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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예보: 핵개인의 시대
송길영 지음 / 교보문고(단행본) / 2023년 9월
평점 :
카페 라테와 캐러멜 마키아토를 좋아하던 시기가 있었다. 커피는 나와 맞지 않지만, 우유의 부드러움과 캐러멜의 달콤함은 다른 영역이니까. 커피는 다만 거들 뿐 소소한 첨가물에 불과하달까. 생크림을 소프트아이스크림처럼 고봉으로 쌓아 올려도 맛있으면 0칼로리라는 불변의 계산법도 있으니, 체중에 대한 걱정은 잠시 접는다.
요즘은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마신다. 이런 탕약을 왜들 마시는지 생각했던 내가. 첫 모금을 마시는 순간, 노곤하던 혈액은 혈색을 되찾는다. 입안에 맴도는 깔끔함과 개운함은 날마다 나를 유혹한다. 온전히 나로 존재하는 시간에 커피 한 잔을 마신다. 퇴근 후 엄마로서의 일정까지 마치고 하루를 마무리하는 스터디 카페에서이다. 적당히 말똥말똥한 밤이어도 괜찮다. 나의 낮은 이 시간을 위해 존재하니까. 여기에 오려고 잠시 직장에 9시간 정도 다녀오는 거니까.
고정불변일 것 같던 취향이 변하는 중이다. 초콜릿, 어리굴젓 같은 단짠을 그렇게나 맛있게 먹었다고?! 절대 변하지 않으리라 여기던 입맛이 비슷한 수순을 밟는다. ‘절.대’라는 말을 섣불리 꺼낼 수 없게 된다. 현재의 세상만이 절대 월드라 여겼던 시절의 오만함이다.
주변 사람을 바라보는 마음도 변하고 있다. 도미노 현상인 듯 인간관계의 농도도 서서히 달라지는 중이다. 내가 이런 사람과 그토록 친밀했다고?! 절대 그럴 리 없는 게 세상에 존재하기는 할까.
『시대예보: 핵개인의 시대』는 세상의 모습을 정확히 스케치하여 세상이 변화해 가는 방향을 제시하는 책이다. 책날개에 ‘시대의 마음을 캐는 마인드 마이너’라는 저자 소개가 있다. 저자 송길영은 사람들의 검색기록을 토대로 빅데이터를 분석하여 결과를 도출한다.
그는 지능화와 고령화를 사회 변화의 주요 축으로 언급한다. AI 최적화 시스템에 따라 일자리가 변화하고, 효도의 종말이 나타난다고 전망한다. 자기만의 세계관을 형성하는 개인의 시대가 왔다고 본다. 기존에 없던 존재, 핵 개인의 출현이다.
물질의 세계에도 핵이 있다. 핵이 처음부터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 건 아니다. 원자가 세상에서 가장 작은 입자이던 시기가 먼저이다. 달리기의 출발선처럼 원자는 늘 시작점이었다. 전자, 양성자, 중성자가 발견되기 전까지. 쪼갤 수 있는 입자가 되면서 원자는 근본의 자리를 내어준다. 이보다 더 작은 쿼크가 등장하는 순간, 원자는 또다시 뒤로 밀린다. 핵의 세계가 세상을 향해 열린다.
핵 개인이 처음부터 존재한 건 아니다. 조부모로부터 부모와 자식들이 생활근거지를 공유하던 대가족이 먼저이다. 시대가 바뀌면서 거대한 가족은 부모와 자식으로만 이루어진 핵가족이 된다. ‘핵’이 붙어 있지만 독립된 존재는 아니다. 사회로 나아가는 개인의 출발점은 가족이었다. 이제 우리는 원자가 쪼개지듯, 그래서 흩어지듯, 결국 홀로 서는 핵 개인의 새로운 시대를 건넌다.
새로움은 기존 사람들에게 종종 두려움으로 작용한다.
“외할머니께서 잔액이 남은 버스카드를 주셨어. 이제 공짜로 탈 수 있다고 쓰래.” “티머니페이로 등록해서 사용해, 엄마. 온다택시 어쩌구 티머니GO 저쩌구 마일리지 쭝얼쭝얼...”
큰딸이 택시 호출 앱을 핸드폰에 깔아준다. 카카오 택시를 접하면서 느꼈던 생소함이 다시 구현된다.
“좀 어렵다.” “엄마! 하나도 안 어려워. 공항버스 어쩌구 고속버스 저쩌구 지원금 쭝얼쭝얼...”
설명을 들어도 주춤거려지는 신문물이다.
기시감이 든다. 부모님을 모시고 병원에 갔다가 택시를 잡으려 할 때의 일이다. 도롯가에서 두리번거리시며 팔을 들어 올리시는 80대 부모님. 예약 문구를 매단 택시 한 대가 휭 지나간다.
“요새는 택시 잡기 참 힘들어.” “엄마, 양반콜 부르면 금방 오는데, 전화할까?” “조금만 더 기다려 보고...”
예약 택시 몇 대를 구경하는 동안, 살짝 답답해진다. 결국 콜택시를 부른다.
당신들이 접하는 생소함과 내가 느낀 답답함이 큰딸과 나 사이에도 고스란히 복제되었으리라. 세상은 변화하고 있다. 보이는 분야에서부터 보이지 않는 생각에 이르기까지. 시간과 공간을 태운 기차는 점점 빨라진다. 미래를 향해 달리는 동안 변화하는 풍경이 펼쳐진다.
변화는 당장 학교에서 직접적인 체감 온도로 다가온다. 도무지 이해되지 않는 행동을 하는 아이들이 많아진다.
“예전 아이들은 안 그랬는데.”
복도를 걸어가며 라떼를 찾는다. 생각이 복잡해진다.
“그게 세대 차이지. 요즘 발령받은 20대나 30대 교사들은 아이들의 행동을 당연하게 여길걸?”
동료가 말한다.
체감하는 온도 차이가 점점 벌어지고 있다. 세대가 변했건 시대가 변했건 분명한 건 변화는 이미 시작되었다는 사실이다. 시작 지점을 콕 집어 말하기는 애매하다. 시간이 멈추지 않고 흘러가듯 변화 또한 노을의 그러데이션처럼 자연스레 물들어 가니까.
아이들은 점점 자신만의 세계관을 만들어 간다. 게임만 해도 이제 유저들은 동네와 국가를 넘어 전 세계로 확장된다. SNS에 실려 보이지 않는 연결이 지구를 휘감는다. 그들은 어떤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있을까.
예전에는 안 그랬던 아이들을 복기하는 횟수가 잦아진다. 괴리감을 느끼는 내 모습을 돌아본다. 사고가 점점 경직되어 가는 걸까. 이상적인 모습을 가둬놓고 고정된 틀을 고집하고 있나.
완고함을 판단하는 기준은 결론을 내리는 순서에 있다. 답정너랄까. 처음부터 스스로 정한 정답이 있다. 그다음에는 정답을 정당화할 수 있는 명분을 찾아 논리적으로 배열한다. 다양한 사례를 분석하여 결론에 도달하는 귀납형이 아니다. 그에게는 어떤 말을 건네도 코팅한 종이에 물 뿌리는 듯 말방울이 흩어진다.
그가 하는 말이 틀린 건 아니다. 살아온 배경과 경험을 토대로 최선의 결론을 내리는 거니까. 나의 말이 틀리지 않듯, 그의 말 역시 그렇다. 다만 완고함은 타인의 의견을 수용하지 않고 틀린 것으로 간주하는 데 있다.
3장에서는 직장 상사의 라떼를 냉철하게 분석한다. 지금 시대는 경험이 아니라 지혜가 자산이니 빠른 환경 변화에는 경험이 독이 되는 경우가 허다하다고 경고한다. 현재진행형이 아닌 과거완료형 회고록의 삶을 살지 말고 지나간 권위는 과감히 내려놓아야 함을 강조한다.
삶은 OX 선택형이 아니다. 틀린 답이 없다. 제각기 다른 답을 작성할 수 있는 서술형이다. 100M 일직선 달리기가 아니라 원형의 룰렛에 가깝다. 부모와 자식 사이에서 발생하는 의견 대립도 마찬가지다. 부모라는 이유로 자식의 삶의 문제에 허락을 논할 수 없다. 골프 경기에서 많은 영향을 미치는 갤러리 정도의 역할이면 충분하다. 삶은 스스로 걸어야 하는 각자의 몫이니까.
“우리 나이 또래에는 현직에 있을 때 자혼을 시키는 경우는 거의 드물 거예요.”
“맞아요. 예전에 비해 경조사에 가는 횟수도 많이 줄었어요.”
“연로하신 부모님도 챙겨야지, 요즘 취업도 어려운데 자식도 신경 써야지, 정신이 하나도 없네요.”
40대 직장 동료의 결혼을 앞두고 사무실에서 오가던 말이다. 20대 후반의 미혼 자녀들과 80대의 노부모가 있는 분들이다. 올해의 사무실 구성원은 유난히 비슷한 또래가 많아서인지 고민의 지점들이 많이 일치한다.
자녀들의 결혼보다 발등의 불은 취업이다. 갈수록 취업의 문이 좁아지니까.
“요즘은 취직만 해도 효자예요. 효도는 바라지도 않아요. 그냥 제 앞가림만 잘하면 좋겠어요.”
맞장구치는 말들이 오간다. AI 시장의 확대로 인한 직장 문화의 변화가 2~3장에 걸쳐 비중 있게 다뤄진다. 사회적 기여가 동반되는 일자리는 쉽게 사라지지 않으니, 시대의 흐름을 읽고 자신을 현행화해야 함을 권유한다. 하나의 장르가 되도록 고유함을 지녀야 함을 강조한다.
자식으로부터의 부양은 아예 기대하지 않으나 부모에 대한 효도는 의무로 떠안은 나이대이다. 위아래로 부양의 의무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는 세대이다. 한 손은 뜨거운 물에 다른 손은 차가운 물에 담그고 있는 사람인 양 체감하는 세상의 온도 차가 가장 큰 나이, 지금의 50대인 듯하다.
효도의 종말이라는 4장의 제목을 보며 속마음을 들킨 듯 움찔한다.
‘이제 효도를 기대할 수는 없게 되었어. 내가 마지막 효도 세대가 아닐까.’
무의식적으로 생각해 왔다. 데이터를 기반으로 한 타당함이 막연하게 흐릿한 생각에 선명한 선을 덧씌운다.
효도의 끝이 개망나니 자식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가족도 남처럼 적정 거리를 유지하며 존중하는 매너를 장착하라는 거다. 오히려 서로 깔끔하게 주고받는 관계가 아름답다는 것. 받는 건 당연한 게 아니니까.
저자에 의하면 나이듦을 판정하는 중요한 기준 중 하나는 완고함이다. 카피라이터 정철의 『한글자』에 나오는 문장이 떠오른다. 가장 인상적으로 와 닿았던 한 글자, ‘불’이다.
‘ “불이야!”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말이다. 닥치는 대로 집어삼키는 불이 나를 삼키기 직전이라는 뜻이다. 그렇다면 가장 무섭지 않은 말은 무엇일까. 아무리 큰 소리로 외쳐도 듣는 사람은 하품만 나오는 말은 무엇일까. “불이었다.” 이미 재가 되어 들꽃 하나, 풀잎 하나도 삼킬 수 없다는 뜻이다. 그냥 아무것도 아니라는 뜻이다. 그런데 늘 과거를 사는 바보들은 나도 한때 불이었다는 말을 입에 달고 다니며 그것으로 사람들을 위협한다.’ (『한글자』, 정철, p284~285)
무의식적으로 불이었던 기억을 붙들고 있었던 건 아닐까. 나이듦의 미래를 그리는 4장에 공감의 시선이 머문다.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려면 동기와 의지가 필요하니, 내 존재의 의미를 갖고 주체적으로 살 수 있다면 충분하다는 격려가 따뜻하다. 왜 옛날만 후회하고 지금은 함부로 사느냐는 문장이 제법 서늘하다.
몇 번이고 읽으며 마음에 새긴 내용이 두 군데 있다. ‘멋지게 나이 드는 것’이 아니라 애초에 ‘멋진 사람이 나이가 든 것’, 문제는 ‘나이’가 아니라 ‘나’라는 문장들이다. 멋진 나로 존재하기 위해서는 시간과 진정성으로 고유한 서사를 만들 것. 변화하는 세상에서 흔들리지 않고 살아가는 비법으로 저자가 제안한 방법이다.
핵개인은 자신의 삶과 사회 모두에 책임을 다하는 존재이다. 옛날 사람이라 핵개인이 될 수 없는 게 아니다. 당신도 나도 이미 원자 단계를 지나 핵개인으로 쪼개져 있으니까. 이를 인지하고 홀로 서려는 의지가 충분하지 않을 뿐이다.
나의 의지로 내린 선택은 새로운 세상으로 삶을 이끈다. 라떼에만 머물렀더라면 아아의 깔끔한 세계를 평생 몰랐을 터이다. 무난하게 잘 걸어왔다며 평지의 추억만을 곱씹으며 낭떠러지 앞에서 주춤거릴 건가. 일단 한 발을 과감하게 내밀면 어떨까. 당신 어깨에 달린 날개가 펼쳐지는 희열을 느낄 수도 있지 않을까. 자유로움은 발을 떼지 못하면 결코 깨닫지 못할 무게로 살며시 접혀있으니.