나는 적극적으로 못 본 척하기를 행동해왔던 것이다.

 

페미니즘은 여성주의이며 여성의 입장만을 강하게 주장하는 편협한 사상이라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조금만 더 깊이 들어가면 그 중심에는 인간이 있다고 본다. 여성으로서의 권리나 정체성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성별을 떠나 독립된 인격체를 향해 암묵적으로 행해지는 차별과 불합리를 당당하게 표현하는 사상이라고 생각한다. 그 주변에는 카키색부터 아기 양말에 이르기까지 지구 전체에 공기처럼 스며든 군사주의라는 커다란 마스크가 페미니스트들의 입을 막고 있다.

나이키 운동화에 담긴 여성의 값싼 노동, 군인 아내의 삶, 보호자라 주장하는 사람들에 의해 자행되는 폭력, 가부장제, 모병 과정에서의 모순점, 일본 자위대, 군비에서 무기 판매가 차지하는 압도적인 비율, 남성 자체가 스펙이 되는 사회 분위기를 차례로 생각하며 스스로에게 질문한다. 이 문제들이 과연 여성에게만 해당되는 것인가?

 

남편이 다음 주 월요일부터 56일 동안 태국 여행을 갔다 올 예정이다. 앞 문장에서 주목할 점은 하나의 조사이다. '과'가 아니라 '이'라는 점. 그가 밤늦게 도착하는 날, 오후에 나는 시댁에서 아버님의 저녁 생신 상을 준비할 예정이다. 그의 일정을 전해 듣는 순간 갑자기 화가 난다.

왜 그럴까? 스스로에게 질문하고 답하며 이유를 찾아간다.

친구들과 혼자만 놀러간다고 부러워서? 나는 추운데 돌아다니는 것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인간이라서 부러운 마음은 아니다.

그의 부재로 인해 생길 빈자리를 상상하니 허전하고 그리울 것 같아서? 그저 웃는다. 결혼한 지 23년째다 라는 말이면 답변으로 충분하리라. 아침마다 토마토 주스 안 갈아줘도 되니까 오히려 더 편할 거라는 건 우리만 아는 비밀이다.

시댁 가서 일하는 것이 억울해서? 방학이니 몸이 그다지 피곤하지도 않을 거고, 요즘에는 어머님과의 관계도 살가워져서 그것도 아니다.

그렇다면 무엇 때문에? 한참을 생각하다 답을 찾는다. 나의 동의를 구하지 않고 여행 일정을 잡아서였다. 그가 돌아오면 나도 똑같이 떠나 버려? 순간적으로 생각한다. 내가 여행을 간다면 군말 없이 보내줄 사람이니. 그런데, 나는 그러지 못한다. 가족들의 밥도 신경 쓰이고 잡다한 집안일에서 자유롭지 못하기 때문이다.

정확한 이유를 파고드니 내 마음이 불편했던 이유는 나의 동의를 구할 필요 없이 본인만 생각하면 된다는 점이었다. 그건 남편만의 문제는 아니었다. 그럴 수 있는 환경으로 굳어진 것은 나의 책임도 크다. 남성 중심으로 형성된 사회적인 분위기 탓도 있고. 내 삶에도 무심코 지나치던 차별이 있어왔던 거다. 어떤 부분부터 변화시켜야 하나. 화석처럼 굳어진 일상에서의 패턴을 지혜롭게 바꿀 수 있는 방법을 진지하게 고민해야 한다.

 

박노해 시인이 말했다던가. ‘전쟁의 반대말은 일상이라고. 전쟁과도 같은 사회이다. 실제로도 전쟁이 일어나는 이 지구에서 그물처럼 덮여있는 남성 중심의 군사주의를 어떻게 걷어낼 수 있을까. 성별을 떠나 공평하게 쌀을 나눠먹을 수 있는 평화로운 일상은 불가능한 걸까. 젠더의 입장에 서서 다시 이 질문과 마주한다. 여성과 여성, 남성과 남성, 여성과 여성의 문제로 구분 지을 것이 아니었다. 페미니즘은 한 인간이 또 다른 인간에게 손을 내밀며 동등하게 바라보는 마음이었다.

 

 

*오타

p228 6째줄: 유안안전보장이사회 유엔~

p257 11째줄, 12째줄: 히노코 히로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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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18-01-09 08: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리뷰를 읽고나니 저도 꼭 읽어보고 싶어졌어요. 땡투 꾹 누르고 담아갑니다.

나비종 2018-01-09 09:45   좋아요 0 | URL
문장의 흐름이 자연스럽지 않은 부분이 있어서 읽는 내내 주춤거리게 되더군요. 하지만 내용적인 면을 놓고 보았을 때는 리뷰에 적지 못한 방대한 내용들이 많은 질문을 던져주어서 의미있는 책이었습니다.^^

2018-01-09 08:2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01-09 09:52   URL
비밀 댓글입니다.
 
힘 빼기의 기술 - 카피라이터 김하나의 유연한 일상
김하나 지음 / 시공사 / 2017년 7월
평점 :
절판


간절히 바랬다. 제발 어디라도 아프게 해주소서! 남들은 부러워했건만 물을 무서워하는 내게는 한마디로 재앙이던 체육 수업. 이노무 몸은 어찌나 튼튼하던지. 그렇다고 꾀병을 부릴만한 배짱은 없던 중1의 소심한 소원이었다. 재미로 발만 담그는 물장구가 아니라 여기서 저기까지 무려 헤엄쳐가는 실기시험이라니! 망했다고 생각했고 실제로도 망했다. 점수고 나발이고 당최 숨도 쉴 수 없는 공간에서 허우적거린다는 것은 공포 그 자체였다. 당시 느낀 심리적 거리감은 거의 1000m 왕복 수준이었다. 학창 시절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시험 거부를 해봤다. 앞에서 붙들어준다는 절친의 설득으로 1m 가량 허우적거리는 액션으로 끝이 났지만. “힘을 빼!” 그때 지겹도록 들었던 말이다.

다니던 중학교에는 수영장이 있었다. 담쟁이덩굴로 둘러싸인 고풍스러운 건물이지만 럭셔리하지는 않았다. 푸세식 화장실과 걸음을 옮길 때마다 삐걱대는 복도. 수영장과 어울리지 않던 구색의 비밀은 운동부에 있었다. 대부분의 학교마다 있던 운동부 종목이 수영이었던 거다.

힘을 빼는 데에 기술씩이나? 책 제목 참 희한하다. 잠시 곱씹어본다. 아하!  ‘의 차이가 눈에 들어온다. 빠지는 것이 아니라 힘빼는 거로구나. 그게 참 어렵다는 것은 진작 경험했던 일이다. ‘힘을 빼고 물에 나를 내맡긴 채 나아가는 것. 딛고 선 땅이 없어도 두려움을 이기고 나를 믿는 것.(p10)’ 프롤로그에서 오랫동안 풀리지 않던 문제의 답을 발견한다. 내가 끝내 수영을 배우지 못했던 이유는 나를 믿지 못하고 힘을 빼지 못해서였다.

 

뜨거우면서도 시원하고, 바삭거리면서도 부드러운. 책에서 아이스크림 튀김 맛이 났다. 한없이 가벼운가 싶다가도 해양심층수의 느낌이 났고, 웃음 뒤에 뭉클함이 스며들었다. 추운 곳을 여행하는 이야기에서 열정이 뿜어내는 김이 모락모락 났다. 냉탕과 온탕을 왔다 갔다 하는 사이, 마음은 점점 따뜻해지고 말랑말랑해졌다. ‘힘을 줄 수 있는데 힘을 빼버렸기 때문에 생겨나는 매력(p45)’ 인건가. 작가의 문체가 주는 매력에, 삶으로 뛰어드는 과감한 용기에, 주변을 돌아보는 열린 마음에 빠져들었다.

모두에게 좋은 책은 없다. 마찬가지로 모두에게 나쁜 책도 없다. 다만 나와 맞거나 맞지 않는 책이 있을 뿐이라 생각한다. 오랜만에 내 정서 코드와 가까운 책을 만났다. ‘독서는 대화(p57)’ 라는 말에 공감하며 책을 읽는 동안 얼굴조차 모르는 작가와 대화라도 한 듯 친숙함을 느꼈다.

광고를 좋아한다. 정확히 말하면 광고 카피를 좋아한다. 30초의 작은 프레임 안에 메시지를 담아야하는 스피디함과 촌철살인의 전달력이 나를 강하게 끌어당긴다. 하나의 문장으로도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다는 점에서 시가 지닌 매력과도 통한다. ‘세월은 강물을 따라 흐르고 사람은 그리움을 따라 깊어간다.’ 였던가. 커피의 카피였는데 오래전이라 기억이 가물가물하지만, 한동안 이 문구가 머릿속에 맴돌던 기억이 있다. 그래서였을 거다. 카피라이터인 작가의 글에 더욱 호감이 느껴진 것은.

 

Part 1 <가까이에서>는 가족, 친구, 고양이 등 작가 주변의 이야기가, Part 2 <먼 곳에서>는 반년 동안 남미를 여행하면서 겪은 이야기가 담겨있다.

유리창 안에서 밖에 펼쳐진 풍경을 보듯 작가의 일상을 들여다보다가도 자연스럽게 비친 내 모습으로 초점이 옮겨졌다. 나무를 보면서 나를 보고, 하얗게 쌓인 눈을 보면서 나를 바라보았다. 나의 삶과 내가 바라는 삶을 진지하게 생각했다.

여행을 하고 싶은 마음이 강해졌다. 여행지를 소개한 글도 아니고 작가의 경험담일 뿐인데도 그 어떤 여행서보다 더 매혹적이었다. 자연에 대해서도, 여행지에서 만날 사람들에 대해서도 나도 직접 경험하고 싶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작가와는 또 다를, 나에게 전해질 미지의 느낌이 궁금했다.

 

나란 인간의 진짜 크기(p28)’ 라는 말에 꽂혀 며칠 동안은 수업을 들어갈 때마다 이 말을 떠올렸다. 간혹 아이들의 말이 마음의 평정심을 깨뜨리며 훅 들어올 때, 입장이 곤란해질까 봐 소심하게 허락하지 못하는 일이 생길 때마다 생각했다. 마음속으로 이 말을 내뱉으며 적절한 허용 선을 찾았다. 마음이 조금씩 커지는 듯했다.

돌아보면 순간순간 그랬다. ‘인생은 언제나 기회비용과 선택의 문제(p129)’ 였다. 사소한 것으로부터 비중이 큰 것에 이르기까지 하루에도 몇 번씩 선택을 해야 하는 시간이 왔다. 그런 선택의 결과들이 적분처럼 모여 내 삶의 방향을 정했다.

선택의 순간은 대부분 사소한 차이로 결정된다. 4951의 근소함이 부지기수이다. 선택되지 못한 49를 떨쳐내지 못해 헛된 시간을 보냈다고 생각했다. 이 책을 읽고 다시 생각하니 그 시간들이 마냥 쓸데없지만은 않았다. 그 안에 담긴 깨달음이 나를 더 단단하고 선명하게 만들었으니. 어릴 때 큰 삼촌이 붙여주셨던 별명이 흐리멍텅이었는데, 지금은 어느 정도 과감하게 결단도 내리고, 미련을 떨쳐버리는 시간이 짧아졌으니. 갖지 못한 것에 대한 욕심도 부리지 않게 되었다.

 

<어쩌다 어른>에서 김미경 강사는 실패한 경험이 갖는 강력한 에너지를 말한다. 실패는 몇 % 모자란 성공이라고. 실패가 쌓이다보면 결국 바라는 대로 이루어질 수 있다는 것이다. 작가도 역시 그런 경험의 중요성을 언급한다. ‘인간은 자신이 선택한 경험을 통해 가장 많이 배운다.(p32)’ 는 말에 크게 공감했다.

1학년 수업에 들어갔더니 아이들이 회의 시간을 조금만 달라고 했다. 축제날 오전에 이루어질 학급별 부스를 준비하기 위한 협의 시간이 필요하다고. 하고 싶은 것과 할 수 있는 것 사이에서 의견이 분분했다. 적정선이 보였지만 해결점을 찾지 못하고 있었다. 답답한 마음이 들었지만 그대로 지켜보았다. ‘자신이 선택한 경험, 실패한 경험이 필요하다는 말이 떠올라서였다. 아이들은 결국 그들에게 맞는 결론을 내렸다. 한 시간 내내 수업을 하지 못했지만, 의견이 조율되는 시간들이 뭉클했다. 교과서 지식보다 더 값진 경험이 그들에게 쌓이는 과정을 보았기 때문이다.

교사로서, 엄마로서 마음의 테두리를 넓히고 조용히 지켜보는 과정이 새삼 중요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지나온 삶을 반추해보면 나 역시 실패하고 부딪히는 과정에서 배운 점이 많았다. 나의 조급함과 내 삶의 잣대로 실패할 기회를 빼앗으면 안 되는 것이었다.

 

잠시 멈췄다. ‘인간의 몸이란 어떤 감각을 그리워하는구나 싶었습니다.(p230)’ 란 문장 앞에서였다. 나는 어떤 감각을 그리워하는 걸까. 시각, 청각, 후각, 미각, 피부감각. 지금은 인간이 지닌 오감 중 온각이 가장 그립다. 나의 온도와 거의 같은 또 다른 36.5. 열은 온도가 높은 물체에서 낮은 물체로 이동한다. 이론상으로 열이 이동은 거의 없지만 너무 뜨겁지도, 차갑지도 않은 온기가 그립다. , 잠시 감성적인 인간 모드로! 추울 때 쓴 글이 확실히 절절하지만 나란히 잡은 손을 통해 이어지는 온기가 그리울 때도 있다.

따뜻함의 순환이란 말은 생각할수록 좋았다. ‘고마운 마음을 잊지 않고 있다가 도움이 필요한 다른 사람에게 보답하면 되니까. 그렇게 해야 따뜻함의 순환이 생겨나는 것이다.(p39)’ 물질의 순환 뿐 아니라 사람의 마음도 자연의 규칙을 따라가면 아름다운 결이 생긴다. 대가를 바라지 않고 내미는 손길을 생각하니 마음이 폭신해졌다.

 

관점과 태도에 관한 글을 읽으면서 <인간을 읽어내는 과학>에 나오는 뇌의 합리화 과정을 연상했다. ‘사람들에게 다가가는 내 태도가 달라지니까 관점이 변해간다.(p186)’ 는 말에 공감했다. 관점에 따라 태도가 달라지지만 역과정도 성립할 수 있다. 인간이란 자신의 태도를 합리화하려는 경향이 강하므로 태도에 정당성을 부여하기 위해 관점이 변할 수도 있겠다 싶었다.

가장 인상 깊던 문장은 사진을 찍는 것은 구도를 잡는 것이며, 구도를 잡는 것은 뭔가를 배제하는 것이다.(수전 손택, p195)’ 란 문장이다. ‘뭔가를 배제한다는 부분에 확 꽂혔다. 관점과 가치관의 차원에서 이루어지는 행위. 삶에서의 많은 활동들도 마찬가지 아닌가. 그림을 그리거나, 뉴스 기사를 쓰거나, 음악을 만들거나, 글을 쓸 때에도. 불필요한 부분을 세심하게 깎아내야 하는 에까지 생각이 미치자, 한 문장이 담고 있는 깊은 사유에 전율이 일었다.

 

국제우주정거장에서 인간은 무중력 상태로 떠다닐 수 있다. 이때의 무중력은 ‘zero gravity’ 가 아니라 ‘gravity free’ 이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매우 크다. 없는 게 아니라 균형이 맞는 상황인 것이다.

수영장에서 자유롭게 유영하는 겉표지의 그림을 보면서 무중력 상태를 떠올린다. 힘이 없는 것이 아니라 줄 수 있는 힘을 뺌으로써 얻어지는 자유와 그 안에서의 삶을 생각한다.

내가 원하는 삶은 어떤 모습인가. 온전히 자유로운 삶을 살고 싶다. 무리하게 힘주지 않고 자연스러운 모습으로 때론 과감하게 새로운 무언가에 도전하며 나를 넓히고 싶다. ‘나는 아주 디테일한 것까지, 내가 원하는 대로 내 삶을 조직할 수 있다.(p207)’ 는 문장처럼, 상상하는 것만으로 가슴이 탁 트이는 내 삶의 주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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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을 파는 상점 - 제1회 자음과모음 청소년문학상 수상작 자음과모음 청소년문학 15
김선영 지음 / 자음과모음 / 201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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흘러내리게 그릴 수도 있다니. 흘러내린다는 상상을 할 수도 있다니. 시계가 주르륵 흘러내리는 장면은 상상조차 해본 적이 없었다. 살바도르 달리의 <기억의 지속>은 그 어떤 작품을 보았을 때보다 강한 충격으로 다가왔다. 중학교 1학년 과학 <분자 운동과 상태 변화>단원에서 액체의 성질을 설명하면서 교과서 한 구석에 그려져 있던 그림이다. 그림을 제시한 이유는 흐를 수 있다는 단순한 사실을 보여주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졸다가 번쩍 눈을 뜬 순간처럼 얼떨떨한 기분이 오랜 여운으로 남았다. 일 분 일 초가 철저하게 지켜지는 크로노스의 시간은 한 예술가에 의해서도 깨뜨려질 수 있었다. 그것은 용기이며 고정 관념을 향한 과감한 도전이었다. 카이로스의 시간은 크로노스의 시간과 대비되는 개념이다. 달리의 상상력은 바로 이 카이로스의 시간을 담고 있었다.

 

카이로스의 시간이 가지는 의미를 가슴 찡하고 따뜻하게 그린 소설을 만났다. 소설 속 이야기를 따라가면서 <기억의 지속>을 떠올렸다. 그림 속으로 빨려들어가 시계 아래에 묘사된 눈을 감고 있는 인간이 된 듯했다. 여기저기 널브러진 시계 안에는 내 주변에 있는 사람들과의 시간이 담겨있었다. 그들과의 시간을 천천히 음미했다. 왜 이제야 이 소설을 만났을까 싶다가도 이제라도 만나서 얼마나 다행이냐며 배시시 웃었다. 바싹 마른 식물의 뿌리가 물기를 흠뻑 빨아들이듯이 작가가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내안으로 끌고 들어왔다.

추리 기법을 사용해서일까. 처음 얼마간은 나미야 잡화점의 기적을 떠올렸다. 나미야 잡화점의 기적에 등장하는 각각의 에피소드처럼 피카레스크식 구성으로 전개되리라 예측했다. 그런데 미묘하게 달랐다. 이 소설 속 이야기들은 모두 시간이라는 하나의 주제를 향했다. 옴니버스 식의 구성도 담겨있었다. 모든 이야기에는 시간이 배경 음악처럼 흘렀다. 그 속에서 전개되는 이야기들은 캐논 변주곡처럼 다양한 리듬을 타며 조금씩 변주되었다. 겹겹이 스며든 시간들은 마지막 장을 덮는 순간 우르르 끓어 넘쳐 시야를 뿌옇게 만들었다.

나미야 잡화점의 기적에서처럼 시간을 왔다 갔다 하는 판타지적인 요소가 없어도 이야기는 충분히 흥미로웠다. 요즘은 책을 읽다 며칠 간격을 두고 다시 펼쳐보면 읽었던 내용에 대한 기억이 가물가물해서 도돌이표를 찍곤 한다. 이 책은 그럴 필요가 없었다. 다음에 전개될 이야기가 도무지 상상이 안 되었다. 어느 부분에서 읽던 호흡을 멈추었는지 금세 기억이 났다. 주인공 온조가 어떻게 이야기를 풀어나갈까 궁금한 까닭에 이틀 만에 다 읽어버렸다.

따라잡느라 허둥대는 것보다 내 식대로 내 시간대로 사는 게 낫다는 생각이 들었어.(p59)’ 내 시간이라는 말. 얼마나 뭉클한 말인가. 시간이 내 것이라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다. 40대 후반으로 달려온 많은 시간동안 나는 자주 숨이 찼고 늘 헉헉대며 하루를 마무리했다. 올해가 되어서야 겨우 내 걸음으로 시간을 걸어가는 기분을 느낄 수 있었다. 출근하는 순간 퇴근하고 싶어지게 만드는 시간, 퇴근 후 따뜻한 아메리카노를 앞에 두고 책을 읽고 글을 쓰는 시간이다. 사람들은 나로부터 서로를 방해하지 않을 만큼 적당한 간격으로 앉아 듬성듬성 그들의 시간을 보내고 있다. 이어폰에서는 좋아하는 음악이 흘러나와 목도리처럼 뒤통수를 감싼다. 온전한 내 시간, 스스로에게 주는 뭉클한 행복이다.

기계 대신에 사람이 들어오고 사람이 가지고 있는 미덕들이 살아나. 시간이 나를 위해 움직인다고 해야 하나? 시간이 나를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내 뒤로 물러나 있는 듯한 느낌 같은 거야.(p65)’ 휴대폰도 연락처도 없는 강토 할아버지가 하신 말씀이다. 친정 엄마 생각이 났다. 엄마는 휴대폰이 없다. 괜히 구속받는 것 같다 시며 일부러 마련하지 않으신다. 여행이라도 다녀오실 때면 정작 당신은 태연하고 여유 있는데 주변에서 조바심을 낸다. 내가 가장 존경하는 인물, 채 여사의 시간은 분명 당신을 위해서 움직이는 듯하다.

나를 둘러싸고 있는 관계들이 과속방지턱처럼 불쑥 불쑥 튀어나왔다. 책을 읽다 잠시 덮고 그들과의 관계 속에서 흐르던 시간을 생각했다. 시간은 마냥 앞으로만 흐르는 것이라 생각했다. 한순간도 같은 강물이 흐르지 않듯이 흘러가면 그만이라고. 하지만 과거에 울컥했던 시간들은 그대로 떠내려가지 않았다. 마음이 약해질 때 번번이 되살아나 현재의 시간들을 아프게 했다. 어느 순간은 아무렇지 않다가도 다른 순간이 오면 바늘처럼 쿡쿡 나를 찔렀다. 그런 시간들이 다가오는 이유를 스스로를 향해 논리적으로 설명하기 어려웠다. 이 책을 읽고 나서 답을 찾았다. 이전보다 확장된 개념으로 시간을 바라보니 실타래처럼 얽혀있던 관계의 시간들을 내 방식대로 차분하게 정리할 수 있었다.

 

모든 관계는 일대일이다. 여러 명과 서로서로 알고 있는 관계라 해도 거미줄처럼 방사상의 구조를 가질지언정 정작 나와 연결된 각각의 선들은 한 줄씩이다. 나와 사람들 사이에 존재하는 다양한 시간들을 생각했다. 관계에는 각기 다른 시계가 존재하는 걸까. 달리의 그림에 등장하는 상황처럼 각각의 시계들은 과거의 어느 시점에 멈춰있거나 현재와 같은 속도로 바늘을 움직이는 시계도 있는 걸까. 상대와 다른 시간을 바라보며 관계를 맺고 있다면, 현재 내 위치로부터의 간극이 멀다면 쓰라리거나 아득한 마음이 들 터이다.

친정 엄마를 생각하면 종종 마음이 아리다. 정작 당신을 만나면 즐거움이 넘치는데 돌아오면 마음 한 구석이 먹먹하다. 당신을 바라보는 나의 시계는 가난하고 힘겨웠던 시절에 멈춰있는 걸까. 당신을 향한 생각의 출발점이 과거의 그 시각이라서 자주 마음이 아픈 것일지도 모르겠다.

큰 아이를 보아도 마음이 아프다. 그 아이를 바라보는 시계는 방황으로 인해 아이를 내팽개쳤던 20대 후반과 30대에 머물러있다. 그래서 더 많이 웃기려고 노력한다. 웃기는 능력은 근육과도 같다. 노력을 하면 업그레이드된다. 운동을 계속 할수록 복근이 생기듯이 응장군(큰 아이 애칭)을 향한 나의 운동은 계속될 것이다.

둘째 아이는 더 어린 모습에서 멈춰있다. 아이들이 6살 터울이니 아마도 비슷한 시기일 것이다. 마우스 반만 한 손가락을 꼬물거려 하늘을 가리키며 군늠, 군늠하던 모습에 눈물이 핑 돌던 마음이 생각난다. 얼마 전 내 키보다 더 자란 아이에게 이 이야기를 했다. “삐까(둘째 아이 애칭)만 보면 옛날에 군늠 군늠 하며 구름보고 좋아라 하던 생각이 나염.” 말하며 팔짱을 끼고 엉겨 붙으면 몸을 피하며 쉬크하게 말을 내뱉는다. “~ 지금도 군늠 군늠하면 정신 지체임.” 이런 무드라고는 찾아볼 수 없이 메마른 17세 청소년 같으니라고!

남편을 바라보는 나의 시계는 행복했던 20대에 멈춰있다. 그 온도차로 인해 가장 아득한 시간이다. 마음 가장 깊숙한 곳에 자리 잡은 무거운 시계. 이 시계가 조금씩 다시 움직일 언젠가가 온다면 그 시간들에 담긴 이야기를 꺼낼 수 있을까.

인간의 본능 중 행복한 행위를 함께 하고 싶은 욕구, 그게 바로 카이로스의 시간을 나누는 것이 아닐까? 그 시간이 하나의 의미로 남는 것.(p66~67)’ 극소수이기는 하지만 과거로부터 현재까지 내게 일어난 사건들을 공유하는 관계들이 있다. 몇 달 만에 연락해도 어제 전화하다 만 이야기를 이어가듯이 부담이 없는. 가끔 생각한다, 나는 인복이 많은 사람이라고. 그들과 즐겁게 밥을 먹는 시간들이 카이로스의 시간이겠지.

 

관계의 시계들은 제각기 움직인다. 나를 중심으로 서로 다른 시간들을 공유하며 흘러간다. 수많은 시계들이 머릿속에서 마그리트의 <골콩드>처럼 떠다닌다. 부유하는 존재는 어디로 흘러갈지 짐작하기 어렵다. ‘시간은 지금을 어디로 데려갈지 모른다. 분명한 것은 지금의 이 순간을 또 다른 어딘가로 안내해준다는 것이다. 스스로가 그 시간을 놓지 않는다면.(p219)’ 마지막 문장을 읽는 순간 이제껏 멈춰있던 모든 시계들이 째깍째깍 움직이는 듯 했다. 그 시간들을 놓치고 싶지 않다. 내 기억이 지속되는 한 그 시간들을 놓지 않으련다. 고요한 침묵 속에서 느리게 움직이는 시계들이 묵직하고 의미 있게 다가온 시간들이었다. ‘우리가 맞이하는 시간이 늘 처음인 것처럼.(p220)’ 내게 다가온 관계들이 물컹하고 따뜻하게 나를 어루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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