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에 감사해
김혜자 지음 / 수오서재 / 202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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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유명사가 보통명사인 듯 회자 되는 삶은 얼마나 뭉클한가. 이름이 포함된 정체성에는 사회적 인정이 담긴다. ‘혜자스럽다는 말이 실물로 구현된 도시락의 출시 소식을 듣는다. 텅 빈 뱃속보다 마음이 더 시린 이들에게 온장고에서 막 꺼낸 양 따끈한 온기를 전해주리라. 만 원을 주고도 한 끼 식사가 만만치 않은 요즘이다. 3,900원짜리 혜자 도시락이 그 탄생 배경만큼이나 특별한 이유다.

TV 프로그램 <유퀴즈>‘김혜자 편의 단편 영상을 본 건 우연이건만 중간에 멈출 수 없었다. 자연스러운 행동과 감사가 묻어나는 말투는 몇 분 동안 많은 메시지를 건넨다. 결국 전체 영상을 찾아 정독하듯 시청한다. 오랜만에 코끝 찡한 시간을 보낸다. 배우 김혜자의 삶과 삶을 대하는 태도가 전하는 감동의 여운이 길다.

생에 감사해는 배우 김혜자의 에세이다. 읽지 않아도 무슨 느낌일지 벌써 알 것 같다. 천천히 산책하듯 걸음을 따라가고 싶은 마음에 망설이지 않고 주문한다. 출연작을 중심으로 배우로 살아온 소회와 삶에 대한 열정이 담긴 책이다. 신기한 건 문장을 따라 음성 지원되듯 그녀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한 착각이 든다는 점이다.

 

자신의 모습이 책 표지가 되는 사람, 존재가 곧 명함인 사람, 눈가의 주름조차 장면으로 만드는 사람, 표지만 들여다보아도 많은 감흥을 불러일으키는 사람이다. 그녀 삶의 이야기가 더욱 궁금해진다.

주어가 김혜자인 추천사. 저자를 스케치한 문장들을 보고 책이 곧 사람임을 깨닫는다. 만남 자체가 선물이 되는 사람이라니!

<유퀴즈>에서 한 말이 대본처럼 고스란히 서술되어 있다. 직접 겪고 느낀 일을 말할 때는 마음에 대본이 새겨지는 걸까. 언제 말하든 토씨 하나 빠뜨리지 않고 말할 수 있는 걸 보면.

연기를 못했던 시절의 회상 장면에서 나는 빙산을 연상한다. 잘함은 빙산의 꼭대기에 불과하며 거대한 아래에는 서투름이 있다고. 그것들이 차곡차곡 쌓이면 어느 순간 잘함이 모습을 드러내는 거라고.

코오롱스포츠 <오로라>CF 영상을 찾아본다. 자연스러운 몸짓도 진한 감동을 전할 수 있구나. 백상예술대상의 수상소감 영상도 찾아본다. 솔직한 마음이 말간 백자를 보듯 고스란히 화면에 투영된다. 갑작스러운 수상 발표에 당황하는 모습에서, 작품 속 명대사가 적힌 대본을 찢어와서 떨리는 목소리로 낭독하는 표정에서 소녀 같은 순수와 진심을 본다.

 

간지처럼 중간중간 수록된 사진도 참 좋다. 해맑게 웃는 표정이 많다. 얼굴의 주름이 미소와 함께 아름답다. 배경보다 인물에 시선을 집중하게 만드는 배우다. 풍부한 표정 자체로 많은 말을 건네기에 한 페이지의 글을 읽고 난 듯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사진작가 조세현의 사진은 편안하고, 홍장현의 그것은 고혹적이다. 조세현이 담은 표정이 더 끌린다.

가장 기억에 남는 표정은 영화 <마더>의 촬영 장면이다. 허허벌판에 형언하기 어려운 표정으로 오도카니 서 있는 어머니. 환하게 웃는 표정보다 허무가 뿜어져 나오는 표정이 강렬하다. 허무라는 단어의 의미를 시각화한다면 저런 모습일까. 순간 가슴이 턱 막힌다.

종종 나를 따라다니던 허무의 시간을 기억한다. ‘죽고 싶다는 문장을 떠올리던 순간이 조용히 부유한다. <마더>에서의 그녀의 표정을 보며 당시의 마음을 스스로 오역하고 있었음을 깨닫는다. 죽고 싶은 게 아니라 이렇게 살고 싶지 않았음을. 질식할 것 같은 잿빛이 버겁다고 간절하게 외치고 싶었음을. 짙은 감정이 순간적으로 심장을 폭 감싼다. 어떤 감정은 사람의 심장을 몰랑해지게 만든다. 결이 고운 흙처럼 부드럽게 스며들어와 심장을 어루만진다.

 

다양한 감정들을 경험하고 나서 연기하는 게 전혀 모르고 연기하는 것과 다르다는 문장에서 글쓰기를 떠올린다. 모든 글이 다큐는 아니지만 현실을 기반으로 하지 않은 글은 없다고 본다. 경험의 정도에 따라 감정의 깊이 역시 달라지며 어느 순간 살아있는 글이 태어난다.

배우는 오직 연기로 말하는 사람이라는 문장에서 작가를 떠올린다. 작가는 글로 말하는 사람이니까. ‘자신의 얼굴로, 자신의 몸으로 하는 것인데 열심히 하지 않을 이유가 없습니다.’ 배우의 관점에서 하는 말을 작가의 관점으로 겹쳐 읽는다. 문장을 따라가는 길이 뜨끔하면서 설레고 뜨거워진다.

힘을 뺄 때 의외로 좋은 결과물이 나오는 경우가 많다. 수영이라든지 이 책에서 언급된 연기라든지. 글도 마찬가지 아닐까. 힘을 빼고 감정을 자연스럽게 따라가며 흐름에 몸을 맡길 때 울림이 큰 문장이 꽃처럼 피어나리라.

좋은 문장은 읽는 사람을 악기로 만든다. 독자의 눈으로 들어온 문장이 손가락이 되어 연주하듯 마음을 울린다. 삶을 노래로 만든다. 사람들에게 울림을 주고 싶다. 어정쩡한 일렁임 말고 뭉클에 어울리는 감정의 일렁임을 듬뿍 선사하는 나비종스러운 문장을 꽃인 듯 피우고 싶다.

 

 

p247, 밑에서 5째줄: 것이었습다. ~습니다.

p301, 밑에서 7째줄: 아이였습니 ~.

p301, 밑에서 2째줄: 홀리해성 ~혜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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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verjinjin 2023-04-16 18: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비종님의 글을 보니 이 책을 읽고싶어졌습니다. 감사합니다.

나비종 2023-04-16 19:00   좋아요 0 | URL
잔잔한 문장만큼 중간에 수록된 사진이 참 좋았습니다. 읽는 동안 삶을 돌아보게 되더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