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 흐르고 꽃은 피네 - 좋은 때를 놓치지 않고 사는 법
금강 지음 / 불광출판사 / 201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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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날 맑은 아침에 집을 나설 때면 가끔 눈물이 난다. 뜨겁지도 차갑지도 않은 바람이 볼을 어루만지다 지나간다. 적당히 갈라진 햇빛의 가느다란 살은 강아지풀처럼 눈썹을 스친다. 언뜻 흘러드는 초록 내음은 한 입 머금은 솔잎차인 듯 향긋하다. 치열하게 붙들고 놓지 못하는 욕심과 미련을 훌훌 털어버리라 한다. , , , 나를 둘러싼 세상이 부드러운 촉수로 마음을 건드린다.

그냥 눈물이 났다. 앞표지의 연꽃봉오리가 뒤표지에서는 서서히 벌어지는 모습을 보는 순간 울컥한다. 슬프지도 않고 아프지도 않은데 무엇 때문인지 모르겠다. 코끝이 찡해지면서 마음을 묶고 있던 끈이 사르르 풀린다. 시간의 힘에 기대어 스스로를 잘 토닥이며 지나왔다고 생각했는데, , 조금은 힘이 들었나보다.

 

읽을수록 지식이 쌓이는 책이 있는가하면 비우고 싶어지는 책이 있다. 304페이지의 책장을 넘기면서 304번 마음을 비웠다. 진공청소기로 휘리릭 청소하는 것과는 다른, 오래된 빗자루로 마음 구석구석을 정갈하게 청소하는 느낌이다.

차례를 본 순간, 내용을 읽기도 전에 가슴이 두근거렸다. 본래 마음, 내려놓음, 무문관, 좌선, 스승, 도량, 발심, 묵언, , 자비, 비움, 수행, 무심, 공양, 공동체, 선업, 무아, 도반, 대의단, 깨어있기, 공생, , 무상, 깨달음, 초심. 25개로 이루어진 소제목은 화두가 되어 마음에 점을 찍는다.

 

이승우 작가의 <사막은 샘을 품고 있다>가 생각난다. <사막은 샘을 품고 있다>가 성경 구절을 제시하고 기독교적 관점에서 관련된 이야기로 삶을 풀었다면, 이 책은 한자 구절을 제시하고 불교적 관점에서 삶을 말한다. 자석의 N극과 S극처럼 다른 방향에서 접근해도 결국은 하나로 모아진다. 어느 것이 더 낫다 하기 어려울 정도로 각기 매력적인 책들이다.

 

책 제목처럼 내용이 물 흐르듯이 마음으로 흘러든다.

아침에 한 사람을 기쁘게 해주고 저녁에 한 사람의 슬픔을 덜어주기를(p3, 270)’나도 그럴 수 있는 사람이 되기를 바란다.

어떤 경지에 이르러야 한 권의 책을 내면서 종이의 원료가 된 나무들에게 미안(p7)’해할 수 있는 걸까. 무심코 지나치다 다시 되짚으며 그 의미를 되새겼을 때, 철렁했던 문장이다. 이제껏 읽어온 어떤 작가의 글에도 이런 관점을 본 적이 없다. 주변의 물건들을 찬찬히 바라본다. 하나의 물건이 만들어지기까지 사용되었을 수많은 재료와 정성을 떠올린다. 어떤 물건이든 더욱 소중하게 다루고 아껴야함을 깨닫는다. 밥을 먹을 때도 생각난다. 한 톨의 쌀이 만들어지기까지 그 속에 깃든 바람, , 햇살, , 농부의 손길을 상상한다.

사람마다 발 아래 맑은 바람 불고 있네.(p16)’라는 문장을 읽으니 어쩐지 내 운동화 아래에서도 맑은 바람이 한 줄기 흘러드는 것 같다.

손 모양과 마음의 상태는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p24)’고 한다. 합장하듯 두 손을 모아보고, 따뜻해진 두 손으로 스스로를 감싸본다.

깨끗하고 단정한 공간에 맑은 기운이 깃든다.(p67)’는 말씀이 마음에 흘러드니 곧바로 몸이 움직여진다. 한동안 미뤄왔던 불필요한 서류더미를 파쇄 한다. 얹힌 속이 뻥 뚫린 듯 후련하다.

향은 불에 타고 차는 끓는 물에서 우러나옵니다.(p253)’는 글 앞에서는 스스로를 태워야 빛과 열을 낼 수 있는 별을 생각한다. 향기로운, 서서히 우러나는 차와 같은, 별처럼 빛나는 사람이 되고 싶다.

마음은 아픈 곳에 있다.(p153)’. 이 짧은 문장에서 오래 머무른다. 나를 아프게 하는 사람들을 떠올린다. 내 마음이 거기로 가 있는 것이구나. 그들을 어떻게 바라보고 대해야 하는 지 알 것 같다.

자연은 곳곳에서 살아 숨 쉬는 교과서이다. ‘지난해 가을의 열매를 생각하지 않는(p280)’나무, ‘겨울을 이겨낸 나무들의 행복한 시간(p10)’이 되는 봄 앞에 내 삶을 비추어본다.

문장을 따라 흐르다보니 마음에 소박한 꽃이 핀다.

 

참사람의 향기는 금강 스님이 계신 땅끝마을 미황사에서 2005년부터 진행되어온 일반인 대상 참선 수행 프로그램이다. 1회 꾸준히 진행되었는데, 올해로 100회를 맞이했다고 들었다. 78일 동안 묵언하면서 수행한다는 점이 가장 마음에 든다. 말하는 직업을 갖고 있지만 가끔 말하고 싶지 않을 때가 온다. 꼭 필요한 말을 제외하고 말 수를 줄여본다. 말을 덜 하니 사람들의 말이 더 잘 들린다. 다른 감각이 깨어나 이제껏 말들에 가려 무심코 지나치던 새로움이 보인다. ‘참사람의 향기를 거쳐 간 많은 사람들의 진솔한 후기가 자꾸 나를 유혹한다. 버킷리스트 하나가 추가된다.

마음도 쉬어야 한다. (중략) 우리 본래 마음으로 돌아가, 이 순간을 보는 것이 마음을 쉬는 것이다.(p282)’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천천히 내쉰다. 잠시 눈을 감았다 뜬다. 이 순간의 나를 본다. 한결 가벼워진 나를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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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돈 벌러 갑니다 창비아동문고 287
진형민 지음, 주성희 그림 / 창비 / 201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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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화를 읽을 때마다 생각이 많아진다. 주인공이 어린이이고, 아이들의 용어로 쓰였다는 점만 빼고는 책이 담고 있는 메시지가 성인 소설 못지않게 묵직하기 때문이다. 아이들의 시선에서 묘사되는 투명한 문장 앞에서 당황스러울 때도 있다.

진형민의 동화는 언제나 개운하다. <기호 3번 안석뽕>을 시작으로 <꼴뚜기>,<소리 질러, 운동장>등 이제껏 나를 실망시킨 적이 없다. 일부러 이름을 검색해서 책을 찾는 몇 안 되는 저자이다. 초등학교 5학년에 다니는 세 친구가 돈을 벌기위해 세상에 뛰어들면서 겪는 에피소드가 담겨 있는 동화이다. 시종일관 유쾌함이 배경음악처럼 흐른다. 취향을 저격하는 문체이다. 주제에 접근하는 방식이 자연스러우면서 직선적이다. 가벼운 촌철살인이랄까.

 

하루 종일 마늘을 깐 대가로 만 원을 받는 초원이의 할머니, 순진한 초등학생을 속인 대가로 이득을 챙기려는 전단지 사장, 먹이사슬을 연상케 하는 삥 뜯는 언니들, 돈 많은 부모님을 만나 영어 단어 한 개를 외우는데 200원을 받는 반장. 다양한 방법으로 돈을 버는 삶을 통해 돈을 번다는 것의 의미를 진지하게 생각한다.

아이들의 눈에 비춰진 어른의 모습이 부끄럽다. 초등학생인 줄 뻔히 알면서 일을 시키는 전단지 사장의 모습은 우리 사회에서 낯선 풍경이 아니다. 택배 일을 하는 청소년들이 떠오른다. 열악한 환경에서 최저 시급도 보장받지 못한 채 일하는 청년들이, 백화점 입구에서 흰 장갑을 끼고 교통정리를 하는 청춘들이 생각난다. 그마저도 구하지 못해 발을 동동거리는, ‘알바천국이 되는 적나라한 현실에 마음이 아프다.

 

대학교 1학년 때, 과외를 하여 처음으로 돈을 벌었다. 졸업 때까지 과외를 했다. 3학년의 어느 주말에는 세 탕을 뛴 적도 있다. 20세 이후 주말마다 쉬어본 적이 없던 나는 주말이 싫었다. 내게 주말은 쉬는 날이 아니라 일을 하는 날이었기에. 이른 아침부터 한밤중까지 식당 서빙을 하던 어머니 앞에서 힘들어하는 마음은 차라리 사치였지만, 힘든 건 힘든 거였다.

몸보다 견디기 어려웠던 건 마음이었다. 지겹도록 공부했던 영어나 수학을 대학생이 되어서도 다시 가르쳐야 한다는, 설명해도 이해를 못하는 아이들에 속이 터졌던, 돈 많은 부모를 만난 그들이 부러워질 때마다 가라앉던 그 마음들이. 그 때 생각이 나면 가끔 울컥한다. 학생 입장에서는 다른 아르바이트에 비해 일한 시간 대비 큰돈을 벌 수 있는 기회였지만.

 

월급날 즈음만 잠시 통장에 머물다 가는 숫자들을 볼 때마다 돈을 번다는 것에 대해 생각한다. 분명 좋아서 선택한 직업이고, 보람을 느끼는 순간들도 있다. 하지만 가끔 기계적으로 일한다는 생각이 들고 남의 떡이 더 커 보일 때면 다른 일로 돈을 벌었다면 어땠을까 상상한다. 6살 위의 직장 동료는 이 나이에 어디서 이만큼 돈을 버냐 하신다. 지금 그만 두면 어디 써주는 데도 없다며 힘닿는 데까지 다니라며 우스갯소리로 말씀하신다.

2017년의 최저시급 6,470원을 생각하면 내가 하는 푸념은 너무나 배부른 소리임을 안다. 어쩌면 저쪽에서 모자를 쓰고 제복을 입은 채로 아메리카노를 만드는 알바생은 그보다 훨씬 적게 받을 지도 모를 일이다. 낮 동안에는 수시로 열 받는 순간들이 난무하지만, 소설 <사랑의 생애>에서도 우리는 기쁨과 보람을 느끼게 하는 대단한 일을 하며 살 수 있기를 바라면서, 그 순간을 기다리면서, 기쁨과 보람을 느끼지 못하는 일을 견딘다.’고 했으니. 퇴근 후에라도 좋아하는 일을 할 수 있으니 한편으로 다행인건 맞지만.

 

너무 힘들지 않게, 계속 재미있게, 거짓말하지 않고도 누구나 돈을 벌 수 있으면 참 좋을 텐데. 그러면 오래오래 기분 좋게 일할 수 있을 텐데.(p148~149)’라는 문장을 읽다 보니 꿈을 꾸고 싶은 거다. 생계형 맞벌이라 돈을 벌지 않으면 가정 경제가 무너지는 답답한 현실을 벗어나 좋아하는 글을 쓰면서 생계를 유지하고 싶은, 글로 돈을 벌고 싶다기보다는 책을 읽고 글만 써도 먹고 사는 데 지장이 없었으면 하는, 글짓기대회에서 1만원의 문화상품권을 받고 벅찼던 기쁨을 더 자주 느끼고 싶다는 꿈을.

욕심이 생겨서 문제인데, 이런 마음이 욕심이 아닌 것이 되는 세상이 왔으면 하는 욕심이 또 슬그머니 고개를 내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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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막은 샘을 품고 있다
이승우 지음 / 복있는사람 / 201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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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력이나 청력이란 말은 있는데, ‘후력, 미력, 촉력은 왜 없을까. 오감을 떠올린다. 시각, 청각, 후각, 미각, 피부감각. ‘이 의미하는 미묘한 차이에 주목한다. 시력 검사나 청력 검사는 건강검진에서도 하지만, 후력이나 미력, 촉력 검사는 없다. ‘! 이 냄새가 얼마나 구린가요?’ 상상해보니 좀 웃기다. 측정하기 애매할 수 있겠다.

혹자는 인체 구조를 빗대어 보는 것듣는 것의 중요성을 설파한다. 코와 입은 한 개인데, 왜 눈과 귀는 두 개나 있는지 아느냐며. 객관적인 말들을 차치하고라도 주관적으로도 눈과 귀는 중요하다. 좋아하는 책과 음악과 미술을 가까이 하기 위해 꼭 필요한 감각이니.

 

<사랑의 생애>를 읽고 저자의 작품에 호기심이 생겨 선택한 책이다. ‘보는 것에 대한 에세이로 읽었다. ‘신앙과 문학과 삶에 관한 사색이라는 부재가 붙어있지만, 전체적으로 흐르고 있는 서술어는 보다였다, 지금의 나에게는. 어떻게 보아야 할지, 어디를 보아야 할지, 보아도 보이지 않는다는 의미가 무엇인지, 상대를 보았을 때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영혼의 창으로 무엇을 보아야 하는지를 생각했다.

 

1눈 맞춤은 사람 사이의 관계를 다룬다. ‘서로의 눈을 마주 보고 있을 때 우리는 그 눈을 통해 서로의 마음과 만난다.(p98)’며 영혼과 마주치는 순간을 말한다. ‘우리는 부딪쳤을 뿐 한 번도 만나 본 적이 없다./ 모두가 낯익은 얼굴들 모르는 사람들이다.(p37)’ 인용된 김광규의 시에서 진정한 존재의 마주침을 생각한다. <아는 여자>라는 영화 제목처럼 겉으로 드러나는 모습만을 본다고 해서 상대를 진짜 아는 것은 아닐 것이다. 안다고 해도 알지 못하는 관계들이 주변에 얼마나 많은가.

차라리 시간은 물과 같다. 흐르는 물과 같아서 반복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토막 낼 수도 없다.(p58)’는 문장에서 소설 한 편을 떠올린다. 김중혁의 단편 소설 <요요>에서 시간에 대한 내용을 읽고 크게 공감한 기억이 있다. 이 책의 저자가 이런 시각으로 먼저 시간과 시계를 바라보았구나.

 

2신의 일식은 기독교 신앙에 대한 이야기가 주로 포함되어있다. 1,2,3부의 전체적인 구성이 성경 구절에서 시작된 일화와 서술이라 종교적 색채가 짙은 책이지만, 종교가 없는 내가 읽어도 거북하지 않다. 성경과 비슷한 무게감으로 곳곳에 인용된 시나 문학 작품의 영향 때문일까. 성경과 시의 구절이 공명하면서 일상의 삶으로 자연스럽게 투영된다.

마르틴 부버의 <신의 일식>이라는 관점에 놀란다. 달에 의해 태양이 가려지는 일식처럼 신의 존재도 여러 장애물에 의해서 가려져있을 뿐이라는 것이다. 흐린 날, 구름이 잔뜩 낀 하늘을 볼 때마다 그 위에 여전히 빛나고 있을 태양을 상상하곤 했는데, 이런 현상을 종교와 결부시킨 사람도 있다니.

정현종의 시을 인용하면서는 창이 부재에 가깝게 투명할 때, 우리는 창을 잃는 대신 그 창을 통해서 모든 것을 얻는다. 창이 투명하기를 그칠 때, 우리는 창을 얻고 그 대신 모든 것을 잃어버린다.(p140~141)’라 쉽게 풀이해준다. 내 영혼에 대하여, 세상을 바라보는 창이 되는 마음을 생각한다.

하늘은, 하늘을 쳐다보는 순간에만 하늘이다.(p159)’라는 문장에서 잠시 멈추어 선다. 한참동안 하늘을 바라본다. 바람이 분다. 세상이 갑자기 넓어진다.

 

3사막은 샘을 품고 있다는 이 책의 제목이기도 하다. 생텍쥐페리의 <어린 왕자>에서 인용된 이 문장은 사막으로 비유되는 삶에서 희망을 품을 수 있음을 보여준다. 황량하고 건조하고 막막한 사막 어딘가에 숨겨져 있는 샘이라니. 힘을 내어 삶을 걸어갈 수 있게 다독여주는 말이다.

남극 대륙 빙하의 4km 아래에는 세상에서 가장 깨끗하고 거대한 호수가 있다고 한다. 보스토크 호수. 영하 60의 공기를 완벽하게 차단한 채 수백 만 년 단절된 230km 길이의 호수. 학자들은 지열에 의해 빙하의 하단부가 녹아서 생성되었을 것으로 추측한다. 극한 상황에서도 이렇게 호수가 만들어지는데, 우리의 삶에도 샘 하나쯤은 있지 않을까.

삶에 대한 생각을 하게 되는 내용이 많다. ‘전시가 삶이 되었다. 가진 것을 전시하고, 전시하기 위해 가지려 한다.(p245)’ 카카오스토리에 푹 빠져있던 몇 년 전이 생각난다. 음식을 먹기 전, 접시를 재배열하고 가장 먹음직스럽게 사진을 찍은 후에야 젓가락을 들 수 있던 때도 있었지. 그 때를 회상하며 잠시 웃는다. 맛 따위는 아웃 오브 안중이었는데. 전시용 사진에 맛이 담기는 것은 아니었으니.

 

드라마용으로 구매했던 안경을 일상에서 더 자주 사용하게 되었다. 노안이 오고 있는 건가 싶어 살짝 우울해하는 중이다. 나이 들어간다는 것이 자연스러운 변화임을 알고 있다. 책을 읽다 잠시 멈추게 될 원인이 눈이 피로해서일까봐. 가능하다면 오감 중에서 가장 오래도록 유지되기를 바라는 감각이기에.

오래도록 시력이 유지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것 못지않게 중요한 것은 방향일 것이다. ‘시선의 방향이 곧 우리의 삶을 결정하기 때문이다.(p264)’ 마음을 강하게 끌어당긴 문장이다. 내 삶의 방향은 내 발걸음이 향하는 방향일 것이고, 시선이 향하는 곳으로 발걸음은 옮겨질 것이니.

어디를 바라볼까. 어디를 향해 갈까. 샘을 찾고, 샘을 바라보며, 샘을 향하고 싶다. 내 마음 깊은 곳에도 자그마한 샘이 분명히 있을 것이다. 우선 나의 샘을 찾고, 그 샘이 얼지 않도록 따뜻한 마음을 가질 것이다. 사람들을 바라보고 저마다 품고 있을 샘을 찾고 싶다. 혹시나 얼어붙어 있다면 나의 글을 통해 조금이나마 녹여주고 싶다. 그렇게 만들어질 샘이 곧 내 삶의 샘이 될 것이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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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만의 방 쏜살 문고
버지니아 울프 지음, 이미애 옮김, 이민경 추천 / 민음사 / 201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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늘 소원이었다. 한 번이라도 나만의 방을 가져보고 싶던 건. 어릴 때부터 간직해온 꿈은 끝내 이루어지지 못했지만.

퇴근 후 동네 커피숍이다. 둥그런 테이블 위에는 노트북과 책 한 권, 왼 편으로는 아메리카노 한 잔이 놓여있다. 음악이 향긋한 공간. 어떤 방해도 받지 않고 글을 쓸 수 있는 장소이다. 몇 시간동안 나는 좀 더 행복한 사람이 된다. 집보다 마음이 더욱 편해지는 곳. 집 안 곳곳 널려있는 가사에 대한 의무감에서 잠시 벗어난 이곳은 나만의 공간이다. 주인장이 여기를 니 방으로 허한 적 없다 해도 상관없다. 지불한 커피 값 2,500원의 효력이 다할 때까지 이곳은 나의 영역이 되리니. 어떤 종류의 밥값에 버금가는 비용이라 처음에는 주춤하기도 했지만, 열심히 일한 나, 스스로에게 이 정도의 허용은 해도 될 듯하여.

울프의 의견에 격하게 공감한다. ‘여성이 픽션을 쓰기 위해서는 돈과 자기만의 방이 있어야 한다는.’(p18) 커피 값조차 버거웠더라면 이런 시간을 확보할 수 있었을까. 이런 공간이 없었더라면 독후감이나 시를 쓰거나 책을 읽을 수 있었을까. 흰 바탕에 배열한 초록색 성냥개비를 연상시키는 표지, <자기만의 방>이라는 제목이 테이블 위에서 당당한 좌석표인 듯 말을 건다.

 

여성과 픽션이라는 주제를 다룬 에세이다. 케임브리지 강연문을 토대로 가상적인 상황을 설정한 저자는 주인공의 시선으로 여성에 대한 사회적 차별을 말한다. 아직도 이물감을 느낄 정도로 낯선 영역으로 다가오는 페미니즘에 대하여, 이 책은 이념을 떠나 과거로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여성의 삶을 깊게 조명해볼 수 있는 기회를 준다. 분량이 가뿐해서 만만하게 보았다가 문체가 낯설어 고도의 집중력을 발휘하며 몇 번이나 도돌이표를 찍어야 했다. 적응이 되고 난 후반부에는 그런대로 잘 흘러간다. 내용이나 글의 전개 방식으로 미루어보았을 때, 비평 글 느낌도 난다. 소설가이자 비평가로도 활동한 사람이다.

 

시에서는 첫 장에서 마지막 장까지 여성의 존재가 고루 퍼져 있지만, 역사에서는 전혀 존재하지 않습니다.(p71)’여성을 향한 차별의 역사가 이토록 뿌리 깊게 지속되어 왔다니! 작은 관심조차 없었다. 역사 속에서 조용히 사라져간, 어쩌면 수없이 반짝이며 소설가 혹은 시인이 되었을 수많은 여성들에게 괜스레 미안해진다.

가장 커다란 해방, 즉 사물은 그 자체로 생각하는 자유가 생겨났습니다.’(p65)라는 문장에 많이 놀랐다. 생각하는 자유가 생..... ‘해방이라고까지 표현한 것은 생각조차 마음대로 할 수 없던 상황이었다는 반증 아닌가.

미용실을 다녀온 다음 날, 거울 속에서 뭔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머리에 대한 푸념을 짧은 글로나마 풀어도 그렇게 위안이 되었는데, 일상의 글조차 마음대로 쓸 수 없던 상황이라니! 그 시절을 살았다면 매일 아침, 머리를 쥐어뜯고 있었을 것을.

가진 것을 소중하게 여기고 겸허해져야한다. 당연하다는 생각조차 않고 누려왔던 자유가 시대에 따라서는 꿈꿀 수조차 없던 것이었음을 생각한다면.

저자는 생각의 폭이 넓은 사람이다. ‘창조적 예술이 이루어질 수 있으려면 먼저 마음속에서 여성성과 남성성이 협력해야 합니다.’(p152) 여성만을 옹호하거나 남성을 폄하하지 않는다. 부당한 것은 부당하다고 하고, 홍시는 홍시라고 말하는 사람이다. 성을 뛰어넘어 인간을 향하는 시선을 가진 이다.

 

목마를 타고 떠난 소녀와 잠시 콜라보 되신 분. 그녀의 책을 읽어본 적은 없다. 인터넷으로 저자의 생애를 훑어본다. 참 치열했겠다, 글과 삶은 무관하지 않다는 생각을 한다.

소설이란 삶에 대한 어떤 거울 같은 유사성을 가진 창조물이라고 여겨질 것입니다.’(p108~109)라 말한 저자는 제인 오스틴, 조지 엘리엇, 에밀리 브론테 등 여성 작가의 작품을 통해 문학과 현실의 관계를 통찰한다. 작품에서 드러나는 한계점의 원인을 그들이 처한 현실적인 삶에서 찾는다.

항상 스스로를 돌아보고 삶의 매순간 섬세하게 반응하고 싶다. 내 글 어딘가 에도 내 삶이 묻게 될 테니.

 

픽션은 사실에 충실해야 하고, 사실이 진실에 가까울수록 픽션은 더욱 나아진다.(p34)’너무나 사실적이라서 픽션인지 다큐인지 헷갈리는 소설들이 생각난다. <잠실동 사람들>이나, <소년이 온다>, <도가니>같은. 장르가 무엇이든 마음을 움직이는 발화점은 한 가지로 점철된다. 진실이 담겨있다면 글로서의 자격은 충분하다.

나만의 방에서 어떤 글을 써야하는가에 대한 방향을 제시해준 책이다. 어떤 글을 쓰든 진실할 것이고, 삶 속에서 진지하고 당당할 것이다. 시선은 보다 낮은 곳을 향할 것이며 문득 걷다 살짝 스치는 향이라도 민감하게 맡아내고 글에 담아낼 것이다.

자기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이 되려고 할 필요도 없고요.(p28)’, ‘여러분이 쓰고 싶은 것을 쓰는 것, 그것만이 중요한 일입니다.(p155)’라는 말에서 지금보다 한 걸음 더 나아갈 용기를 얻는다. 방금 머금은 마지막 커피향이 향긋하다. 오늘따라 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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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5-24 18:2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05-24 19:4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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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는 날아가면서 뒤돌아보지 않는다
류시화 지음 / 더숲 / 201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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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은 녹는점이었다. 글을 경계로 추웠던 마음은 따뜻함을 향해 허물어졌다. 농담이 아니었다. 외롭다, , 격하게 외롭다. 소름 돋는 이 고독을 냉큼 예술로 승화시켜야 해. 우스갯소리로 포장하여 친한 이에게 건네곤 했던 이 말은 사실 진심이었다. 내 말은 아재개그처럼 썰렁했지만 가끔은 웃겼고, 그 말 직전에는 더 자주 외롭고 추웠던 마음이 늘 앞서 있었다.

10여년 남짓 되었을까. 외로울 때면 책을 읽고 느낌을 글로 적었다. 그럴 때면 신기하게도 마음이 따뜻해졌다. 마음을 단지 글로 표현했을 뿐인데, 거울인 듯, 자화상인 듯 나의 글은 잔잔하게 내 자신을 보여주었다. 컴퓨터 자판을 두드리는 순간, 글을 쓰는 나는 글 안에 있는 나를 보는 관찰자가 되어 그 안에 담긴 마음을 토닥이고 있었다. ‘불완전하고 상처 입은 자신을 아름답게 재탄생시키는 것이 바로 삶의 예술이다. 흠과 결함을 더 창조적인 것으로 변신시키기 때문에 예술인 것이다.(p241)’아직 불완전하고 결점 많은 문장이 결정적인 흠이지만, 그래도 꿋꿋이 예술이라 세뇌하며 책을 읽고 감상을 남긴다. 그때마다 거짓말처럼 외로움이 위로가 되는 마법을 경험하며.

상처를 외면하지 말라. 붕대 감긴 곳을 보라. 빛은 상처 난 곳을 통해 네게 들어온다.(p183)’외면하거나 감추지 않기로 했다. ‘이 세상을 떠날 때, 당신이 가져갈 수 있는 유일한 것들은 당신의 가슴에 담긴 것들이다.(p266)’라는 말처럼, 가슴 뛰는 순간들을 많이 담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싶다.

 

공전 소리는 너무 커서 오히려 들리지 않는다고 한다. 아주 깊은 슬픔에는 눈물조차 나오지 않듯이, 이 책이 그랬다. 이러다가는 책 한 권 통째로 필사하는 거 아닌가 싶을 정도로 마음을 울리는 문장들이 너무 많아서 일일이 옮겨 적기가 어려웠다. 근 한 달 동안 사무실 책상 위에, 안방 머리맡에, 커피 옆 테이블에 이 책이 놓였던 이유다. 난해한 문장은 단 한 줄도 없었건만 소설책 읽듯 쭉쭉 읽어 내릴 수 없었다. 한 장 한 장 책장을 잡는 손가락은 습자지를 넘기듯 조심스러웠다. 마음 역시 느린 화면이 재생되듯 천천히 움직였다. 명상록인 듯 잠언집인 듯 스스로를 돌아보고 주변을 돌아보고 삶을 돌아보도록 하는 내용들로 가득한 51편의 산문집이다. 나는 걷기 명상을 하는 사람이 되어 느릿느릿 문장의 뒤를 따라 책 속을 산책했다. 너무 가볍지도, 무겁지도 않은 문장들이 발끝에 닿는 풀잎인양 마음 곳곳을 툭툭 건드렸다.

 

마음속으로 다양한 부호들이 쏟아졌다.

물음표가 들어온 어느 날은 하루의 매듭을 묶기 전에 책 속의 문장을 따라 읽으며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졌다. ‘마지막으로 노래한 것이 언제인가? 마지막으로 춤춘 것이 언제인가? 마지막으로 자신의 이야기를 한 것이 언제인가? 마지막으로 고요히 앉아 있었던 것이 언제인가?(p112~113)’, ‘오늘 놀라운 일은 무엇이었는가? 오늘 감동받거나 인상 깊은 일은 무엇이었는가? 오늘 나에게 영감을 준 일은 무엇이었는가?(p191)’

쉼표가 들어온 또 다른 날은 과감히 직장 일을 내려놓고 좋아하는 일(=웹 소설 판타스틱 남장신부몰아보기)을 했다. ‘인생은 쉼표 없는 악보와 같기 때문에 연주자가 필요할 때마다 스스로 쉼표를 매겨 가며 연주해야한 한다.(p15)’심적으로 힘들다는 친한 지인에게 카카오 톡으로 이 문장을 보내기도 했다. 그녀는 위로가 되었다며 격하게 공감을 했다.

느낌표가 들어온 날도 있었다. 많은 위로를 받고 잠이 들었다. ‘마음이 담겨 있다면 그 길은 좋은 길이고, 그렇지 않다면 그 길은 무의미한 길이다.(p45)’간혹 주춤거릴 때가 있었다. 시를 쓰거나 글을 쓰면서 퇴근 후의 시간을 보낼 때, 전공과는 전혀 반대편에 있는 이 일이 과연 의미가 있는 일인 걸까 하는 생각에. 그 때에도, 으슬으슬 몸이 떨려 털스웨터에 야상까지 입고 굳이 커피숍에 온 4월 하순의 지금도, 나의 글에는 나의 온 마음이 담겨있으니. 이 길은 분명 좋은 길일 것이다. 박하사탕을 입에 넣은 듯 마음이 화해졌다.

화살표가 들어온 날에는 든든한 동지를 얻은 듯했다. ‘내가 지금 걸어가는 이 길, 누군가는 그 길을 걸었으며, 지금도 누군가는 나처럼 길을 걷고 있고, 또 누군가는 그 길을 걸어갈 것이다. 그것만으로도 우리는 혼자가 아니다.(p78)’문장에서의이 물리적인 의미만은 아닐 것이다. 혼자 떠나는 여행이라도 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어디를 향하든 마음이 향하는 곳이라면 씩씩하게 걸어가고 싶은 용기가 생겼다.

책을 읽는 모든 날이 좋았다. 잠시 무로 돌아가셨던 그분이 떠오를 정도로 내내 마음이 편하고 행복했다.

 

마음의 연필을 들고, 나와 나의 삶과 사람들과의 관계를 스케치했다.

왜 나에게만 이런 일이. 내가 행복해지려면 다시 태어나는 수밖에 없다며 비관적인 시선을 가졌던, 어느 책 속 등장인물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던 때가 있었다. 우물을 향해 던져진 작은 돌멩이가 개구리에게는 생존을 위협하는 대상이 되듯, 마음을 할퀴는 상처는 철저하게 상대적이다. 누구도 절대적인 크기로 상처의 깊이를 속단할 수는 없다. 상처투성이의 마음을 그러안은 나는 어리석게도 세상을 탓한다. ‘밖에서 날아오는 화살은 피하거나 도망치면 그만이다. 그러나 자기 안에서 스스로에게 쏘는 화살은 피할 길이 없다.(p139)’땅에 떨어진 화살을 굳이 주워서 스스로에게 상처를 입혀온 것도 깨닫지 못한 채.

독일의 사상가 마르틴 부버는 인간이 맺는 두 종류의 관계를 -의 관계와 -그것의 관계로 분류했다고 한다.(p256) 그의 시선이 참신하다. 주변 사람들을 한 명 한 명 떠올려본다. 어떤 이는 이고, 또 다른 이는 그것에 가깝다. 다른 무엇으로도 대체될 수 있는 그것이 되고 싶지 않다는 생각을 한다. 나도, 내 글도.

 

이번 달 독서모임의 토론도서는 소설이었다. 마음이 지쳐있던 한 달 전, 소설을 한 호흡으로 길게 읽어 내려가기 부담스러웠을 때, 이 책을 가볍게 집어 들었다. 근 한 달간 이 책을 읽고, 힘을 얻은 나는 이틀 만에 토론도서 읽기와 독후감을 클리어 한다. ‘때로는 우회로가 지름길이다. 삶이 우리를 우회로로 데려가고, 그 우회로가 뜻밖의 선물과 예상하지 못한 만남을 안겨 준다.(p83)’우회로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머문 셈이다. 선물과도 같은 책이고, 따뜻한 책이고, 스스로 다시 걸어갈 수 있도록 힘을 주는 책이다.

나무에 앉은 새는 가지가 부러질까 두려워하지 않는다. 새는 나무가 아니라 자신의 날개를 믿기 때문이다.(p204)’가장 위로가 된 문장이다. 자유롭게 날아가는 새처럼, 이렇게 잠시 쉬어도 가면서 가슴 뛰는 순간들로 내 삶을 채워가고 싶다. 마음 어딘가 달려있을 나만의 날개를 믿어보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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