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은 내가 이상하다고 한다 - 홍승희 에세이
홍승희 지음 / 김영사 / 201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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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표지를 감싸고 있는 초록색 옷을 벗긴다. 가방에 책을 넣고 뺄 때 물건들에 걸리면 찢길까 신경 쓰여서이다. ! 홀딱 벗고 다리를 벌린 채 물구나무를 선 여인의 그림이 가운데 떠억 버티고 있다. 슬그머니 다시 덮는다. 무엇이 부끄러워서였을까. 무엇을 감추고 싶었던 걸까, 나는.

 

웅크리거나 몸을 반으로 접거나 거꾸로 서있거나 어딘가에 매달려 있다. 중간 중간 실린 그림 속 여인들의 자세이다. 전부 옷을 입고 있지 않다. 프리다 칼로가 스친다. 피 철철 흐르는 강렬한 색상도 아니고 전체적으로 섬세한 선인데 무엇이 그녀를 연상시킨 걸까.

몇 점 감상하다보니 떠오르는 단어가 있다. 자유. 왜 하나같이 옷을 입고 있지 않은지 알 것 같다. 세상으로부터 자신을 감추고 있는 외피를 벗어던짐으로써 세상과의 경계를 없애고자 했던 걸까. 있는 그대로를 드러내고자 하는 열망이 뿜어져 나온다. 자유라는 과녁을 향해 쏘아 올린 화살처럼 강렬하다.

 

자살을 시도한 이야기, 감옥에 간 이야기, 가정사 등 민낯의 이야기들이 담담하게 담긴 책이다. 삶에 대한 허무가 짙게 깔려 텅 빈 듯 보이지만 투명한 공간에는 무언가 담겨있다. ‘살면서 느끼는 감정을 압축적으로 몽땅 뱉고 나면 다 살아버린 것 같아 모든 게 허무하게 느껴진다. 기분 좋은 허무다.(p54)’ 광섬유처럼 넘실거리는 허무의 끄트머리에서 삶이 섬세하게 반짝인다. 켜켜이 담겨있는 감수성을 조심스럽게 따라간다.

작가에 대하여 더 알고 싶어서 인터넷 자료를 찾아본다. “아무렇지 않은 이야기가 되었으면 좋겠어요.” 인터뷰 장면 중 이 책에 관한 작가의 답변이다. 나의 글은 아직도 몇 겹의 옷을 입고 있는데 거추장스러운 옷 따위는 훌훌 벗어던져버린 듯 거침이 없어 보인다. ‘애국이란 태극기에 충성하는 것이 아니라 물에 빠진 아이들을 구하는 것입니다.’ 효녀연합 퍼포먼스를 하는 그녀의 미소가 당당하게 빛난다.

 

나는 미디엄 레어를 좋아하는 가끔 채식주의자다. 가끔 고기가 당기는 날도 있고 회식을 하면 고기에 몰두하며 본능적으로 흡입한다. ‘서툴러도 채식주의자이고 싶다 / 조금이라도 내 존재가 덜 가해할 수 있도록(p28)’ 고기 먹는 모순된 채식주의자라 채식주의자라 말을 꺼내기가 다소 민망하지만 저변에 깔려있는 마음은 채식주의다. 고기를 조금 덜 먹으리라 다짐한다. ‘덜 가해할 수 있도록이라는 말이 마음을 툭툭 건드린다.

 

주변 사람들을 얼마나 알아야 아는 사람이라 말할 수 있는 걸까. 그들의 생각과 가치관과 아픔과 기쁨을 얼마나 이해하고 있는 걸까. ‘같은 언어로 소통하면 알고 있다는 착각을 하기 쉽다.(p151)’는 말에 공감한다. 사람들이 나를 잘 모르는 것처럼 나 역시 그들을 잘 알지 못한다. 일부만을 보고 전부를 아는 양 착각하는 지도 모르고. 속단은 오만이다. 3, <당신을 모른다>를 읽고 나니 사람들을 대하기가 더욱 조심스러워진다. 핸드폰에 저장된 주소록을 천천히 넘겨본다. 벌써 마지막 목록이다. 예상은 했지만 당황스럽다. 어설피 아는 사람들뿐이다. 자신 있게 안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단 한 명도 없다니. 어떤 사람을 완전하게 안다는 것은 가능한 일일까.

 

마지막 책장을 덮으면서 생각한다. 그림과 같은 글을 쓰는 사람이구나. 그림에서 벗어던진 가식이 글에도 고스란히 묻어나온다. 파스텔 톤의 부드러운 색상의 그림에 마음이 몰랑몰랑해지더니 글도 비슷한 느낌이다. 울어도 전혀 창피하지 않을 것 같은 분위기랄까. 울면 안아주는 게 원칙인 남신 라도 만난 듯 책장을 넘기다보니 눈물이 핑 돈다. 작가의 이야기가 슬퍼서도 연민이 느껴져서도 아닌데. 어느 순간 책을 통해 나를 바라본다. ‘눈물은 무능이 아니라 열린 감각의 증거다.(p80)’ 단단하게 누르고 있던 덮개가 스르르 벗겨진 듯 마음이 촉촉해진다. 논바닥처럼 갈라진 감자 껍질을 벗기고 김이 모락모락 나는 속살을 마주한 기분이다.

 

책 표지를 덮고 있던 껍질을 물끄러미 바라본다. 진초록의 머리칼에 그믐달이 그려진 여인의 뒷모습이다. 그믐달. 해 뜨기 전 새벽에 뜨는 달이다. 어깨에 그려진 문신 부근 지평선 아래에는 태양이 있다. 이제 곧 태양이 떠오를 거라 속삭이는 것 같다. 마음이 따뜻해진다. 누드가 야하다는 생각은 편견이었다. 아무 것도 입지 않았다는 것은 존재 자체를 말하는 것인데 야하다는 발상이야말로 이상한 것을. 두 번째 읽을 때에는 껍데기를 훌러덩 벗기고 당당하게 카페로 갔다.

 

글에도 누드가 있다면 이런 느낌일까. 가식과 허울을 다 벗어던지고 인간 본연의 감성과 허무와 죽음을 그린 글. ‘그런데 아파도 돼.(p5, 들어가며)’라는 작가의 말이 아픈 마음을 드러내도 괜찮아, 괜찮아라 말하는 것 같다. 앙상한 나뭇가지 같은 글들이 이제 곧 연두 잎이 돋아날 거라며 마음을 토닥인다. 아무것도 입지 않고 자신을 드러낸 글이 주는 위안이란 이런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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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플갱어를 잡아라! - 제7회 웅진주니어 문학상 단편 부문 대상 수상작 웅진책마을
이윤 지음, 홍정선 그림 / 웅진주니어 / 201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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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짝 의기소침한 모습이었다. 퇴근 후 피아노를 배우고 강을 끼고 도는 산책로를 거의 매일 간다고 했지만 그마저 썩 즐기는 것 같지는 않았다. 좋아하는 것을 찾아봐. 친구에게 말했다. 학생들과 상담할 때에도 종종 해주던 말이다. 자신이 무엇을 좋아하는지 계속 찾아보라고. 친구와 대화하는데 이 책이 떠올랐다. 도플갱어와 얼굴을 비볐을 때 사라질 듯 투명해지던 주인공의 모습이 친구와 겹쳐졌다. 투명한 외로움이 해파리처럼 물컹하게 잡히는 듯했다. 내게도 종종 머물다 가는.

 

맛있는 것도 같이 먹고 바다에 발도 담그고, 초록의 숲길도 실컷 보았다. 행복한 사진들 속에서 환하게 웃는 친구의 미소가 눈부시다. 집에 도착했다는 카카오 톡을 보내니 답변이 온다. 유붕이 자원방래하니 불역 열호아. 친구의 삶에 기분 좋은 바람이 불어들기를 바라며 피곤한 몸을 뉘었다.

마음의 갈증이 완벽하게 해소되지는 않았으리라. 자신과 같은 친구 한 명만 가까이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외로울 때 함께 있어주고 답답할 때 푸념을 들어줄 수 있는 그런 친구, 내 마음의 어디가 가려운지 정확하게 긁어줄 수 있는 존재 말이다. 외롭거나 답답할 때마다 막연한 바람을 갖곤 했다. 조금 더 어릴 때에는 내 대신 학교를 가거나 싫어하는 일을 해준다면 좋을 텐데 하며 짜릿한 상상도 했다. 누구나 한번쯤은 상상해보았을 또 다른 나. 상상이 구체적으로 표현된 글을 읽어 내려가는 기분이 참 묘하다.

 

표제작 <도플갱어를 잡아라!>는 진정한 란 어떤 존재여야 하는지 돌아보게 되는 동화이다. 함께 실린 <집으로 가는 아주 먼 길>대신 로 치환하여 읽어도 자연스럽게 감정이입이 된다. <지구 관찰자들>에서는 평화의 중요성을, <할아버지와 꽃신>에서는 평균 수명이 길어진 미래에서의 노인 소외 문제를 다루고 있다. <집으로 가는 아주 먼 길>을 제외한 3편의 동화는 판타지적인 요소가 바탕이 된다. 달을 보고 어떻게 저런 생각을 했나 싶고, 말하는 신발에 관한 아이디어도 참신하다. 높이 평가하고 싶은 점은 동화 속에 자연스럽게 녹아들어있는 주제이다. 현실에서 한 번쯤 되돌아보아야 할 화두가 선명하게 담겨있다.

 

짧은 동화를 읽으면서 중요한 사실을 간과하고 있었음을 깨닫는다. 이제껏 나는 시키는 대로 척척 해주는 로봇과 같은 존재를 바라고 있었다는 것을. 동화 속에서 존재할 수 있는 진정한 는 오로지 한 명뿐이다. 존재로서의 는 사람들의 눈치 따위는 보지 않고 원하는 대로 행동하는 당당한 사람인가 끊임없이 묻는다. 무엇을 좋아하고 싫어하는지 어떤 존재가 되고 싶은지, 본심을 숨기고 허깨비로 살아간다면 도플갱어와 다를 바 없음을 말한다. 도플갱어에 얼굴을 비볐을 때 점점 투명해지는 주인공의 모습은 독자들에게 질문을 던진다. 당신은 지금 온전한 로 존재하고 있나요? 라고.

 

작가는 <작가의 말>에서 사람들의 내면을 거울 속 친구로 비유한다. ‘거울 속 친구와 대화하기 위해 필요한 건 오직 하나뿐이야. 용기, 바로 그것이지.(p123)’ 오랫동안 의식하지 못했다. 간혹 의식했을 때에도 종종 외면해왔다. 내가 무엇을 원하는지, 어디로 가고 싶은지. 마지막에 실린 동화 <집으로 가는 아주 먼 길>에서 주인공 영도가 미로를 헤매는 흰쥐를 보고 더 이상 도망치지 않고 집으로 돌아가기로 결심하는 장면도 결국 에게 이르는 여정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거라 생각한다. 내게 있어 터닝 포인트는 책을 읽는 일이었다. 지금도 여전히 느린 독서 속도는 책을 내팽개치지 않고 붙들고 있게 하는 용기를 필요로 했다. 그 과정에서 글을 쓰게 되었고 내가 쓰는 글은 자연스럽게 나를 비추는 거울이 되었다.

 

답답하거나 외로울 때 글을 쓰면 후련해진다. 좋아하는 일은 확실히 찾았는데 요즘은 새로운 고민이 생겼다. 무엇을 쓰고 싶은지, 내 글이 걸어갈 장르와 방향 말이다. 짧게 쓸 수 있는 내용은 시로 표현하려 한다. 하지만 시 쓰기가 내게 맞는 길인지는 아직 모르겠다. 쓰다 보면 글이 길어지는 경향이 있어 아직도 산문이 편하지만 소설은 호흡이 길고 치밀해서 엄두가 나지 않는다. 수필은 내 얘기를 누가 재미있어할까 싶어 아직은 시도하고 싶지 않다. 나중에 좀 더 많은 사람들이 나의 글을 읽게 되고 삶의 에피소드를 묘사할 기회가 온다면 모를까 나부터도 타인의 신변잡기에는 선뜻 시선이 가지 않으니까.

 

계속 나에게 말을 거는 중이다. 나비종, 너는 무엇을 좋아하니? 무엇을 원하니? 어디로 가고 싶은 거야? 거울 속의 친구를 자주 들여다보면 어느 순간 환하게 웃음 짓는 얼굴을 볼 날도 오지 않을까. 바로 그 순간을 알고 싶은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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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리고 갈 것만 남아서 참 홀가분하다 - 박경리 시집
박경리 지음 / 마로니에북스 / 200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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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50. 서서히 노안이 나타날 나이. 작은 글씨가 안 보인다는 또래 사람들의 말이 남의 일 같지 않다. 라식 수술을 한 사람들은 근시 증상이 다시 나타나는 것이 노안이 왔다는 증거라던데 요즘 부쩍 멀리 있는 물체가 흐릿한 것을 보면 내게도 드디어 왔구나 싶다. 눈이 점점 안 좋아지고 있다는 사실이 와 닿을 때마다 언제까지 노트북에 글을 쓰며 지낼 수 있을까 불안하다. 눈이 어리어리해서 책조차 보지 못하면 어쩌지 하는 생각이 들 때면 종종 울적하다.

 

어쩌다가 글 쓰는 세계로 들어가게 되었고/ 고도와도 같고 암실과도 같은 공간/ 그곳이 길이 되어 주었고/ 스승이 되어 주었고/ 친구가 되어 나를 지켜 주었다’(p33~34, <천성>) 책을 읽고 리뷰를 쓰고 시를 쓰는 시간이 가장 행복하다. 하루 중 많은 시간은 직장일과 집안일로 할애되지만, 퇴근 후나 휴일에는 대부분 글과 함께 보낸다. 절대적으로 적지만 환한 여백으로 채워지며 내 삶을 빛나게 하는 시간이다. 책읽기와 리뷰와 시 쓰기의 시작은 작은 우연의 연속이었다. 여러 겹으로 겹쳐진 우연은 단단한 화장지의 심이 되어 나의 시간을 돌돌 말아가기 시작했다. 10여년이 넘어서자 이 모든 시간들이 필연의 의미를 띄었다. 뭉툭하던 연필 끝이 점점 가늘어지면서 서툴지만 가끔은 삶이 지닌 디테일을 나만의 질감으로 묘사할 수 있었다.

 

글이 매력적인 것은 읽는 사람마다 다른 색채로 해석된다는 점이다. <어머니>라는 부제의 2장에서는 생경한 낱말들이 어찌나 많던지. 서문안, 달비, 철기날개, 관사, 숙고사, 자미사, 법단, 양단, 세루, 스란치마, 은조사, 우장, 장무새, 적산, 측천무후, 모본단, 차부, 마메다쿠시. 인터넷 사전을 찾아가며 음미하다보니 종종 걸음으로 촘촘하게 걸을 수밖에 없었다. 어머니를 떠올리게 한 부분은 오히려 <가을>이라는 부제가 달린 3장이다. 주변 생명들에 대한 시를 음미하며 나의 어머니를 자주 떠올렸다.

가난하다고/ 다 인색한 것은 아니다/ 부자라고/ 모두가 후한 것도 아니다/ 그것은/ 사람의 됨됨이에 따라 다르다’(p88, <사람의 됨됨이>) 궁핍하게 살았지만 어머니는 베푸는 모습을 몸소 보여주셨다. 어릴 때부터 자연스러운 의미를 지닌 동사로서의 나눔을 알려주신 분이다.

백일장 대회에 나가 <이팝꽃처럼 솔솔>이란 시로 입상을 한 적이 있다. 공양주로 일하시던 어머니께서 절에서 남은 밥을 가져오셔서 도시락을 싸주셨는데 어느 날 그 밥이 삭아버려 버렸던 경험에서 만들어진 시이다. 입상 결과가 발표나자 자랑하듯 이메일로 시를 보내드렸다. 내 시를 보고 우셨다는 당신의 말씀을 듣고 우쭐했다. 으흣~ 드디어 나도 정말 감동적인 시를 쓰게 된 거야 라고. 당신께 내 시는 보다 진한 색채였다는 사실은 한참 후에야 알게 되었다. 고등학교 다닐 때의 생생한 하루. 그게 내 기억의 전부였건만, 그런 일이 종종 일어났던가 보다. 많은 하루들을 모조리 담고 계셨던 당신의 울림은 생각보다 깊었다. ‘육신의 아픔은 감각이지만/ 마음의 상처는/ 삶의 본질과 닿아 있기 때문일까/ 그것을 한이라 하는가’(p106, <>) 그 시절들이 어쩌면 당신께는 한이었던 걸까. 이 시를 읽다보니 불현 듯 이런 생각이 든다.

 

마음에 와 닿는 글의 공통점이 있다.

첫째, 안과 밖의 묘사가 균형을 이룬다. 내면의 자신을 똑바로 응시하면서도 그의 사유는 안으로만 함몰되지 않고 바깥세상을 정면으로 응시한다. 동양화에서 붓으로 그려지는 대상과 여백이 적절한 조화를 이루며 감흥을 자아내듯이. 세상을 꼬집는 작가의 날카로운 시선이 통쾌하다. ‘음식이 썩어 나고/ 음식 쓰레기가 연간 수천 억이라지만/ 비닐에 꽁꽁 싸이고 또 땅에 묻히고/ 배고픈 새들 짐승들/ 그림의 떡, 그림의 떡이라/ 아아 풍요로움의 비정함이여’(p113, <까치설>)

둘째, 작가만의 이야기가 있다. 그만의 표현 방식과 그만의 이야기가 담긴다. 세상에 단 하나밖에 없는 이야기이기에 독자는 귀를 기울일 수밖에 없다. 대하소설을 쓴 소설가로만 알고 있던 박경리님의 시를 보서 깨닫는다. 당신만이 쓸 수 있는 이야기가 담겨있구나 하고. 당신과 글과 어머니와 가족과 주변과 사회의 모습을 그려낸 글은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독특한 색채를 띤다.

 

나는 아직도 나이가 들어간다는 사실이 두렵다. 언제쯤 되어야 늙어가는 것이 편안해지는 경지에 오를까. ‘아아 편안하다 늙어서 이리 편안한 것을/ 버리고 갈 것만 남아서 참 홀가분하다’(p16, <옛날의 그 집>) 버리고 갈 것만 남아서 참 홀가분하다는 말이 계속 마음을 두드린다. 이토록 가뿐해 보이는 문장들이 왜 이리 묵직하게 다가오는지. 소설 <토지>를 집필한 25년의 세월, 감히 상상할 수 없는 시간을 지나온 사람만이 느낄 수 있는 걸까. 희끗해진 머리. 돋보기를 쓰고 펜을 움켜쥔 채 책 표지 안쪽에 무언가를 적고 있는 노작가의 모습이 담긴 사진(p140)이 오랜 잔상으로 남는다.

 

그것 다 바느질이 아니었던가/ 개미 쳇바퀴 돌 듯/ 한 땀 한 땀 기워 나간 흔적들이/ 글줄로 남은 게 아니었을까’(p30, <바느질>) 십여 년이 지난 오늘 노작가의 생애가 기록된 약력을 담담한 마음으로 따라가며 글 쓰는 삶에 대해 생각한다. 세상에 단 하나밖에 없는 수제 퀼트. 글을 쓴다는 건 이런 의미일까. 자신만의 글 안에 시간도 꿰고 마음도 꿰며 삶이라는 작품을 완성해가는 과정 같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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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당의 무게 휴먼어린이 고학년 문고 1
이현 지음, 오윤화 그림 / 휴먼어린이 / 201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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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만 놓아줘요. 보낼 때는 보내줘야지. 출근하자마자 화분에 물부터 주는 나를 보고 짝꿍 샘이 말씀하신다. ~ 아니에요. 저 밑바닥에서는 아직 살아있을 지도 몰라요. 도저히 포기할 수 없는 마음으로 물을 준지 일주일째다. 내일 아침이라도 연두 빛 이파리가 고개를 내밀 것만 같단 말이다.

처음부터 물을 준 것은 아니다. 스승의 날 즈음이었나. 누군가 졸업한 제자에게서 받으신 듯 보이는 화분이 교무실 창가에 놓였다. 쪽파처럼 생긴 초록 잎이 무성하게 심어져있었다. 내가 받은 것도 아니기에 무관심했다. 얼마간을 무심코 지나쳤다.

그 문구가 눈에 띈 것은 우연이었다. 기분이 우울하던 6월의 어느 날, 싱크대에서 손을 씻고 고개를 돌리는데 화분이 보인다. 하얀 플라스틱 바탕에 박힌 검은 글씨가 눈에 들어온다. I LOVE YOU SO MUCH! 화분 안에 담긴 식물이 격하게 나를 사랑한다고 말을 거는 것 같아 피식 웃음이 나온다. 조금 옅어진 이파리 사이로 갈색 잎이 삐죽삐죽 섞여있는 것을 보는 순간 방치되고 있음을 알았다. 흠뻑 젖을 만큼 물을 주었다. NOBBY. 화분에 붙어있는 스티커를 보고 이름을 붙여주었다. 너에게 이름을 지어주겠어! ~ 이제부터 너는 노비야!

 

악당이라는 이름을 붙인 유기견과 아이와의 이야기. 요즘 동화는 왜 이리 뭉클한 작품들이 많은지. 웬만한 소설을 읽을 때보다 더 가슴이 먹먹해진다. ‘!(p161)’ 한 글자가 나오는 순간, 책 속에서 총알처럼 불쑥 튀어나온 글자가 눈가를 스치기라도 한 듯 눈물이 핑 돈다. 주인공 수용이가 쓰러진 악당을 품에 안는 장면이 이어지자 제목이 지닌 묵직한 존재감이 다가온다. 악당의 무게. ‘무게가 이런 의미였구나. 현실에서도 이런 저런 이유로 스러져가는 생명들을 생각하니 책을 읽기 전에는 평범하게 지나치던 제목이 뜨거워진다.

언젠가 라디오 방송에서 들었던 이야기가 생각난다. 작은 새 한 마리의 무게만큼 자신의 살점을 떼어주기로 약속한 이. 아무리 살을 도려내어 올려놓아도 저울은 새가 놓인 쪽으로만 기운다. 저울의 균형은 그가 저울 위에 올라서는 순간 비로소 맞는다. 생명의 가치는 동일하다는 깨달음을 주는 일화이다. ‘사람은 이유 없이 개를 괴롭혀도 되고, 개는 사람한테 절대 대들면 안 되는 거야?(p99)’ 맑은 시선으로 생명을 바라보는 아이의 항변은 동화 밖에서 행해지는 어른들의 부당함을 향한 고귀한 외침이다.

 

동물을 키워본 경험이 거의 없다. 아이가 어렸을 때 유치원 숙제로 같이 키우던 누에와 달팽이가 경험의 전부이다. 며칠 지나지 않아 죽어버린 생명들을 버리며 씁쓸했던 기억이 있다. ‘나쁜 사람들이 개를 버리는 게 아니야. 개를 책임질 수 없는 상황이 되면, 나쁜 짓을 하게 되는 거지.(p79)’ 책임질 수 없는 상황이라. 오래도록 마음에 남는 말이다.

타고난 성향으로 보았을 때 내게는 동물보다는 식물이 더 맞는다. 선인장도 말려 죽이는 경이로운 손의 소유자였지만 재작년 여름 이후로 달라진다. 나의 손에서 식물이 살아나기 시작한 거다. 방학식을 하던 날, 교무실 창가에 있던 화분을 가져왔다. 그즈음 나는 교무실에서 매일 화분에 물을 주며 점점 피어나는 분홍색 꽃을 보는 재미에 빠져있었다. 방학이 가까워지자 혹시나 말라죽을까 염려되었다. 집으로 가져왔다.

앞 베란다에 놓고 열심히 물을 주었다. 그러다 무지하게 더웠던 며칠, 바쁘게 왔다 갔다 하다가 화분의 존재를 잊어버리고 만다. 방치된 화분은 태양의 열기에 타버린 듯 갈색으로 변해있었다. 갈색 잎을 하나하나 떼어냈다. 아래쪽 구석에 코딱지만 한 초록 잎 두어 장만 덩그러니 남아있었다. 얘네들이라도 살려보자. 미안한 마음으로 정성껏 물을 주었다. 며칠이 지난 뒤 나는 질긴 생명의 힘을 확인할 수 있었다.

 

우리가 사는 세상에는 사람만 있는 게 아니다.(p178)’ 어린이 독서 모임을 진행하며 아이들에게 물었다. 사람 이외의 존재를 생각나는 대로 열 가지만 말해보라고. 동물과 식물 이름이 술술 쏟아져 나온다. 열 가지 정도 이름대기는 까짓것 일도 아니다. 이런 생명들이 먹이사슬로 얽히면서 서로가 서로를 살리는 거야. 우린 모두 한 때는 살아있던 것들을 먹으며 살아가지. 오늘 아침과 점심 때 먹었던 음식들을 생각해봐. 어느 것 하나 생명이 아닌 것이 없지 않니? ~ 빵은요? 그건 살아있던 밀로 만들지. 밥은요? 살아있던 쌀로 만들잖아. ? 정말 그러네요. 살아가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이 또 다른 생명을 먹을 수밖에 없지만 그들에게 늘 고마움을 잊지 말아야 해. 순진한 눈망울들이 고개를 끄덕인다.

주방 창가에는 4개의 작은 화분이 있다. 가끔 식물들이 살아 숨 쉬는 모습을 상상한다. 이 공간에 가족 이외에 숨을 쉬는 존재들이 있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마음이 따뜻해진다.

 

생명력은 어디에서 오는 걸까. 모든 생명이 타고나는 힘일까, 햇살과 바람과 흙과 물이 지닌 신비로운 기운이 합쳐져 생명을 지켜내는 걸까. 2년 전의 그 화분은 눈곱만 한 연두 잎이 서서히 영역을 넓혀가더니 되살아났다. 기적 같은 일이었다. 지금까지 주방 창가에서 풍성하게 잘 크고 있다. 새끼손톱만한 꽃이 번갈아 피어나며 여섯 장의 꽃잎을 흔든다.

정성껏 물을 주며 시든 잎을 떼어내건만 어쩐지 노비는 점점 생기를 잃어간다. 급기야 몸 전체가 연한 황토색으로 변했다. 가위로 이발을 해주었다. 아랫부분까지 메말라있었다. 그렇게 해놓으니까 봉분 같애. 그만 포기해요. 이미 죽었어. 물을 주는 나를 보며 짝꿍 샘이 다시 말씀하신다. 일주일만 더 키워 보려고요. 키운다는 표현이 무색하게 정지 화면처럼 미동도 않는 노비를 보면서도 미련을 버리지 못한다.

요즘 매일 아침 나의 눈은 현미경이 되어 노비를 구석구석 살핀다. 초록의 흔적을 한 점이라도 볼 수 있을까 숨을 죽이고 관찰한다. 질긴 생명의 힘을 엿본 경험이 노비를 보내지 못하는 마음으로 작용하는 걸까. 노비에게 물을 준 한 달여 넘는 시간이 압축되어 버티고 있는 뿌리 끝에 이슬 방울만한 생명으로 매달려있는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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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계의 물리학
림태주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 / 201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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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를테면 어린이용 약병과도 같다. 아귀가 맞춰지지 않으면 뱅글 뱅글 헛바퀴만 돌 뿐 잘 열리지 않는. 가장 가까우면서 가장 멀리 느껴지는 거리에 이런 모습의 그가 있다. ‘몸이 느껴지지 않아야 건강한 겁니다.(p259)’ 관계에 관한 책을 읽을 때마다 매번 나의 시선은 그를 향한다. 그가 느껴지는 걸 보면 우리의 관계, 아직 건강하지 않은 것이 틀림없다. 몇 번을 망설이다 다시 시도 해보아야지 하며 슬쩍 마개를 돌린다. 다가간 거리만큼의 탄성이 작용하면 되돌아온 공간은 텅 빈 공기로 가득하다. 가끔 두려웠다. 돌리고 돌리다 지쳐 어느 순간 돌리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게 될까봐.

 

따뜻한 봄 같은 사람이라 좋아. 주변 사람들이 그에 대해 물을 때마다 나는 이렇게 말했다. ‘스웨터가 따듯한 이유는 털실의 보푸라기들이 틈 사이에 온기를 붙들고 있기 때문이다.(p46)’ 그렇게 수북하던 털실들이 끈끈한 일상에 묻어 한 올 한 올 빠져나간 걸까. 점점 온기가 그리워졌다. 언제부터였을까. 이 때부터였을까, 아님 그 후였던가. 그 때는 늦지 않았던 걸까. 골조만 남아있는 빈 집의 이미지가 겹쳐질 때면 종종 시간을 거슬러 올라갔다. 시작도 기억나지 않는 어긋남을 바라보는 일은 매번 오한이 느껴지는 슬픔이다. 한 때 열기를 뿜어내던 관계의 끄트머리가 이렇게 투명해질 수도 있다니. 이런 생각이 온몸에 열기로 퍼질 때면 매번 마음은 감기를 앓았다.

 

책날개로 펼쳐지는 첫 문장에 시선이 꽂힌다. ‘살아보니 삶의 전부가 관계였다.’ 요즘 자주 떠올리는 생각이다. 직장에서도 집에서도 간혹 나를 힘겹게 했던 것은 관계였지만 잠시 몸을 기대 위안을 받은 것 역시 관계였다. 관계의 여집합은 관계가 아닌 것이 아니라 또 다른 관계인 걸까.

관계의 본질을 꿰뚫는 작가다. ‘관계는 빛이 아니라 열에 가깝다.(p115)’ 열이 이동하듯 관계는 계속 변하니까. 일정한 온도가 유지되려면 무언가를 태우는 희생이 필요하듯 좋은 관계를 이어가기 위해서는 계속적인 노력이 필요하니까. 고온에서 저온으로 열이 이동하듯 관계에서도 내가 따뜻한 열기를 유지해야 타인의 체온을 함부로 빼앗는 일이 없(p116)’어지는 것이니.

 

냉정하게 판단해보면 시선을 먼저 돌린 것은 나였다. 그의 무심함을 탓했던 많은 날들은 나를 합리화하기 위한 핑계였다. 내가 먼저 등을 보였다. 마음의 문을 닫아걸었던 것도, 마음을 냉동실에 집어넣어 딱딱하게 얼린 것도 내 자신이었다. 서운함은 켜켜이 쌓여 빙하처럼 단단한 벽이 되어버렸다. 절대로 변할 것 같지 않아. 다시 돌아가고 싶지도 않아. 잘해준대도 내가 싫어. 굳어진 관계를 확신하며 가까운 친구에게 무덤덤하게 말하곤 했다.

이 얼마나 오만한 생각이었나. 관계에 대한 확신을 내린다는 것은. 며칠 전, 브라스 공연 중 연주되던 캐논을 듣다보니 갑자기 눈물이 나왔다. 그가 좋아하던 음악이다. 여러 악기 버전으로 나온 이 곡을 내내 듣던 때도 있었지. 나도 모르는 새 온기가 스며들어 있었나. 얼어붙은 마음의 끄트머리가 살짝 녹아 눈물이 되기라도 한 것처럼 함께 음악을 듣던 순간들을 안고 흘러나왔다. ‘캐논이 담고 있던 봄날의 시간들이 한꺼번에 우르르 쏟아져 나왔다. ‘..라는 낱말은 관계의 사전에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는 건지도 몰랐다.

 

변화는 서서히 일어나고 있었다. 고기를 먹을 때 파인애플을 구워서 제일 먼저 내 접시에 올려주었을 때, 출근복도 못 갈아입고 널브러져 잠든 방의 불을 슬며시 꺼주었을 때, 분리수거를 내놓고 티셔츠를 손빨래하고 스스로 밥을 차려먹었을 때부터.

글에 마음을 실어 조금씩 덜어내면서부터였던 것 같다. 조금씩 일어나는 변화가 눈에 보이기 시작한 것은. 그가 변한 건지 내가 변한 건지 둘 다 변한 건지 모르지만 관계의 색채가 변한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켜켜이 쌓여 꽉 들어차있던 감정들이 마음의 변화를 감지하지 못해왔던 걸까.

마음은 잡동사니를 쌓아두는 창고가 아니라 비워두는 무의 공간이다.(p244)’ 빈 공간으로 새로운 공기가 조금씩 스며드는 것 같다. 계속 덜어내려 한다. 이 공간에 온기가 스며들 수 있도록. 관계가 이라면 그에게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갈 언젠가 나의 온기를 나누어줄 수 있을 정도로.

 

진정한 관계란 끌어당기는 것이 아니라 미는 힘으로 서로의 확장을 돕는 일이다.(p38)’ 지금까지는 단지 확장을 위해 밀어내는 시기였을 뿐이라 생각하기로 한다. 외로울 때마다 책을 읽고 글을 쓰던 시간만큼 나는 확실히 넓어진 것 같으니까. 그리움의 시간이 길었을 뿐이라고.

첫 장에 실린 능소화의 꽃말처럼 그리움이 가득한 책이었다. 강아지풀을 한 올 한 올 쓸어내리듯 책장을 넘기는 동안 그리움의 꽃가루가 손끝에 묻어나는 듯했다. 관계에 대한 또 다른 책을 만난다면, 아마도 나는 다시 그를 떠올리며 그에 대한 글을 쓸 것이다. 오랫동안 묻어두던 마음이 심장을 할퀴며 쓰라리겠지만 그믐달의 모습으로 있는 관계가 초승달을 지나 보름을 향할 수 있도록 느린 걸음을 내밀어보려고 한다.

 

서로 마음에 난 길이 관계다.(p7)’ 참 멋진 문장인데 눈이 시큰하다. 마음이 맞는다면 서로를 향한 감정들은 고속도로를 달릴 테지만, 어긋난 관계의 길은 뚝 끊어진 낭떠러지일 것이기 때문이다. 영화에서 본 것 같은 거대한 낭떠러지. 건너편까지의 간극은 아득하고 바닥은 보이지도 않는. 주인공은 눈을 질끈 감고 한 발을 내딛는다. 순간, 신기루처럼 길이 나타난다. 제목도, 주인공의 얼굴도, 그가 여자였는지 남자였는지조차 가물가물하지만 이 장면만은 또렷하다. 공간을 툭 건드린 발바닥이 마법의 봉이라도 된 양 순식간에 이어지던 길. 관계를 향하는 걸음을 생각하며 이 장면을 떠올린다. 아직은 종종 아득해도 한 발씩 내딛다보면 점점 가까이 다가갈 수 있으리라 믿고 싶다. 그에게로 가는 길, 끊어진 듯 보이는 아득함을 향해 나는 계속 한 걸음을 내밀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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