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유의 힘
장석주 지음 / 다산책방 / 201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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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두둑 뚜둑! 기지개 한 번에 관절이 존재를 알린다. 크게 펼친 두 팔. 손가락 끝에 닿는 바람의 감촉이 새삼스럽다. 쭉 늘어난 몸에 생긴 느슨한 틈으로 기분 좋은 바람이 스민다.

 

매일 뭔가를 쓰기 시작한지 이십일 째다. 독후감을 한 편씩 쓰는 게 이상적인 그림이지만, 책 읽는 속도가 워낙 느리기 때문에 불가능의 영역임을 안다. 서두르지 않기로 했다. 독후감은 나의 속도로 쓰고, 책을 읽는 중이면 주로 시를 쓰기로 했다. 날마다 하는 생각의 기록, 일종의 시 일기랄까. 초라한 작품들이 난무했지만 무모한 도전은 그런대로 이어지는 중이다. 감히 작..이라 명명하는 이유는 이러한 시행착오의 바탕 위에 우뚝 설 위대한 작품이 언젠가는 탄생할 것이기 때문이라며 마인드컨트롤을 한다.

 

시적인 나날이 계속되는 가운데 이 책을 만났다. <은유의 힘>은 은유에 대한 임금님 수라상이다. 외국 시부터 우리나라 시에 이르기까지 상다리 부러지도록 다양하고 고급 진 은유가 그득하다. 책을 읽어가면서 시를 짓다보니 나의 시가 점점 업그레이드되는 듯 착각이 일었다.

실전으로 적용해볼만한 팁도 발견했다. ‘대상과 은유 사이가 벌어질수록 은유의 효과는 커진다.(p31)’ 좀 더 멀리, 더 멀리. 이 문장을 읽은 후로 나의 시에 반영하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식상한 표현은 저리 가라! 새로운 시도를 찾아야 해. 나만 표현할 수 있는 팔딱거리는 횟감이기를. 마음을 조금씩 스트레칭 했다.

 

시인이 할 일은 이름이 없는 것의 이름을 부르고, (중략) 이를 세상에 표현하는 것이다.’(p5, 살만 루슈디) 이름 없는 것의 이름을 부른다는 문장이 마음 깊이 자리 잡았다. 버스, 아파트, 우산, 목백합, 꽃병, 어머님, 아이들, 친구. 사물로부터 사람에 이르기까지 이들과의 관계에 이름을 붙이고 문장으로 나타냈다. 폐지 할아버지, 청소 아주머니, 경비 아저씨, 노점상 할머니. 존재에 걸 맞는 이름을 붙이고 싶은 대상들이 새털구름이 되어 마음속에 둥둥 떠다닌다.

좋은 시란 어떻게 태어나야 하는지 답을 얻었다. ‘시는 머리가 아니라 몸에서 꺼내는 것이다.(p18)’, ‘은유는 대상의 삼킴이다.(p31)’ 나를 둘러싼 다양한 몸짓들이 순간적으로 들어와 마음속에서 버무려졌다. 때론 선명하게, 때론 뭉글하게, 뾰족하거나 포근한 향기를 내며.

 

시로 표현하는 대상이 내안에서 새롭게 탈바꿈되어 나온다면, 나의 시들은 누군가에게 눈물이기를 바랐다. 울고 싶어도 맘껏 울지 못하는 이에게는 펑펑 흘러내리는 눈물로, 가슴이 벅차오르는 이에게는 맑게 솟아오르는 눈물로, 홀로 감싸는 두 팔이 유일한 위안인 이에게는 가만가만 떨어지는 눈물로 다가갔으면 좋겠다고. ‘당장 목마른 사람에게 바다를 줄 필요는 없다. 그에겐 차가운 물 한 잔이면 족하다.(p172, 울라브 하우게)' 생명을 생생하게 되살리는 물은 아니더라도 대신 흘려주는 눈물 한 방울로 작은 토닥임이 될 수 있기를 바랐다.

 

이 책이 마냥 좋지는 않았다. 두 가지가 불편했다.

첫째, 시도 은유, 해설도 은유. 기발한 은유는 철철 넘치는데, 저자가 시인이다 보니 소개하는 시들에 대한 해설까지 온통 은유라서 꾸역꾸역 소화하려다 배탈이 날 지경이었다. 산책하는 마음으로 길을 나선 내 눈은 몇 번씩 왕복달리기를 하며 헉헉 댔다.

둘째, 노벨문학상의 후보로 자주 거론되었던 노시인에 대한 존경이 담긴 문장들이었다. 20177월에 출간된 책이니 사회적 이슈가 되었던 사건 발생 전이다. ‘삶과 시가 각각의 길로 따라 가지 않고 동일한 궤도에서 움직인다는 사실을 입증해낸다.(p269)’는 문장으로 설명된 존재와의 괴리감을 느꼈다. 삶과 일치하는 글에 대해 다시 한 번 진지하게 생각했다.

 

아직은 뱁새라서 종종 가랑이가 찢어지거나 우두둑 굳은 뼈 벌어지는 소리도 자주 들었다. 너무 거리가 벌어져서 당최 무슨 풍경을 묘사한 건지 알기 어려운 미스터리 시도 가득했다. 하지만 스트레칭을 자꾸 하다 보니 마음이 한결 유연해졌다. 벌어진 마음의 틈으로 기분 좋은 바람이 스며들었다. 은유의 힘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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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두 발자국 - 생각의 모험으로 지성의 숲으로 지도 밖의 세계로 이끄는 열두 번의 강의
정재승 지음 / 어크로스 / 201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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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시간 지났다. 마음에 와 닿는 문장이 잔뜩 적힌 열 두 장의 종이는 달력인 양 펼쳐져있다. 이 모든 문장들을 앵무새처럼 나열할 수는 없고, 화룡점정이랍시고 엄청 좋았다, !’이라 쓰기에는 심히 허무하다.

굉장히 멀리 떨어져 있는 것을 서로 연결하는 능력, 이것이 실제로 창의적인 사람의 뇌에서 공통적으로 보이는 현상(p201)’이라는데, 조각천만 잔뜩 가져다놓고 꿰맬 바늘조차 찔러 넣지 못하고 있으니. ‘천장의 높이가 높을 때 정말로 창의적인 아이디어가 많이 나온다.(p217)’길래, 2.4미터 아파트보다 훨씬 천장이 높은 커피숍에 앉아있단 말이다. ‘하루 중에 뇌의 인지적 에너지가 충만할 때를 판단해서 가장 창조적인 일을 그때 해야 한다.(p378)’길래, 잠도 충분히 자고 아침밥도 배부르게 먹고 나와 이 절묘한 시간을 선택했다. ‘두세 가지 과제를 동시에 수행하면서 다른 과제를 하다가 다시 돌아올 때 좋은 아이디어가 떠오르기도 한다.(p334)’길래, 잠시 시도 쓰고 돌아왔건만.

여전히 노트북 화면은 태풍의 눈처럼 고요한데 주변에 있는 나의 뇌는 오른쪽 반원에 들어가 있다. 이 생각 저 생각들이 뒤엉켜 소용돌이친다.

 

이런 결정 장애 같으니라고. 뭐라도 써, 쓰란 말이야! 뇌에서는 계속 명령을 쏟아내는데 당최 아름답게 정리되지 않는다. 어릴 때 흐리멍텅이라는 별명으로 불린 적이 있다. 자라면서도 여전히 우유부단하다 독서의 세계에 뛰어들면서 어느 순간 말끔하게 치유가 되었건만. 예전의 흑역사가 슬금슬금 떠오른다. ‘오늘 죽는다고 생각하면 그 어떤 상황도 그보다 비극적이진 않기 때문에, 두려움 없이 의사결정을 할 수 있다.(p93)’는데, 막상 죽는다 생각하면 적어도 리뷰를 쓰다 생을 마감할 수는 없으니. 에잇, 이건 아니구나. ‘메멘토 모리(죽음을 기억하라)’는 잠시 접어둔다.

공급된 에너지의 23%나 쓰인다는 뇌를 뭐라고 쓸까 고민하느라 써서 그런지 몇 시간 지나니까 배만 다시 고프다. ‘결핍이 욕망을 만든다.(p81)’더니 당 결핍으로 뭐라도 먹고 싶다는 욕망만 생긴다. 머릿속은 이미 빵 이미지로 빵빵하다.

태풍이 지나 간 듯 적나라하게 생생하던 마음을 사진처럼 보여줄 수는 없을까. 언젠가는 생각을 이미지화시킬 수 있다던데. ! 지금은 아냐. 잠시 산책하다 1차적인 식욕부터 해결하고 다시 뇌 속을 탐험해야겠다.

 

12시만 되면 호박마차로 전력 질주하는 신데렐라. ‘오늘이 되었음을 확인하면 나는 재작년 다이어리를 후다닥 펼친다. 한구석에 적어놓은, 지금은 없어진 Daum오늘의 운세를 확인하기 위해서다. 140개 매뉴얼의 물레방아 돌리기라는 것은 너무도 잘 알고 있지만, ‘불과 관련된 것에 행운이 따릅니다.’라면 신호등도 불이라며 애정 어린 시선으로 보고, 오늘처럼 친구, 동료들과의 교제에서 해를 볼 우려가 있으니 인간관계에 주의하세요.’라면 카카오 톡 한 건을 보내는 데에도 손을 사리게 된다.

<여섯 번째 발자국, 우리는 왜 미신에 빠져드는가>에서 정재승 교수는 이에 대한 답을 명쾌하게 내린다. 그것은 통제할 수 없는 미래에 대한 불안(p168)’ 때문이라고. 미신에 대한 글을 읽으면서 찔리는 한편 안도했다. 나만 그런 건 아니었구나. 소소한 행운이 생기면 으흠, 그럴 줄 알았어.’라며 미리 알고 있던 점쟁이가 되고, 운이 없다는 문장을 맞는 날이면 종일 신경이 쓰인다. ‘행복은 예측할 수 없을 때 더 크게 다가오고, 불행은 예측할 수 없을 때 감당할 만하다.(p179)’는 문장에 고개를 끄덕인다. 행복도 불행도 예측할 수 없을 때 맞이하는 것이 더욱 효과적이라는 것이다.

공감을 했으면 이제는 과감하게 오늘의 운세를 끊어야 하는데, 이게 은근히 중독성이 있어서 탈이다. 미리 확보한 140일치의 운세를 저금이라도 해놓은 듯 뿌듯해하고, 내일은 평소 원하던 사람이나 연인을 만나게 되는 운이라니 벌써부터 설렘에 입술이 실룩거리는 나는 과학교사다, .

 

과학교사로서 가끔 아이들에게 미래사회의 전망을 말하면서 답답했다. 어렴풋이 감은 오지만 어떤 말을 해주어야 아이들의 진로 탐색에 도움이 될까 늘 고민되었다. <여덟 번째 발자국, 인공지능 시대, 인간 지성의 미래는?>을 읽으니 속이 후련하다. 아직 오지 않은 미래는 여전히 불안하지만 어떤 마음가짐으로 다가올 시간들을 맞이해야 하는가를 얘기해줄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인공지능에 대한 과학 시사뉴스를 소개해주고 의견을 발표시키면, 절반 이상의 아이들이 일자리 감소에 대한 우려를 표한다. 그들의 발표를 듣다보면, ! 그래서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나요? 라는 무언의 외침을 듣는 것 같았다. ‘데이터를 처리하고 분석하는 역할은 인공지능에게 넘겨주고, 우리는 데이터 자체를 검토하거나 결과를 해석하는 고등한 능력을 발휘해야 합니다.(p240)’ 교육과정이나 현실의 제도를 생각하면 여전히 마음은 무겁지만, 이런 답이나마 제시해주면 조금이라도 낫지 않을까.

 

<아홉 번째 발자국, 4차 산업 혁명 시대, 미래의 기회는 어디에 있는가>를 통해 제4차 산업혁명의 정의를 명확하게 이해했다. ‘4차 산업혁명을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사물인터넷을 통해 아톰 세계를 고스란히 비트화해서 비트 세계와 일치시키면 이 빅데이터를 클라우드 시스템 안에 저장해서 인공지능으로 분석해 아톰 세계에 맞춤형 예측 서비스를 제공해줄 수 있는 산업으로의 전환을 말합니다.(p251)’

출연하신 TV프로그램이나 책을 볼 때마다 느끼는 점이지만 참 깔끔하고 스마트한 설명이다. ‘정말 중요한 건 그걸 이용해서 실질적으로 사람들에게 어떤 가치를 만들어낼 것이냐(p261)’하는 것이고, ‘결국 우리가 고민해야 할 것은 일자리의 지형도가 아니라 업무의 지형도(p270)’라는 것. ‘디지털은 뇌만 자극하지만, 아날로그는 몸도 자극(p278)’하므로 파격적으로 바뀔 시대에 살아갈 우리들은 뇌와 몸의 균형을 향한 갈구(p278)’를 잊지 말아야 함을 강조한다.

 

매년 1231일과 11일에 올해의 반성과 내년의 계획을 세운다. <다섯 번째 발자국, 우리 뇌도 새로고침할 수 있을까>에서는 새해결심을 계획대로 이룬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를 설명한다. 올해 계획한 일이 얼마나 무모한 것이었는지 점점 깨닫게 되는 요즘, 타들어가는 한여름에 소나기를 만난 듯 했다. 계획이 너무 많았다. 내년에는 개수를 대폭 줄여야겠다. 계획을 어떤 식으로 세워야할지 감을 잡았다.

새로운 삶을 위해 취해야 할 태도에 대한 작가의 생각에 공감한다. ‘절박함새로운 환경이 포인트이다. ‘메멘토 모리는 나도 가끔 이용하던 마인드컨트롤이라 반가웠다. 주문을 외듯 몇 번 자기 암시를 하면 못할 게 뭐 있냐는 용기가 생긴다. 새로운 환경은 몇 년 전부터 시도하는 방법이다. 평소 가지 않던 길, 쓰지 않던 방법, 보지 않던 공연, 접하지 않던 책, 만나지 않던 사람 등 스스로에게 신선한 선물을 준다는 기분으로 도전한다. 분위기를 일부러 전환시키면 그 효과가 글에 묻어나온다. 놀랍도록 문장이 풍성해질 때가 많다.

 

안하면 나중에 후회하는, 특히 평생에 거쳐 반드시 해야 하는 것들이 바로 독서, 여행, 사람들과의 지적 대화입니다.(p219)’라는 문장을 마음에 새긴다. 독서는 꾸준히 해오고 있으니 계속 하면 될 것이고, 내년에는 여행을 중점적인 화두로 삼기로 한다. 사람들과의 지적 대화는 알라딘 서재를 이용할 계획이다. 지금까지는 주로 시나 리뷰쓰기로 나의 서재에 집중했는데, 이제부터는 다른 이들의 리뷰나 페이퍼도 많이 읽고 댓글도 열심히 달아야겠다. 글을 읽으면 어떤 식으로든 댓글로 나의 생각을 표현하려고 노력하는 편이다. 알라딘 서재의 주인들은 댓글에 대한 답글을 성의껏 달아주므로 읽다보면 그들과 대화하는 느낌을 받을 때가 있다. 나보다 책을 훨씬 많이 읽으며, 글도 잘 쓰고, 지적인 이들이므로 배울 점이 많기 때문에 아주 즐거운 소통이 된다.

 

일요일 밤 불을 끄고 누울 때 종종 생각한다. ‘학교가기 싫다.’ 마침 안방에 들어온 딸에게 삐까! 학교 가기 띠러염.”해본다. “, 열시까지 야자, 주말마다 학원 두 탕!” 누구 앞에서 투정이냐는 듯 시크하게 돌아오는 고2의 답변이다. ‘지금 이게 싫으니까 그만두는 건 좋은 선택이 아닙니다.(p45)’ 마음을 꿰뚫어보기라도 하듯 작가가 조언한다. 열심히만 한다면 당장 그만 두고 글 쓰고 책만 읽으면서 먹고 살 수 있을 지도 모르잖아. 마음이 다시 속삭인다. ‘섣불리 창업하지 않고 위험을 잘 관리하는 성향의 사람들이 결국 창업에도 성공한다는 겁니다.(p319)’, ‘모호한 상황에서는 쉽게 의사결정을 하지 않는다.(p322)’는 냉철한 답이 쏟아진다. 머쓱해진다. , 안다. 지금 그만두고 글만 쓰면 그지 꼴을 못 면한다는 사실을.

그래도 걸출한 성취가 인생에서 40대 이후에 더 많이 나타난다.(p324)’고 했으니, 아직 희망은 있다. 많은 위안이 된 문장이다. 올해 50세가 되면서 너무 많이 늦은 것은 아닐까 내심 왜소해지는 마음이 커지던 터였다.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되 실패하지 않기 위한 준비에 철저한 사람(p349)’이 되기 위해, 지난 91일부터는 뭐든 계속 쓰면서 기회를 엿보기로 했다. 글만 쓰며 살 수 있는 삶을 위하여! 아자!!

 

완전히 혼자 있는 시간, 누군가에게 방해받지 않는 시간(p384)’이다. 글을 쓰는 데 자주 영감을 주는 음악만 귀를 통해 마음으로 흘러들고 있다. 행복하다. 해야 할 업무를 잠시 치우고 글을 쓰는 이 시간이 즐겁다. ‘창의적인 사람들의 특징 중 하나가 일을 잘 미룬다.(p344)’는 말에 기대어 잠시 창의적인 인간으로 빙의하여 과감하게 미뤄본다. ‘마감효과의 효능은 학창시절부터 벼락공부로 단련해온 경험으로 이미 알고 있기에. ‘나는 무엇에서 즐거움을 얻는 사람인가? 라는 질문은 내가 무엇을 지향하는 사람인지를 알려줍니다. 나는 무슨 일을 하며 살아야 할까 라는 질문에 대답하려면, 내 즐거움의 원천인 놀이 시간을 들여다보아야 합니다.(p124)’ 작가의 말에서 답을 얻는다. ‘독서가 쾌락이 되어야 평생 책을 읽는 어른으로 성장(p102)’한다던데 나의 경우에는 글을 쓰는 일이 위 모든 조건들을 아우른다. 글을 쓰고 나면 운동하고 땀을 쫙 뺀 것처럼 온몸이 나른해지고 피로감이 몰려오지만, 마무리한 후에 느껴지는 짜릿한 전율이 있다. 그 느낌은 예전에 미친 듯이 했던 테트리스처럼 중독성이 있어서 매번 힘들어도 노트북을 두드리게 한다.

 

한 번 더. ! 아니, 한 번 더. 한 번 더? ! 아니, 그게 아니라 그림을 한 번 더 보여 달라는 말이었는데쩜쩜쩜. 드라마 <서른이지만 열일곱입니다>의 주인공들이 드디어 뽀뽀를 했다. 여주인공의 말을 착각한 남주인공은 무척 고맙게도 내리 세 번 뽀뽀를 한다. 맥락이 없지는 않다. 그의 뇌 속은 방금 한 뽀뽀 생각으로 온통 가득할 거라서 어떤 말이든 이와 연관되어 받아들여질 것이니.

요즘 나의 관심사는 글을 쓰며 살아가는 삶이다. 뇌 속에는 온통 그 생각뿐이라서 책을 읽는 족족 글 쓰는 삶과 연결을 짓고, 글쓰기와 관련된 문장만 눈에 쏘옥 들어온다. 글쓰기와 관련된 문장이 아니라도 글쓰기 관련 문장으로 해석되는 기현상이 벌어진다. 지극히 개인적인 시각에서 바라본 독후감에 대한 변명이다. 책의 내용을 통찰하는 균형 잡힌 시각 따위는 없다. 혹시라도 내 글을 읽고 책을 접하는 누군가가 있다면 아마 깜짝 놀랄 것이다. 이 문장이 이 맥락에서 쓰인 거였어? 이 책 읽고 독후감 쓴 거 맞아? 하면서.

 

과학자가 쓴 책이 나의 성향과 잘 맞을 때 작가에 대한 호감도가 급상승한다. 탐구의 기본은 가설 검증을 위한 근거 제시인데, 과학자는 글에 신뢰감을 줄 수 있는 방법으로 주로 다양한 실험 데이터를 제시한다. 숫자가 포함된 적절한 예는 내용을 쉽게 이해하도록 돕는다. 뇌과학이 흥미로운 분야로 다가왔다. 복잡계 물리학의 세계에서 통용되는 특수한 언어들을 과시하듯 나열하지 않은 점이 마음에 들었다. 그의 문장은 쉬웠다. 일반인들에게 쉬운 문장을 구사한다는 것은 해당 분야에 대한 깊이 있는 이해가 바탕이 되어야 가능하다. 초등학생들에게도 상대성 이론을 이해시킬 수 있는 강사가 명강사라 생각한다. 그가 그랬다. 창의성의 고수임을 드러내주는 유머는 적절한 포인트에서 방향제처럼 칙칙 뿌려져 분위기를 매끄럽게 했다. <인간이라는 경이로운 미지의 숲을 탐구하면서 과학자들이 내딛는 열두 발자국>(p11)을 따라가면서 뇌과학의 관점에서 바라본 인간의 존재를 생각했다. 리더에게, 교사에게, 엄마에게 의미 있는 문장들의 숲을 만났다. 삶을 돌아보고, 나를 바라보고, 미래를 상상했다.

 

어쨌든 1차적인 목표는 달성했다. 마음에 특히 들어온 문장들, 추리고 추려낸 문장들을 어떤 식으로든 모조리 담아냈으니. 책의 내용을 그나마 짐작하려면 작은따옴표로 인용된 문장만 독립적으로 읽은 다음 천천히 음미하시라 권한다. 한 가지 팁을 더하자면, 이 문장들은 책이 담고 있는 얘깃거리에 비한다면 바나나 표면에 있는 갈색 점 두어 개일 뿐이라는 거다. 작가는 세상에 대한 지도는 여러분 스스로 그려야 합니다.(p59)’라 했다. 이 책으로 인해 나는 나만이 걸어갈 수 있는 오솔길을 그렸다. 직접 펼쳐보든 요약된 다른 글로 짐작하든 책에 대한 느낌의 지도는 당신이 직접 그려야 할 것이다. 당신만의 오솔길, 궁금하지 않은가?

 

 

p267, 밑에서 8째줄 : 겁입니다. 겁니다. 또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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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9-08 08:50   URL
비밀 댓글입니다.

나비종 2018-09-08 20:23   좋아요 0 | URL
견해를 펼치는 분야가 자리하는 시점의 한계라고 생각해요.
뇌과학은 실험 데이터를 근거로 과거와 현재의 뇌를 분석하는 분야이기 때문에, 데이터의 신뢰성이나 양과는 별개로 어쨌든 견해를 뒷받침하는 근거가 있는 거죠. 미래에 우리의 뇌가 어떻게 될지를 말하는 것이 아니니까요.
비트코인은 뒷받침할 수 있는 근거도 없고 미래에 거래될 화폐로 적절하냐 부적절하냐를 판단하는 것이라 아직 오지 않는 미래를 예측하기에는 한계가 있었던 것이겠죠.

JTBC의 토론은 찬반 토론이 아니라 다양한 전문가들의 견해를 듣는 것으로 그쳤으면 좋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경제학자, 컴퓨터공학자, 뇌과학자, 거래에 몸 좀 담가본 사람들로요. 비트코인이든, 블럭체인이든 관련 지식을 얼마나 많이 보유하고 있느냐를 떠나서 다양한 견해들을 제시하는 거죠.
현재 경제를 기점으로 화폐로서의 활용 가치를 말한다면 부정적인 결론이 나올 수 밖에 없었을 것 같아요. 도입기에서의 과도기적인 혼란의 시기이니까요.

이 책 <10장, 혁명은 어떻게 시작되는가>에서도 이런 내용이 나와요. 혁명은 테크이상주의자와 실천가와 많은 사람들의 동참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라구요.
비트코인을 O,X로 말하기는 어렵다고 생각해요. 저의 극히 개인적인 견해는 이상주의자와 가깝습니다. 컴맹이고 기계치이고 인터넷뱅킹을 한 지도 불과 몇 년 안되었지만, 그래서 이런 용어들이 참 두렵고 무섭지만, 그래도 언젠가는 이쪽으로 흐르게 되지않을까요? 다만 시기의 문제라는 생각이 듭니다. 지금 생각으로 저는 절대로 안할 거지만요.^^;;
 
뽑기의 달인 좋은책어린이 고학년문고 2
윤해연 지음, 안병현 그림 / 좋은책어린이 / 201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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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재감이 없던 봄맞이꽃이 렌즈 시야에 담긴 것은 우연이었다. 다른 꽃을 찍으려고 카메라를 들이밀었는데 초점이 맞지 않아 흐릿하게 찍혀버렸다. 배경이라 생각했던 주변이 선명하게 찍힌 것이다. 자세히 들여다보니 사진 중간에 하얀 색 점들이 있는 거다. 뭘까? 가까이 가서 직접 들여다보았다. 말끔하게 생긴 다섯 장의 하얀 꽃잎. 작은 꽃들이었다. 다시 초점을 맞췄다. 사진을 보고 반해버렸다. 그때부터 나는 봄맞이꽃과 함께 봄을 맞았다.

디지털카메라를 처음으로 구입했을 때, 퇴근만 하면 카메라를 들고 동네를 배회했다. 동네에 피는 야생화를 폭발적으로 많이 알게 된 시기였다. 봄꽃은 개나리, 진달래, 목련, 영산홍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야생화는 산 속에서만 볼 수 있는 식물도 아니었다. 가까이 가서 무릎을 굽히고 초점을 맞추면 언제든 볼 수 있는 대상이었다. 디지털카메라 관련 초보 입문서를 읽고 나서야아웃포커싱이라는 촬영 기법을 얼떨결에 사용했다는 것을 알았다.

 

여섯 편의 이야기를 읽으면서 아웃포커싱을 떠올렸다. 봄 언저리에서 배경으로만 자리했던 야생화들이 초점을 맞추는 순간 렌즈 안으로 들어와 주인공이 되었던 것처럼 누구나 주인공이고 누구나 주인공이 아니기도(p127)’한 동화들이었다. 작가의 말대로 이 책에는 주인공이 한 명만 있지 않았다. <엉뚱한 발레리나>에서는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윤아와 엉뚱한 발레리나 수지가, <뽑기의 달인>에서는 뽑기의 달인이 된 영찬과 짝꿍 수호가, <화해하기 일 분 전>에서는 주인공과 동생 은지가, <빵빵 터지는 봉만이>에서는 빵빵 터지게 된 봉만이와 늘 화가 나있던 찬수가, <비밀 편지>에서는 진구 오빠와 주인공이, <나중에 할게>에서는 아람이와 민구가. 뮤지컬의 더블캐스팅처럼 번갈아가며 막상막하의 존재감을 나타냈다. ‘세상의 주인공은 정해져 있지 않다.’(p127)는 작가의 말은 삶에 적용되었을 때 더욱 적절했다. 실수하고 질투하고 실망하고 미워했지만 서툰 손짓을 하는 아이들은 점점 주인공으로 선명해져갔다. ‘분명한 건 여기에 나온 친구들 모두 조금씩 자라고 있다는 거야.(p128)’ 이들을 주인공으로 성장시키는 것은 함께 걸어가 주는 친구들과 상대방에게 먼저 다가가는 맑은 용기였다.

 

그저 있었을 뿐인 동매가 드라마 <미스터 션샤인>에서 나만의 주인공으로 등극하는 데는 1초도 걸리지 않았다. 핵심은 대상을 향하는 초점인 거다. 수학에서의 여집합도 상황에 따라 달라진다. 벤다이어그램으로 표시된 부분의 안이 되기도 하고 밖이 되기도 한다. 수묵화에서 먹으로 그려진 대상 못지않은 매력을 지니는 것은 여백이다. 백색의 공간에 시선을 두면 뿜어져 나오는 아름다움에 사로잡힐 수도 있다.

봄맞이꽃을 알게 된 후로 작은 꽃들이 점점 많이 눈이 띄었다. 아웃포커싱으로 보지 못했던 대상들은 초점을 옮기는 순간 주인공이 되었다. 우리도 각자 삶의 무대에 초점을 맞추고 맑은 용기로 도전을 한다면 조금 더 멋진 주인공이 될 수 있지 않을까. 눈에 띄지 않던 꽃들이 찬란한 주인공으로 흐드러지게 된 나의 봄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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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인과 제왕 - 문화인류학 3부작 넥스트 3
마빈 해리스 / 한길사 / 200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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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시원해 보이는 강물 줄기, 연초록의 가뿐한 나무들, 외국의 것으로 보이는 거대한 지층. 컴퓨터 바탕화면의 이미지를 보는 순간 가슴이 탁 트인다. 체온을 넘어서던 2018년의 여름을 가까스로 넘겼다. 아침저녁으로 가을이 묻은 바람이 분다. 파란 강물을 물끄러미 바라본다. 고대 중국, 인도, 메소포타미아, 이집트 등 강을 중심으로 발달되었다는 문명들이 떠오른다. 물을 지배하던 절대 권력과 전제군주제 아래에서 수력 사회를 살아가던 사람들을 생각한다. 가슴이 답답해진다. 책을 읽고 나서 바라보는 물은 더 이상 편하게 바라볼 수 있는 대상이 아니다.

 

미국의 문화인류학자 마빈 해리스가 1977년에 쓴 책이다. 처음에는 주춤했다. 과학이 발달되어가는 속도가 하루가 다르게 가속화되는 세상인데, 40여 년 전에 쓰인 내용이 얼마나 실효성을 나타낼 수 있을까. 절판된 책이라 중고로 구입해야 한다는 점도 망설임의 이유를 더했다. 꾸준히 읽히는 책은 아니라는 말이니. 따분하지는 않을까. 40년의 간극이 이질감으로 채워지지는 않을까. 선뜻 손이 가지 않았지만 이 모든 망설임보다 호기심이 조금이나마 컸던 것이 책장을 펼친 이유다. 나는 책이 쓰인 시점으로부터 40년 동안 일어난 변화를 이미 아는 입장이니, 문화의 흐름을 읽는 저자의 예측이 요즘 세상과 얼마나 일치될 수 있을까가 궁금했다. 옮긴이는 책을 번역하면서 1994년 여름의 혹독한 더위를 즐겁게 보낼 수 있었다고 했다. 2018년 여름, 독자에게는 어떤 느낌을 줄까. 타임머신을 탄 기분으로 인류의 기원을 향했다.

 

문화인류학이라니! 생소한 분야였다. 내게 있어 문화란 움집, 초가집, 이글루, 수상가옥 등 거주 형태의 다양성이거나 한식, 양식, 분식, 중식, 일식 등 음식의 나열이거나 의복 형태의 변천사 같은 의미였다. 학창시절, 역사나 세계사 교과서에서 스치듯 배운 내용이 아는 지식의 대부분이었다. 더군다나 인류라는 거창한 말까지 결합되니 규모가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로 커져서 내가 이해할만한 분야가 아닐 것만 같았다. 이미 지나간 일이고, 이미 세상에 없는 사람들의 역사를 알아서 어쩌자는 건지 싶기도 하고.

식인과 제왕이라는 제목부터 탐탁지 않았다. 세상 어딘가에는 아직도 식인종이 있다지만 극히 일부에서 일어나는 일을 제목으로 대표하기에는 과하다 싶어서. ‘식인제왕이란 말 역시 아무리 연관을 지어보려 해도 접점이 보이지 않았다.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그래서 더욱 충격적으로 다가왔다. 식인 문화는 일부 독특한 인종들만의 전유물이 아니었다. 여기에 정치, 종교, 경제, 사회 문제 등이 인과 관계를 이루며 사람들과 얽혀있었다. 일련의 역사가 야만적이라며 무조건 비난할 수 없을 만큼 합리적인 이유로 존재했다.

 

에세이형식이면서도 인류학에 대한 이론이 풍부하게 담겨있어 교과서를 공부하는 듯 했다. 저자는 문화 발전에 일종의 프로세서가 존재한다고 말한다. 생식압력(인구증가압력)에서 시작한 과정은 생산증강을 가져오고 이로 인해 생태 환경의 파괴와 고갈이 발생하면 새로운 생산 양식이 출현한다고 설명한다. 인류의 역사를 통틀어 이제껏 발생했던 문화는 자연환경에 대한 인간의 적응과 자기조절 과정의 반복이라는 것이다. 과거의 유적들과 현존하는 일부 부족의 모습과 동서양의 사례들을 근거로 제시하며 인류 문화의 발달 과정을 말한다. 문화를 바라보는 거대한 틀을 제시하는 책이다.

교과서를 저런 식으로 배웠으면 어땠을까. 어른이 되어서 접하는 내용들이 새삼스럽다. 나이 들면서 생긴다는 통찰력은 죽어가던 지식에 생명력을 주는가. 학교 다닐 때에는 글자로만 인식되던 지식들이 마음에 들어와서 꿈틀댄다. 종종 느꼈지만 세상에 저절로 이루어진 건 단 하나도 없었다. 한 줄의 문장에 담긴 수많은 사람들의 땀과 세월의 무게가 벅차고 먹먹했다.

 

동굴 안에서 발견되었다는 석공 기술의 흔적이나 엄청난 뼈 더미는 석기시대의 생활이 지극히 어려웠을 거라는 가정을 여지없이 깨어버린다. 남자 177cm, 여자 165cm. 구석기 시대 성인의 평균 신장으로 추정되는 데이터라고 한다. 생각보다 풍족한 삶을 누렸을 거라는 증거다.

일부 식물학자들은 식물이 움직일 수 없는 이유를 이렇게 말한다. 광합성으로 스스로 양분을 만들어낼 수 있기에, 먹이를 찾아 헤매야 하는 동물과는 달리 움직일 필요가 없는 것이라고. 이 책에서도 인간이 천성적으로 정착하기를 원해서 농사를 지은 것은 아니라고 말한다. 석기시대에 농사를 짓지 않은 것은 지식이 부족해서도 아니고 농사를 지을 필요가 없었던 것이라고.

당연하게 생각했다. 고대로부터의 인류의 생활은 비례관계 그래프처럼 시간이 흐를수록 점점 나아지는 방향으로 발달되었다고. 근거 없이 가지고 있는 고정관념은 얼마나 오만한 것인가.

 

농업의 기원을 거슬러 올라가면 빙하 시대 말기, 지구의 온난화로부터 출발한다. 기후 변화로 목초지가 소멸되면서 육식하는 인간에 의해 거대 동물의 멸종이 일어나고, 좀 더 작은 짐승을 거쳐 곡물 쪽으로까지 관심 대상이 확산되면서 농업적 생산 양식이 유발된다. 짐승이나 농사에 이용되는 가축의 분포에 따라 아시아, 아프리카, 유럽 등의 구세계와 아메리카로 대표되는 신세계의 촌락 생활에도 차이가 있지만, 어쨌든 저자는 농사를 지으면서 인류가 정착 생활을 하게 된 기원을 이렇게 본다. 타고난 성향이 아니라 필요에 의해 발생한 생산 양식이라는 것이다.

변화는 멈추지 않고 일어난다. 인구는 폭발적으로 증가하고 환경이 소모되고 자원이 고갈된다. 생활수준의 하락을 막기 위한 대가가 필요해진다. 인간과 자원 사이의 균형을 맞추기 위한 수렵채집인들의 선택은 전쟁과 여아 살해이다. 전쟁에 참여하는 남성들과 연관이 되어 부계제나 모계제가 출현한다. 저자는 남성지배제와 외디푸스 콤플렉스의 원인도 전쟁에 있다고 본다. 남성에 의한 무기 독점의 부산물로 성차별적인 관습과 제도가 생겼다는 것이다.

농업 생산을 강화하다보니 이를 주도적으로 밀고 나갈 필요가 생긴다. 원시국가가 발흥한다. 국가는 자유로부터 예속으로 내려앉는 것을 의미한다. 국가 안에서 생산의 증강을 이끄는 자들은 빅맨이나 무미라 불렸고, 식량을 분배한다는 점에서 이들의 권력은 막강해진다.

 

강도 높은 생산 활동으로 다시 인구가 증가한다. 가축이 드물었던 메소아메리카(중부아메리카와 멕시코)로서는 동물성 단백질의 공급원으로 인육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동물성 단백질을 섭취하기 위한 과정은 정황상 이해가 된다 해도 섬찟하다. 아즈텍이나 톨테카족, 마야족 등의 문화에서 종교적 희생의식으로 거행되었다는 인신공희. 인신공희를 위한 방편으로 전쟁을 일으켰고 주로 포로들이 식인의 대상이 된다. 상당수의 노예나 청년, 처녀들도 희생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었다고 한다. 인간을 죽이는 과정이나 인육으로 잔치를 벌이는 장면이 생생하게 묘사된 부분은 매우 원초적이었다. 육식동물이 피식 동물을 취하는 과정과 별반 차이가 없어 보여 자주 움찔했다.

가축이 이렇게나 고마운 존재였던가. 적국의 병사들은 덕분에 식량의 생산자로 이용된다. 인육이나 가축이 동물성 단백질의 공급원으로 선택될 수 있었던 결정적인 요인은 비용 대비 효과의 문제이다. 라마의 먹이는 사람이 먹지 못하는 풀들이다. 잉카는 다행스럽게도 라마 덕분에 인육을 먹는 것을 그만둘 수 있게 된다.

유목민 사회의 돼지고기 금지도 필요에 의해 생겨난 문화이다. 육식의 계속적인 이용이 기존 생존 양식을 위태롭게 했기에 생겼다고 한다. 금기 대상은 물질적인 비용과 이득을 따져본 결과로 정해진다. 힌두교에서의 소고기 금지도 마찬가지 맥락이다. 동물 고기에 대한 일반 대중의 수요를 충족시키기 어려워지자, 육식은 브라만 등 선택된 계층만이 누리는 특권이 된다. 인구밀도가 증가하면서 농사기간동안 쟁기를 끌어야했던 소는 금기시된다. 불규칙한 몬순 강우에 의존해야 하는 농사의 특성 상 암소와 황소 보호가 긴박해질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저자는 힌두교도의 채식주의가 물질에 대한 정신의 승리가 아니라 생산력에 대한 생식력의 승리라고 본다.

 

중국의 공산주의 혁명은 물을 지배하는 고대 제국적 통치제도의 복원이다. 생산을 집중적으로 강화하기 위한 과정에서 전제주의가 통치 형태로 탄생했다는 것이다. 물에 의한 올가미는 몇 천 년 동안 인간의 지성과 의지를 무력화시킨다. 물을 중심으로 발생한 문명사회에서 거대한 성곽, 피라미드 등 수많은 인력이 동원된 구조물의 건축이 가능했던 이유다.

자본주의가 유독 유럽에서 발달한 이유도 생산 양식과 무관하지 않다. 봉건 제도로 농노제가 실시되고 생산의 기본 단위가 장원의 영지로 분화되면서 출발한다. 전염병과 전쟁과 여러 가지 요인 등으로 장원 제도가 붕괴될 위기가 오자 과학 기술과 기계 생산에 기초한 제도가 절실해진다. 이윤을 극대화할 필요성이 대두되고 그 결과 자본주의가 발생한다는 것이다.

 

어린이는 문화 발달 과정에서 꾸준한 희생양이 되어왔다. 구석기 시대의 유아 살해율은 50% 수준이었다고 한다. 이렇게 자행된 잔인한 행위가 석기 시대에만 국한되지 않았다는 점은 너무 안타까운 일이다. 유아 살해는 취락 규모의 지나친 팽창을 방지하기 위한 수단으로 종종 이용되었다.

직접 살해뿐 아니라 간접 살해도 공공연하게 이루어졌다. 18세기 영국에서는 정부가 세운 영아 양육원이 사실상 어린이의 살해 장소로 이용된다. 수천 명의 기아들을 죽이는 유모들까지 존재했다는 사실은 믿기 어려운 일이다. 이로 인해 높은 출생률과 못지않게 사망률도 높았다. 19세기 초까지 양육기관에 있는 유아의 80%~90%가 출생 후 첫해에 죽어갔다니 경악할 일이다.

18세기 말 유럽에서는 드디어 어린이의 사망률이 감소하는데 그 이유에 화가 치민다. 어린이를 노동에 이용하기 위해서였다니. 생존의 문제라 어쩔 수 없던 면도 있었을 거다. 어른들의 이기심이라고만 치부하기 어렵기에 마음이 더욱 무겁다.

자식들과 함께 극단적인 선택을 했다는 사회면 뉴스를 보니 다시 답답해졌다. 예나 지금이나 어린이들은 약자일 수밖에 없는 걸까. 그래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린이를 희생시키는 방법이 유일한 선택지였을까. 속속들이 이어져온 역사적인 사실이 함께 떠오르면서 한동안 가슴이 아팠다.

 

19세기 산업 혁명이 일어나면서 인구 증가율은 감소된다. 인구통계상의 과도기로 불리는 시기가 나타났다. 저자는 그 원인을 3가지로 분석한다. 연료와 피임과 직업의 혁명이다.

직업의 혁명으로 경제 활동의 구조가 달라지면서 어린이에 대한 양육비가 증가한다. 이에 비해 극소 부분만 돈이나 재화나 용역으로 돌아온다. 이는 출생률의 감소로 나타난다. 21세기인 지금도 우리나라를 본다면 마찬가지 아닌가. 올해 우리나라의 2분기 합계출산율이 0.97명이라는 뉴스를 보았다. 0명대는 전쟁과 같은 극한 상황에서나 나타날 법한 현상이라는데 이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인구 감소 현상은 자원 분배라는 단순한 시각으로만 보면 바람직한 일이다. 가장 큰 문제는 연료의 혁명에 있다. 석탄이나 석유라는 연료가 재생 불가능하다는 점이 치명적이다. 현재의 식량 생산은 절대적으로 석유 공급에 의존한다. 저자는 감소되는 인구 증가율에도 불구하고 투입된 연료가 인구증가율을 따라잡지 못하게 될 것이라 예측한다. 대체에너지 전환의 절실하게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태풍 솔릭이 지나간 후 요 며칠 장마처럼 비가 왔다. 긴장된 마음으로 뉴스 보도에 귀를 기울이며 기상 위성 사진을 가장 많이 보았던 지난주였다. 태양을 향해 정밀한 탐사선을 쏘아 올리고 우주여행상품이 개발되는 시대이지만 아직도 인간은 자연재해에 무기력하다. 지구온난화의 결과물은 상상 이상이다. 일기예보조차 보란 듯이 추측을 벗어난다. 환경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는 인간이 만든 환경에 속수무책으로 당하는 기분이다.

다양한 문화는 환경의 영향을 받은 인류가 생존을 향해 달려가는 과정에서 나타난 결과물이다. 문화현상들의 연결고리가 놀랍다. 나타날 수 없는 문화의 형태는 없다는 점을 깨달았다. 함부로 속단하면 안 된다는 점도 배웠다.

저자가 제시한 문화 발전 과정으로 본다면 대체적으로 지금 이 시기는 생태환경의 파괴와 고갈이 일어나는 단계로 판단된다. 곳곳에서 일어나는 기상 이변과 화석연료의 고갈에 대한 데이터가 쏟아질수록 점점 분명해진다. 새로운 생산 양식이 나타날 시점이 온 것이다.

 

역사적 결정론을 지닌 저자의 입장에서 문화는 패턴처럼 되풀이되는 과정을 거치면서 발전한다. 과정만을 본다면 환경에 순응할 수밖에 없나 하고 비관적인 듯 보이지만 저자는 조금씩 다른 선택을 하는 인간들의 대응방식에 주목한다. 유사한 듯 동일하지 않고, 확정적인 듯 확률적이라는 것이다. 하고 많은 선택지들 중에서 하필이면 그 선택을 하는 데에는 인간의 의지가 개입할 여지가 있어 보인다. 보다 합리적으로 대응하기 위해서는 열심히 노력하는 방법밖에는 없다고. 의식적인 방향으로 변화시키려면 이 세계가 어떻게 유지되고 변화되어왔는가를 이해할 필요가 있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은 매우 유용했다. 문화를 바라보는 시각이 부채 살을 편 듯 확 늘어난 느낌이다.

도미노를 떠올린다. 인접해있는 블록이 다음 블록을 건드리면 쓰러지지만 조금이라도 방향이 틀어지면 가다가 멈추고 만다. 도미노의 성공여부는 미세한 차이를 두고 바뀌는 방향에 있다. 문화도 마찬가지라 생각한다. 책을 쓴 마빈 해리스로부터, 책을 옮긴 정도영에게로, 책을 읽은 나로부터, 이 리뷰를 읽는 당신에게로 이어지는 인식 변화의 도미노. 거대한 폭풍이 나비 효과의 어느 지점에서 시작될지 불확실하지만 이렇게 이어지는 과정 어딘가에 아직 희망은 존재한다고 믿고 싶다.

 

p234, 2번째 단락 10째줄 : 암소을 암소를

p240, 2번째 단락 마지막 줄 : 우수꽝스런 우스꽝스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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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그만 메모수첩 2018-08-30 10: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린이들의 사망율 감소와 증가 원인이 충격적이네요 ㅠㅠ 리뷰 잘 읽었습니다. 이 요약만으로 책을 안 읽어도 될 거 같ㅇ....으면 안 되고 기회 될 때 꼭 읽어보려고 합니다

나비종 2018-08-30 15:25   좋아요 1 | URL
독서모임 책으로 선정된 거라 대략적인 요약에 최선을 다했으나 내용 자체가 엄~~~청 방대합니다ㅎㅎ 세계사 내용 요약 숙제한다 생각하고 읽었습니다ㅋㅋ
 
컬러의 말 : 모든 색에는 이름이 있다 컬러 시리즈
카시아 세인트 클레어 지음, 이용재 옮김 / 윌북 / 201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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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강, 다홍, 주황, 귤색, 노랑, 노란연두, 연두, 풀색, 녹색, 초록, 청록, 바다색, 파랑, 감청, 남색, 남보라, 보라, 붉은보라, 자주, 연지. 초등학교 때 외웠던 20색상환이 아직도 기억난다. 그 사람 이름은 잊었지만 그 눈동자 내 가슴에 있기라도 한 것처럼. 이게 노란연두냐 연두냐 실물을 들이댄다면 당연히 구분도 못할 거면서 어째 아직까지 이름만은 생생하단 말이냐. 주입식 교육의 결과물이지만 곰곰 생각해보면 그 이유만은 아니다.

켜켜이 접혀있던 무지개가 한껏 기지개라도 편 것처럼 좍 펼쳐진 색의 스펙트럼. 볼 때마다 마냥 좋았다. 한참 바라보노라면 심장이 살짝살짝 뛰면서 은은한 음악이 들리는 듯했다. 가지런히 누워있는 크레파스 앞에서 마음이 몽글몽글해지고 잘 사용하지도 않는 색연필 세트를 바라볼 때면 아직까지도 흐뭇해지는 내게 색깔은 이런 의미였다.

 

모든 색에는 이름이 있다니. <컬러의 말>이라는 책제목과 부제와 먼셀의 20색상환을 연상시키는 표지만으로 책을 구입할 이유는 넘쳤다. 책이 도착한 날 옆모습을 보고 한 번 더 반했다. 화려한 공작새의 날개 같기도 한 종이들을 손끝으로 훑어 내리는 나는 멋들어지게 채색된 피아노 건반을 연주하는 음악가처럼 의기양양했다.

75가지 색이 만들어지기까지의 과정과 이에 얽힌 역사와 문화가 담긴 책이다. 이토록 많은 이름이 존재했던가. 꼴랑 20개만 들어있던 나의 색채 월드가 팝콘처럼 튀겨졌다. 색이란 화가의 전유물이며 미술사의 영역에서만 다뤄지리라고 무의식적으로 생각해왔나. 오징어 집 스낵을 베어 물기라도 한 듯 색에 대한 편견이 바삭 깨졌다. ‘색은 주관적인 문화의 창조물로 받아들여야 한다.(p27)’ 벌레에서 추출한 염료에는 생물학이 얽혀있었으며, 연금술사들이나 독극물과 관련된 화학이 담겨있었으며, 특권 계층의 의복으로 점유된 이력이 있는 문화였으며, 경쟁적으로 차지하려는 전쟁을 발발시키거나 막대한 자본이 오고 가는 등 세계사의 흐름을 바꿔놓은 역사였으며, 인간들의 정신적인 영역을 지배한 심리학이었으며, 많은 이들의 삶과 죽음이 얽힌 철학이었다.

 

색이 주는 심리적인 효과나 상징적인 의미는 이 책의 곳곳에서도 드러난다. ‘빛은 색이니, 그림자는 색의 결핍이다.(p12, J.M.W.터너, 1818)’ 빛은 에너지이니 색에도 고유의 에너지가 있다. 인간마다 지닌 자체 에너지와 공명을 일으키는 파장의 빛도 존재할 것이라 생각한다. 36.5도에 해당하는 적외선 말고 사람마다 뿜어내는 기 같은 것 말이다. 어떤 이에게 유난히 어울리는 색이 있다면 이 에너지들이 서로 시너지 효과를 일으키는 것은 아닐까. 입은 옷이나 지니고 있는 물건의 색감만으로 왠지 자신감이 생기고 기분 좋아지는 때가 있는 것을 보면.

<소셜 컨트롤>이라는 네이버캐스트의 칼럼에도 색이 등장한다. 사람들의 행동이 바뀌면 세상도 바뀐다는 부제로 짤막하게 나오는 3개의 동영상 중에는 색과 관련된 흥미로운 실험이 하나 있다. 자연계에는 블루베리를 제외하고 먹거리의 색으로 파란색은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이를 이용하여 과식을 억제하는 환경을 인위적으로 만들 수 있음을 증명한 실험이다. 뷔페식당의 절반을 식탁보, 조명, 의자, 벽면에 이르기까지 온통 파란색 환경으로 만들어준 다음, 나머지 평범한 공간에서의 식사량과 비교한다. 실험의 결과는 놀라운 수치로 드러난다. 음식을 더 먹으려 왔다 갔다 하는 횟수가 줄어들고 식사량 역시 감소한다. 실제로 접시 색깔을 바꾸는 것만으로도 식사량을 줄일 수 있다는 팁으로 실험은 결론을 맺는다.

 

컴퓨터 안에서 구현되는 몇 백 개의 색상 안에는 얼마나 많은 세월들이 켜켜이 담겨있는 걸까. ‘디지털 사진 기술의 발전으로, 그저 클릭 몇 번이면 갓 찍어낸 생생한 이미지에 한 세기의 세월을 불어넣을 수 있다.(p255)’ 한글 화면의 글자색을 클릭하다 문득 미안한 마음이 든다. 존재 자체를 당연한 것으로 알았던 컬러. 미묘한 차이를 보이는 발색의 과정에는 지난하고 치열한 인내가 담겨있었다. 구현해내기 불가능하리라 여겨졌던 색의 탄생은 치열한 땀방울의 결과물이다. 색에 관한한 무에서 창조된 유는 없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완독하는 데 한참 걸렸다. 몇 번이나 집어던지고 싶었다. 색의 이름 자체도 생소하였거니와 색의 역사를 말하는 내용이다 보니 발음도 어려운 외국인들의 이름과 문화적인 용어가 설겅설겅하게 씹혔다. 첫 문장을 들여 쓰지 않고 앞부분에 맞춰 정렬한 편집 체계도 문단을 구분하여 내용을 파악하려는 데 방해가 되었다.

가장 난감했던 부분은 번역이었다. 원어민 선생님 앞에서는 과묵한 외국인이 되며 간혹 마주치면 오른손을 들고 하이!”만을 일관되게 외치는 내가 꺼낼 말은 아닐 듯싶지만, 많은 문장들이 갈치 가시처럼 자꾸 목에 걸렸다. 유용한 정보가 듬뿍한 것은 알겠는데 당최 무슨 말을 하고자 하는지 모르겠는 거다. 세계사에 해박한 지식을 가진 이들에게라면 뒷동산을 산책하는 수준이었을 것이다. 저자 역시 서문에서 색의 깊은 역사를 다루지 않는다. (중략) 간략사와 성격 묘사 중간의 어딘가에 속하는 이야기를 썼다.(p11)’라고 했으니. 다만 지극히 얄팍한 지식을 보유한 나란 인간은 에베레스트 산을 등정하기라도 한 듯 헐떡였다는 거다. 원문에 최대한 가깝게 직역하려는 역자의 의도였겠지만 조금만 더 자연스러운 용어로 바꾸거나 몇 가닥 더 풀어헤쳤으면 하는 아쉬움이 있다. 얼굴에 바른 파운데이션이 군데군데 뭉쳐져 말라버린 느낌의 문장이랄까. 부드럽고 가뿐하게 펼쳤으면 훨씬 좋았을 것이라는 지극히 개인적인 생각을 해본다.

 

두더지 잡기 게임처럼 불쑥불쑥 튀어나오는 과속방지턱을 가까스로 넘어가며 간신히 완주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용이나 발상만으로도 책의 가치는 충분하다. 미술 관련 책을 읽었는데 음악을 감상한 기분이다. 색깔을 상상하고 바라보며 읽어가는 내내 리드미컬한 음악이 눈 속에서 춤을 추었다. ‘리듬(rhythm)’이란 흐른다는 의미의 동사를 어원으로 하는 그리스어 ‘rhythmos’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무수히 많은 컬러가 마음속으로 계속 흘러들어와 리듬처럼 펼쳐졌다. 하루에 색상 하나씩 읽기로 정해두고 오랜 시간 곱씹는다면 의미 있는 맛이 날 것 같다. 무지개 너머 존재하는 색채의 드넓은 세상을 분명 보여줄 책이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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